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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손 기획세미나] 물질과 기억 1장 후기

yeony 2018.09.18 21:41 조회 수 : 629

지난주와 이번 주 2주에 걸쳐 드디어 <물질과 기억> 1장(표상을 위한 이미지들의 선택-신체의 역할)을 마쳤습니다. 물질과 기억 1장이 베르그손 철학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하지요. 이제 모두들 조금씩 베르그손의 이미지 존재론 전반에 대한 그림이 조금씩 그려가고 있습니다. 실제 그림으로도 그려봤지요? 1장에서 이미지, 지각/순수지각, 행동, 정념, 기억 등 주요개념이 거의 다 등장했습니다. 1장은 그 중에서도 주로 “신체의 활동”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지난 첫번째 발제때 넘 길게 발제를 했기에, 1장 전제의 요약문 겸해서 지난 시간에 했던 내용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보았습니다.

 

[이미지 존재론 : 이원론을 넘어서는 이원론]

 

우선 베르그손의 이미지 존재론은 두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관념론과 실재론의 전통적인 이원론을 넘어서는 이미지들(물질세계 / 내 신체)의 이원론이다.

 

“이 책은 정신의 실재성과 물질의 실재성을 주장하고 전자와 후자의 관계를 하나의 정확한 예증, 즉 기억이라는 예증위에서 규정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이 책은 분명히 이원론적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책이 물체와 정신을 이원론이 항상 야기해 왔던 이론적 난점들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상당히 완화되기를 바라는 그러한 방식으로 고찰할 것이다.”(MM21)

 

1. 물질세계의 이미지 : 운동하는 원자들로서의 물질

 

베르그손에게 “물질세계는 이미지들의 총체”인데, 그가 ‘이미지’로 의미하는 것은 “관념론자가 표상이라고 부르는 것 이상의 그리고 실재론자가 사물이라고 부른 것보다는 덜한 어떤 존재(사물과 표상의 중간 길에 위치한 존재)이다.”(MM22)

 

베르그손에게 ‘물질’과 ‘이미지’는 뭘 의미할까? 책을 읽다보니 흥미롭게도 베르그손이 상상한 이미지로서 실재하는 물질세계는 “운동하는 원자들”의 세계였다. 베르그손의 설명을 따라보자. 그는 “물질을 운동하는 원자들로 환원”(66)해 보라고 제안하다. 이 원자들은 “물리적 성질도 결여”하고 있고, “가능적 시각과 가능적 접촉의 관계”에서만 규정된다. (역주에 따르면 고전역학에서 원자들이란 주관적인 제2성질 뿐 아니라 모양, 크기 같은 제1성질도 결여된 추상물질이라네요. 그럼에도 우리는 물질을 시각이나 촉각으로 규정하려고 하니 베르그손은 ‘가능적 시각’ ‘가능적 접촉’이라고 표현합니다!) 그리고 다시 원자를 “힘의 중심들로 응축”시켜 보고 그것을 “연속적인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와동trourbillon들로 해체”시켜보라고 제안한다.(원자는 ‘실체’가 아니라 ‘힘의 중심’으로 보는 패러데이의 전기장이론을 끌어 온 것!) 이처럼 베르그손은 물질을 “운동하는 원자들”로서 상상하였기에, 물질은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이지만 우리에게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실재하며, 표상되지 않고도 현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이런 흐름, 이 운동들, 이 중심들은 그 자체가 단지 하나의 무력한 접촉, 효과 없는 충력, 퇴색한 빛과의 관계에서만 규정되지만 여전히 이미지들이다. 이미지가 지각되지 않고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표상되지 않고도 현존할 수 있다. 그리고 현존과 표상이라는 이 두용어들 사이의 거리는 바로 물질 자체와 우리가 그것에 대해 가지는 의식적 지각 사이의 간격을 측정하는 것처럼 보인다”(MM66-67)

 

2. (특권을 가진) 내 신체 이미지 : 지각-행동의 중심

 

베르그손에게 나의 신체도 이미지로 존재하는 물질세계의 일부이다. 그러나 나의 신체는 특권을 가진 이미지이다. 어떤 특권인가? 베르그손에게 (나의 신체를 포함하여) 모든 물질세계의 이미지는 기본적으로 ‘운동’을 하면서 서로에게 작용하고 반작용하는 이미지들이다. 나의 신체 이미지도 ‘운동’을 하는데, 내 신체의 운동 이미지는 단순히 작용-반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한 ‘선택’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것이 내 신체의 지각 활동이다. 지각은 행동을 준비한다. 따라서 ‘행동’이라는 운동을 하는 나의 신체는 ‘선택’ 가능성으로 인한 ‘비결정지대’를 품고 있기에 기계적으로 작용-반작용하는 다른 물체들과 구분된다. 단순히 구분될 뿐만 아니라, 외부 물질세계의 이미지들은 내 신체의 행동을 중심으로 해서 그 관계 속에 배열된다. 여기에 지각하는 내 신체가 가진 특권이 있다. 하지만 내가 지각하지 않을 때에도 물질들의 이미지는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다.

