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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지 > 3권 새로운 가치평가의 원리 > 2장 자연의 권력의지 (2020.7.13)

 

1. 기계론적 세계해석은 무엇이 문제인가?

0. 기계론적 세계해석_요약 :: #618 지금까지 시도된 세계해석 중에서 기계론적 세계해석이 승리를 거두었다. 어떤 과학도 기계론적 절차의 도움 없이 발전이나 성공은 믿지 않는다. 기계론은 ① (객관성) '이성'이나 '목적'을 가능한 배제하고 ② (필연, 법칙성) 충분히 시간히 지나면 모든 것이 모든 것으로부터 생성될 수 있으며, ③ (물리적 힘의 작용으로 해석)식물이나 알의 노른자의 '운명에 담긴 명백한 의도' 역시 압력과 응력으로 설명한다. ④ (원자개념) 기계론은 사상을 기술할 수 있는 것에 불과하며 결코 설명할 순 없다. 그래서 원자라는 개념을 끄집어오면서 ‘역학적 세계해석’을 내린다. 

①​ 객관성_비판 :: #627 기계론적 의미에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것'은 완전히 허구이다. 우리는 목적없는 인력(*끌어당기는 힘)을 상상하지 못한다. 우리는 끌어당기거나 밀어내는 것을, 어떤 사물을 소유하려는 의지나 자신을 어떤 사물로부터 보호하려는(반발하려는) 의지로 이해한다. / #636 물리학자들은 그들 나름으로 '참의 세계'를 믿는다. 그것은 필연적 운동을 계속하고 모든 생명체에게 동등하고 고정된 원자를 체계화하는 것이다. ...... 그들이 설정하는 원자는 의식의 퍼스펙티비즘에 따라 추론된 것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주관적 허구이다. ..... 그리고 물리학자들은 자신들이 구성한 세계 속에서 어떤 것을 생략해버렸는데, 그것이 바로 필연적인 퍼스펙티비즘이다. 모든 힘의 중심이 이 퍼스펙티비즘을 이용해서 자기 관점에서 세계의 나머지를 구성한다. (모두가 자신이 가진 힘에 따라 세계를 측정하고 감각하고 형태를 만든다.) 그들은 퍼스펙티비즘을 정립하는 이 힘을 '참된 존재' 속으로 포함하는 것을 망각했는데, 이 힘이 바로 주관이다. 퍼스펙티비즘이란, 그 종의 고유한 복합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바는, 각각의 특수적 신체는 모든 공간에서 주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힘(힘에의 의지)을 확장하려 노력하며 그 확장에 저항하는 모든 것을 강하게 밀어붙인다. 그러나 모든 신체는 다른 신체의 똑같은 노력에 부단히 충돌하며 이윽고는 자신과 충분히 닮은 다른 신체와 화해하기에 이른다. 이리하여 이들 신체는 공모하여 함께 힘을 추구한다. 그리고 이 과정은 계속된다. / #689 우리는 쾌/불쾌의 감각 없이도, 힘의 상승/감소의 감정 없이도, 힘을 추구하는 노력을 상정할 수 있을까? 기계론이란 투쟁하고 초극하는 의지의 양의 내면적 사실계에 대한 암호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질ㆍ원자ㆍ무게ㆍ압력ㆍ충돌이라는 기계론의 모든 전제는,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허구의 도움을 빌어 행해진 ‘해석’이다. / #712 기계론과 물질은 저급단계의 표현형식이다. 정신을 완전히 박탈당한 ‘힘에의 의지’의 형식에 불과하다.

