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_시즌5] 권력의지 :: 에세이 프로포절 공동작업
[1] 권력의지: 에세이일정
2020-0810(월) 에세이 프로포절
2020-0817(월) 에세이 초안
2020-0824(월) 에세이 발표
[2] 권력의지: 에세이프로포절
자기애와 운명애를 위한 교육 :: 해
니체의 시각에서 본 장애인 :: 이슬기
우리에게는 새로운 지위가 필요하다 :: 박순영
니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성의 재조명 : 재연
니체, 너로 정했다 :: 이경빈
'세포들의 귀족정치'에서 발생하는 비인칭적 의지(욕망) :: 다비
그림책을 찾는 어른들과 니체의 [권력의지] :: 김지수
혼란한 세상을 사는 약자에게 니체 아포리즘 :: 신현욱
내가 되기 위한 몸부림, 니체 철학 :: 너구리
[3] 에세이프로포절: 공동작업
- 에세이 필자는 : '댓글'로 에세이 프로포절을 올린다.
- 다른 사람들은 : '댓글에 대한 댓글' 형식으로 코멘트를 달아준다.
- 프로포절 제출 : 어제 프로포절를 제출하신 해, 이슬기, 박순영샘도 아래 댓글로 올려주세요. ^.^
- 프로포절 준비 : 프로포절 준비 중인 다른 회원들도 최소한 '제목과 문제의식'을 올려주세요. ^0^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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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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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서론에 필요한 ::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스케치!
- 슬기샘이 이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동기같은 것이 있을까요?
- 혹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슬기샘의 글에 집중하게 하는 토픽같은 것이 있을까요?
1. 장애문제를 접근하는 개념 :: 약자/소수자
- 강자/약자보다, 소수자/약자로 접근해보면 어떨까요? ex. 장애인은 약자인가, 소수자인가?
-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 :: (1) 대체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같이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경우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는 '신체적 문화적 특징으로 인해 사회의 주류집단으로부터 차별받는 존재'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주류집단에 대한 하부집단의 관계로서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남성과 여성, 백인과 흑인, 정상인과 장애인, 이성애자와 동성애자... (2) 한편,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다르게 보는 경우, 같은 대상이지만 다른 퍼스펙티브를 갖게 됩니다. 사회적 약자의 경우, 우리는 '배려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그러나 소수자는 '다수자에 대항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자'입니다. 이 경우 장애인은 더이상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변화의 주체가 될 것입니다.
2. 흑인의 경우 :: 배려의 대상인가, 변화의 주체인가
예를 들어 흑인에 대해서라면 이런 문제설정이 가능할 것입니다. 흑인은 '배려의 대상'인가, '생성의 주체'인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2주체를 상정할 수 있습니다. 흑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과, 흑인 스스로의 관점 말입니다. (1) 먼저, 우리는 '흑인을 배려의 대상으로 볼 것인가, 생성의 주체로 볼 것인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흑인은 차별당하는 불쌍한 존재인가, 아니면 백인 중심의 우리사회에 문제를 던지고, 우리신체에 새로운 감각을 깨우는 존재인가 하는 물음입니다. 전자의 관점이 흑인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차이의 인정'이라면, 후자는 흑인의 존재로부터 새로운 생성을 보는 '차이의 긍정'일 것입니다! (2) 다음, 흑인 가운데서도 스스로를 '배려의 대상'이라는 규정을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이러한 존재규정을 거부하고 차별에 저항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나아가 흑인의 신체성이 가지는 다른 감각으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니체는 각각의 존재를 '낙타적 복종'과 '사자적 저항', 그리고 '어린아이의 생성'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모든 흑인이 사회적 약자도 아닐 것이며, 소수자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흑인도 흑인-되기가 필요할 것입니다. 흑인의 신체로 태어난 사람이 '존재론적 흑인'이라면, 흑인-되기의 과정을 통해 구성되는 사람이 '구성적 흑인'일 것입니다.
3. 이 주제에 관한 참고자료
(1) 다수자와 소수자의 개념에 관하여 :: [니체_참고자료] 니체의 복수주의와 소수성 / 힘에의 의지 ...... [2] 다수자(무리, 약자)와 소수자(예외자, 강자)
http://www.nomadist.org/s104/B3_Planseminar_data/316273(2) 약자와 소수자의 존재론에 관하여 :: [MeToo사건과 위버멘쉬의 타자성] 중 '미시권력에 봉사하는 지배담론을 넘어'와 '매순간 나를 몰락시킬 타자를 기다리며!'
http://www.nomadist.org/s104/index.php?mid=G1_Webzine_column_phil&page=2&document_srl=165326(3) 장애의 존재론에 관하여 :: [불온한 것들의 존재론] 3장 장애자 존재, 장애의 그늘 속에 있는 것.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745765(4) 장애의 존재론에 관하여 :: [삶을 위한 철학수업] p34~39 신체교정의 꿈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7377123 -
해
“자기愛와 운명愛를 위한 교육” -교육에서 ‘평등’과 ‘정답’을 제거하기
서론(문제의식): 교육은 오로지 ‘나를 위한’, ‘진짜 내가 되기 위한’ 것이다.