 

“우선 이미지들의 전체가 있다. 이 전체 속에 ‘행동의 중심들’이 있는데, 이에 관련된 이미지들은 이 중심들에 반사되는 것처럼 보이다. 지각들이 생겨나고, 행동들이 준비되는 것은 그와 같이 이루어진다. 나의 신체는 이 지각들의 중심에서 그려지는 것이고 나의 인격은 이 행동들이 결부되어야 하는 존재이다”(MM86)

 

“외적 이미지들은 나의 신체에 “여기 외적 세계의 이미지들이 있고, 그 다음에는 나의 신체, 마지막으로 나의 신체가 주변의 이미지들에 가한 변양들이 있다. 외적 이미지들은 나의 신체에 운동을 전달한다. 나의 신체는 외적 이미지들에게 운동을 되돌려 준다. 따라서 나의 신체는 물리적 세계 전체 속에서 다른 이미지들처럼 운동을 받고 되돌려 보내면서 작용하는 이미지이며 단지 자신이 받은 것을 되돌려 보내는 방식을 어느 정도까지는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를 뿐이다...대상들을 움직이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나의 신체는 따라서 행동의 중심이다. 그것이 표상을 생겨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42)

 

[지각 : 표상과 정념 사이에서]

 

1. 지각과 표상

 

통상 철학에서 지각활동은 ‘표상’을 만드는 일로 직결되지만, 베르그손에게 ‘지각’은 기본적으로 ‘행동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베르그손은 신경계의 활동으로 이를 논증한다. 통상 사람들은 “신경계의 기능이 지각을 형성하고 표상을 만든 이후 운동들을 산출한다고 생각”(82)하지만, “지각은 운동중추에 있지 않은 만큼, 감각중추 속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각은 이것들의 관계의 복잡성을 측정하는 것이며 그것이 나타나는 바로 거기에 존재한다.”(84) 베르그손의 생각에 따르면 “사실상 나의 신경계는 내 신체를 움직이는 대상들과 내가 영향을 행사할 수 있는 대상들 사이에 놓여 운동을 전달하고 배분하거나 억제하는 단순한 전도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 전도체는 주변에서 중심으로, 중심에서 주변으로 팽팽하게 당겨져 있는 막대한 수의 신경섬유들로 구성되며, 저변에서 중심으로 향해가는 섬유들이 있는 만큼 나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즉 나의 운동적 활동에 기초적인 질문을 제기할 수 있는 공간의 점들이 있다. 제기된 각 질문이 사람들이 ‘지각’이라고 부르는 것이다.”(82) 이렇게 베르그손에게 지각이란 기본적으로 “나의 운동적 활동에 기초적인 질문을 제기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베르그손은 “지각은 하나의 안정된 습관이 획득될 때마다 감소하는데, 완벽하게 준비된 대답은 질문을 불필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생명체의 지각활동은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외계로부터 다가오는 위험을 감지하고 그에 대응하는 행동을 준비하는 일과 직결된다. 따라서 베르그손에게 “지각은 전체적으로 볼 때 신체의 운동하려는 경향 속에서 진정한 존재이유”(83)가 있다고 본다.

 

물론 베르그손에게도 지각이 ‘표상’을 만드는 일과 무관하지 않다. 앞에서 나의 신체는 다른 모든 이미지들을 변양시키는 행동의 중심으로서 특권적 이미지라고 했다. 베르그손은 지각과 표상의 관계에 있어서도 통상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나의 의식적 자아로부터 나의 신체로, 나의 신체로부터 다른 물체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잘못된 생각으로 본다. 베르그손에게 “사실상 나는 물질적 세계 일반에 단번에 위치하여, 나의 신체라고 불리는 이 행동의 중심을 점차로 제한하여, 그것을 다른 물체들로부터 구별”(86)하기 때문이다. 베르그손은 우리가 순전히 내적인 상태들을 우리 밖에 투사하여 표상을 만든다는 오해들은 “불가분적 연장과 동질적 공간의 형이상학적인 혼동, ‘순수지각’과 기억의 심리학적 혼동”(87)때문으로 본다. 베르그손이 보기에 이것이 ‘이미지’와 ‘실재’(공간적)의 혼돈이다.

