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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왜.끊.곁 에세이_타자와 동락하기

효영 2021.03.27 11:12 조회 수 : 124

타자의 문제는 근대적 주체의 동일성에 포섭되는 방식으로 다뤄졌기에 독립적 주제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20세기 이래 근대적 주체 내지 자아의 허구성에 대한 고발과 그것을 해체하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 점차 타자의 문제는 현대철학자들에 의해 독립적 주제로 조명되기 시작한다. 가령 정치철학적인 테마로서 광인 내지 비정상성을 고찰한 푸코의 시도나 정신분석적 테마로서 인간의 욕망구조와 결부된 대타자 개념을 제안하는 라캉의 작업은 상이한 맥락에서이지만 타자성을 중심에 두는 현대철학의 사유를 예화한다. 무엇보다 타자의 문제가 철학의 장에서 확고한 지위를 얻게 된 것은 레비나스의 기여일 텐데, 그가 제1철학이라고 명명한 윤리학의 중심에 있는 것이 타자라는 화두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간의 주체 내지 동일성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온 서양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명명하고 그 역사를 유한책임의 역사로 진단한다. 상호등가성에 입각한 타자에 대한 유한 책임의 한계를 지적함으로써, 그는 주체를 주체이게 하는 것은 오직 타자에 대한 무한책임일 것이라고 호소한다. 데리다가 후에 조건적 환대의 대개념으로 무조건적 환대 개념을 제안하게 되는 것 역시 이러한 레비나스의 문제의식의 연장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레비나스가 제안하는 무한한 책임을 실행하는 주체의 반대편에는 고통받는 얼굴의 타자가 있다.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타자는 결코 온전히 해명 될 수 없는 이해불가능한 대상일 뿐 아니라, 오직 그러한 포섭불가능성으로 인해 그를 대면하는 자가 윤리적 주체로 정립될 수 있음을 가정한다. 그렇기에 주체에게 타자를 향한 끝없는 책임 속으로 자신을 끌어내리는 노력이 요구된다면, 타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오직 그러한 주체를 자각시킬 만큼 충분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는 일 뿐이다. 그렇게 고통받는 얼굴로 지각되고, 그러한 상태에 머무를 때만 마주한 편에서 윤리적 주체가 탄생한다. 이 지점에서 레비나스의 윤리학은 일종의 아이러니를 발생시킨다. 타자를 향한 주체의 무한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타자는 결코 스스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내지는 벗어나서는 안 된다는 난점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타자는 고통받는 얼굴을 지을 때만 윤리적 주체를 정립시킬 수 있기에, 도움을 바랄 수 있을 뿐, 스스로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연 타자를 향한 깊은 연민의 정이 무한한 책임으로까지 고양되고, 그것이 한 개인을 비로소 윤리적 주체로 성장시키는 도야의 과정이라고 하더라고, 그를 위해 벗어날 길 없는 고통을 강요받는 타자의 문제가 가벼운 것일 수 있을까? 주체철학에 대한 비판에서 출발하면서도 결국 다시금 주체정립의 문제로 회귀하는 레비나스의 윤리학 안에서 이에 대한 답을 구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2부 3장에서 다뤄지는 니체의 ‘동정(Mitleid)’ 분석은 이처럼 동정 내지 연민에 토대하는 현대의 윤리학이 마주할 수밖에 한계를 아주 상이한 방향에서 다룬다는 점에서 유의미하다. 니체는 현대의 덕으로 격려되는 동정의 배후에 자리한 위험성을 알린다. 동정이란 고통에 처한 자에게 느끼는 연민의 정이고, 이는 도움이라는 베풂을 낳는다. 그 행위의 결과 동정을 행하는 주체는 행복을 느낀다. 그러나 동정 받는 자들의 측면에서 그것은 수치심을 안긴다. 그로써 그들의 마음속에는 감사 대신 복수심이 자란다. 니체가 동정에서 충분히 위협적인 면을 발견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타자를 무한하게 책임지고 섬기기에 지고한 윤리적 주체로 나아가는 레비나스의 윤리학에서 결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동정과 시혜의 대상인 타자의 시선이고, 동정을 받는 자의 신체에 그것이 일으킬 효과일 것이다. 그것은 감사이기보다 수치심이고 결국 그로써 고통받는 자는 더없이 큰 자로 성장할 모든 기회를 잃고 더욱 왜소해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주체의 윤리학은 간과했던 것이 아닐까. 동정에 의한 일말의 행동들이 도움을 구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다는 점을 간과한 채, 그들을 ‘빨간 뺨을 가진 짐승’이 되도록 만들고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한 채, 자신의 베풂 자체에 만족하고 있다면, 수치심을 느껴야 할 자는 오히려 도움을 받는 자들이 아니라, 그들을 돕고 있는 자가 아닐까?