②​ 필연과 법칙성_비판 :: #634 기계론적인 이론에 대한 비판. 여기서 “필연”과 “법칙”이라는 두가지 유명한 개념을 폐기하기로 하자. “필연”이라는 개념은 거짓 속박(*허위의 강제)을, “법칙”이라는 개념은 거짓 자유(*허위의 자유)를 세계 속으로 넣어놓기 때문이다. '사물들'은 규제적으로 행동하거나 규칙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다. '사물' 같은 것은 절대로 없으며, 그것은 우리의 허구이다. 마찬가지로 사물은 필연성의 강제 하에서 행동하는 일도 없다. 여기에는 복종이라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무엇인가가 있는 그대로 강하거나 약하다'는 사실은 복종의 결과이거나 지배나 억압의 결과가 아니기 때문이다. 저항의 크기와 압도하는 힘의 크기, 모든 사건에 문제가 되는 것은 이것이다. 법칙이라는 것은 없다. 모든 힘이 매 순간마다 최선의 결과를 끌어내고 있을 뿐이다. ......

③ 물리적 힘의 작용_비판 :: #622 압력과 응력은 아주 최근에 나온 것으로, 파생적이며 원초적인 것이 아니다. 압력과 응력은 서로 결합한 상태에서 압착하고 치고 있는 무엇인가를 전제한다! 그런데 이 무엇인가가 어떻게 결합되어 있을 수 있는가? / #689 물질ㆍ원자ㆍ무게ㆍ압력ㆍ충돌이라는 기계론의 모든 전제는, ‘사실’이 아니라 심리적 허구의 도움을 빌어 행해진 ‘해석’이다.

④ 운동개념과 원자개념_비판 :: #635 우리는 계산을 위해 '단위'를 필요로 한다. 우리는 '단위'라는 개념을 아주 오래된 신앙조항인 '자아'라는 개념에서 차용했다. 만약에 우리가 스스로 하나의 단위고 믿지 않았다면, '사물'이라는 개념은 절대로 형성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자아' 개념이 실재 단위를 전혀 보장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신한다. 기계론적 세계관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는 언제나 2가지 허구를 이용해야 한다. 하나는 운동개념(우리의 감각언어에서 나온)이고, 다른 하나는 원자개념(통일체이며, 우리의 정신적 '경험'에서 나온)이다. 이렇듯 기계론적 이론은 어떤 감각편견과 심리적 편견을 전제하고 있다. 기계론적 이론은 연속적인 현상들을 공식으로 나타내는데, '모든 영향은 운동이고, 운동이 있는 곳에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이 이론은 원인으로 작동하는 힘(*힘에의 의지)을 건드리지 않는다. 기계론적 세계는 계산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하여, 원인을 일으키는 통일체가 발명되었다. '사물(원자)'이 그 통일체이며, 주체 개념이 원자 개념으로 바뀌었다. 

 

2. 기계론에서 말하는 '힘Kraft'과 니체가 말하는 힘에의 의지의 '힘Macht'는 어떻게 다른가?

#619 물리학자들은 '힘Kraft'라는 의기양양한 개념으로, 신과 세계를 창조했는데, '힘'이라는 개념은 보완될 필요가 있다. '힘Kraft'는 내가 '힘에의 의지 Willen zur Macht'라고 부르는 그것(힘을 표명하려는 혹은 힘을 행사하고 실행하려는, 지치지 않는 욕망으로창조적 충동으로 특징되는 하나의 내적 의지)에 돌려지지 않으면 안된다. ...... 모든 운동, 모든 '현상', 모든 '법칙'은  내적 사건의 징후로 이해되어야 하고, 이 목적을 위하여 인간을 하나의 유추Analogie(*유추해석, 비유)로 이용해야 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모든 충동을 힘에의 의지로 이끌어내는 일이 가능하다. 유기적 생명의 모든 기능을 이 유일한 원천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일도 마찬가지로 가능하다.

#620 지금까지 어떤 힘Kraft을 증명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있었는가? 단지 그 효과만 아주 이상한 언어로 옮겨놓았을 뿐이다. 

#634 힘의 크기는 힘이 일으키는 효과와 힘이 저항하고 있는 것에 의해 정해진다. 힘을 일으키는 것도 저항하는 것도 아닌 무관심은 그것 자체로 사고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힘의 크기는 기본적으로 폭력을 휘두르고 폭력에 대하여 자기 몸을 방위하는 하나의 의지이다. 그것이 자기보존은 아니다. 모든 원자가 존재의 전체에 나름대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의지력을 발산하는 것을 망각한다면, 그 순간 그는 존재를 멈춘 것으로 여겨진다. 의지력을 내가 '힘에의 의지의 크기'라고 부르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용어는 기계론적 접근으로 전달하기 어려운 특성을 쉽게 전달한다. 