① 맹목적 평등주의와 획일적 정답주의는 ‘진정성 있는’ 교육을 망치는 숨은 범인이다.
② 교육은 세속적 성공이나 진리 탐구를 위한 게 아니라 자기 극복을 위한 수단이다.
본론1: 평등주의와 정답주의라는 무리 동물에게 치명적인 유혹
① 평등주의, 모두가 똑같은 것을 배우고 똑같은 평가를 받아야만 공정하다.
→ 힘에의 의지의 차이, (가치의) 위계, 개인차를 부정한다.
② 정답주의, 오직 단 하나의 정답(진리)만 존재한다.
→ 관점주의, 신체성, 다양성, 고유성을 부정한다.
본론2: 동등한 강자들의 관계 맺음을 지향하고 다양한 세계를 긍정하는 교육
① 힘에의 의지를 자극하고 강화하는 교육
② 관점주의에 기반한 다양성을 긍정하는 교육
결론:
자기 자신과 자기의 세상을 파괴함으로써 새로운 자신과 세상을 창조하도록 하는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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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에서 :: 문제의식이 잘 드러나는 사건 (토픽이나 이미지)
- 이런 사건적 스케치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글에 집중하게 하는 효과를 줍니다. (슬기샘에게 말한 것처럼)
- 또 사건적 스케치는 에세이전개가 일반적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특정주제 중심으로 모아주는 역할을 합니다.
- 평등주의, 정답주의를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사례나 특이한 현상들 말이예요 ^^
2. 교육방식으로, 현재적 방식과 니체적 방식을 대비시키면 흥미로울 거 같습니다.
- 현재 교육이 인간을 길러내는 방식과 니체적 교육방식(특히 4권 훈련과 육성_1장 위계에서 말하는!)은 어떻게 다른가?
- 현재의 교육방식에서, '평등주의'를 통한 평균인의 생산이 교육의 목표라면, '정답주의'는 교육의 내용으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쨌거나 평등주의와 정답주의, 양자의 관계를 정리해보면 좋을 거 같습니다.) 반면 니체적 교육방식의 경우, '위계'를 통한 강자의 육성이 훈련의 목표라면, '힘에의 의지'는 훈련의 내용으로 말할 수 있겠지요. "힘의 크기만이 위계를 결정하고 위계를 구분한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위계의 결정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855)
3. 교육과 관련된 니체의 좋은 아포리즘을 몇개 소개합니다.
- "청소년을 부패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들보다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더 높은 존경을 표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침놀] #297
- "세상에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너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하나 있다. 그 길은 어디로 이어지는가? 묻지 말고 걸어라. 사람은 그의 길이 자신을 어디로 데려갈지 모를 때 가장 높이 분기한다." [반시대적 고찰3] 1장 p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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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성의 재조명
1. 서론
- 공공성의 역할과 필요성
- 문제의식 : 니체적 삶은 국가와 분리된 것인가? 국가는 니체적 삶을 부정하는가? 위험사회에서 공공성 담론은 필연적인데, 이러한 공공성은 니체적 삶에 어떻게 작동하는가?
- 니체는 모든 인간의 권력 의지가 제1의 원동력이고, 이 권력 의지에서 다른 모든 동기들이 나온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니체의 권력 의지를 인간의 기본적 욕구로 간주할 수 있겠다. 이 기본적 욕구는 어떻게 충족시키는가? 필자는 이 지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권력의지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면, 기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단도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즉, 기본적 욕구의 존재는 속해있는 집단이 어떤 것이든 그 집단(가족, 또래 집단, 동아리 등)으로 하여금 욕구 충족을 위한 일정 수준의 집단조직화와 복지제공을 요구하게 된다. 따라서 인간의 기본적 욕구, 권력의지의 극대화를 주창한다면, 집단의 사회적 평등의 요구에 귀기울이지 않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사회적 평등이란 무엇인가? 니체가 경계한, 모든 인간을 평균으로 수렴하려는 것과 사회적 평등은 구분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는 개인의 능동성과 자율성에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에 필자는 본 에세이에서 공동체주의적 공공성의 개념으로 니체적 삶의 가능성을 분석하고자 한다.
2. 본론
(1) 개념정리
- 복지이론과 공공성 개념정리 : 사회적 평등과 개인의 자유 / 공공성 정의
- [권력의지]의 주요 개념 정리 : 권력의지 / 영원회귀
(2) 공공성과 니체철학의 접점
- 공공성과 권력의지
- 공공성과 영원회귀
3. 결론
- 능동적 개인과 공공성
- 니체적 삶을 가능하게 하는 공공성의 방향성 제시
# 참고문헌
니체(2018). 권력의지. 부글.
백승영(2018). 니체, 철학적 정치를 말하다. 책세상.
김진석(2009). ‘니체는 왜 민주주의를 비판했는가’. 개마고원.
토니 피츠패트릭(2015). 사회복지사를 위한 정치사회학. 나눔의 집.
