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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의 맥락을 중심으로 잘 요약된 후기입니다. 지난 토론을 복습하기에 좋은 자료입니다! 잘 읽었어요, 경희샘^^ ㅎㅎ 

지난 세미나에 가장 흥미로웠던 주제가 '확신과 거짓'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니체는 '확신에 대한 퍼스펙트브'를 통해, 사물과 사건 일반에 대한 자신의 방법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서 확신은 신념 혹은 강한 믿음을 의미하는 태도입니다. 

 

1. 확신과 거짓에 관한 전제들 

[1-1] 순교는 진리-옳바름의 논거인가? 확신이 거짓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수일 수 있다! #53

확신과 믿음의 심리학에서, "순교라는 행위가 자신이 옳바르다는(자신이 진리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증명하는가?"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순교는 어떤 사태의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순교를 '자기가-참으로(*옳다고)-간주하는 것을 세상에 대놓고 말해대는' 행위라고 비판합니다. 여기에는 저급한 지적 성실성(자기 견해의 설득력을 강화하여 다른 사람을 설득시키려는 성실성이 없다는 점에서)과 진리에 대한 둔감함(자신이 가진 하나의 진리만을 확신한다는 점에서)이 표현되어 있다는 거지요. "진리란 누군가는 가졌을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갖지 않고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고 진리에 대한 태도를 지적합니다. 
니체에게는 단 하나의 진리TRUTH가 아니라 다수의 진리들truths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다른 진리들에 대한 시도를 제거한다는 의미에서, "순교자는 진리에 해를 입혔다."고 합니다.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483에서 "진리의 적들 -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진리의 편에 두고, 타인을 오류로 간주하기 때문이고, 이런 방식은 독단에 빠지기 쉽고, 다수의 진리들을 불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1-2] 거짓과 확신은 구별가능한가? 혹은 거짓과 확신은 대립관계인가? #55

니체는 이번에는 결정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싶다고 합니다. “거짓과 확신은 정녕 대립관계인가?” 물론 우리는 세상의 통념, 다수의 견해를 근거로 우리의 확신을 주장하지만, 니체는 그것이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하지요. "세상이 그렇게 온 세상이 그렇게 믿고 있다. 하지만 온 세상이 무엇은 믿지 않는다는 말인가!" 이어서 '거짓(실책)이 어떻게 확신이 되는가'의 계보를 말합니다. "모든 확신은 나름의 역사와 나름의 시험적 모습과 실책을 갖고 있다. 오랫동안 확신이 아니었던 시기 이후에, 확신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했던 더 오랜 시기를 거친 다음에, 그것은 확신이 된다. 아버지에게 거짓이었던 것이, 아들에게서는 확신이 된다."
니체는 '보이는 것을 보려하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보려하지 않는 것'을 거짓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가장 습관적인 거짓이 자신을 속이는 거짓이며, 타인을 속이는 것은 예외적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보이는 것을 보려-하지-않는 것, 보이는 그대로-보려-하지-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든 모든 당파적인 자들의 제1조건이다." 정치적 논쟁을 보면, 당파적 입장에 선 정치인들이 얼마나 거짓에 능한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보는 것을 그들은 보지 않거나 다르게 보고 있다는 점에서요. 사실 진정한 사기꾼은 자기자신을 속이는 자이며, 자신이 그렇게 믿지 않고서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믿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국 니체는 묻습니다. "이런 확신과 거짓말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2. 확신에 대한 퍼스펙티브(관점) 

니체는 확신에 관한 이런 전제를 바탕으로, 우리에게 확신에 대한 3가지 퍼스펙티브를 제시합니다. 확신 / 확신으로부터의 자유 / 수단으로서의 확신. 그리고 우리의 태도를 묻습니다.

[2-1] 확신하는 자: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54

(믿음은 탈아와 자기소외의 표현) "믿음에 대한 욕구, 무조건적인 긍정과 부정에의 욕구는 약한 힘의 욕구이다. 믿음을 가진 자, 온갖 ‘신앙을 가진 자’는 필연적으로 의존적인 사람이다. 자신을 목적으로 설정하지 않고, 더욱이 자발적으로는 목적을 도대체가 설정할 수 없는 자들이다. ‘믿는 자’는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다. 그는 단지 수단일 뿐이며, 사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그를 사용할 누군가를 그는 필요로 한다. 그의 본능은 탈아Entselbstung의 도덕에 최고의 명예를 부여한다. 모든 종류의 믿음은 그 자체로 탈아의 표현이고 자기소외의 표현이다."

니체는 '믿음에 대한 욕구는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부정하려고 하는 욕구'라고 말하며, 이는 '약한 힘의 욕구'라고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물과 사건에 대해 무조건적으로 긍정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부정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니체의 지적은 간단히 넘어갈 수 없지요! 확신은 약한 힘의 요구이므로, 우리의 '힘에의 의지'가 약할 때, 우리는 필연적으로 확신을 찾게 되고 확신에 의존하려고 합니다. 따라서 확신하는 자는 다른 것에 의존적인 탈아이며, 자신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수단이며, 자기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자기소외의 존재입니다. 