 

3.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인과론이란 무엇인가?

#627. 인과성을 믿으려는 경향은 '목적없는 과정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631. 서로다른 두 힘은 인과법칙이 아니라 힘관계를 보여줄 뿐이며, 연속관계가 아니라 의존관계에 있다 :: 어떤 현상들의 불변하는 순서(*원인과 결과로 해석되는)는, 어떠한 '법칙'(*인과법칙)도 증명하지 못하며, 2개 이상의 힘들 사이의 힘관계만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 관계가 어디까지나 불변이다!(*원인으로 작동하는 힘 ······> 결과로 이어지는 힘: 관계는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동일한 힘은 다른 힘이 될 수 없어!(*원인-힘은 결과-힘이 될 수 없고, 결과-힘은 원인-힘이 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문제는 연속관계Nacheinander가 아니라 의존관계Ineinander이며, 즉 서로 잇달아 일어나는 각각의 계기가 원인-결과로서 제약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인 것이다. ① '행위'를 '행위자'로부터 분리시키는 일, ② 사건을 그 사건을 발생시킨 것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 ③ 과정을 지속되고 있는 어떤 것(실체, 사물, 물체, 영혼 따위)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일은, ...... 사건을 '존재하는 것'의 위치변화로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④ 이 낡은 신화야말로 언어와 문법의 기능들에서 확고한 형식을 발견함에 따라, '원인과 결과'에 대한 믿음으로 확립된 것이다. 

#675. 행위자는 행위와 동일시되어야 한다 (행위자는 행위로 정의되어야!) :: 나의 소망은, 행위자가 다시 행위와 동일시되는 것을 보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행위가 행위자와 분리됨으로써 모든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나는 무엇인가를 한다는 인식과 '목표', '의도', 대상 같은 개념이 행위 속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을 보기를 원한다. 행위가 이런 것들과 인위적으로 분리됨으로써 무의미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 '목표', '의미'는 단지 온갖 현상들에 고유한 한가지 의지인 힘에의 의지를 표현하는 방식에 지나지 않으며, 힘에의 의지의 변형들이다. 

#633. 연속적 상태를 원인과 결과로 말하는 허위 :: 두개의 연속적인 상태를 놓고 첫번째 상태를 '원인'으로, 두번째 상태를 '결과'로 이야기하는 것은 허위이다. 첫번째 상태는 아무것도 초래하지 못하고, 두번째 상태 안에서는 첫번째 상태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것이 전혀없다. 그것은 서로 힘Macht이 같지 않은 2가지 요소들 사이에 일어나는 투쟁의 문제이다. 각자가 가진 힘의 크기에 따라 새로운 배치가 이뤄진다. 두번째 상태는 첫번째 상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이며, 첫번째 상태의 결과가 아니다. 본질적인 것은 '투쟁하고 있는 여러 요인이 다른 힘의 크기를 동반하여 표출된다'는 점이다. 

#689. 힘에의 의지와 인과관계 ::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원인'이라는 개념은 '의도하는 것'이라 불리는 행위에 담겨있는 우리의 힘감정이다. '결과'라는 개념은 이 힘감정이 사람들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믿는 미신에 불과하다. 만약 우리가 '원인'이라는 개념을 우리가 원인을 끌어낸 영역(*힘에의 의지)으로 다시 옮겨놓는다면, 우리는 힘에의 의지가 개입하지 않는 어떤 변화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어떤 변화에 대해 어떤 힘이 다른 힘을 침해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외에 달리 방법을 모른다.

