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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너머 104 니체 세미나: 2020. 04. 06> 발제자: 해

 

[도덕의 계보] 제3논문: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11~22)

 

▣ 오늘의 주제: 성직자적 금욕주의

 

금욕주의적 이상에는 인간의 의지가 지닌 공허의 공포가 표현되어 있음. →인간의 의지는 하나의 목표가 필요함. 이 의지는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 오히려 허무를 의욕함.

 

성직자들에게 금욕주의적 이상이란? (제1논문 #1)

본래의 성직자적인 믿음, 그들의 권력의 최상의 도구, 권력을 지향하는 최고의 면허를 의미.

성자(盛者)들에게는?

동면하기 위한 구실, 그들의 가장 최후의 영예욕, 허무(‘신’) 속에서의 안식, 그들의 착란의 형식을 의미.

 

 

#11::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편에서 본 우리의 삶에 관한 가치 평가

 

 

- 금욕주의적 삶이란: 다른 생존을 위한 하나의 다리, 출발한 지점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미로, 행위에 의해 반박당하고 반박당해야만 하는 오류
하나의 자기모순. 삶 자체를 지배하려는 본능과 힘 의지의 원한이 지배함. 즉, 힘의 원천(욕망, 욕구)을 봉쇄하기 위해 힘(금욕주의)을 사용하려는 시도. 그 결과, 그 자신의 전제 조건인 생리적인 삶의 능력이 감소함에 따라 심지어는 더욱 자신을 확신하게 되고 의기양양해지는 균열 앞에 서게 됨.

 

 

- 규칙적이고도 보편적으로, 거의 모든 시대에 나타나는 금욕주의적 성직자

그는 개별적인 종족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곳곳에서 성장하며 모든 계층에서 자라남. 삶에 적대적인 종족을 되풀이하여 계속해서 성장시키고 증식시키는 것은 최고급의 필요성 → 이러한 자기 모순적인 유형이 소멸되지 않는 이유? 삶 그 자체의 관심사.

 

 

#12:: 지성을 거세하는 금욕주의, 진리와 존재의 왕국에서 축출된 이성

 

 

- 관점주의적 인식만이 존재한다

달리 보려는 의욕은 지성이 미래의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훈련이자 준비임. 객관성이란 ‘무관심한 직관’이 아니라, 인식을 위해 관점과 정서적 해석의 차이를 이용하는 것.

순수하고 의지와 고통이 없고 무시간적인 인식 주관을 설정한 위험하고 낡은 개념의 허구 경계하기.

 

 

- (금욕주의와 금욕주의자들은) 항상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하나의 눈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요구

전혀 어떤 방향도 가져서는 안 되는 하나의 눈, 능동적이고 해석적인 힘을 저지하고, 결여시킨 눈. 따라서 여기에서 눈이 요구하는 바는 언제나 불합리하고 이해할 수 없는 것.
의지를 모두 제거하고 정서를 남김없이 떼어낸다는 것은 지성을 거세하는 것.

 

 

 

 

# 13::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 삶을 보존하기 위해 삶을 거스르는 금욕주의적 삶

 

 

- 금욕주의적 이상은 퇴화되어 가는 삶의 방어 본능과 구원 본능에서 생겨남. 그러한 삶은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며, 자신의 생존을 위해, 죽음에 대항하여 투쟁함. → 삶을 보존하기 위한 기교

 

 

- 금욕주의적 성직자, 이 외견상 삶의 적대자, 이 부정하는 자, 그는 바로 삶의 아주 거대한 보존하는 힘과 긍정하는 힘에 속함.

 

 

- 인간, 변하기 쉽고 불확정적이 병적인 동물이면서 동시에 대담하고 혁신적이며 운명에 대해 도전적인 위대한 자기 실험자이며 언제까지나 정복되지 않는 자, 결코 휴식을 모르는 영원히 미래적 존재. → 인간은 이것에 싫증이 남(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 혐오 등). 인간이 삶에 대해 말하는 부정은 ‘더욱 부드러운 긍정의 충만함’을 드러냄. 이러한 자기 파괴의 거장인 인간이 스스로에게 상처를 준다고 할지라도 훗날 이 상처 자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살 것을 강요함.

 

 

# 14::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와 동정이라는 전염병

 

 

- 병자는 건강한 자들에게 가장 큰 위험. 강자에게 닥치는 재앙은 가장 강한 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가장 약한 자에게서 옴.

 

 

- 허무주의의 탄생: 강자를 강하게 하는 공포의 감소를 원할 게 아니라 인간에 대한 커다란 혐오와 동정을 두려워해야 함. 동정과 혐오의 교미를 통해 허무를 지향하는 최후의 의지, 허무주의가 태어남.

