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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인지16] 2주차 발제 3,4,5장

진세 2023.04.21 19:12 조회 수 : 71

청인지16 사랑할만한 삶이란 어떤 삶인가.

김진세

 

3장 삶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 법

 

1. 철학을 호구 삼는 자들.

     니체의 선악의 저편 3장 제목은 ‘종교적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 인간의 내적 체험, 영혼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을 ‘위대한 사냥’이라고 니체는 표현하는데 이 사냥에 ‘학자’보다 오히려 ‘종교적 인간’이 적합하다고 말한다. 학자들은 객관적인 서술 방식을 택하며 자신의 개입을 제한하려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실행여부와 타당성을 별개로 하며 개인적(personal) 삶을 걸지 않는다고 한다. 니체를 연구하는 학자는 니체에 대해 쓰지만, 니체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하는 사람은 드물다. 철학을 삶과 무관한 지식으로만 만드는 학자들에 대해 저자는 철학을 호구삼는 자들이라고 비판한다. 

     그에 비해 종교인들은 소중히 여기는 가치를 위해서라면 고독과 대면하거나 상처를 감수하며, 자기 인생을 걸고 신에게 다가간다. 삶과 분리된 지식을 좇는 학자들 보다는 실패와 좌절이 기다린다고 해도 삶을 걸어가는 자들이 인간의 영혼과 그 한계를 탐구하는데에 적합하다고 한다.

 

2. 삶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라.

     종교가 학문과 다른 것은 이성이나 논증의 결여가 아니다. 신학은 합리적 논증을 통해 믿음의 근거를 짓고자 했고, ‘이해하기 위해선 믿으라’는 태제의 신학도 이해하기 위해선 믿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자 했다. 종교는 학문과 달리 ‘이러이러한 삶을 살아라!’는 본질적인 명령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종교에서 믿음이든 이성이든, 삶을 말하기 위해 동원된다. 그리고 주로 삶이 근본적으로 흔들리는 사건을 경험할 때 종교에 빠져들게 된다. 

     종교는 삶을 직접적으로 타겟하기에, ‘좋은 삶’을 말하고자하는 니체는 좋은 삶을 찾기위해 종교를 이용해야한다고 말한다. 니체가 기독교를 비판하는 것도 종교가 인간육성에 이처럼 중요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고통과 희생의 감수를 ‘노예가 되고 자신을 불구로 만드는 것’ 이라고 하며 부조리라고 비판한다.

 

3. 양심과 가책, 책임과 책임감

    니체는 고독, 단식, 성적 금욕을 종교적 신경증이라고 했다. 정신분석학에서 신경증이란 규범에 눌려 자신의 욕구를 포기하지만, 본질적으로 사라질 수 없는 것이 욕구 이기에 ‘증상’이라고 불리는 언행이다. 고독, 단식, 금욕도 종교를 위해 포기해야하지만 완벽히 행해질 수 없는 것 이기에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오히려 이 고통을 통해 자신을 채찍질하는 삶의 고통이 반복되는 것을 즐기게 된다. 자기의 욕망을 억누르면 성스러운 것에 가까워진다는 ‘가책’의 쾌감이 생존의 쾌감을 대신하게 한다.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가 양심의 가책에 대해 비난하는데 흔히 양심 자체를 비판하는 것으로 오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니체가 비판하는 것은 양심이 아니라 양심의 가책이다. 

     양심이란 자신이 약속한 것에 최대한 책임을 지는 것이다. 반면에 양심의 가책은 자신의 양심이 있음을 확인하는 도착적 쾌감이다. 책임과 책임감도 마찬가지이다. 책임은 의도 뿐 아니라 결과마저 자신이 약속한 것을 지키는 것이다. 니체는 책임지는 자를 강자라고 한다. 반면에 책임감은 책임을 지겠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저 채무감으로서 죄의식에 지나지 않는 반동적인 감정이다. 