[인과론의 기원 : 인과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나?] :: ① 행위자로부터 행위를 분리시킨 후, 행위자를 원인으로 행위를 결과로 간주하는 경우 (ex. 행동하는 주체에 대한 믿음. 이때 주체는 원인으로, 행위는 결과로 간주된다. 이때 원인으로 간주되는 주체는 인간으로 제한되고, 비인간은 제외된다.) ② 사건발생으로부터 사건을 분리시킨 후, 사건의 발생을 원인으로 사건을 결과로 간주하는 경우 (ex. 코로나팬데믹으로 인해 세계경제가 위기에 빠졌다. 이때 코로나팬데믹은 원인으로 세계경제의 위기는 결과로 간주된다) ③ 지속되는 어떤 것(실체ㆍ사물ㆍ물체ㆍ영혼)으로부터 과정을 분리시킨 후, 실체ㆍ사물ㆍ물체ㆍ영혼을 원인으로 간주하고 과정을 결과로 간주하는 경우 (ex. 비가 내린다. 이때 비는 원인으로 내리는 과정은 결과로 간주된다.) ④ 한편, 인과론이라는 낡은 신화를 하나의 법칙으로 확립시킨 것이 바로 문법의 환상, 언어의 의지이다. 즉 '행위는 주체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동사는 주어가 있어야 한다는'는 문법이 만들어낸 환상이다. (그래서 '비가 내리는' 하나의 과정이 분리되면서, 첫번째 비는 주어가 되고 두번째 비는 동사가 된다.)

 

4.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고통/쾌감(쾌/불쾌)이란 무엇인가?

[고통/쾌감(쾌/불쾌)에 대한 통념] ① 고통과 쾌락이 모든 행위의 동기이다. ② 고통과 쾌락은 대립되는 감정이다. ③ 인간은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피한다.

[니체의 퍼스펙티브] ① 행위의 동기는 '힘에의 의지'이다. 쾌/불쾌는 힘의 증대/감소의 '차이'가 감정으로 번역된 것! ② 고통과 쾌락은 대립되는 감정이 아니다. ③ 인간은 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쾌를 피하는 것도 아니다.

 

#694. 불쾌는 힘의 작용(지배/저항)에 필연적이며, 불쾌는 삶을 자극하고 힘에의 의지를 강화한다.
어떤 힘이 지배할 목적으로 찾고 있는 저항에 따라, 실패와 불행의 크기도 커진다. 모든 힘들이 이 저항에 대해 방출되는 한, 모든 힘의 작용에는 필연적으로 불쾌가 내포되어 있다. 오직 이 불쾌가 삶의 자극으로 작동하고, 힘에의 의지를 강화한다.

#695. 쾌/불쾌의 감정의 본질 :: 힘의 증대/감소에 따른 ‘차이’가 의식에 떠오르는 것 (쾌/불쾌는 힘의 증대/감소가 감정으로 번역된 것!)
쾌락과 고통이 힘감정과 관계있다면, 삶은 힘의 증대을 표현할 것이다. 힘이 증대하면, 그 차이가 의식 속으로 들어올 것이다(*쾌). 일정한 수준의 힘이 유지된다면, 힘에 따른 쾌감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질 것이다. ...... 따라서 쾌감의 본질(힘이 증대하면 그 차이가 떠오르는) 속에 힘의 증대의지가 들어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힘의 감소하면, 그와 반대의 차이가 의식에 들어온다(*불쾌). 이전에 강했던 순간의 기억이 현재의 쾌감을 떨어뜨린다. 이 상태에서는 쾌감을 축소시키게 된다.

#696. 쾌감의 원인은 의지의 만족이 아니라, 의지의 불만족에 있다

쾌의 원인은 의지의 만족이 아니라, 의지가 전진하는 것을 의욕하고 앞길을 막는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쾌감은 의지의 불만족(반대자와 저항 없이는 의지가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있다. '행복한 인간'은 무리적 인간의 이상일 뿐이다.