 

 

- 가장 약한 자들은 인간 삶의 토대를 허물어버리고, 삶이나 인간 자신에 대한 우리의 신뢰에 가장 위험하게 독을 타서 그것을 의심하게 만듦. 약한 자들에게 승리한 인간은 증오의 대상이 됨.

 

 

- 약자들은 ‘최소한의 정의, 사랑, 지혜, 우월감’을 나타내려고 함. 이것이 최하층 인간, 병자의 야심임. 약자들, 치료할 수 없는 병자들은 덕을 완전히 스스로 독점함. → “우리만이 선한 인간이며, 의로운 인간이다. 우리만이 선한 의지를 가진 인간이다.” 그들 자신의 불행을, 모든 불행 일반을 행복한 자들의 양심에 밀어 넣는 데 성공할 때, 이를 통해 그들이 자신들의 행복을 수치스럽게 여기도록 만들 때 가장 세련되고 가장 섬세한 복수의 승리에 이름.

 

 

- 건강한 사람은 병자와 멀리 떨어져야 함. 위에 있는 자는 밑에 있는 자의 도구로까지 자신을 격하시켜선 안 됨(간호사나 의사가 되는 것은 그들의 임무가 아님). 거리의 파토스는 또한 영원히 양자의 임무를 마땅히 분리시켜야 함. 강자들에게는 좋은 공기와 우리의 사교 모임이 필요함. 어쩔 수 없을 땐 고독이 필요함.

 

 

# 15:: 금욕주의적 성직자,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 자, 더 쉽게 경멸하는 섬세한 동물

 

 

-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병든 무리의 예정된 구원자, 목자, 변호인. 고통받는 자를 지배하는 게 그의 왕국임. 그는 스스로 병들어야만 하며, 근본적으로 병자나 실패자와 밀접하게 관계해야만 함. 그는 ‘건강한 사람에 대항해서, 건강한 사람들에 대한 질투에 대항해서’ 그들의 무리를 지켜야 함.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건강과 강건함의 선천적인 적수이며 그것을 경멸하는 자가 되어야 함. 성직자는 증오하기보다는 더 쉽게 경멸하는 섬세한 동물의 최초의 형태임.

 

 

-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의사가 되기 위해, 먼저 상처를 줄 필요가 있음. 그는 상처에서 오는 고통을 가라 앉히면서 동시에 상처에 독을 뿌림. 그의 주변에서 건강한 자는 모두 반드시 병들게 되고, 병자는 모두 반드시 유순하게 됨.

 

 

- 기묘한 목자: 성직자란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 자. 모든 고통받는 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아 그 감정을 배출하고자 함(“내가 불쾌한 것은 그 누군가에게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 그러나 목자인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그에게 이렇게 말함. “맞다 나의 양이여. 그 누군가가 그것에 대해 틀림없이 책임이 있다. 그러나 너 자신이 이러한 그 누군가이며 오로지 너 자신이야말로 이것에 대해 책임이 있다. 너 자신이 오로지 네 스스로에 대해 책임이 있다.” 원한의 방향이 변경됨.

 

 

# 16:: 인간에 대한 ‘죄스러움’이란 사실이 아니라, 생리적 장애에 대한 해석에 불과하다

 

 

-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시행한 치료는? 모든 고통받는 자들의 나쁜 본능(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는 본능)을 자기 훈련, 자기 감시, 자기 극복을 위해 이용함. 그러나 단순한 감정 치료로 생리학적 의미의 진정한 병자를 치료할 수 없음.

 

 

- 인간에 대한 ‘죄스러움’이란 사실이 아니라, 즉 생리적 장애에 대한 해석일 뿐임. “정신적 고통” 자체도 지금까지 정확히 형식화할 수 없었던 사실들에 대한 하나의 해석(인과적 해석)에 불과함.

 

 

# 17:: 고통이 없는 상태, 깊은 잠, 최면에 빠진 상태, 가치들 가운데 가치, 최고 선

 

 

-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진정 의사란 말인가? 그럴 수 없음.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고통 자체, 고통받는 자의 불쾌와 싸울 뿐, 그 고통의 원인이나 진정한 병과 싸우는 것이 아님. 고통을 완화하는 모든 종류의 ‘위로’야 말로,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천재성 자체를 증명함. 특히 기독교는 영민한 위로 수단의 거대한 보물창고임. 모든 거대한 종교의 주요한 문제는 유행이 되어버린 어떤 피로나 중압감과 싸우는 것임.