 

“모든 이미지 가운데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어떤 이미지의 잠재적 행동은 주변의 이미지들이 내 신체의 잠재적 행동을 명백히 반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나의 신체에 대해서 일종의 가능적 행동이 있는 만큼 다른 물체들에 대해서도 상이한 반사체계들이 있다. 이 체계들의 각각은 나의 감관들 중 하나에 상응할 것이다. 따라서 나의 신체의 다른 이미지들 위에 행사할 다양한 행동의 관점에서 그 이미지들을 분석하면서 반사하게 될 어떤 이미지처럼 행동한다. 따라서 같은 대상 안에서 나의 여러 감관들에 의해 지각된 성질들 각각은 나의 활동의 어떤 방향, 어떤 필요를 상징한다.”(88)

 

“의식적으로 지각하는 것은 선택하는 것을 의미하고, 의식은 무엇보다 실천적 분별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나의 다양한 감관들이 제공하는 동일한 대상의 상이한 지각들은 서로 결합된다고 해서 대상의 완전한 이미지를 재구성하지는 못할 것이다. 이 지각들은 나의 욕구들 속에서 그만큼의 공백들을 측정하는 간격들에 의해 서로 분리된 채 머물 것이다.”(89)

 

여기서 베르그손의 ‘이미지 실재론’의 의미가 살아난다. 내 신체의 이미지는 가능적 행동이며 그 다양성만큼 다른 물체들은 상이한 반사체계를 가진다. 따라서 대상과 우리의 지각 사이에는 내 신체의 욕구들에 따른 공백지대가 존재하기에 다양한 감관으로 들어온 대상에 대한 상이한 지각들을 결합한다고 해서 대상에 대한 완전한 이미지가 재구성될 수는 없다고 본다. 베르그손은 이렇게 우리 내부의 욕구(정념)들로 인해 혼탁해진 대상과 지각 사이에 존재하는 공백을 메우고 연속성을 회복하기 위해 감관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89)

 

아무튼 베르그손에게 “물질적 대상은 지각한 것의 총체가 아니다.”(90) 그렇다고 물질에 대한 지각이 상대적이고 주관적이라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지각이 ‘정념’과 ‘기억’으로 혼탁해져 있을 뿐이지, 베르그손에게 ‘이미지’로서의 ‘물질’은 엄연히 실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91) 이를 해명하기 위해 베르그손은 ‘순수지각’이라는 단순히 인식기능을 하는 ‘지각’을 상정한다. 순수지각은 나의 욕구나 정념 혹은 기억으로 혼탁해지지 않은 순수한 대상의 인식으로서의 지각이다. 베르그손은 이미지를 ‘실재’로서 만들기 위해서 최초의 출발지점으로서 ‘대상’과의 만남이라는 ‘순수지각’을 상정한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지각은 (이론상) 권리로서만 존재하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순수지각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외부 대상의 공간적 표상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지각은 언제나 욕구나 정념으로 물들어 있다.

 

2. 지각과 정념

 

따라서 베르그손은 “우리 지각의 역사는 내적이고 비연장적인 상태들(정념적 상태)이 연장적이 되어 밖으로 투사(표상적 상태)되는 역사”라고 본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각은 ‘행동에 대한 촉구’이며 ‘가능적 행동’인데, 어떤 상황에서 지각대상과 내 신체 사이의 거리가 감소하여 임박한 위험을 느끼는 것이 정념의 발생이다. 이제 지각은 표상적 상태의 ‘가능적 행동’은 정념 상태의 ‘실제적 행동’으로 바뀌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여성이 밤길을 걸어가고 있다. 저 멀리 사람이 보인다. 그 사람의 존재를 “저기 사람이 있다”로 중성적으로 인지하는 것은 내 지각의 ‘표상적 상태’이다. 그런데 점점 그 사람의 걸음이 빨라져 나에게 점점 다가온다면 여성을 불안을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그때 ‘불안’은 정념의 발생이다. 불안함이라는 정념은 나에게 더욱 발걸음을 빨리하여 그 장소로부터 벗어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들 것이다. 여성은 빠르게 걸어가거나 그 사람을 먼저 지나쳐 지나가도록 행동을 조정할 것이다. 이렇게 정념의 발생은 어떤 환경 속에서 생명체가 위험이 임박했음을 느끼는 것이며, 지각대상이 우리의 신체와 일치해가는 것이다. 그때 지각이 표현하는 것은 더 이상 ‘잠재적 행동’이 아니라 ‘실제적 행동’이다.