#696. 쾌와 불쾌는 반대가 아니다. 작은 불쾌는 쾌를 증대시키지만, 작은 쾌는 불쾌를 증대시키지 않는다. 
고통은 쾌와는 다른 무엇이지만, 쾌의 반대가 아니다. ‘쾌’의 본질이 힘의 증대감(비교를 전제로 하는 차이의 감정)이라 하더라도, 이것으로 ‘불쾌’의 본질은 정의되지 않는다. 게다가 작은 불쾌한 자극이 쾌의 조건이 되어 힘의 감정ㆍ쾌의 감정이 급속히 증대된다. ex. 성행위 때의 성적인 가려운 통증. 이와 같이 불쾌가 쾌의 요소로 작동하고 있다. 작은 저지가 극복되면, 잇달아 작은 저지가 발생하고, 이것 또한 극복된다. 저항과 승리의 이 같은 놀이가 쾌의 본질을 구성하는 바, 넘치는 힘의 총체적 감정을 가장 강하게 자극한다. 이와는 반대로, 작은 쾌의 자극에 의하여 고통의 감각이 증대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쾌와 고통은 결코 정반대의 것이 아니다. 

#700. 고통의 지적 성격
고통은 그 순간에 입은 '피해'를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피해가 그 사람에게 지니는 '의미'를 암시한다.

#490. 고통은 의식적인 것이어서, '해롭다'는 판단에 의존하고 있다. (고통에는 해롭다는 판단이 투영된 것.)

#670. 감정은 지성의 창작물이며, 존재하지도 않는 원인들이 날조한 가공물이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육체적 감각은 지적으로 해석된다. … ‘쾌감’과 ‘고통’안에 이미 판단(*유용/유해)이 내재해 있다. 그래서 힘감정을 증대시키는지 여부에 따라서 자극(쾌감/고통)이 느껴지는 것이다.

#701. 쾌/불쾌는 유용/유해의 감정형식이다. (*쾌/불쾌는 유용/유해의 판단이 감정으로 번역된 것)
쾌/불쾌는 유용/유해에 따른 부대사항이지, 아무런 원인도 아니다. 쾌/불쾌는 감정의 형식을 빌어 말하고 있는 ‘유용/유해’이며, 따라서 일시적이고 의존적인 것이다.

#702. ‘인간은 쾌를 추구하고, 불쾌를 피한다’는 통념에 대하여
인간은 쾌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불쾌를 피하는 것도 아니다. 쾌/불쾌는 (*원인이 아니라) 단순한 결과-단순한 수반현상이다, 인간이 의욕하는 것, 생명있는 모든 유기체의 최소부분이 의욕하는 것, 그것은 힘의 증대이다. 힘의 증대를 추구하는 노력 속에서 쾌도 생기도 불쾌도 생긴다. 힘에의 의지로부터 인간은 저항(*불쾌를 동반하는)을 탐구하며 저항할 무엇인가를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불쾌는 스스로 힘에의 의지에 저항하는 것으로서 하나의 정상적인 사실, 모든 유기적 사건의 정서적 요소이다. 인간은 불쾌를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쾌을 부단히 필요로 한다. 모든 승리, 모든 쾌감, 모든 사건은 극복된 이러한 저항(*불쾌를 동반하는)을 전제로 한다. 
원시적인 영양작용이라는 가장 단순한 경우를 예로 들면. 원형질은 스스로에게 저항하는 무엇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자신의 위족을 뻗치는데, 그것은 굶주림에서가 아니라 힘에의 의지에서이다. 잇달아 원형질은 저항물을 극복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동화하려고 시도한다. 즉 영양이라는 것은 보다 강력해지려는 근원적 의지에서 결과하는 현상이며, 힘에의 의지의 유효한 응용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쾌는 우리의 힘감정의 감소를 결과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극으로서 이 힘감정으로 행동을 유발한다. 저항(*불쾌를 동반하는)은 이 힘에의 의지의 자극제인 것이다. 