*워드에서 끌어오다보니 번호매김이 이상하게 되네요. 댓글로 수정도 안되어 그대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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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공성'이라는 주제의 특정화
복지의 공공성은 다소 제도적 문제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감각적으로 멀게 느껴지는 면이 있습니다. ㅎㅎ 먼저 재연샘이 주제로 삼는 '공공성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특정화한다면, 에세이를 쓰거나 읽는데 훨씬 도움이 될 거 같습니다. 사회적 공공성을 '인간의 기본욕구를 충족시킬 보편복지'로 이해한다면, 공공성 혹은 보편복지는 니체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요? 흥미로운 주제입니다. 이 경우에도 사회적 공공성을 제도적 차원에서 필요성을 말하려는 것인지, 사회적 약자의 관점에서 공공성확대를 위한 투쟁의 정당성을 말하는 것인지가 분명해져야 겠지요. ㅎㅎ 재연샘의 시선이 어디에 있는지 '퍼스펙티브의 위치'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ㅎㅎ 그리고 이 주제의 특성에 비추어, 가능하면 구체적인 예시로 접근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 주제의 특성을 전제한다면, 가능하면 재미있게 쓸 수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2. 공공성에 대한 2가지 관점
자칫, '공공성'을 인간의 최소한 기본욕구를 위한 것이고, '힘에의 의지'는 이런 기본욕구 위에 얹혀지는 인간다운 어떤 것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힘에의 의지'가 인간을 넘어 세계와 생명이 존재하고 생성하는 원리라면, 힘에의 의지가 공공성보다 근원적인 개념이 아닐까요? ㅎㅎ 오히려 우리가 어떤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따라 다른 공공성을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통상적으로 약자적 방식의 공공성과 강자적 방식의 공공성을 생각해 볼 수 있겠지요! 따라서 모든 공공성이 니체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 공공성이 니체적 삶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3. 사회적 약자의 권리투쟁과 사회적 평등의 요구
(0) 공공성에 대한 2가지 관점에 따라 사회적 약자의 권리투쟁 역시 2가지 방향이 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가 권리확보를 위해 싸우더라도, 어떤 관점인가에 따라 투쟁의 양상은 완전히 달라질 것입니다. 먼저, 차별에 저항하여 권리확보를 목표로 하는 투쟁이 있는가 하면, 한편 이 투쟁을 통하여 사람들이 어떻게 달라졌는가(니체적으로 말하면 '힘에의 의지'가 얼마나 능동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화되었는가)를 목표로 삼는 방식이 있을 것입니다. (1) 전자의 경우 우리의 요구가 일정하게 확보된다면, 이슈는 사라지고 권리를 얻어낸 사람들은 전선에서 떠나겠지요. 그렇다고 사회적 불평등이 해소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 사회적 약자를 만들어내는 불평등한 사회구조가 존재하는 한, 사회적 평등은 불가능한 요구지요! (2) 하지만 후자의 방식으로 싸움을 조직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사회적 평등'이라는 요구를 통해 우리사회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고, 그래서 '사회적 평등'이 이 사회에서는 불가능함을 폭로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활용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사회적 평등'이라는 요구의 진정한 용법이 아닐까요? 이 과정에서 참여한 사람들은 이전과는 다르게 변화될 것이고,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경험하면서 다른 방식의 삶을 모색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투쟁을 진정으로 확보할 것은 '구체적인 권리'가 아니라, 새롭게 구성된 '힘에의 의지'이고 다른 존재일 것입니다.# 재연샘! 댓글도 수정이 된답니다. ㅎㅎ 제가 재연샘의 의도를 짐작해서 프로포절을 약간 편집해보았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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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빈
[ 제목 ] 니체, 너로 정했다.
[ 서론 ] 니체를 만난 소감
200년이 채 되지 않는 거리의 파토스로 니체와 첫 데이트를 했다. 설익은 자기소개와 탐색 과정을 거쳐 어떻게 애프터(after)를 신청할지 고민 중이다.
뭐라 답톡을 보내야 할까? “재미있었어요. 당신은 특별하군요. 많이 배웠어요.” 이 정도의 리액션은 지금껏 다른 이들과의 무수한 소개팅에서 그가 받아봤을 법한 반응이겠지?
외설서(猥褻書)를 처음 집어든 거뭇한 아이처럼 그의 책들을 연쇄적으로 찾아 참조하면서 황홀했다. 마찬가지로 그도 나에게 읽히는 게 행복할 거라는 도취감을 욕망한다. 누군가와의 만남은 한 알갱이의 영혼이라도 서로 다리를 놓아 교통하는 관계 속에서만 의미가 있다. ‘그도 내가 맘에 들어야 할 텐데...’ 몽긋대는 사이 스르르 꿈을 꾼다.
‘죽은 자 중에서 인생의 반려자를 선택하는 일은 산 자 중에서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현몽(現夢)이다. ‘고전은 왜 읽는가?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새삼 고민해본다.
50년 망각의 인생을 톺아보며 그나마 의식에 남아있는 장기기억과 무의식의 자국을 중심으로 짧은 단상(斷想) 몇 줄을 끄적여 보려 한다. 좀 더 일찍 만났더라면 하는 아쉬움을 안은 채 비록 늦었지만 읽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힘이 되는 니체, 앞으로 남은 인생에 미칠 끝 모를 그 의미의 첫 단추를 나름으로 꿰달아 본다.