니체가 오히려 ‘고귀한 자는 고통 받는 모든 사람 앞에서 수치심을 느끼라고 자신에게 명령한다’고 말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도움을 베푸는 자가 타자의 고통에 시선을 빼앗겨 동정에 골몰할 때, 그는 동정받는 자의 자존심에 동정이라는 칼날이 만드는 생채기를 보지 못한다. 그렇기에 타자에게 그러한 상처를 입혔다는 데 대한 부끄러움,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수치심도 알지 못한다. 니체가 우려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타자에게 동정이 새기는 상처와 그로써 각인되는 수치심을 충분히 고찰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화이다. 그것은 복수심을 키우고, 양심의 가책이 부추기는 앙갚음과 책망에 의해 도와준 이를 집어삼켜버린다. 그것은 온몸을 기어다니는 작은 진균과 같은 하찮은 것이기에 질병으로 터져나오지 않지만, 종국에 우리 신체는 그 작은 진균 때문에 썩어 문드러지고 시든다.

그렇다면 타자의 고통을 대면하는 우리의 자세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들의 고통의 휴식처가 된다는 것, 그에게 어떤 베풂을 행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어야 할까. 그것은 아주 잠깐의 휴식, 그로써 스스로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작은 계기의 제공이어야 할 것이라고 니체는 말한다. 고통받는 친구에게 다만 딱딱한 야전 침대가 되라는 그의 권고는 이를 함의한다. 그것이 병들고 지친 자에게 가혹한 처사일지라도, 그 불편한 안식처는 쓰러진 자를 제 발로 일어서게 하고, 고통에서 벗어날 의지를 자기 안에서 확보하도록 독려한다. 그로써 니체는 고통받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 베풂을 받는 자와 주는 자라는 기존의 관계를 전복시키고, 자신이 직면한 고통에 스스로 맞서고 극복하는 독립적인 주체들간의 관계로 나아간다. 그가 고통을 함께한다는 의미에서의 ‘동정(Mitlied)’ 대신 ‘동락(Mịtfreude)’을 제안하는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독립적인 개인들간의 우정이란 종국에 고통을 함께함이 아니라 기쁨을 함께함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함께 삶의 문제를 고찰하는 니체식의 윤리학, 타자의 윤리학을 대체하는 일종의 공생의 윤리학이 아닐까.

더불어 우리는 동정이 덕으로 칭송되기에 갖고 있는 위험성을 다시 주체의 편에서 조명해볼 수도 있다. 관련하여 들뢰즈가 『니체와 철학』에서 동정이 어떻게 세 종류의 허무주의(부정적, 반동적, 수동적 허무주의)로 나아가게 되는지 분석하는 부분은 이러한 동정의 위험성을 보다 강하게 부각시킨다는 점에서 참조할 만하다.

들뢰즈는 『니체와 철학』, ‘5장 초인: 변증법에 반대해서’의 ‘2절 연민의 분석’에서 ‘연민이란 영(zero)에 근접하는 삶의 상태에 대한 관용’이라고 말한다. 연민은 분명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약하고 병들고 반동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동정은 분명 베풂을 행하고 선한 자가 되려는 삶에 대한 사랑이지만, 고통받는 자에 대한 연민, 하찮고 무능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기에 약하고 병듦에 대한 사랑이다. 또한 그것은 자신 안의 의지가 추동시키는 능동적(active)인 힘에의 의지가 발현시키는 삶에 대한 관심이기보다, 고통받는 타자처럼 외부의 것들에 의해 추동되는 반동적(active)인 힘에의 의지에 끄달리는 이들에 대한 사랑이라는 점에서 반동적인 삶에 대한 사랑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가난한 자들, 고통받는 자들, 무능한 자들, 하찮은 자들의 최종 승리를 예고’하면서, ‘삶 속에서 능동적인 모든 것을 증오하고, 삶을 부정하고 비하’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 지점에서 들뢰즈는 ‘니체에게 연민은 항상 무의 의지와 반동적 힘들의 복합체’라고 진단한다. 무의 의지란 무(無)를 향한 의지, 멜빌 소설의 주인공 필경사 바틀비처럼 어떤 것에도 부정으로 응답함으로써 하지 않음 자체를 향하는 의지이다. 연민이 가난과 고통, 무능과 하찮음에 공감하고 그에 반동적으로 이끌려 갈 때, 그것은 모든 능동적인 것에 대한 부정이 되고, 어떤 것도 하지 않음으로 의지를 추동시키는 무를 향한 의지와 일종의 복합체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6장에 등장하는 신이 죽었기에 실직한 성직자가 전하는 신이 죽은 여러 이유 중 하나, ‘신은 연민으로 질식했다’는 말은 이러한 사태에 부합한다. 상승하고 고양되려는 모든 적극적인 의지를 부정하고 그에 반하는 고통과 가난, 무능과 하찮음에 진심어린 동정으로 응답할 때, 그를 안내한 것은 반동적인 것과 무의 의지의 복합체에 의한 질식사였던 셈이다. 들뢰즈는 이를 부정적 허무주의라고 일컫는다.