#703. 2가지 종류의 쾌/불쾌
2가지 불쾌 : 힘을 자극하는 불쾌, 힘이 소진된 불쾌 > 불쾌는 불쾌의 일종인 소진과 오해되어 왔다. 소진은 힘에의 의지의 깊숙한 감소ㆍ저하(힘이 입는 현저한 손실)를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말하는 것. a) 힘을 강화하는 자극수단으로서의 불쾌가 있고, b) 힘이 탕진되어 버린 후의 불쾌가 있다. a)의 경우 불쾌는 하나의 자극제이며, b)의 경우 불쾌는 과도한 자극의 결과이다. 저항할 수 없는 무능함이 b)의 불쾌이며, 저항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이 a)의 불쾌에 속한다. 
2가지 쾌 : 혼수의 쾌, 승리의 쾌 > 소진상태에서 감각되는 쾌는 혼수(수면)이며, 반대상태에서 감각되는 쾌는 승리이다. 심리학자들은 이 2가지 쾌(혼수의 쾌와 승리의 쾌)를 구별하지 않았다. 소진한 자들은 안식ㆍ휴식ㆍ평화ㆍ정적을 의욕하고(니힐리즘적 종교ㆍ철학의 행복), 부에 넘치고 생기에 가득찬 자들은 승리(극복된 적수를, 보다 광대한 영역의 힘감정)를 의욕한다. 유기체의 모든 건강한 기능은 이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유기체는 힘감정의 생장을 추구하여 격투하는 복합체이다! 

 

5.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행복이란 무엇인가?

[행복에 대한 통념] ① 인간은 행복을 추구해왔다. 

[니체의 퍼스펙티브] ① 인간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은 힘에의 의지를 욕망한다.  ② 행복은 증대된 힘감정의 자각에 불과하다. 행복은 수반되는 것이지, 동기가 아니다. 

#688. 힘에의 의지가 근본적인 욕망형식이며, 행복은 달성된 힘감정에서 생기는 것이다.
심리학의 일원론적 관점. 우리의 통념 “여러 형식들이 단 하나의 기원에서 발달했다." 나의 이론 “힘에의 의지가 근본적인 욕망형식이며, 그 밖의 모든 욕망은 힘에의 의지에 의하여 형성된 것에 불과하다.” 
모든 생물이 추구하는 개체의 ‘행복’을 대신하여 ‘힘’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모든 생물은 힘을 향하여, 힘의 증대를 향하여 노력한다.” 쾌감(*행복감정)이란 달성된 힘감정의 증후(차이에 대한 자각)에 불과하다. 모든 생물이 쾌감(행복)을 추구하여 노력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추구하는 것이 달성될 때 쾌감(행복)이 생기는 것이다. 쾌감(행복)은 수반되는 것이지, 쾌감(행복)이 동기는 아니다. 모든 몰아붙이는 힘은 힘에의 의지이며, 이것 이외에는 어떠한 물리적ㆍ역학적ㆍ심리적 힘도 없다. 

#704. 인간의 행복과 식물의 의지
심리학에 있어서 근본신조가 심한 왜곡이나 화폐위조인 것은 어째서인가? 예컨대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여 노력한다” 도대체 이 주장에 참된 것이 있을까? “삶이란 무엇인가, 삶이란 어떤 종류의 노력ㆍ긴장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공식은 동물이나 나무나 풀에도 타당하지 않으면 안된다! ...... 개체의 힘영역은 시간에 따라 부단히 변화한다. 그런데 개체들이 이런 식으로 변화할 때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자기를 확장ㆍ신체화ㆍ생장하는 행동은 저항하는 것을 제압하고자 노력하는 행동이다. 운동은 본질적으로 불쾌상태(*저항에 따른)와 결합하고 있는 것이며, 여기에서 몰아세우고 있는 것(*힘에의 의지)은 불쾌를 의욕하는 한, 어쨌든 행복과는 다른 것을 의욕하고 있다. 무엇을 둘러싸고 원시림의 수목은 서로 투쟁하고 있는가? ‘행복’을 둘러싸고 인가? ‘힘’을 에워싸고 있다!
자연의 맹위를 지배하는-자신의 야성ㆍ방자함을 지배하는 인간(욕망이, 복종하는 것을ㆍ유용하게 되는 법을 배우고 만 것이다)은 인간 이전의 생물에 비하면, 거대한 ‘힘’의 양을 나타내고 있다. ‘행복’의 증대를 나타내고 있는 게 아니다! 인간이 행복을 추구해왔다고 어떻게 주장할 수 있겠는가? ...... 삶(*인간)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이며, 모든 생존(*생명)이 시인되지 않으면 안되며, 삶만이 시인되어서는 안된다. 즉 삶(*인간)은 힘(*생명)의 생장형식의 표현이다.