[ 본론 ]
① 니체가 때리니 우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
철학이 내 삶에 어떤 기운을 주었는가? 새삼 정리의 필요성이 들었다. 철학을 선택하여 대학을 온 것부터 이후 허벅지에 타박상을 입을 정도로 ‘탁 치니 억하고’ 깨달았던 모든 순간이 우연이었다. 철학으로 인해 더러는 행복했고, 대체로 고독했다.
학력고사 합격자 방(榜)이 붙었다는 소식을 전해들었지만 크게 관심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점수 맞춰 지원한 대학에 무에 그리 애착이 있기야 했겠느냐마는 내심 떨어지길 바랐다. 바람은 수화기 너머에서 바람같이 흩어졌고, 어쩔 수 없이 낯선 서울에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곰팡내 나는 반지하방도 플라톤의 「메논」도 어질어질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질디어진 형님이 노동판에서 구르며 달마다 꽂아주는 ‘삼십(參拾) 만원’은 안타깝게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끔 나를 내몰았다.
IMF 사태의 된서리를 맞으며 세상 밖 여기저기서 자살 소식이 넘쳐날 즈음, 취업률 0%라는 전대미문의 사태 앞에 학사모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쓰레기가 되고 말았다. 누군가는 청운의 꿈을 품고 넘었다는 대관령을 되넘어 낙향을 결심하고 채 10년이 되지 않는 짧은 유희로서의 서울살이를 정리하며 책덩이를 묶는 붉은 노끈에 손이 무질 즈음, ‘때르르릉’ 전화벨이 울린다.
팔자에 없는 공립학교 철학 선생 노름판에 우연히 던져졌다. 19살 먹은 사티로스-사람처럼 생긴 쇠- 귀에 경을 읽었다. 지나 내나 잘 모르는 헛소리를 참 성실히도 읊어댔던 시절이었다. 하면할수록 선생질은 알 수 없는 열정과 엑스터시를 안겨주었다. 지나고 보니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말이 딱 그 짝이지 싶다.
…………………………
인생길을 돌고 돌며 이곳저곳을 헤매는 숲에서도 언제나 중심에는 철학이라는 년석이 있었다. 그것에 돈을 쓰고, 잠깐 거둬들이고, 또 돈을 붓고, 그렇게 기대며 뭉개며 적당히 발을 얹고 산 것 같다.
밝은 빛을 보기를 갈망한다는 숭고함 따윈 온데간데없고, 그저 배우고 낯익은 게 그것밖에 없다보니 내게 철학하는 삶이란 어쩌면 강제된 무엇이었다.
죽일 놈의 데카르트, 그에게서 왜 하필 학문하는 자의 강박(强迫)을 엿보았을까? 그 기준에 맞추며 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했으니 어떤 것도 쉬이 믿어질 리 만무했고, 고립은 자초한 것이었다. 결국 철학은 나에게는 똥고집을, 세상을 향하여는 경멸과 허무의 시선을 안겨주었다.
② 현대문명에 부고장(訃告狀, Trauerbrief)을 날린 니체, 나는 니체를 왜 읽는가?
늘생각이지만 철학고전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이다. 뭐 주워 먹을 것 없나 하는 본능적 게걸스러움은 반드시 따라붙는다. 수세기의 시간 속에 문자 그대로 지적(知的) 위계가 높은 사람들의 손과 입에 일관되게 오르내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그러하다. 경험상 이런 책을 들춰봤다는 것만으로도 내 삶에 분명히 유용하다.
지금까지 내가 지지(支持)했고 나를 지지해온 가치는 ‘자유, 해방, 휴머니즘’이었다. 학창시절 돌멩이를 던지고, 꽃병과 파이를 들고 부르짖었던 가치도 그것이었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이 지적, 종교적 속박으로부터 탈피(계몽)하고, 존재론적으로 해방(신으로부터의 독립)되고, 새로운 실존으로서 휴머니즘의 세계로 편입되는 것을 바랐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내가 받아든 성적표는 허무함이었다.
현대란 무엇인가? 문명이란 무엇인가? 너무 목적지랄적으로 이행한 근대가 결국 인간소외, 인간성 타락, 부조리라는 역설을 낳았다. 이로 인한 니힐리즘이 현대성의 본질이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지다 중간에 나뭇가지를 잡고서도 나머지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 폼잡는 인간(나)이 현대의 이미지가 아닌가?
진리에 관한 스포일러(spoiler), 니체. 무엇이든 태어난 것은 사멸한다는 필연을 알려준 사람, 삶이 우리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아야 한다는 차갑도록 서러운 진리를 깨닫게 해 준 사람.
아직 내게는 잘 죽기 위한 훈련이 더 필요한 것 같다. 사는 게 무의미하고, 산다는 게 무엇인가를 고민하던 즈음, 왜 쇼펜하우어의 솔직함을 들여다 본 건지...지랄맞은 그것도 운명이었다.
죽음을 예고하며 살아생전 도덕, 종교, 철학, 과학 등 이성에 끊임없이 계고장을 보낸 니체의 저서들을 들춰본 것도 운명이다.
모래시계의 좁은 모가지 터널을 일정하게 빠져나가는 갇힌 모래의 운명에서 벗어나 비록 거짓일지라도 삶의 템포를 늦추었다 당겼다 하는 지혜가 쌓이기를 바라고 있다. 나를 여럿으로 쪼개 어느 곳에서는 살고 싶었던 대로의 입자로 살고, 또 다른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살아내면서 나를 부여잡아야겠다.