(확신하는 자는 진리의 반대자이자 적대자) "대다수 사람에게 그들을 묶고 고정시키는 외부규정이 얼마나 필요한지, 그리고 강압이나 고차적 의미의 노예제가 어떻게 의지박약의 인간을 번성시키는 조건인지를 생각해보면, 확신이라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된다. 확신하는 인간에게 확신은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다. 많은 것을 보지 않고, 어느 것에도 공평하지 않고 철저히 편파적이며, 모든 가치를 필요한 시각으로 보는 것만이, 확신하는 인간을 존재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진실한 인간의 반대이자 적대자이고, 진리의 반대이자 적대자이다. 믿는 자는 ‘참’과 ‘거짓’이라는 문제에 대한 양심을 자기 마음대로 가질 수 없는 법이다. 이때 정직하면 그는 즉시 몰락해버릴 것이다. 확신하는 자의 시각의 병적 제약성은 그를 광신자로 만든다. 강하고 자유롭게 된 정신의 반대유형으로 만든다. 이런 병든 정신들의 거창한 태도는 많은 대중에게 효력을 발휘한다. 광신자들은 그림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인간은 근거를 듣기보다 체스처 보기를 더 좋아한다."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묶고 고정시키는 외부규정이 필요하며, 이러한 강압은 다시 의지박약의 인간을 번성시킵니다. 확신하는 인간에게 확신은 그를 지탱해주는 기둥이며,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보려는 '정직'은 그를 몰락시킵니다. 따라서 많은 것을 보지 않고, 어느 것에도 공평하지 않고 철저히 편파적인 것이 확신하는 자의 존재조건입니다. 이렇게 해서 확신하는 자는 진리의 적대자가 됩니다. 

[2-2] 회의주의자: 우리는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54

"위대한 정신들은 회의주의자다, 차라투스트라는 회의주의자다. 정신의 강력함에서 (정신의 힘과 힘의 넘침에서) 나오는 자유는 회의를 통해 입증된다. 확신하는 인간은 가치/무가치의 문제에서 근본적인 것을 고려하지 못한다. 확신(*≒독단)은 감옥인데, 충분히 넓게 보지 않고 발아래를 보지 않는다. 하지만 가치/무가치에 대해 말참견할 수 있으려면, 오백가지 확신들을 자기 발아래 굽어보아야 하며 자기 뒤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위대한 것과 그것을 위한 수단을 원하는 정신은 필연적으로 회의주의자다. 온갖 종류의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자유롭게-볼-수 있는 강한 힘에 속한다."

니체는 확신이 약한 힘의 욕구라면, 반대로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강한 힘에 속한다고 합니다. 즉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정신의 강력함에서 나오며, 위대한 정신은 회의주의자입니다. 확신이 감옥이어서 넓게 보거나 발아래를 보지 않는다면, 확신으로부터의 자유는 확신들을 발아래 굽어보거나 자기뒤에 있는 것으로 봅니다.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울 때, 우리는 가치와 무가치의 문제를 다룰 수 있게 됩니다.

[2-3] 위대한 열정: 우리는 확신을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가? #54

"그(*회의주의자)라는 존재의 근거이자 힘인 위대한 열정은 그 자신보다 훨씬 더 계몽되고 훨씬 더 오만하다. 그의 열정은 그라는 존재의 지성을 자신에게 봉사시키며, 대담하게 만들고 지성에게 신성하지 못한 수단마저 사용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경우에 따라서는 확신을 허용해준다. 수단으로서의 확신: 많은 것이 확신을 수단으로 해서만 달성된다. 위대한 열정은 확신을 사용하지만, 확신에 굴복하지는 않는다. 위대한 열정은 자신이 주권자임을 알고 있다."

이제 회의주의자보다 훨씬 더 오만해진 위대한 열정은 확신으로부터 회의를 넘어 확신을 허용합니다. 위대한 열정은 지성을 자신에 봉사시켜, 지성에게 신성하지 못한 수단인 확신을 사용할 용기를 줍니다. 위대한 열정은 주권자로서 확신을 수단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확신을 사용하지만 확신에 굴복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단으로서의 확신'입니다. 우리는 왜 확신을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가? 그것은 우리 삶에 있어서 많은 것이 확신을 수단으로 해서만 달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확신이라는 약자의 감정에서 '독단'이라는 성격만 걷어내면, 확신은 우리가 어떤 일을 수행하는데 강력한 추진력으로 작동할 것이며 아름다운 열정으로 꽃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니체는 확신을 허용하는 것처럼 거짓도 수단으로서 허용합니다. (#56)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는가가 결국 문제인 것이다." (#58) "실제로 어떤 목적으로 거짓말하는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유지하려고 거짓말하는가, 아니면 파괴하려고 거짓말하는가에 따라서. 이 점에서 그리스도교인과 아타키스트는 완전히 같다. 그들의 목적과 그들의 본능은 오로지 파괴로만 향한다." 이렇게 확신과 거짓을 수단으로 활용할 때, 확신/거짓의 가치는 구별불가능해 질 것이며, 확신/거짓의 경계는 의미를 잃어버릴 것입니다.

 

3. 니체적 퍼스펙티브의 일반성

[3-1] 약자적 - 강자적 - 위버멘쉬적 퍼스펙티브

먼저 우리는 '확신'을 가져야 하는가? 이 물음은 '확신'이라는 지배적 가치에 복종하는 약자적 퍼스펙티브(시대성)에 대한 비판입니다. 

다음 우리는 '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가? 이 물음은 지배적 가치와 대결하는 강자적 퍼스펙티브(반시대성)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확신을  수단으로 활용'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지배적 가치를 넘어서는 위버멘쉬적 퍼스펙티브(비시대성)를 지향합니다.

[3-2] 니체적 퍼스펙티브의 방법론적 일반성

우리는 여기에 '확신'이라는 가치 대신, '돈, 권력, 동정' 같은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를 넣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 돈, 권력, 동정' 같은 시대의 지배가치에 복종해서는 안되며, 이것으로부터 거리를 확보하고 자유로워져야 할 것입니다(거리의 파토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추지 말고, 이러한 지배가치를 넘어 그로부터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주권자로서 그것을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며, 그것을 사용하지만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수단으로서의 확신, 수단으로서의 돈, 수단으로서의 권력, 수단으로서의 N...'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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