 

6. 힘에의 의지의 관점에서 생존본능(자기보존)이란 무엇인가? 니체는 어떤 관점에서 다윈주의에 반대하는가?

[다윈의 생존본능] "생명체의 기본적인 것은 생존본능이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 "힘에의 의지는 생명체가 스스로를 보존하고 향상시키려는 의지이다. 생존본능은 힘에의 의지가 힘을 발휘한 결과이지 목적은 아니다." 

#688. 모든 생명은 보존이 아니라 힘의 증대를 위해 모든 일을 한다.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의욕하지 않는 능력이 없다”고 하면, “자기 자신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는 듯”이 보인다. ‘자기보존’에 관한 스피노자의 명제는 변화를 정지시킬 수밖에 없다!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한 것이 되기 위하여 모든 일을 한다. (*코나투스 : 자신을 보존하려는 욕구 <······> 자기를 관철하려는 사물의 현행적 본질. 인간의 경우에는 충동ㆍ의지ㆍ욕망으로 나타난다. 스피노자의 코나투스니체의 힘에의 의지는 멀지 않은 개념이다. 고병권)

#689. 힘의 중심에서 발하는 유일한 실재성은 보다 강해지려는 의지이다.
모든 힘의 중심에서 발하는 보다 강해지려는 의욕이 유일의 실재성이다. 자기보존이 아니라, 자신의 것으로 만들고 지배하고, 보다 더한 것이 되고, 보다 강한 것이 되고자 하는 의욕이 유일한 실재성이다. 우리에게 숙지된 존재형식으로서의 삶은 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이다. 삶의 모든 과정은 여기(힘의 축적에 대한 의지)에 지렛대를 가지고 있다. 그 어느 것도 보존하고자 의욕하지 않으며, 모든 것이 집적되고 축적되어야 한다. 삶은 하나의 특수한 경우로서 힘의 극대감정을 추구한다. 힘의 극대감정을 추구하는 것은 힘의 증대를 추구하는 노력이며, 노력이란 힘을 추구하는 노력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가장 깊고 가장 내적인 것은 어디까지나 힘에의 의지이다. 

#774. 가장 저급한 형태의 힘에의 의지는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살려는 욕망, 자기보존본능이다.

 

7. 왜 강자는 약자에 맞서 자신을 기켜야 하는가? (#685)

[다윈주의] 생존투쟁에서 강한 것이 살아남는다. "자연선택과 종의 진보는 보다 강하고 체질적으로 보다 훌륭한 생명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니체] 생존투쟁에서 약한 것이 지배한다. "자연선택이 예외적이고 운 좋은 인간들에게 절대로 유리하지 않다. 따라서 강자는 약자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655. 약자는 일체화의 욕망과 함께 있으며, 강자는 차이, 변화의 욕망과 함께 있다.  

약한 사람(the weaker vessel)은 영양섭취의 필요성 때문에 강한 사람에 끌린다…. 강한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스스로 보호한다… 일체화의 욕망이 커질수록 더 약함이 거기에 있다. 반면 변화, 차이, 내면적 붕괴의 욕망이 증대할 수록 거기에는 큰 힘이 있다. 무엇인가에 접근하려는 본능과 무엇인가를 물리치려는 본능은, 유기물의 세계에서뿐만 아니라 무기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로 결합의 끈이다. 이 두가지 본능을 뚜렷이 구분하는 것은 하나의 편견이다. 힘들의 모든 결합에서 힘에의 의지를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강한 자에게 맞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약한 자에겐 무자비하게 달려드는 힘에의 의지 말이다. 

#684. 생존투쟁에서 약자의 교활함이 강자의 힘을 이긴다.   