현재 안락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안락사다.
※ 아직 생각이 잘 정리되지 않아 몇 가지 토픽을 좀 더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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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글에서 그 사람의 인격이 드러나는 부분에서 시선을 잠시 멈추게 됩니다. "철학으로 인해 더러는 행복했고, 대체로 고독했다. ...... 나는 왜 니체를 읽는가? ...... 현재의 안락에 머무르는 것, 그것이 안락사다." 자기 삶을 니체철학으로 해석하려는 시도는 어쩌면 우리의 가장 원초적인 욕망(힘감정)일 것입니다. 문제는 자기 삶을 해석할 때 조차, 나의 퍼스펙티브는 어디에 있는가를 보는 게 아닐까요? 예를 들어 자기 삶의 성찰이나 반성이라는 '과거의 시점'이 있다면, 한편 다른 방식의 삶을 위해 현재를 해석하는 '미래의 시점'이 있을 것입니다. 진정한 해석이란, 그것이 생성을 위해 봉사할 때가 아닌가 해요^^ 삶의 해석을 조금더 밀고 나가서, 다른 삶의 방식을 기획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으면 하고 응원합니다~~!!
니체는 스스로 철학을 삶의 기술로 정의했고, 자기철학 역시 강자를 육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삶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오랜 철학의 화두는 "어떤 철학이 삶을 구원할 것인가?"로 고쳐 물어야 할 것입니다. 모든 철학이 삶을 자기 문제로 설정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니체의 철학비판처럼 대부분의 '철학은 도덕의 지배' 아래서, 우리에게 참된 삶을 보편진리로 제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다음시간에 공부할 영원회귀가 힘에의 의지와 함께, 우리 삶을 새롭게 기획하는 키워드가 될 수도 있겠어요! 자기 삶의 문제를 다루겠다면, 영원회귀에서 힌트를 얻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경빈샘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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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림책을 찾는 어른들과 니체의 『권력의지』
혹은, 그림책을 찾는 어른들과 그들의 권력의지
서론
그림책이란 (그림동화, 삽화와의 구분)
트렌드가된 어른들의 그림책읽기
본론1
그림책의 매력 ① 시와의 구분 '그림' ②SF와의 구분 '어린이를 위한'
본론2
그림책을 찾는 어른들을 니체의 책을 통해 해석하기.
keyword. 현대인의 질병/ 변신, 어린아이의 정신/ 권력의지/ 니체적 강자
"아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따라 굴러가는 바퀴인 것이다."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이며, 그 명령 또한 능력을 실현하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강자)"
마무리
니체적 강자로 되도록 오래 살아가기.
"내가 내 자신을 위대한 방식으로 사랑할 때, 나도 사랑의 결실인 임신을 하는 것이다"
나에게, 내가 어린아이에게 바라는 것을 명령하고, 실행하는것.
참고도서
니체,김세영 정명진 역, 권력의지
고병권, 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진은영,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릿터 25호 커버스토리 / 나, 요즘 그림책 읽어
무루, 이상하고 자유로운 할머니가 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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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목과 주제 :: 새롭고 특이한 주제라서 먼저 시선이 가네요. 그리고 제목도 하고자 하는 말이 잘 드러나서 좋습니다.
2. 글의 소제목 :: 서론 / 본론 / 결론도 소제목을 달고, 그로부터 글을 풀어쓰는 방식으로 하면, 글이 집중되는 효과가 있어요!!
예를 들어 서론에서 질문하고 본론1.2에서 대답하고, 결론에서 요약하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살짝 던지는 방식요! ㅎㅎ
서론 제목(예시) "어른들은 왜 그림책을 찾는가?" / 본론 제목(예시) "어른들의 아이-되기 욕망으로서 그림책 읽기"
3. 참고자료에 어린아이의 정신의 원출처인 [차라투스트라]를 포함시키면 좋겠어요. 물론 그 부분을 읽고나서요 ^0^
4. 그럼, 내일 에세이초안을 가지고 만나요, 지수샘 ~~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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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혼란한 세상을 사는 약자에게 니체 아포리즘 선별
[서론] 21세기 혼란의 시기
- 미중 패권전쟁과 한반도. 세계 경제의 흐름은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남북은 결국 전쟁으로 치달은 것인가? 아니면 미국의 중재로 평화통일로 넘어갈 건가
- 지속적인 실업과 자산가격 폭등. 부의 편중에서 소외된 개인들은 니체의 어떤 아포리즘을 교훈삼아 인생을 지탱할 것인가
- 니체는 어떤 형태의 데시데라타desiderata를 현대인의 좌우명으로 제시하는가?
[본론1] 세상은 늘 혼란스러웠다.
