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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11-6강 후기

ㅎㅎ 2017.11.06 00:55 조회 수 : 337

깜빡 잊고 있다가 뒤늦게 후기 남기려니

세미나 내용이 잘 기억이 안나네요. ^^;;

 

책을 다시 들춰보며 생각나는 대로 몇 자.. 매우 주관적인 후기로 쓸께요.

 

지난주에는 <세미나 11>의 

8장. 선과 빛

9장. 그림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얘기를 나눴지요.

 

8, 9장은 <세미나11> 전체의 흐름에서 좀 벗어나  시선, 이미지, 가시성 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는데요,

그래서 <세미나 11> 강의에서는 흔히 건너뛰는 장이라고도 해요. 

(gaze, 출판된 책에는 응시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번역자가 나중에 시선으로 번역할 걸 그랬다고 후회했다는 후문이 있네요. 제 후기에서는 응시/시선을 막 섞어 썼어요.)

하지만 영화나 미술 등 시각예술에 관심이 있는 분들께는 풍부한 시사점을 주기도 하고,

또 시각적인 장에서 라캉의 '실재'나  '시선'의 의미를 좀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1. 방황하던 청춘 라캉이 공부를 접고 어부들과 고기잡이 배를 탔을 때의 이야기죠.

바다 위에 떠있는 정어리 깡통 하나가 햇빛에 번쩍이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함께 있던 어부 한 명이 라캉에게 농담을 합니다.

"보이나? 저 깡통 보여? 그런데 깡통은 자네를 보고 있지 않아!"

모두들 이 농담에 재미있어 했지만 라캉은 혼자 뻘쭘함을 느꼈답니다. 

그리고 수십 년 후 라캉은 이렇게 해석하지요.

"깡통이 광점에서 나(라캉)를 응시"하고 있었다고요.

 

응시하고, 사유하는 주체인 줄 알았던 내가 

문득 사물에 의해 응시되고 있음을 느낄 때, 

내가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겼는데

정작 나 자신이 풍경 속의 한 '얼룩'에 불과함을  감지할 때의 느낌.

세계로부터 분리된 자의 소외감, 수치, 불안?

주체가 빗금친 주체에 불과함을 깨달을 때의 겸허함?

 

2. 7장에서 다뤘던 '왜상', <세미나 11>의 표지그림이기도 한 홀바인의 그림 역시 응시의 한 가지 사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과 악기, 지구의 등 찬란한 르네상스  문화를 상징하는 물건들 앞에서 두 대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지요.

그런데 바닥에 그려진 알 수 없는 형상.

위의 그림처럼 비스듬한 시선으로 볼 때 비로소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는 그 형상은 바로 해골의 모습입니다.

해골확인.jpg  해골.jpg

왕성한 삶의 한가운데 문득 '죽음'의 시선을 감지할 때의 전율을 읽어낸다면, 라캉의 응시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이라는 실존적 주제로 이어지겠죠.

만약 해골을 문화와 문명이라는 상징적 현실의 균열, 빈틈, 구멍으로 해석한다면, 라캉의 응시는 상징적 현실의 구조적 한계,  '이데올로기적 폐쇄'(ideological closure)에 대한 비판적 분석에 활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장용학의 소설 <요한시집>의 주인공 누혜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철조망에서 자살함으로써 드러낸 분단체제의 균열 같은 것이지요. 

흥미롭게도, 소설 속에서 죽은 누혜의 눈동자는 뽑혀진 채, 소설 속 인물들을, 세계를, 독자를 '응시'합니다.  

요한시집.jpg

 

3. 라캉은 그림의 '배후'에 있는 "수많은 응시들"에 대해 얘기합니다.

성화상에서 표상되는 '신'은 또한 그림의 배후에서 화가를, 그리고 그림을 바라보는 관객을 응시하지요.

혹은 사람들(peuples, 레츠 추기경이 시민이란 부른 사람들)이 베네치아의 팔라초 두칼레의 중앙홀에 그려진 무수한 그림들을 볼 때, 그들은 역으로 그 홀에서 토의하던 사람들(역사 속의 시민들?)의 응시에 노출됩니다.  라캉이 '코뮨' 단계라 부르는 응시이죠. 이를 '잠재적' 공동체의 응시라고 할까요. 

팔라쵸 두칼레 그림.jpg

이처럼 라캉의 모호한 글쓰기 속에서 응시는 "항상 수많은 응시들"(175)을 향한 해석에 열려 있는 듯 합니다.

 

4. 그러나 다른 한편 라캉은 응시하는 눈은 항상 '사악한 눈'이라고도 말합니다

엄마의 젖을 물고 있는 동생을 질시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형의 사악한 눈.

라캉이 든 사례들 중에서 가장 쉽게 이해될 만한 이 사례는, 그러나 라캉의 '응시'가 갖는 풍부한 함의를 축소시켜버리는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라캉은 "사악한 눈의 기능이 보편적인 반면, 선한 눈, 은혜를 베푸는 눈에 대한 흔적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178)고까지 단언합니다.

 

5. 그런데 서구에는 "Seeing Eye of God"라는 계열의 그림들이 있었지요.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바라보고 있는 신의 시선을 형상화한 것이랍니다. 

