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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6] 5주차 발제_『선악의 저편』 제 1장

이희옥 2023.05.17 22:56 조회 수 : 66

[청인지 16_사랑할 만한 삶은 어떤 삶인가?]                                                                                          5주차 2023.05.19.(금)

프리드리히 니체, 『선악의 저편·도덕의 계보』, 김정현(역), 서울:책세상, 2002

제1장 철학자들의 편견에 관하여

 

이희옥

 

 

1. (pp. 15-6.)

니체는 ‘진리에의 의지’가 가져온 고약하고 의심스러운 문제를 알아차리고 마침내 불신을 품고 등을 돌려도 이상하지 않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러한 스핑크스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질문하는 법을 배우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무엇이 도대체 ‘진리를 향해’ 의욕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해야 한다. 이제 의지의 원인을 찾으려는 근원적인 물음에 걸음을 멈추고 이 의지가 가지는 가치를 묻게 되었다. 우리가 진리를 원한다고 가정해왔다면 왜 오히려 진리가 아닌 것 혹은 불확실성이나 심지어 무지를 원하지 않는지에 의문을 품고 이제 우리는 진리의 가치 문제에 직면해 있다고 지적한다.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제기된 적 없고, 우리가 처음으로 제시하고 주목하려는 문제인지 모험을 걸어보려고 한다.

 

 

 

2. (pp. 16-7.)

“어떤 것이 어떻게 그와 반대되는 것에서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이러한 종류의 발생은 불가능하며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은 다른 독자적인 기원을 가져야만 한다. 이 독자적인 기원이자 근원이 ‘물자체’ 속에 있다는 판단은 전형적인 편견을 낳는다. 형이상학자들의 모든 논리적 추론 과정에는 이러한 방식의 가치평가가 있으며, 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믿음’에서 그들의 ‘지식’을, 격식을 갖추어 마침내 ‘진리’라고 명명하게 되는 그 무엇을 얻으려고 노력한다. 그들의 근본적인 믿음은 가치들의 대립에 관한 믿음인데, “모든 것을 의심한다de omnibus dubitandum”는 의심의 경계선부터 이미 의심하는 것이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사실을 의심해 볼 수 있다. 첫째, 도대체 대립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둘째, 형이상학자들이 보증했던 저 대중적인 가치평가가 단지 표면적이고 일시적인 하나의 시각 말하자면 개구리의 관점 같은 것이 아닌가? 즉 사물의 가치를 만드는 것이 겉보기에 대립되고 나쁜 사물과 유사한, 어쩌면 연관되어 있는,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이 ‘아마도’에 마음을 쓰는 의지의 주체는 누구인가? 니체는 이 주체가 지금까지의 철학자와는 다른 새로운 철학자이며 이미 출현하고 있다고 말한다.

 

 

 

3. (p. 18.)

니체는 스스로 많은 철학자들을 면밀히 살펴본 결과 우리의 의식적인 사유 또한 본능의 활동으로 간주해야만 하며 ‘의식’이 본능적인 것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가 ‘만물의 척도’가 아니라고 가정하면 확정된 것과 불확정적인 것 진리와 가상 중 전자에 명확한 가치를 두는 설정된 궤도는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한 우리에게 필요한 어리석음이다.

 

 

 

4.(pp. 18-9.)

삶의 조건으로 비진리를 용인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방식으로 습관화된 가치 감정에 저항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일을 감행하는 철학은 그것만으로도 이미 선과 악의 저편에 서 있게 된다.

5. (pp. 19-20.)

니체는 철학자들이 정직하지 못하다고 말하면서 그들의 견해는 냉철하고 순수하며 신적으로 초연한 변증법의 자기 전개에 의해 발견한 것처럼 군다고 일갈한다. 게다가 그들은 이러한 사실을 고백할 양심의 용기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다. 니체가 보기에 ‘늙은 칸트’는 경직되고 점잖은 위선으로 우리를 ‘정언명법’으로 유혹하고 있으며, 스피노자가 자신의 철학에 적용하는 수학 형식 또한 가면을 씌우는 기괴한 술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6. (pp. 21-2.)