- 진보에 속지않도록 하자. 19세기는 16세에 비해 어느 면으로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인류는 거대한 실험실을 많이 닯았다. 어느시대 할 거 없이 어떤 것은 성공하지만, 셀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실패하고 있다. (#90)
- 모든 중요한 성장은 엄청난 규모의 붕괴와 사라짐을 수반한다. 가장 극단적인 형태의 페시미즘인 철저한 니힐리즘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핵심적이고 근본적인 성장이 이뤄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 인간은 타고난 본능을 다시 복구시킬 용기를 가져야한다. 비정상적인 사회적 개념(죄의식, 처벌, 정의, 정직, 자유, 사랑 등)은 존재 자체가 허용되지 말아야 한다.(#124)
- 유산자들은 “사람은 인간다운 존재가 되기 위해서 무엇인가를 소유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체들에게 가장 건전한 본능은 “사람은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해서 지금 가진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욕망해야 한다.” 발달의 도덕이며, 성장자체가 삶이다. (#125)
[본론2] 권력의지 키우라.
- 도덕적 가치평가에 대해 당신 스스로 비판해 볼 것을 요구한다. 당신은 본능적인 도덕적 충동을 중단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복종하게 된다. “왜 꼭 복종해야 하지?”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 (#399)
- 우리는 “진정한 세계”가 “거짓의 세계”라는 것을, 도덕이 비도덕성의 한 형태라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는 “더 강한 자가 잘못”이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401) 숨어있는 “긍정”이 우리를 앞으로 몰아붙이고 있으며, 이 “긍정”은 우리의 모든 “부정”보다도 강하다. 우리는 그 임무에 도전한다. (#404)
[본론3] 위험하고 불확실성을 즐겨라. 위버맨쉬가 되자
- 삶 자체가 권력의지이고, 권력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다. 도덕이 절망으로부터 구해주었다는 믿음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운 질서를 수립하라.(긍정의 니힐리즘) (#55)
- 붕괴, 불확실성은 이 시대의 특이한 현상이다. 현대세계의 다양성과 불안은 가장 높은 형태의 의식으로 인해 생기고 있다. 과로와 호기심, 동정은 현대의 악덕이다.(#72,73)
[소결]
현실은 늘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다.
긍정의 니힐리즘과 영원회귀, …을 바탕으로 현실을 극복해야 한다.
-
1.
오호! 니체의 아포리즘만으로 에세이를 구성하는 것, 영리하고 멋진 기획입니다. ^^
한번도 이런 방식의 에세이를 보지 못해서 새롭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마치 내 생각을 전달하는데 니체의 목소리를 사용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영리한 기획입니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내 생각에 걸맞는 아포리즘을 찾기 위해, 책 전체를 검토하는 수고가 따를 것이고,
곧 [권력의지] 전체를 복습하는 효과를 가져올 것이라는 점에서 에세이 원래의 취지에도 맞습니다!!
2.
중간중간에 니체의 아포리즘에 대한 현욱샘의 코멘트를 '짧게라도' 달아주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마지막 영원회귀를 결론으로 삼은 것도 당연한 흐름처럼 느껴집니다.
마지막 결론까지, 영원회귀에 대한 해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밀고나가기를 바랍니다.
응원합니다~~!! 현욱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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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구리
[제목] 내가 되기 위한 몸부림, 니체 철학.
[서론] 왜 니체는 불교적 초월과 공(空)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평생을 니힐리스트로서 살았다고 주장하면서 초인을 우리가 지향해야 하는 인간상으로 제시하는가?
[본문] 니체 철학 이면에 숨겨진 자기대상에 대한 갈망
1. 타인을 통한 자기화
: 자기 심리학의 관점에서 코헛(Kohut, 1984)은 사람이 타인들로부터 반영(mirroring), 긍정(affirmation), 확인(validation), 이상화(idealization) 같은 어떠한 기능을 요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하였다. 니체는 과연 삶에서 자신에게 이러한 반영, 긍정, 확인, 이상화와 같은 기능을 제공하는 대상을 충분히 확보하였을까?
2. 대상으로서의 좋은 젓가슴 vs 나쁜 젓가슴
니체의 바그너 및 쇼펜하우어에 대한 비판을 넘어선 비난은 좋은 자기대상(좋은 젓가슴) 확보가 좌절된 것(좋은 것을 주지 않는 대상- 나쁜 젓가슴)에 대한 대상 상실적 반응이 아니었을까? 또한 대상에 대한 분노가 대상 파괴 즉 좋은 젓가슴 파괴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3. 좋은 젓가슴인 자기대상확보를 통한 자기화와 성숙
: 니체가 주장하는 위버멘쉬 즉 초인은 이상적 자기의 추구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이상적 자기는 무리를 떠나거가 체질적으로 우수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좋은 대상을 통한 진정한 내가 되는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진정한 자기이해와 수용은 분열적 자기가 통합적 자기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것이며 이를 통해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발전하는 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베멘쉬는 분열적 자기 상태에서 소망적 자기애에 충족의 시도일 뿐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소결] 니체가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무엇인가? 위베멘쉬는 어쩌면 이상적 자기에 대한 끝없는 갈망이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상적 자기애에 대한 추구는 좋은 대상을 확보하지 못해 자기 통합에 이르지 못한 파현화된 자아의 한 표현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위베멘쉬를 막연하게 무조건적으로 긍정하며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이상이 여길 것이 아니라, 삶에서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그 관념 자체와 결핍된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인식 하에 자신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깨달아 스스로에게 진정한 자유를 선사하는 것이 요망될 수 있겠다.
