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스는 항상 나의 관심을 자극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전투적인 철학자였다. 상충되는 듯한 두 단어를 구현한 인간. 그의 책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항상 있었지만 다가가기 쉽지는 않았다. 다행히 이번 수업을 통해 조금 다가서게 되었다.
북클럽 자본에 대한 나의 앎의 의지는 무엇일까. 어쩌면 나는 그 책에 대한 관심보다는, 맑스라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더 컸던 것 같다. 다음은 내가 바라 본 맑스에 대한 인상이다. 미쳐버린 시대 앞에서 결코 포기하지 않고 지적 용기를 유지한 사람이라고. 다른 지식인들이 현실을 외면하거나 과거로 돌아가거나 미쳐버렸을 때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 같다. 시지프스 같이 고난이 있어도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 자본을 읽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사고의 극한까지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울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본주의 내부의 비자본주의적 외부를 만든다는 것. 그런 발상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것이 나 자신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설득할 지도 나에게는 중요한 과제처럼 느껴졌다. 지금 사회에서 공동체 안에서 아늑하게 사는 것은 완벽히 안전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환경에서 적대적인 존재를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주변 환경에 저항할 힘이 필요하고 연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것을 논하는 것은 나중의 과제일 듯하다.
[1] [북클럽자본]을 읽는 기헌샘의 앎의 의지, 멋지군요. .....
맑스처럼 "사고의 극한까지 다다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니! 우리의 사유를 멈추지 않고 끝까지 밀어부치는 것, 그것만이 지금의 사유에서 다른 사유로 이행할 수 있는 방법일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공부를 함께 하는 우리들은, 서로에게 지치지 않게 도와주는 페이스메이커의 역할을 하게 되겠지요. 각자 사유의 지평은 그의 존재만큼 다채로울 것이므로, 각자가 책을 읽으면서 지금과 다른 사유의 지평을 갖게 되고, 그래서 우리가 서로의 새로운 지평을 바라보는 일은 얼마나 멋진 일이 될까요? ㅎㅎㅎ
[2] 자본주의 내부에서 비자본주의적 외부를 만든다. ......
기헌샘의 말처럼 수유너머 같은 공동체에서 외부를 구성하는 것보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나 적대적인 관계에서 외부를 만드는 것이 훨씬 힘들고 지난한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북클럽자본] 세미나가 가진 '앎의 의지' 즉 '주체의 변형으로서 책읽기'와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먼저 우리 내부의 자본주의적 욕망을 다른 형태로 변형시키는 것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주변에서 비자본주의적 외부를 구성하는 출발일 테니까요! 무수한 비자본주의적 구멍으로 자본주의가 '무화'된다면, 그때 그것을 뭐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