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20일 발제와 후기 동시에 올립니다.
<후기>
오랜 기간 나는 위장의 형태로 나타나는 권력의지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
아포리즘 774에 나오는 자기 보존 본능, 순종, 사랑, 의무, 양심, 인정, 자기비하와 같은 위장 형태의 권력의지...
이 모든 위장 형태의 권력의지를 빼고 나의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혹은 누군가와의 관계를 설명할 수 있을까?
자신을 지키고 싶은 여러 마음들..
순종을 하거나 받는 방식으로 자신의 힘을 느끼고 싶은..
권력자의 힘을 은밀히 얻기 위해 사랑이란 미명을 타인에게 접근하는..
양심을 들먹이며 타인을 위축시켜 조종하고 싶은..
의무를 강요하며 타인을 구속하여 통제하고 싶은..
그런 마음들이 우리의 민낯임은 분명한데...
어느 정도 자신의 행동을, 그 기저에 자리한 욕망을 알아차리고 멈출 수 있을까,
진정한 강자로 이러한 위장 없이도 스스로 창조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최소한 자신의 욕망을 알아차리고 타인과 호혜적인 거래라도 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라는 생각 속에서
본능적 왜곡을 멈추고 나의 의도와 행위를 제대로 알아차릴 수 있을까 생각한다.
니체는 목적으로부터의 해방을 통해 생성의 순수를 통해 우리에게 용기와 자유를 맛 볼 수 있다고 제시한다.
하지만 나는 두렵지만 한 걸음 내딛으려는 용기와 알지 못하는 자유에 대한 모호한 믿음이 오히려 목적으로부터 해방를 모색할 수 있는 초석이 되지 않나 싶다.
목적으로부터 해방되어 순수에 이를 수 있다면.. 그리고 목적 없는 순수가 창조로 잇닿을 수 있다면...
우주적 중요성을 들먹이지 않고서도 우주의 진정한 일부로 영원의 시간 속을 자유롭게 유영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니체의 날카로운 지성과 파격적인 언어 안에서..
오랜만에 사람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서 참 좋았다...
따뜻함...
우리가 엄마의 태내에서 아무 소리도/ 빛도/ 그 무엇도 구별할 수 없을 때에도 느꼈던 양수의 온기...
온기인지도 모르고 느꼈을 그 미적지근한 온기.... 근원적 그리움.....
온기를 품은 날카로운 언어이기에 가슴에 부드럽게 스민다.
1. 우리 시대의 미덕과 에피스테메 :: 수동성(반동성)은 아무것도 생성할 수 없다!
너구리가 언급한 자기보존, 순종, 사랑, 의무, 양심, 위계에 대한 인정(자기비하는 제외하고! ㅎ)은 대체로 우리 시대의 미덕으로 간주되는 가치들입니다. 니체가 위장된 힘에의 의지로 해석하지 않았다면, 하나도 문제될 것이 없는 도덕적 가치들입니다. 문제는 이들 가치들이 우리 시대의 에피스테메(특정한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무의식적인 기반) 주위를 회전하고 있다는 거지요. 이처럼 시대적 가치는 그 시대의 공기와 같아서, 우리가 문제삼지 않는 한 우리 주변에 자연스럽게 흘러다닙니다.
자기보존, 순종, 사랑, 의무, 양심, 위계에 대한 인정같은 가치들은, 새로운 방식을 시도(생성)하기 보다 현재적 상태를 유지(존재)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가치들을 긍정하는 한, 지금과 다른 삶과 새로운 가치들이 생성되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런 가치들을 수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과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생성이 아니라 존재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또 그런 관점에 따라 살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위장된 형태의 힘에의 의지는 '힘의 유형학'에 있어서 약자적 힘에의 의지를 말합니다.
2. 힘의 유형학과 힘에의 의지의 전환 :: 우리 신체 내부의 어떤 충동에 먹이를 줄 것인가?
먼저, 힘을 사용하는 방식에서 약자적 힘에의 의지는, 어떤 사건을 주도하는 능동적(Action) 힘이 아니라, 이러한 능동적 힘에 대한 반동적(Reaction) 힘으로 나타납니다. 반동적 방식이란 능동적 힘에 수동적으로 따라가거나 능동적 힘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또한 의지의 방향에서도 약자적 힘에의 의지는, 긍정적인 의지가 아니라 부정적인 의지로 사건을 종합합니다. 어떤 것도 그 자체로 부정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부정적으로 종합하는 의지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우리 '신체'가 힘들의 복합체라고 할 때, 여러 충동들이 함께 공존하며 서로 '주체'에 지배력을 행사하기 위하여 투쟁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 존재하는 강자적 충동과 약자적 충동 가운데, 무엇에 먹이를 주는가에 따라 우리 신체는 강자 혹은 약자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니체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여러가지 문턱을 넘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시간이 없어서', '니체를 읽어서 뭐해?', '읽을 능력이 없어서' 등등.
또한 돈이나 권력, 명예 같은 시대적 가치는 쉽게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돈, 권력, 명예가 아닌 이유에서 니체를 읽는다는 것은 이미 시대적 가치와 다른 무엇을 꿈꾸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여기서 함께 니체를 읽는 것은, 지금까지의 삶을 문제삼는 것, 그리하여 다른 방식의 삶을 향한 실험이 아닐까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주체의 의식상태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신체의 힘에의 의지가 가리키는 것이겠지만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