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을 돌아보면 기독교라는 환경 탓인지 일반적인 도덕적 인간에 가깝다고 여겨지는(혹은 가까워지기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이 꽤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도덕적 인간이란, 곧 사회구성원으로서 적합한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되었던 이들이다. 나에게는 그러한 개념에 가까웠다. 법 없이도 살 정도로 개인적인 양심에 비추어 사는 사람들, 남에게 피해주지 않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 공동체를 형성하기에 큰 문제가 없는 사람들이야말로 도덕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의 이름 아래 모이긴 하지만, 어떠한 도덕은 기독교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질서를 만들고, 가치를 함께 공유하며,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만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충분히 이상적인 삶을 꿈꿀 수 있는 환경이었지만, 의문이 들기 시작한 것은 그 ‘좋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이후였다. 그들은 고통 받았다. 신이 내린 말씀에, 도덕적 잣대에, 자신의 마음을 자로 재듯이 재며 죄의식으로 고통스러워하였다. 고통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내가 느낀 그들의 고통은 질병에 가까웠다. ‘사랑’이란 포장지로 감추려하지만 조금만 건드려도 눈물을 흘리는 이들을 보며 안타까움과 동시에 지긋지긋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이 끝날 것 같지 않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 또한 힘든 일을 겪은 후에 ‘그래, 그것은 신의 뜻이었지.’라고 의미를 덧붙이며 생각해왔다면 니체를 만나진 못했을 것이다.
지난 세미나에서 니체는 도덕이 가진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345, ‘문제로서의 도덕’(p324.)에서 도덕의 가치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우선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이라고 말한다.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도덕은 문제로서 다가왔다. 시간과 몸을 바쳐 그것을 지키지만, 여전히 울고 있는 그들의 눈물을 신은 닦아주지 않았다. 삶과 도덕을 별개로 나누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것은 나에게 문제였던 것이다. 니체의 말이 이 시대에도 유효함은, 여전히 우리는 도덕의 지배 아래 살고 있으며 도덕이 가진 결함에 대해서는 지적하지만 도덕 그 자체가 지닌 가치를 문제 삼지는 못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도덕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문제를 삼기 시작한 순간 의심은 끝없이 이어질 것이고, 결국에는 파괴를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삶의 조각이 붕괴되는 것은 두려운 일이지만, 그 위에 건설될 ‘발전’이란 것을 기대하기에 니체는 그 자신부터 도덕을 무너뜨린 것은 아닐까? 서론에서 언급한 것처럼 두려움을 최소화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도덕 아래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니체 세미나에 모인 선생님들 또한 새로운 도덕을 꿈꾸고, 타인의 기대 속에 사는 수동적인 삶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니체를 만나러 이 자리에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너 자신의 삶을 살라는 친구의 말을 회상했던 프라하님, 아이들을 키우신 후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시는 정화님, 자신의 믿음에 대해 고민하며 그 고민을 통해 새로운 미래를 계획하시는 엇결님 등, 폐허에서 방황하지 않고 길을 찾기 위해 노력하시는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이 세미나를 만들어가며, 그것이 니체 세미나의 진정한 의미라는 생각이 들었던 시간이었다.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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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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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지난 시간 프라하님의 고백이 전 참 반가웠어요. 말씀하신 깨달음을우리에게 주기 위해 니체가 말하는 것이 바로 ‘지적’ 양심, ‘나의’ 양심이겠죠. 도덕을 문제삼는 자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그리고 응원할게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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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
니체를 만나면서 예전이라면 인지부조화 속에서 해석하지 못한 상태로 괴로웠을 상황들을 그 모순과 부조화 그대로 끌어안을 수도 있음을 알게 된 나를 발견합니다. 몰락, 붕괴, 폐허란 내 삶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애써 부정하고 안간힘을 쓰며 버티어내며 지키던 그 세계가 완전히 몰락해서 온전한 폐허가 되는 것이 차라리 새로운 가능성을 여는 것이구나 하고 종종 생각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처참하게 무너지고 쓰러진 자들이 삶에서 실패한 자들이 아니라 한번도 무너진 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겨우 버티어 내는 자들이 실은 무수히 매일 넘어지는 자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요.
완전한 폐허란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기에 어찌나 적합한지요. 세미나 시간에 말을 아끼는 보영님의 소중한 후기, 감사히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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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
보영님의 글에 이리 힘이 있군요. 조용하셔서 어떤 분일까 궁금했더랬어요. 볼 때마다 반가운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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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후기야말로 완전 '깜놀'할 만한 것이 아닌가요?! 평소 말이 적어서 더 '깜놀'하게 되나 봅니다. ㅎㅎ
1. 도덕과 기독교의 근친성
"신의 이름 아래 모이긴 하지만, 어떠한 도덕은 기독교에서는 필연적인 것이었다. 좋은 사람들이 모여 질서를 만들고,
가치를 함께 공유하며,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만이 삶에 대한 두려움을 최소화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와 도덕(중세의 기독교와 근대의 도덕) 사이의 근친성은, 도덕의 뿌리가 기독교에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의 죽음'은 중세의 세계관으로서 기독교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무너진 '기독교'의 잔해에서 '도덕'을 재건하였습니다. 즉
이 세계 저편의 '초월성'와 추상적 인간에게 요구되는 '보편성'이 바로 도덕과 기독교가 공유하고 있는 지반입니다.
2. 기독교의 신과 그리스의 신
"내가 살고 있는 환경에서 도덕은 문제로서 다가왔다. 시간과 몸을 바쳐 그것을 지키지만,
여전히 울고 있는 그들의 눈물을 신은 닦아주지 않았다."
기독교의 신은 우리의 가책을 덜어주는 존재라기보다 인간의 가책에 기생하는(그것을 먹고사는) 존재라고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인간에게 죄의식을 심어주고, 인간이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할 때, 신은 인간의 가책을 덜어주는 존재로서 요청되는 법이니까요!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은 후로, 기독교의 신은 모든 인간에게 원죄의식을 요구하게 됩니다.
방금 태어난 아이조차 죄를 가지고 태어나는 셈인데, 인간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죄에 대해서조차 죄책감을 요구받습니다.
이처럼 기독교의 신이 우리에게 죄를 묻는 존재라면, 그리스의 신은 우리의 죄를 덜어주는 존재입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들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거나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 경우, 그것을 모두 신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내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나의 부주의를 자책하지 않고 여기에 돌부리를 둔 신의 탓으로 돌리거나,
내가 잘못된 선택을 하여 재물을 잃어버렸을 때도, 내 실수가 아니라 그 순간 나의 판단력을 흐리게 한 신을 탓했다는 겁니다.
이렇게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다시 룰루랄라~!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었지요.
우리에게 그리스 신과 같은 존재를 찾는다면, 바로 니체철학이 아닐까 생각해요. ㅎㅎ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고, 자기 삶을 가볍고 명랑하게 만들 수 있는 기술, 이것이 니체철학이라고 말이지요.
'나' 자신을 속이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는, 즉 외부로의 명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도덕'이라 여겨왔음을, 니체 세미나에서 깨닫게 됩니다."문제로서의 도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