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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왜.끊.곁 7주차 후기

시체 2021.03.07 13:39 조회 수 : 135

5장 「도덕의 자연사」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논의되었습니다.

 

1. 도덕 감각과 도덕학 & 도덕의 정초(186절)

 

오늘날 유럽에서의 도덕 감각은 섬세하고 노숙하며 다양하고 민감하며 세련되었는데 그에 속하는 ‘도덕학’은 아직 젊고 미숙하며 서툴고 조야하다 : ―이것은 흥미진진한 대조이며, 가끔 도덕주의자의 인성 자체에서 볼 수 있고 구현된다. ‘도덕학’이라는 용어는 그 용어로 표현되는 것을 고려할 때, 이미 너무나도 불손하며 좋은 취미에 거슬리는 것이다.

 

‘도덕 감각’이라는 용어가 ‘도덕학’과 어떻게 관계되는지를 둘러싸고 의견이 분분했는데, 논의에서 얻은 힌트를 바탕으로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섬세하고 민감한 ‘도덕 감각’을 지녔다고 자부하는 오늘날의 (도덕)철학자에게 있어 ‘도덕학’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거슬리는 용어입니다. 도덕은 그저 ‘주어진 것’으로, 까다롭고 엄숙하게 추구하기 위한 것이지 낱낱이 파헤쳐 기술(記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그들은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좀 더 겸손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민족, 시대,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서 자료를 수집하고, 어떤 가치들이 반복되고 있으며 그 가치 간의 차이는 무엇인지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정리해야 합니다. 도덕의 본래 문제들은 도덕 감각에만 의존해서는 절대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많은 도덕들을 비교함으로써 도덕의 유형학(도덕학)을 마련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도덕)철학자들은 도덕을 정초하기(도덕의 기초를 닦음)를 원했으며 정초했다고 믿어 왔으나, 사실상 그들이 말하는 ‘도덕의 정초’라는 것은 현재 유행하는 도덕에 대한 훌륭한 믿음의 현학적인 한 형식에 지나지 않으며, 그 믿음을 검토하고 분석하고 의심하고 해부하는 것과는 반대선상에 있습니다.

 

2.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 할지라도 사실은 매일 식후 플루트를 불었다 & 도덕 앞에서 멈추어 서는 신과 세계를 부정하는 자(186절)

 

“그 누구도 해치지 말고, 가능한 많은 사람을 도와라―이것이야말로 진정 모든 윤리학자가 정초하려고 노력하는 명제다…… 이것이야말로 수천 년 동안 현자의 돌처럼 사람들이 찾았던 윤리학의 진정한 초석이다.” (중략) 힘에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이 세계 속에서 이 명제가 얼마나 무미건조한 거짓이고 감상적인지를 한번 절실하게 느낀 사람은,―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라 할지라도, 사실은―매일 식후 플루트를 불었다는 사실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 이에 대해서는 그의 전기를 읽어보라. 그런데 잠시 물어보자 : 염세주의자가, 도덕 앞에서 멈추어 서는 신과 세계를 부정하는 자가―도덕을, 아무도 해치지 않는 도덕을 긍정하고 플루트를 불고 있는가?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이것이 정말로 염세주의자란 말인가?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인간은 생존하려는 본능에 따라 맹목적인 생존 의지를 가지고 살아갈 뿐인 존재입니다. 삶을 단조롭고 고되게 만드는 그러한 의지의 압도적인 힘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은 윤리학과 미학 속에 있습니다. 물론 의지의 힘이 너무 강하여 그 어떤 도피도 단지 일시적인 위안에 그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한 쇼펜하우어조차 매일 식후에 플루트를 불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고 니체는 비판합니다. 어떻게 염세주의자가 도덕을 긍정하고 플루트를 불고 있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은 솔직히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특히 ‘아무도 해치지 않는 도덕’이라는 구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염세주의자이면서 나날의 루틴에 따라 의욕적으로 살았다는 점을 꼬집고 싶은 걸까 막연하게 추측할 따름입니다. 참고로 자살을 예찬했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 72세에 폐렴 증상을 보이며 자택에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논란이 되었던 문장 ‘염세주의자가, 도덕 앞에서 멈추어 서는 신과 세계를 부정하는 자가’는 원문을 참고한 결과

염세주의자

=도덕 앞에서 멈추어 서는 자

=신과 세계를 부정하는 자

로 읽어야 한다는 데 모두가 동의했습니다. 번역문만 봐서는 쉼표가 찍혀 있지 않아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있었습니다.

 

3. 인간의 차이는 어디에서 나타나는가(194절)

 

인간의 차이는 그들이 지닌 재산목록의 차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중략)―그것은 오히려 그들이 무엇을 재산의 진정한 소유이며 점유로 여기는가에서 나타난다.

 

이 절에서 니체는 어떤 경우에 재산을 진정으로 소유했다고 느끼는지는 인간의 유형별로 다르다고 말하며 여성을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①유형은 여성의 육체를 마음대로 하고 성적으로 향유할 수 있을 경우, ②유형은 여성의 육체뿐만 아니라 그녀가 갖고 있거나 갖고 싶어 하는 것까지도 취할 수 있을 경우, ③유형은 여성이 그의 친절, 인내뿐만 아니라 사악함, 탐욕까지 사랑해 주는 경우에 해당 여성을 진정으로 소유했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에 더해 니체는 더욱 섬세한 소유욕을 지닌 인간 유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러한 유형은 타인(빈곤한 사람)을 마치 소유물 다루듯이 마음대로 취급합니다. 그 타인은 도움을 필요로 하여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그에게 감사하고 복종할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이 ④유형의 예로는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는 부모를 떠올리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나아가 교사, 성직자 등도 새로운 인간을 접할 때 새로운 소유의 기회가 찾아왔다고 생각합니다.