 

4. 종교적 잔인성과 실험

     종교의 관점에서, 삶은 고통과 희생을 본질적 요인으로 보기에 그 고통을 주고 견디게 하는 절차가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절차는 잔인성을 갖고 있다. 니체는 종교적 잔인성에 세 가지 형태가 있다고 한다. 첫 째는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치라는 명령이다. 종교에서 인신공양을 요구하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둘 째는 가장 강한 본성(nature)을 바치라는 요구이다. 일차적 본성인 식욕을 바치는 단식, 성욕을 바치는 성적 금욕을 예로 들 수 있다. 셋 째로는 가장 소중한 것과 가장 강한 본성을 바치고 나서 남은 것을 바치라는 요구이다. 첫번째, 두번째를 바치고 나면 남는 것은 희망이나 믿음인데 아무것도 남지 않은 이들에게 남은 것은 신이다. 즉, 신을 바치라는 것이 세번째 잔인성이다. 신을 바치게 되면 신에 대한 채무감을 갖게 되고 죄의식, 허무, 절망 등이 결국 남게 된다. 

 

5. 산업사회와 ‘부지런함’의 무신론

     모든 종교가 신을 중심에 두고 있는 건 아니다. 신의 위상, 의미, 신의 숫자 등이 종교마다 다르다. 기독교는 신의 중심성이 확실한 종교여서 기독교 비판은 종종 무신론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신은 죽었다’ 라고 말한 니체는 무신론자가 아니다. 신을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을 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세상에서 신이 이미 죽었다고 확인하는 선언이었다. 신의 죽음은 신이 죽고 없는 세상에서 삶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 하는 물음이었다.

     종교라는 것에 몰두하기 위해서는 양심에 거리낄 게 없는 한가함이 있어야 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근대에 들어 부지런함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태도가 만연하면서 그 부지런함이 세대를 거쳐 종교적 본능을 해체해버렸다고 한다. 종교가 힘을 잃는 것은 종교에 대한 반감 때문이 아니라 산업화로 인해 먹고 사는 것 이외에 종교에는 무관심해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무관심은 사물과의 접촉을 두려워하는 신중함과 순수함으로 승화되었다. 종교적 인간을 학자들이 저급하다고 보는 것도 무지이며 무관심의 연장이다.

 

6. ‘인간육성사업’과 종교

     철학자는 인류의 전체적인 발전에 책임을 느끼는 자라고 니체는 말한다. 또한 인간을 길러내고 교육하기 위해 정치와 종교를 이용하듯이 종교도 이용해야 한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자는 미래의 철학자를 말하며 좋은 삶을 창안하고 그런 삶으로 사람들을 데려가는 자들이다. 

     인간육성사업’과 ‘교육사업’을 듣고 계몽주의나 전체주의, 나치를 떠올리며 반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단지 어감이 주는 반감이며, 본질적으로 좋은 삶을 살 줄 아는 인간을 만들어내고 그런 인간을 길러내는 방향을 담고 있다. 계몽주의와 다른 점은 이성과 지식을 빛삼는 철학에 대해 차라리 종교적인 인간이 낫다고 보는 점이다. 그리고 전체주의와 다른점은 동일성에 사람들을 맞추는 식의 육성이 아니라 스스로 고양되어 가는 힘과 의지를 통해 각자의 삶을 다양한 양상으로 펼쳐가는 방식의 인간육성을 말한다는 점이다.

     인간육성사업을 위해 종교 또한 이용해야한다고 말하는 데, 종교는 저항극복수단 그 이상이고 지배자와 예속된 자를 하나로 묶어 주는 유대의 끈이며, 예속된 자의 양심이며 복종에서 벗어나려는 속마음을 전자에게 알려주는 통로라고 한다. 종교는 고귀한 자, 중간층(지배받는자), 평범한 사람들에게 각각 다르게 효과를 갖고 강자로 육성하게 해준다. 