이어 4부 7장에 등장하는 ‘더 없이 추악한 자’는 신의 동정을 견디지 못하고 신을 살해한 자이다. 그는 자신의 가장 더러운 구석까지 기어들어와 자신의 치욕과 추악함을 들여다보고 동정하는 수치심 없는 신의 연민을 견딜 수 없었기에 신을 살해한다. 그것은 신에 대한 가장 큰 혐오가 불러온 살인, 그렇기에 ‘우월한 가치들보다는 오히려 전혀 가치가 아닌 것에까지’ 하락하는 의지, 이제 ‘의지가 아닌 것인 의지의 무’라는 점에서 하지 않음이라는 형식으로서 무라는 대상이지라도 어떤 대상을 가졌던 ‘무를 향한 의지’와는 구별되는, 의지없음인 ‘의지의 무’로 빠져든다. 차라투스트라는 그를 보다 높은 자로 치하하고, 자신의 동굴로 초대하지만, 들뢰즈가 그럼에도 그를 ‘큰 무기력의 예고자’라고 해석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들뢰즈는 이를 반동적 허무주의라고 지칭한다.

마지막으로 들뢰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에 등장하는 최후의 인간을 이 신의 살해자의 자손으로 해석한다. 모두가 똑같은 것을 원하고, 그렇기에 모두가 똑같고, 가난해지지도 부유해지지도 않으며, 누구도 지배하길 바라지 않는 그들은 니체의 눈에 ‘전혀 의지도 아닌 것, 오히려 단 한 무리’일 뿐인 것, 고통스럽기 그지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들뢰즈는 이들이 드러내는 것이 모든 의지를 제거해버리고, 전혀 의지도 아닌 상태로 전락한 허무주의, 수동적 허무주의라고 말한다.

이상의 세 인물-신, 신의 살해자, 최후의 인간-로 극화된 유형은 각각 부정적 허무주의가 어떻게 반동적 허무주의로, 다시 수동적 허무주의로 전락하게 되는지를 예고한다. 즉 모든 비천한 것들에 대한 더없는 동정에 전념한 신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데까지 갔다는 점에서 부정적 허무주의를 드러내고, 그를 살해한 더 없이 추악한 자는 신의 수치심을 느끼지 못하는 연민에 비명을 지르고 살해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반동적 허무주의를 가시화하며, 그러한 고통조차 느끼지 못하고, 모든 부정과 고통을 그 자체로 부정하고 의지 자체를 절단시킨 최후의 인간은 수동적 허무주의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들뢰즈는 연민이라는 삶의 가장 저점의 상태로 추락하는 상태에 대한 공감과 연민의 태도를 ‘극도로 지친 삶’이라고 진단하고, 그로써 그것은 ‘자신을 능가하는 의지에 의해서 생기를 얻기보다는 오히려 수동적으로 꺼지듯 소멸하기를 바라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동정 받는 자에게 안기는 수치심이라는 상처, 그로써 그의 마음속에서 자라날 앙갚음과 복수심, 그 매서운 이빨로 물어뜯길 주체에 자리한 자를 향한 니체의 경고에 덧붙이는 그의 또 다른 경고이다. 동정과 연민으로서 타자로 나아가고 베풀고자 하는 주체에게 있을 화, 그것은 타자에게 물어뜯기기 전에 이미 스스로 세 종류의 허무주의 혹은 그 이상의 수많은 허무주의에 의해 스스로 진균이 되어 제 몸을 갉아먹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해 종국에 썩어 문드러질 위기에 처한 자들을 향한 경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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