 

이처럼 불안이라는 정념(고통)의 발생은 침해당한 요소들이 사태를 제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노력(빨리 걸어가거나 더 천천히 걸어감)을 하게 하는데 이것이 “감각신경 위에서 일어나는 일종의 운동적 경향”(100)과 같다고 말한다. 모든 고통은 “국부적local” 노력이다. 따라서 정념은 나의 개인적 실존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상 그것을 느끼는 주체로부터 분리된 고통이란 무엇이 되겠는가? 지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외적 지각은 무해하게 된 정념을 공간 속에 투사하는 것이다.(96) 여기서 베르그손이 말하는 감각과 지각의 차이가 드러난다.

 

여기서 감각들은 우리에 의해 우리 신체 밖에서 지각된 이미지들이 아니라 우리 신체 자체 속에 위치한 정념들이다. 우리 신체의 이른바 감각적인 요소들은 그것이 일상적으로 지각하는 외적 대상들에 관해 그것의 잠재적 행동과 같은 종류에 속함이 틀림없는, 자신의 고유한 실제적인 작용을 가진다. 이로써 사람들은 왜 각각의 감각 신경들이 감각의 결정된 양태에 따라 진동하는 것처럼 보이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94) 이와 같이 우리의 감각과 지각의 관계는 우리 신체의 실제적 작용과 가능적 또는 잠재적 작용의 관계와 같다. 그것의 잠재작용은 다른 대상들에 관련되고, 따라서 이 대상들 안에서 그려진다. 우리 신체의 실제적 작용은 신체 자체와 관련되고 따라서 신체에서 그려진다. 이런 이유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공통된 한계인 신체표면은 지각되는 동시에 감각되는 유일한 연장적 부분이다.(102)

 

베르그손의 ‘지각과 정념’에 대한 설명에서 96쪽과 100쪽이 모순되는 듯해서 좀 혼란스러웠다.

 

“우리 신체 위에서 대상의 작용을 증가시킴으로써 정념이 되고 더욱 특별하게는 고통이 될 수 없는 지각은 없다. 사람들이 바늘의 접촉으로 찔린 자국으로 보이지 않게 이행 할 때가 그러하다. 역으로 고통의 감소는 차츰 그 원인의 지각과 일치하고, 표상으로 외재화 된다. 따라서 정념과 지각 사이에 본성의 차이가 아니라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96)

 

이는 이해가 어렵지 않다. 바늘에 찔렸을 때 처음에는 “아야!”하는 고통이 먼저 다가온다. 그 고통이 어디에서 왔는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런데 조금씩 바늘에 찔린 고통이 감소해 가면서 어디에 찔렸고 피가 얼마나 나는지 등을 살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고통의 감소는 그 원인을 지각과 일치하고 표상으로 외재화 된다. 지각이 정념으로 물들어 있고 정념(고통)이 조금씩 걷힐수록 표상이 점점 드러나게 되는 것이기에 지각과 정념의 차이는 정도의 차이라는 말로 이해했다. 그런데,

 

“따라서 고통이 개입하는 정확한 순간이 있으며 그것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것은 유기체의 손상된 부분이 자극을 받아들이는 대신에 자극을 거부하는 때이다. 그리고 지각을 정념으로 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단지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성의 차이’다”(100)

 

이 말은 어떻게 이해하나? 설명을 보면, 이건 '정념의 근원'과 관련한 표현같다. 베르그손은 “우리는 생명체를 그것에 행사된 주변대상들의 작용이 그 대상들로 다시 반사되는 일종의 중심으로 본다. 외적 지각이란 이와 같은 반사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근데, 베르그손은 지각은 ‘전반사’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지각에서 '정념'이 사라지는 순간에 '표상'이 드러나는 것을 '전반사'라는 말로 표현했나?) 그런데 이 행동의 중심(신체)은 자연의 모든 물체들처럼 자신을 해체하려고 위협하는 외적 원인들의 작용에 노출된 하나의 물체이고, 이 원인들의 영향에 저항하고 투쟁하고 이 작용을 흡수한다. 정념의 근원이 여기에 있다. 따라서 표상을 만드는 (외적) 지각은 ‘신체의 반사능력’을 측정하고, (내적) 정념은 ‘신체의 흡수능력’을 측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둘 사이의 차이는 근본적 본성의 차이라는 말로 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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