 

4.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 & 노예(199절)

 

인간이 존재하는 한, 어느 시대든지 무리를 이룬 인간 집단 역시 존재했으며(씨족 연합, 공동체, 부족, 민족, 국가, 교회), 언제나 소수의 명령하는 자에 비해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즉 복종이란 지금까지 인간들 사이에서 가장 잘 그리고 오랫동안 훈련되고 훈육되어왔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제 당연히 각 개인은 평균적으로 일종의 형식적인 양심으로, “너는 어떤 것을 무조건 해야만 하고, 또 어떤 것을 무조건 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하는 것, 즉 간단히 말하자면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그러한 욕구를 타고 났다고 전제해도 좋을 것이다.

 

‘소수의 명령하는 자에 비해 복종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와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는 그러한 욕구를 타고 났다고 전제해도 좋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일견 상충되어 보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문장에서 ‘명령’은 ‘복종’으로 치환하여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대다수가 복종에 익숙한 무리 사회에서 각 개인은 복종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너는 해야만 한다’고 명령하며,이는 곧 복종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노예나 마찬가지인 존재입니다.

물론 여기서 스스로의 명령에 복종한다는 것이 개인이 힘에의 의지를 가졌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외부의 복종에 맹목적으로 따르도록 훈련되고 훈육된 상태를 니체가 비아냥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복종이라는 무리의 본능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마침내 무리 안에는 명령하는 자가 사라지고, 노예 상태의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며 스스로를 기만하게 됩니다. 이를 가리켜 니체는 명령하는 자들의 도덕적 위선이라고 말합니다. 제게 있어서 ‘양심의 가책’이니 ‘도덕적 위선’이니 하는 표현은 여전히 딱 와닿지 않지만, 어째서 약자를 노예라고 하는지는 이제 이해가 갑니다.

 

6장 「우리 학자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이 논의되었습니다.

 

5. 비판가와 회의론자(210절)

 

후대인들은 적어도 비판가를 회의론자와 구별하는 저 진지하나 우려할 만한 여러 속성들을 빼놓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치 척도의 확실성, 의식적으로 통일된 방법을 사용하는 것, 기지 있는 용기, 독립성과 자기 책임 능력 등이다.

 

여기서는 과연 니체가 비판가를 회의론자와 마찬가지로 보는지, 좀 더 나은 존재로 보는지, 아니면 미래의 철학자과 동급으로 보는지가 논의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알 수 있듯이 비판가란 가치 척도의 확실성을 가졌으며 의식적으로 통일된 방법을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또한 자신을 ‘고양’시키거나 ‘감격’시키기 위해 진리와 관계를 맺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감정을 좌지우지하는 사상과 작품에 냉소를 보냅니다. 이로써 비판가는 니체가 추구하는 ‘강자(스스로의 의지로 스스로를 고양시키는 자)’와는 명백히 다른 존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로운 철학자들은 비판가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게 될 것입니다.

 

비판가들은 철학자의 도구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직 철학자 자체가 아니라, 도구일 뿐이다!

 

종합하자면, 비판가는 확실히 회의론자와는 구별되면서도 아직 미래의 철학자에는 못 미치는 존재입니다. 비판가는 단지 도구일 뿐입니다.

 

6. 진정한 철학자가 되려면 비판가 단계를 거쳐야 한다?(211절)

 

진정한 철학자가 키워지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에게 종사하는 철학의 학문적인 노동자들이 머무르고,―머무를 수밖에 없는 이러한 모든 단계에 그 스스로도 한번은 머문 적이 있었다는 것이리라. (중략) 아마도 그 스스로 비판가이며 회의론자이고 독단주의자이며 역사가이고, 그 외에 시인이며 수집가이고 여행가이며 수수께끼를 푸는 자이며 도덕가이고 예견하는 자이며 ‘자유정신’이며 거의 모든 유형의 인간이어야만 했을 것이다.

 

철학자가 되는 데에 단계가 있어서 그것을 차례로 밟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단지 철학자는 천의 얼굴을 가졌으며 천의 길을 가는 존재임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나가 될 수 있는 자,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이것을 정확히 이해하려면 ‘천의 얼굴, 천의 길’에 대한 더 깊은 설명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7. 경험으로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함에 긍지를 가져야만 한다고?(213절)

 

철학자가 하는 것은 가르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우기가 나쁘다. :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으로 ‘알아야’ 한다.―또는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긍지를 가져야만 한다.

 

사상가와 학자는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통속적인 견해만을 갖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유’란 완만한 것이며 진지하게 생각하는 것이라고밖에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들은 오로지 이런 식으로만 사유를 ‘체험’해 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유는 가볍고 들뜬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반면 예술가는 사상가, 학자보다 더 예민한 후각을 가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자의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필연적으로 행할 때 감정이 절정에 달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것이 과연 긍지까지 가질 일인지는 의문입니다. 경험하여 알기는 지극히 힘든 일이므로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오히려 알지 못함을 안다는 것에 긍지를 가져라,라는 뜻일까요.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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