지금까지의 모든 위대한 철학자는 본인도 모르게 철학 창시자의 자기 고백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도덕적인 의도에서부터 출발하는 철학이 그 전부이다. 철학의 아버지는 ‘인식 충동’이 아니라 인식에 종사해 온 다른 충동이며 이러한 충동이 철학을 추동해왔다는 것, 그리고 인간 현존재의 최종 목적이자 다른 충동의 정당한 주인으로 자리했다. 모든 충동은 지배욕에 차 있고, 또 지배자로서 철학적 사유를 하기 때문이다. 학자의 경우에는 자신의 연구 분야가 그의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지만 이와 반대로 철학자는 그의 도덕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7. (pp. 22-3.)

에피쿠로스는 플라톤과 플라톤주의에 대해 ‘디오니소스의 아첨꾼’ 즉 디오니시오콜라케스라고 불렀으며 플라톤이 자신의 제자들과 보인 웅대한 몸짓과 연출을 두고 그들이 모두 순진하지 않은 배우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테네 정원에 은둔해 300권의 책을 쓴 에피쿠로스를 그리스가 알아차리기까지 100년이 필요했다.

 

 

 

8. (p. 23.)

모든 철학에는 철학자의 ‘신념’이 무대에 등장하는 시점이 있다. 또는 이를 고대 신비주의의 언어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아름답고 가장 강인한 당나귀가 다가왔다,”

 

 

 

9. (pp. 23-5.)

니체는 자연에 따라 살기를 바라는 스토아 철학자를 비판하면서 자연이 냉담하고 자비와 공정함도 없고, 황량하고 불확실한데 이는 삶 자체와는 다르게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연에 따라 살길 바란다면 원리를 만들 필요가 없는데, 역으로 자연을 다스리고 알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냐는 의심이다. 이러한 스토아학파적 관심은 자연을 그릇되게, 스토아적으로 보도록 강요했으며 이처럼 철학은 폭군 같은 충동이자 ‘세계를 창조하려는’, 제1원인을 지향하는 가장 정신적인 의지이다.

 

 

 

10. (pp. 25-6.)

형이상학자의 공명심은 한 줌의 ‘확실성’을 선호하며, 불확실한 그 무엇을 위해서보다는 오히려 확실한 허무를 위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청교도적인 광신자도 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강건하고 생동하는 생명을 갈망하는 사상가의 경우 가상에 반대 입장을 취하며 ‘관점적인’이라는 말을 쓴다. 특히 이들은 자신의 몸에 대한 믿음을 사소하게 평가하는데, 이는 ‘불멸의 영혼’ 혹은 ‘낡은 신’ 등 사람들이 ‘현대 이념’의 토대보다 더 힘차고 명랑하게 살 수 있던 이념들을 다시 탈환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이 점에서 오늘날 회의적인 반현실주의자와 인식의 현미경주의자들에게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 현대적인 현실에서 벗어나도록 몰아대는 그들의 본능은 부정될 수 없는 것이며,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회귀’가 아니라 사라지려는 것이다. 조금 더 힘, 비상, 용기, 예술적 재능 같은 것이 있다면 그들은 넘어가기를 원하고, 되돌아오기를 원치 않는다!

 

 

 

11. (pp. 27-9.)

니체의 시대에도 칸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있었는데, 독일 철학의 발전과 개화는 지금이 적기라고 말한다. 그러나 칸트가 ‘어떻게 선험적 종합 판단이 가능한가?’ 라고 물었을 때, 그리고 도덕적인 능력을 발견했을 때, 철저히 ‘현실적이거나 정치적’이지 않았던 도덕적인 독일인들은 열광했다. 셸링이 지적 직관이라고 명명한 ‘초감성적인 것’에 대한 능력이 발견된 시기는 낭만주의라는 젊음을 가장한 시기였고, 이제 사람들을 꿈에서 깨어 이마를 문지르고 있다, 우리는 지난 시기 동안 꿈을 꾼 것이며 제일 먼저 꿈을 꾼 사람은 칸트로 그의 ‘하나의 능력에 의해서’라는 대답에 머물지 말고, 칸트의 물음에 “왜 그러한 판단에 대한 믿음이 필요한가?”라고 바꿔 물어야 한다. 종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참이라고 믿다가 이제는 그 판단이 잘못된 판단이 될 수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으로 칸트가 주장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며, 거기에는 어떤 명백한 최면의 힘이 작용하고 있다.

 

 

 

12. (pp. 29-31.)