 

 

- 사람들은 맨 먼저 생명감 일반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리는 수단을 통해 저 우세한 불쾌감과 싸움. 심리학적·도덕적으로 표현하자면, 탈아(脫我), 신성화, 생리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최면임(동물의 겨울잠, 식물의 여름잠과 비슷함) → 고통이 없는 상태를 고통받는 자나 근본적인 부조화자는 이미 최고의 선으로, 가치들 가운데 가치로 여김. 동일한 감정의 논리에 의해 모든 염세주의적 종교에서 허무란 ‘신’을 의미함.

 

 

# 18:: 우울증 상태를 방지하기 위한 기계적 활동과 작은 즐거움

 

 

- 우울증 상태를 방지하기 위해 더욱 수월한 다른 훈련: 기계적 활동 (노동의 축복).

인간의 의식이라는 방은 협소하기 때문에 반복되는 행위가 의식에 들어오면 고통이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됨.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고통과 싸우며 이러한 것들을 철저하고 미묘하게 이용함. (절대적 규칙성, 아무 생각 없이 하는 정확한 복종, 단호한 생활 방식, 즉 비인격성이나 자기 망각, 자기 무시에 대한 훈련 등)

- 쉽게 접근할 수 있고 일상적인 것이 될 수 있는 작은 즐거움이라는 처방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이웃 사랑’을 처방함(선행, 안심시키기, 도움주기, 설득하기, 위로, 칭찬 등).

 

 

- 상호선행, 상호성을 지향하려는 의지, 무리를 이루는 것은 우울증과의 투쟁에서 중요한 진보이며 승리.

모든 병자나 병약자는 숨 막힐 듯한 불쾌함이나 허약한 감정을 떨쳐 버리려는 갈망에서 본능적으로 무리 조직을 추구하며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이러한 본능을 간파하고 그것을 장려함.
→ 강자들은 서로 흩어지려고 하고 약자들은 서로 모이려 함.

 

 

# 19:: ‘죄 있는’ 수단과 감정의 무절제함

 

 

- 금욕주의적 성직자의 여러 수단에 의해, 약자들은 개개인의 자기 자신에 대한 불만은 공동체의 번영에 대한 쾌감으로 인해 느끼지 못하게 됨.

 

 

- ‘죄 있는’ 수단: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감정의 무절제함에 관한 것. 그 때문에 “무엇에 의해 감정의 방탕이 이루어지는가?”라는 하나의 질문을 생각해내는 데 성직자의 창의성은 끝이 없었음.

 

 

- 현대 서적들의 가장 고유한 특징은 거짓이 아니라, 도덕적 기만에 습관이 되어버린 순진함임. 그것은 아마도 곧바로 우리를 격렬한 구토로 인도함. → 오늘날 스스로를 선량한 인간으로 느끼는 모든 사람은 부정직한 거짓말을 하며 모두 철저히 도덕화되어 정직에 관해 오점을 남기고 영원히 망가뜨림.

 

 

# 20:: 감정의 무절제함을 야기하는 데 기여하는 금욕주의적 이상

 

 

-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종교적 해석이나 정당화를 토대로 인간 안에 있는 들개 무리 전체를 자신에게 봉사하도록 함. 이 치료법의 의도는 병의 치료가 아니라, 우울증의 불쾌와 싸우고 이를 완화하고 마비시키는 것.

 

 

- 죄책감(동물적인 양심의 가책에 대한 성직자적인 해석)을 이용해서 병자를 죄인으로 만듦. 병자, 약자는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자기 자신 안에서 구하도록 이끌어지며, 자신의 고통 자체를 벌의 상태로 이해해야 함. → 고통을 오해하려는 의욕이 삶의 내용을 이루고 고통을 죄책감, 공포감, 벌의 감정으로 재해석함.

 

 

# 21:: 성직자적 치료는 모든 상황에서 병자를 더 병들게 만들었다

 

 

- 금욕주의적 성직자가 병을 치료한 곳에선 어디서나, 매번 놀라울 정도로 병이 빠르고, 깊고 넓게 확산. 그 결과, 이미 병든 것에 덧붙여 신경 체계를 파괴함. → 유럽인의 건강이나 인종적 힘에 금욕주의적 이상처럼 파괴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은 없음.

 

 

# 22::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자신이 지배했던 곳에서 영혼의 건강과 예술과 문학의 취미를 망가뜨림.

 

 

- 그리스도교적 선동가(교부)들은 그 단순함과 허영심으로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자 함.

“우리 역시 우리의 고전 문학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인들의 고전 문헌이 필요하지 않다.”

- 금욕주의적 이상은 결코, 어느 곳에서도 좋은 취미를 길러주는 학교가 아니며 좋은 예법을 길러주는 학교는 더욱 아님. 그것은 기껏해야 성직자적 예법을 길러주는 학교였음. 이것은 모든 좋은 예법의 불구대천의 적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무엇(절도가 부족하고 절도에 반감을 가지는 것)을 몸 안에 스스로 지니게 만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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