-
1. 위버멘쉬란 어떤 존재인가?
에세이를 전개하는 주요개념인 '위버멘쉬'에 대해 좀더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물론 너구리의 해석처럼 위버멘쉬를 '이상적 자기의 추구'로 보는 것도 의미있다고 생각합니다.
니체의 텍스트 속에서 너구리가 새로운 힌트를 얻을 것으로 생각해요 ^^
이번 시즌의 [권력의지]에서 위버멘쉬는 다음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납니다.
4권 훈련과 육성 > 1장 위계 > 3절 고귀한 인간, 4절 대지의 주인, 5절 위대한 인간, 6장 미래의 입법자
2. 위버멘쉬가 강자보다 높은 다른 위계에 속하는 것은,
강자가 시대의 지배적 가치에 저항하는 존재라면, 위버멘쉬는 미래의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존재입니다.
즉 강자가 시대와 '대결하는 자'라면, 위버멘쉬는 시대를 '넘어서는 자'로 정의될 것입니다.
이것을 개인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시대와 사회에 규정되는 우리의 존재는 시대적 가치 속에서 숨쉬고 사유하며, 다수적 욕망을 욕망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자기를 극복하는 과정은 곧 시대적 가치와 욕망을 넘어 어떻게 새로운 가치를 생성하는 과정일 것입니다.
즉 강자가 현재의 자기와 '대결하는 자'라면, 위버멘쉬는 현재의 자기를 '넘어서는 자'입니다.
3. 다른 텍스트의 '위버멘쉬'에 대한 니체의 말을 들어볼까요?
나 너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노라,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들은 인간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지금까지 모든 존재자는 자기 자신을 능가하는 무엇인가를 창조해왔다. ······ 인간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인간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 보라, 나는 항상 스스로를 극복해야 하는 존재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자기극복에 대하여」)
‘위버멘쉬’라는 말은 최고의 완성된 유형을 지칭하는 말로서, ‘현대’인, ‘선한’ 자, 기독교인과 여타의 허무주의자들과는 반대되는 말이다. ······ 그런데 위버멘쉬라는 말은 도처에서 차라투스트라가 의도하는 가치와는 정반대의 가치로 순진하게 이해되고 있다. 말하자면 위버멘쉬는 더 높은 인간의 ‘이상주의적인’ 전형으로, 반은 ‘성인’이고 반은 ‘천재’로 이해되는 것이다. ······ 위버멘쉬라는 말을 두고 어떤 소같은 학자들은 나를 다윈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하기까지 한다. (『이 사람을 보라』 중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오늘날 소심하기 짝이 없는 자들은 묻는다.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러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묻는 최초이자 유일한 자이다. “어떻게 하면 인간이 극복될 수 있을까?” 내가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은 위버멘쉬이다. 바로 그가 내게 유일자이다. 인간도 아니고, 이웃도 아니며, 가장 불행한 자도 아니고, 가장 슬퍼하는 자도 아니며, 가장 선한 자도 아니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 「보다 지체높은 인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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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니체의 생각, 나의 생각. 그 퍼스펙티즘
[서론]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위험선호의 함의는?
- 니체의 힘에의 의지가 보는 세계와 고통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 세계에서 위버맨쉬는 무엇인가?
- 위버맨쉬는 항상 힘에의 의지를 지니고 위험을 즐기는, 아슬아슬한 삶을 살아간다고 하는데, 어떤 함의를 가지는가?,
[본론1] 힘에의 의지는 관계주의, 퍼스펙티즘
- 니체는 이 세계 전체, 온 우주 전체가 바로 이런 의지들의, 힘에의 의지들의 거대한 관계네트워크라고 이해한다. 세계는 힘에의 의지 세계인 것이다. 힘에의 의지가 활동하고 운동하는 의지작용이자 힘겨루기 관계를 맺는 의지작용이기에 세계는 거대한 관계의 세계다. 쌍방의 의지를 피드백받는 관계에서 각각의 존재는 자신의 생각으로 사실을 해석하므로 절대적인 사실은 없고 해석은 다원적일 수 밖에 없다. “있을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
- 니체는 인간을 힘에의 의지작용 Wille zur Macht이 총체적으로 수행되는 장소로 이해한다. 고통은 바로 그 의지의 본성, “항상 상승적 삶을 추구하는” 그 본성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상승을 추구하기에 그 불만족 상태의 불쾌감. 그것이 고통인 것이다. 힘에의 의지작용은 이렇듯 항상 고통받는 의지이다.
- 니체는 위버멘쉬를 인간 존재의 의미이자 실존적 목표로 제시한다. 위버멘쉬로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을 진정한 인간으로, 삶을 진정한 삶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버멘쉬로 사는 것은 쉽지 않은데 우리 안의 “짐승”때문이다. 위버멘쉬는 첫째로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인간이라는 점이다. 둘째로 자유 정신의 소유자이다. 기존 판단과 관습, 습관을 넘어서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을 구성한다. 셋째, 주인 의식의 소유자이다. 넷째 자신의 삶을 예술 작품처럼 조형하는 삶의 예술가이다. 사랑과 긍정을 가지고 있다. 다섯째 세계가 거대한 관계 세계라는 것을, 자신도 그 한개의 계기라는 점을 인정한다.