유물론적 원자론은 현존하는 것 중에 논박이 가장 잘 된 것 중 하나이며, 지금까지 지상에서 얻은 감각에 대한 가장 위대한 승리였다. 코페르니쿠스가 지구는 정지해 있지 않다고 설득했던 반면, 보스코비치는 ‘정지하고 있는’ 모든 최후의 것에 대한 믿음을 단호하게 버릴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 세계가 오랫동안 가르쳐온 영혼의 원자론 Seelen-Atomistik에게도 최후의 일격을 가해야만 한다. 하나의 단자, 원자로 여기는 믿음을 우리의 학문에서 추방해야 한다. ‘영혼’ 자체를 버리는 것이기 보다 영혼의 가설을 새롭게 파악하고 세련되게 만드는 길이 열려있다는 것이다. 니체는 심리학자가 영혼이라는 관념 주변에 널린 미신에 대한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러한 심리학자 또한 발명 혹은 발견하도록 운명 지어져 있을 것이다.

 

 

 

13. (p. 31.)

생리학자들이 말하는 유기체의 기본적인 본능이 자기 보존의 본능이라고 설정하는 것은 숙고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명이라는 것은 자신의 힘을 발산하기 때문이며, 생명 그 자체는 힘에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즉 불필요한 목적론적 원리가 끼어들지 않도록 주의하자는 것인데, 예를 들면 자기 보존 본능은 원리를 절약적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방식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14. (pp. 32-3.) 15. (p. 33.) 생략

16. (pp. 33-5.)

‘직접적인 확실성’(“나는 생각한다” 또는 “나는 의지한다”)이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 아직도 존재할지도 모르나 이 ‘직접적인 확실성’에는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형용모순을 함축하고 있다. 애초에 “나는 사유한다”라는 명제 자체가 논증하기 어려운, 대담한 주장이라는 것이다. 즉 사유가 무엇인지 나는 알고 있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한다는 진술은 내가 나의 상태를 확정하기 위해 내가 알고 있는 다른 상태들과 나의 현재의 순간적인 상태를 비교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 경우에 철학자는 ‘직접적 확실성’ 대신 형이상학적 물음을 손에 넣는다. “사유라는 개념을 나는 어디서 얻게 되는가? 나는 왜 원인과 결과를 믿는가? 나에 대해, 더구나 원인으로서의 나에 관해, 그리고 결국에는 사유의 원인으로서의 나에 관해 나에게 말할 권리를 주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에 즉각적인 답을 한다고 하여도 철학자는 다시 물을 것이다. “당신이 틀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대체 왜 절대적으로 진리만이 있어야만 합니까?”

 

 

 

17. (pp. 35-6.)

하나의 사상은 ‘그 사상’이 원할 때 오는 것이지, ‘내’가 원할 때 오는 것이 아니다. 즉 앞서 설명한 명제의 ‘나’는 단지 하나의 가정일 뿐 ‘직접적인 확실성’은 아니다. “그 무엇이 생각한다”에서 충분한 문장일 때 ‘그 무엇’에 사유 과정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함축되어 있다. 사고와 결부된 하나에 대한 추정, 즉 원자에 대한 가정은 뒤로 하면 어느 날 사람들은 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그 무엇’없이 꾸려나가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18. (p. 36.)

어떤 이론은 그것을 반박할 수 있다는 데서 큰 매력이 된다. ‘자유의지’가 백 번이나 반박됨으로써 이러한 매력에 힘을 받은 것이다. 항상 그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 이 이론을 반박함으로써 스스로 충분히 강하다고 느낀다.

 

 

 

19.(pp. 36-39.)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은 마치 의지가 세상에 잘 알려진 것처럼 논하곤 한다. 즉 하나의 용어에는 언제나 철학자들의 사소한 주의만을 제압해온 대중의 선입견이 숨겨져 있다. 따라서 여기에 주의하고 ‘비철학적’인 것을 추구해야 한다. 의지작용에는 첫째, 감정의 다양함이 있으며, 둘째, 의지의 행위를 지배하는 하나의 사상이 있음을 인정해야 하며, 셋째, 의지는 감정과 사고의 복합체이자 하나의 정서Affekt, 명령의 정서이다. 의지하는 자는 행위하는 데 의지만으로 충분하다고 굳게 믿는다는 점을 지적한 니체는 의지와 행위가 하나라는 믿음으로 결과의 필연성을 감지하는 것이 의지 자체를 맹신하게 된다고 부연한다. 다만 명령하고 스스로 명령을 수행하는 자를 충실히 이행한 자는 결국 ‘하위에 있는 의지Unterwillen’ 또는 ‘하위에 있는 영혼Unter-Seelen’에 쾌에 감정을 덧붙인 명령과 복종으로 이해될 수 있다. 이는 지배계급이 자신과 사회 공동체의 성취를 동일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철학자는 의지를 이미 도덕의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다. 도덕을 지배 관계에 관한 학설로 볼 수 있을 것이다.