    그러나 종교를 새로운 인간의 육성수단으로 삼지않고, 종교 자체가 목적이 되면 위험하다는 점을 니체는 지적한다. 종교가 대게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고통받는 약자를 옳다고 인정하기 쉽고 약자들을 보존하게 되며 인간 유형을 낮은단계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나아가서 소중한 가치인 강한 의지나 힘을 증오하게 만들 수도 있고, 약함을 넘어서게 하는 것들을 사람을 괴롭히는 가해적인 것 이라며 비난하게 만들 수도 있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인간을 하나의 숭고한 기형아로 만들려하는 의지라며 강하게 비판한다.

 

4장 잠언과 간주곡, 별을 따라가는 자와 별에 맞아 피 흘리는 자

 

  1. 한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야만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로 인해 그 밖의 모든 사람은 무시되기 때문이다.

- ‘사람’이라는 단어를 ‘가치’로 바꾸어도 대체로 성립한다.

  1. 만일 그대가 아직도 별들이 ‘그대 위에 있는 것’으로 느끼는 한, 그대에게는 인식하는 자로서의 안목이 아직 결여되어 있는 것이다. 

-  이상과 꿈을 가진 이들, 즉 별을 따라가는 사람이라면 별에 맞아 피 흘리며 쓰러져 본 적이 있다. 없다면 있어야한다. 별의 추락 속에서 심연을 맛볼 때, 우리는 별빛 뒤에 있는 돌을 맛볼 수 있다.

  1. 인간을 고귀하게 만드는 것은 고귀한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그것의 지속이다.

- 순간적으로 높이 올라가는 것보다 어떤 강도를 지속하는 것과 지속되는 강도의 흐름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1. 자기 자신을 경멸하는 사람은 그러면서도 언제나 경멸하는 자로서의 자신은 존중한다.

- 자기경멸하는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면, 자기 경멸은 스스로 경멸에서 벗어나는 출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1. 감정을 통제할 줄 알면 정신이 자유로워진다.
  2. 삶과 결별할 때 오디세우스가 나우시카와 이별할 때처럼 하라. 삶에 연연하기보다는 삶을 축복하면서
  3.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싸우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 만일 그대가 심연 속을 오랫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심연도 그대 속을 들여다본다.

- 심연은 자신이 따라가던 별의 추락에 피를 흘리는 이들이 빠져드는 곳이고, 모든 가치가 무너지고 허무의 어둠이 있는 곳이다. 심연의 어둠에 영혼이 잠식되기 십상인데 심연에 들어갔다 나온자는 그러지 못한 자와 같을 수 없다. 애써 심연을 벗어난 신체에 어둠이 남아서 잠식하고 있는지 유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1. 우리는 좋은 일이나 나쁜 일에 갚음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을 행한 바로 그 사람에게 갚음을 하는가?

 

5장 도덕의 자연사, 도덕의 ‘유물론’

 

1. 감응의 도덕, 도덕의 유물론     

     니체는 철학자들이 도덕 자체를 주어진 것으로 간주 하는 것을 비판한다. 기존의 도덕에 근거가 있는지 묻기 보다는 근거를 찾아주려 하며 정당화하는 것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도덕학을 비판하며, 도덕의 본래 문제는 상이한 도덕들을 비교함으로써 기존의 도덕을 물음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본다.