- 힘에의 의지를 힘을 통한 지배의지로 해석하여 많은 오류가 있었다. 관계주의-상호주의라는 관점에서 힘에의 의지를 해석해야 일방주의-제국주의라는 오역을 피할 수 있다. 이성과 비이성, 도덕과 비도덕이라는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버리고, 관계주의와 다원주의를 논하다니 대단한 이론이다. 위버멘쉬로 살아가기 위해 욕망을 올바르게 관리해야 한다. 쉽지 않다. 항상 내 자신을 넘어서는 목표를 세워야 한다니. 당장 체중계와 다이어트가 아른거린다.
[본론2] 삶을 위한 삶. 위험을 즐기라
- 니체에 의하면 인생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삶을 위한 삶”이고, 다른 하나는 “삶을 거스르는 삶”이다. 전자는 번성하고 성장하고, 후자는 퇴화하는 삶, 데카당스이다. 이성적이며, 밝고 냉정하고 신중하고, 의식적이기는 해도 본능은 없으며 본능에 대적하는 삶은 그 자체 하나의 병(데카당스)일 따름이다.
- 진정한 삶은 충동, 욕망, 쾌락, 본능의 부정과 포기가 아니다. 오히려 이제까지 부정되고 배척되었던 것, 우리 몸과 쾌락, 본능과 욕망을 인정함으로서 세속적인 삶의 유혹과 맞서 싸우면서 자신만의 이상을 만들어 갈 때 가능한 것이다. 긍정적인 금욕주의는 수신술이다.
- 수신술은 하나의 목적이 있다. 니체는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를 가진자는 거의 모든 방법인 “어떻게?”를 견뎌낼 수 있다고 한다. 실존의 방법을 찾아낸다. 인생은 목적을 찾을 수 있는가? 인생의 목적은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본능과의 끊임없는 투쟁을 통해 삶을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획득할 때 만들어지는 것이다.
- 니체는 불멸에 대한 믿음이 세상의 가치를 빼앗아버렸다는 인식으로 신으로 대변되는 영원한 생명을 부정한다. 신과 영혼불멸을 버리고 “참을성 있게 죽음을 받아들인다”. 죽음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을 긍정할 수 있다. 니체는 진정한 삶의 예술ars vivendi은 죽음의 예술 ars moriendi이며, 내일로 내세로 삶을 연기하기 말고, 지금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제때 죽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가르치노라. ‘하긴 결코 제때에 살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제때에 죽을 수가 있겠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KSA, p96) 서양철학에서 니체는 키에르케고르와 더불어 독일 실존철학의 선구자이며, 베르그손 짐멜과 더불어 생철학의 대표자이다.
-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우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산과의 싸움속에서 살라. 그대들 인식하는 자들이여, 지배와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와 정복자가 되라.” (즐거운 학문, #283)
- 세상은 한달 앞을 내다볼 수 없게 급변하고 있고, 회사는 미친 듯한 실적과 업무량을 나에게 부과하고 있다. 어쩔까?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오늘도 버텨야 한다. 회사돈 수십억 투자하고, 매출 천억 규모의 사업보고서를 결재 올리면서, 문득 문득 혹시 시나리오와 다른 방향으로 결론이 나면 어쩌지 걱정도 된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신이 아니고 내일은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영역일 뿐이다. 그저 오늘을 살아갈 뿐. . 심하게 오르락 내리락 하는 코로나확진자 수와 실업률, 주가와 경제동향을 보면서도 장기투자를 해야하는 상화. 죽음을 각오하고 ‘에코’라는 영혼을 홀리는 노래를 듣지 말아야 살아돌아 갈 수 있다는 헤라클레스의 용기처럼 많은 힘에의 의지를 필요로 한다.
[소결]
- “오늘 잘 웃는 자가 최후에도 웃는다”(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43)
- “짧은 비극은 결국 언제나 영원한 실존의 희극에게 자리를 물려주거나 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 이런 난세(변동성이 크다는 의미에서)를 살아내기 위해서 ‘힘에의 의지’를 가득채운 강인한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를 필요로 한다. 내일은 없다. 오늘 지금이 중요하다. 고통을 즐기면서, 가끔 큰소리로 부르짓으면서 자신의 최대 역량을 살아가는 자, 힘에의 의지의 인간이 되고자 한다.
참고서적
백승영 외, 인생교과서 니체, 21세기북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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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보완하여 에세이 최종본 올립니다. 신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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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니체의 시각에서 장애인은 강자인가 약자인가
[서론]
1. 장애란 무엇인가.
장애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에 있다.
장애는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비장애인과 똑같이 누릴 권리가 있다.
2. 니체가 말하는 약자
정신적, 체질적
3. 니체가 말하는 강자
정신적, 체질적
[본론]
1. 장애인을 약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2. 장애인을 강자의 관점에서 해석하기.
[결론]
니체의 관점에서 장애인은 약자or강자이다.
if 약자, 니체의 시각에서 장애인의 권리 되찾아보기.
■ 참고자료
『권력의지』, 프리드리히 니체
『묵묵』, 고병권
『장애학의 도전』, 김도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