 

 

 

20. (pp. 39-40.)

근본적으로 철학은 자의적이거나 스스로 성장하는 것이 아닌 상호 간의 관계와 유사성 속에서 상장한 것이다. 크게는 하나의 체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철학함의 가능성이라는 어떤 근본 구도를 되풀이하며 또다시 새롭게 동일한 순환 궤도를 달린다. 이는 인도, 그리스, 독일의 모든 철학적 사유 행위가 놀랄 정도로 가족 유사성을 지닌 것으로 쉽게 설명될 수 있다. 즉 언어 유사성이 있는 곳에서는 공통된 문법 철학이 존재하며, 따라서 내가 생각하는 것은 동일한 문법 기능에 의해 무의식적인 지배와 운영에 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처럼 특정한 문법적 기능에 속박되는 것은 궁극적으로 생리학적 가치 판단과 종속적 조건에 속박되는 것이다. 이는 관념의 기원에 대한 로크의 피상성을 반박할 수도 있는 것이다.

 

 

 

21. (pp. 41-43.)

지금까지의 사유 중에 자기 원인은 가장 심한 자기 모순이며, 일종의 논리적인 강요이자 부자연스러움이다. 형이상학적 최고 지성이 가진 ‘의지의 자유’를 향한 열망은(자신의 행위에 완전히 책임지고 신, 세계, 조상, 우연, 사회를 그 책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열망) 자기 원인이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누군가 ‘자유의지’를 자신의 머리에서 지운다고 한들 애초에 그 개념적 허점을 발견한 것마저도 지워버리라고 간청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의 오용에서 생긴 ‘부자유 의지’임을 깨닫고 ‘원인’과 ‘결과’를 그릇되게 사물화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결과는 원인에 뒤따른다’는 것은 없으며, 기호 세계 그 자체로 사물에 투사하고 혼합시키면 신화적으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만다. 실제 삶에서 중요한 것은 오직 강한 의지와 약한 의지의 문제뿐이다.

 

 

 

22. (pp. 43-4.)

“어느 곳에서도 법 앞에서는 평등하다.―자연은 이점에서 우리와 다르지 않고 우리보다 나을 것이 없다” : 이 말에는 은근한 속셈이 있는데, 그 안에는 또 한 번 특권적이고 자주적인 모든 존재에 대한 천민의 적의가 있으며, 두 번째 좀더 세련된 무신론이 변장한 채 있다.

이처럼 동일한 자연과 현상에 대해 가차 없는 권력 주장이 관철되고 있음을 읽어낼 줄 아는 어떤 사람이 나타날 수 있다. 이 사람은 모든 ‘힘에의 의지’ 속에서 무예외성과 무조건성을 그대들에게 보여주는 해석가이지만 다른 이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것을 주장하며 끝을 맺는다. 즉 세계는 ‘필연적’이고 ‘계산할 수 있는’ 진행 과정을 밟아간다는 것이다. 다만 세계를 법칙이 지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법칙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힘은 매 순간 마지막 결론을 이끌어낸다는 것이 니체의 다른 해석이다.

 

 

 

23. (pp. 44-6.)

심리학 전체가 지금까지 도덕적인 편견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에 심리학은 심층까지 들어가지 못했다. 니체처럼 심리학을 힘에의 의지의 형태론과 발달이론으로 파악하는 사상가는 없다고 말한다. 이렇게 볼 때 도덕적인 편견이 가하는 폭력은 가장 냉담하고 아무런 전제가 없는 세계로 침입한 것이다. 진정한 생리 심리학은 연구자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무의식적인 저항과 싸워야만 한다. 심리학은 이제 다시 근본적인 문제에 이르는 길이 되었고, 바로 도덕을 넘어가는 항해를 시작할 때 우리들 자신의 도덕의 잔재를 짓누르고 분쇄하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 번도 열리지 않은 세계, 모험가에게도 더욱 심층적인 통찰의 세계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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