     니체는 여러 다른 도덕들에 대해 말하면서 도덕들이란 “감응(affect)을 나타내는 징후적 언어”라고 말한다. 스피노자는 감응이란 어떤 것과의 만남이 주는 촉발(affection)에 따라 발생한 능력 증감의 표현이라고 한다. 능력이 증가할 때는 쾌감이 발생하고 감소할 때는 고통이 발생하며, 쾌감은 상승감을 고통은 하강감을 표현하는 감응이다. 우리가 느낌이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상태들인 반가움, 기쁨 등은 상승감에 속하고 불안함, 슬픔 등은 하강감에 속한다. 그런데 모든 신체와 영혼은 복합체이기 때문에 감응은 명료하지 않다. 예를 들면, 커피를 마실때 혀의 어떤 세포는 쓴맛에 놀라고(하강), 다른 세포는 뒤따라오는 단맛에 쾌감을 느끼고(상승), 신맛에 긴장(하강)하게 된다. 이런 감응들이 모여서 커피 맛의 감응이 복잡하게 형성된다. 이처럼 감응은 계속 섞이게 되고 상태도 달라지기에 지속적인 이행상태에 있고 모호하다고 할 수 있다. 유기체는 두드러지는 감응을 주로 포착하고 미묘한 것들은 포섭하려고 하며, 이를 하나의 말로 명명하여 감정으로 단일화하려 한다. 

     도덕이 감응의 징후라는 말은 도덕에 함축된 감응을 읽어내라는 말이다. 그 도덕안에서 지배적인 힘과 의지가 어떤 것인지 보라는 말이기도 하다. 피끓는 감응의 도덕을 따라가면 피끓는 삶 속으로 들어가게되는 등, 도덕은 따르는 이들에게 그 감응에 대응하여 신체를 행동하게 한다. 

 

2. 강제와 훈육을 이용하라.

     니체는 모든 도덕은 자유방임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도덕에서 본질적이고 귀중한 점은 그것이 장기간에 걸친 강제라는 점이라고 말한다. 장기간의 지속력을 갖는 강제와 그 생산적인 효과를 주목해야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운율과 리듬의 강제는 시와 음악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고 악기의 자유로운 연주를 위한 연주자의 손가락 훈련이나 학생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강제에 따르는 것이다. 니체는 당시 교회나 궁정에서의 강제에 대해서도 유럽의 정신에 강한 힘과 호기심, 세련된 유연성을 갖추도록 훈련시킨 수단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금욕주의를 비판했던 니체는 능력을 육성하기 위해서라면 금욕도 이용하고자 했다. 예를 들어 단식은 미각을 예민하게 해주는 점에서 감각을 깨우게하고, 금욕은 충동을 순화하고 지적인 집중을 가능하게 하는 점에서 능력의 성장을 이루어내게 한다. 그리고 기존의 감각을 벗어나서 새로운 감각을 받아들이거나 다른 투시법을 넘나드는 것에도 훈련이 요구된다. 취향에 다르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단지 ‘싫다’ 라고 표현하는 것은 그저 감각의 무능력을 표현하는 것뿐이고, 같은 것에서도 다른 감각을 읽어낼 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유란 통제와 훈련을 통해 신체와 감각을 다룰 수 있게 되어야 가능한 것이고, 고통과 훈육을 제거해가면 오히려 생명력은 약해지게 된다. 고통스러운 것을 뚫고 나가며 고양되는 것이 강자로의 육성이며,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Übermensch)는 ‘넘어서는 자’를 뜻한다.

 

3. 감각의 도덕은 관념의 도덕보다 빠르니

     니체는 감각과 인식을 도덕의 차원에서 다룬다. 도덕의 차원에서 다룬다 함은 좋음과 나쁨이라는 범주는 어떤 것에 대한 권장과 금지의 명령어를 담고 있으며, 감각이나 인식은 그런 권장과 금지의 체계속에서 형성되고 작동한다는 것이다. 권장되는 것에는 쾌감을, 금지되는 것에는 불쾌감을 느끼게된다. 그러나 명시적 도덕없이도 익숙한 것은 권장된다. 어느 도덕도 익숙한 것만 보고 생각하라고 하지 않지만 우리는 익숙한 것만 감각하고 생각하려 하며 낯선 것은 밀쳐낸다. 낯선 것을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익숙한 것에 맞추어 편집하여 해석하게 된다. 기억도 익숙한 양상들로 재편집하게 되고  특이한 체험을 해도 익숙한 체험으로 바꿔버릴 가능성이 있다. 감각이 안바뀌었다면 무의식이 안바뀐 것이고 삶이 안바뀐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편한 것 뿐만 아니라 불편한 것도 경험하는 훈련과 강제를 동반하는 새로운 습속이 필요하며 그것이 없으면 인간을 바꾸거나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한다.