 

painting-in-the-church-of-st-mary-major-sant-maria-maggiore-in-rome-B0C7N1.jpgseeing eye of god.htm-x1.jpg

그런데 신의 시선이란 어떤 것일까요. 자비와 은총의 시선? 혹은 라캉이 말하는 것처럼 '사악한 시선'일까요?

사실 이 계열의 그림들을 보면 신의 시선이 은총과 자비보다는 언제, 어디서나 나를 감시하는 초자아 내지 상징적 아버지의 시선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1984-bigbrother.jpgeagle-eye.jpg

마치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독재자 빅브라더의 시선, 혹은 영화 <이글아이>에서 전산화된 모든 정보를 장악하여 인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조종하는 수퍼컴퓨터 '아리아'의 시선처럼 말이죠. 

 

6.그러나 저는 모든 시선을 사악한 시선으로 환원하는 게 쉽게 동의되지 않는군요. 

특히 라캉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갔던 '코뮌'의 시선은  저에게 다른 상상을 불러 일으킵니다. 

배명훈의 <타워>라는 소설집에는 <타클라마칸 배달사고>라는 짤막한 단편이 하나 실려 있는데요.

소설집 전체가 '빈스토크'라는 가상의 도시국가를 배경으로 미시권력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있지요. 

 그런데 쿨하고 냉철해 보이는 이 작가가 의외로 이상주의자고 로맨티스트네요. 

우리들 모두가 미시권력의 네트워크에서 권력(power)을 실행하는 하나의 행위자로 기능'한다'/'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또한 동일한 사람들의 네트워크가 '선물'과 '우정'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음을 끊임없이 주장하니까요. 

이 점을 잘 보여주는 게 <타클라마칸 배달사고>지요.

앞뒤 맥락 다 자르고 핵심만 말하자면, 빈스토크에 용병으로 고용되었던 한 남자가 사막에서 실종됩니다.

그 소식이 뒤늦게 이 남자의 옛 애인에게 전해집니다.

사실 그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를 따라 빈스토크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용병에 지원했던 것이죠.

국가로서의 빈스토크는 용병 따위의 구조에 냉담합니다. 

여자 또한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죠. 그러나 사내를 외면할 수 없었던 여자는 인터넷의 위성사진을 확대하고 무수한 구역들로 분할하여 사내의 흔적을 찾기 시작합니다. 모래사장에서 바늘찾기 하는 심정으로요. 그런데 이 소식이 인터넷에 전해지고, 이 일에 동참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리고 순식간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구역들로 나눠진 타클라마칸 사막의 위성사진을 두, 세 차례 검토하다가 마침내 사내를 발견합니다.

소설 마지막에, 사막에 쓰러져 신음하던 사내(은수)가 느끼는 이 시선은 무엇일까요? 사내의 '안녕'을 걱정하며, 밤새 충혈된 눈으로 위성사진을 훓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 "영혼을 갖득 채우는 이 뜨거운 시선"   

"은수는 지도를 바라보았다. 서서히 색깔이 짙어지는 모습이 마치 타클라마칸 사막 전체가 서서히 하늘로 들려 올라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실종된 용병 조종사를 통째로 하늘에 바칠 기세였다. 

... 누군가의 시선이 또 한 번 느껴졌다. 위에서부터 누군가가 내려다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영혼을 가득 채우는 이 뜨거운 시선. 하늘문이 열린 게 틀림없었다."  배명훈, <타클라마칸 배달사고>, 110~111

 

굳이 자비와 은총을 가득 담은 신의 시선까지 떠올리지 않는다 해도, 

사람이 사람을 향해  서로의 '안녕'을 기원하는 정도의 따스함.  

그 꼬뮨의 우정을 배명훈의 다른 소설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요.

"생명이 생명에게, 살아 있는 영혼이 살아있는 영혼에게. 네가 어떤 존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죽지 않고 이렇게 살아만 있다면.

“안녕! 잘 지냈어?” 그런 의미였다. 그뿐이었다."  배명훈, <자연예찬>, 74

7.물론,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늘 이렇게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겠죠.

위에서도 말했듯 배명훈은 사람들의 우호적 관계가 '유착'이 되고 '선물'이  '뇌물'이 되고, 우정의 활동으로 행했던 것이 어느덧 위계화된 관계 속에서 '노동'이 되어버리는, 미시권력의 네트워크를 누구보다 날카롭게 파헤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희망은, 사람들 안에, 사람들의 관계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네트워크.png

 

결국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의 점들 하나하나가 어떤 방식으로 활동하느냐, 일까요. 

미시권력의 행위자가 될 것인가, 우정과 선물의 증여자가 될 것인가...?

사람들 간의 관계란 결국 어떤 점들이 더 우세하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요.

회사나 학교에서 맺어진 관계도 우정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고, 

꼬뮨을 표방하는 곳에서 맺어진 관계조차 미시권력의 네트워크가 될 수 있는... 

 

이상, 기-승-전-코뮨의 이상한 후기를 마칠께요.

간단히 쓰려 했는데 너무 길어졌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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