 

4. 소유의 세가지 개념

     니체는 소유라는 동일한 개념에서 느끼는 감각차이에 대해 설명한다. 무엇을 진정한 소유라고 여기는 지 얼마나 다를 수 있는지에 대해 보여준다. ‘연인을 소유한다’라는 사례에서 보면, 가장 천한 소유감각은 연인을 육체적으로 제 맘대로 향유하는 상태를 소유한다고 부르는 것이다. 두번째는 첫번째보다 한단계 높은 수준의 소유를 말하는 데 연인이 그에게 자신을 줄 뿐 아니라, 자신이 갖고 있거나 갖고 싶어하는 것을 그를 위해 포기하는 지를 두고 소유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번째로는 좋은 모습뿐만 아니라 어두운 모습까지도 알게된 후에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이 진정한 소유라고 말하는 감각이다. 니체는 이 세가지의 소유에 대한 개념을 국민에 대한 소유에 빗대는데 첫번째 소유는 독재자의 국민에 대한 소유감각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두번째는 존경을 받는 정치가이고 세번째의 경우에는 정치가에게는 도달하기 힘든 경지고 문학의 영역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5. 정의란 무엇인가

     니체는 각자의 신체안에 수많은 힘과 의지가 있음을 강조했다. 인간의 신체에서는 서로 다른 충동과 욕망이 충돌하게 되는데 그런 내부의 싸움을 제거하려는 인간보다 자신과의 싸움을 교묘하게 조정하고 지배하는 인간을 강자라고 말한다. 이어서 니체는 ‘무리의 도덕’과 악에 대해 분석하는데, 공동체주의도 결국 패거리의 공리성을 원칙으로 한다는 점에서 공리주의의 일종이라고 지적한다. 한 사회 전체가 동의하는 공공선이란 없기 때문이다. 데리다는 충분히 알 수 없는 타자성에 대해 생각하려는 시도를 ‘정의’라고 말한바가 있다. 타자성이란 정확히 계산될 수 없고, 언제나 동일하게 계산될 수도 없기에 여러 답들에 대해 열려 있어야하며 이 열어둠이 결국 정의라고 한다. 따라서 상이한 답에 대한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고, 무리의 공리성을 위해 그 공리성을 넘어서는 행동이나 충동을 단순 악으로 표현하는 것은 결국 유순한 인간이 존경을 받게 되는 병적인 유약화가 일어나게 만든다고 한다.

 

6. 패거리의 도덕과 민주주의

     니체는 패거리에 대해 비판한다. 패거리는 비슷한 자들 끼리 모인 것이고, 고유한 생각보다는 패거리의 논리가 득세함으로 강자의 생각을 거기에 맞추게 하기 때문이다. 패거리는 비슷한 것들이 옳은 것이라고 믿게하고 그것과 다른 것들을 배제하는 폭력도 행사하기에, 개인과는 다른 집단의 힘을 갖게 한다. 그러나 거기 속한 개인의 힘은 집단과 분리되었을 때는 무력한 약자에 불과하다고 한다. 권력이라는 것도 약자들이 모여서 힘을 행사하는 것이고 능동적인 힘으로 새로운 창안을 하는 사람들은 비난받고 배척받게 되기 때문에 니체는 약자들로 부터 강자를 보호해야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 또한 무리의 도덕이라고 비판했다. 

     니체는 미래 인간에게 희망을 걸어야한다고 말한다. 이를 적극적으로 보면 우리 각자에게 미래의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공동체로 넓혀보면 패거리에 동질화되기보다, 각자가 최대의 특이점이 되고 특이점들이 모여 특이성을 만들고 새로운 특이점이 쉽게 출현하도록 하여 전체의 특이성을 바꾸어 가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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