다윈에 반대하며. 생물학자들은 생존투쟁을, 약한 생명체들의 죽음과 강인한 존재들(가장 유능한 전투원들)의 생존으로 보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생물학자들은 모든 생명체의 완벽성이 지속적으로 증대될 것이라고 상상하고 있다. 반대로, 우리는 생존투쟁에서 운이 강력한 자들의 명분에 이롭게 작용하는 것 못지 않게, 약한 자들의 명분에도 이롭게 작용한다는 것을(교활함이 종종 힘을 이긴다는 것을) 확신한다. 
나의 전반적인 견해. 첫번째 명제는 인간은 하나의 종으로서 진보하지 않는다. 보다 높은 표본이 성취되지만, 그런 표본은 생존하지 못한다. 종의 전반적인 수준은 높아지지 않는다. 두번째 명제는 하나의 종으로서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비교할 때 어떤 종류의 진보도 보이지 않는다. 인간 종에서도 마찬가지로 탁월한 사람들(진화의 행복한 예들)이 가장 먼저 사라지는데, 이들은 온갖 형태의 쇠퇴에 노출된다. 그들은 극단적이며, 바로 그 점이 거의 쇠퇴를 의미한다…. 아름다움과 천재성, 카이사르 같은 인물은 지속되는 기간이 짧은 점이 특징이다. 세번째 명제는 인간의 길들이기(문화)가 매우 깊이 각인되지 않는다. 인간의 순화가 피부 아래 깊이 들어갈 때, 그것은 즉각 쇠퇴가 된다. (유형: 기독교 교도). “야성적인” 인간(또는 도덕적인 용어를 빌리면, 사악한 인간)은 자연으로 복귀하는 것이며, “문화”의 효과로부터 치료되는 것을 나타낸다.

#685. 현실도덕에서 평균적인 사람은 예외적인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 인류의 힘의 증가는 예외자보다 평균자에 의해 보장된다.

오늘날 다윈과 그의 학파가 보고 있거나 보기를 원하는 것들, 즉 보다 강하고 체질적으로 보다 훌륭한 생명체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자연선택과 종의 진보와 정반대되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 운이 좋은 사람들이 억압당하고, 보다 훌륭한 것을 타고난 유형들이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당하고…. 내가 모든 변화의 종국적 이유로 인식하고 있는 힘에의 의지가 자연선택이 예외적이고 운 좋은 인간들에게 절대로 유리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가장 강하고 행복한 천성의 소유자들이 조직화된 무리본능과 공포의 지배를 받는 다수 앞에서 약해지 때문이다. … 참으로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강한 자는 언제나 약한 자에, 체질적으로 훌륭한 자는 언제나 체질적으로 약한 자에, 건강한 자는 언제나 병들고 생리적으로 실패한 자들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현실로부터 도덕을 끌어낸다면, 그 도덕은 이런 내용일 것이다. ‘평균적인 사람이 예외적인 사람보다 더 소중하고, 쇠퇴한 사람이 평범한 사람보다 더 소중하다. 따라서 비非존재를 추구하려는 의지가 생명을 추구하려는 의지보다 더 강하다’ … 요약하면 어떤 종(*인류)의 힘의 증가는 아마 그 종의 운 좋은 자식들의 우위에 의해 보장되기 보다는, 평균적이거나 낮은 유형들의 우위에 의해 보장될 것이다. 후자는 대단한 다산성과 지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전자는 수반되는 위험도 더 크고, 낭비도 더 심하며, 숫자의 감소도 훨씬 더 빨리 일어난다

 

8. 유기적 과정에서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9. 인간의 관점에서 권력의지란 무엇인가?

 

10. 생성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1] 인식의 영역에서 :: 생성의 세계는 사물의 세계이고, 존재의 세계는 인식의 세계이다 ('생성하는 세계'와 존재에 대한 인식 사이의 불일치)

#492. (*정신과 현상학이 아니라) 육체와 생리학이 출발점이다. 육체와 생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이유는 이렇다. ...... 살아있는 통일체들은 부단히 생성ㆍ소멸하며, '주체'는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507. (믿음이 진리의 본질이다. 우리의 믿음이 진리의 세계를 생성이 아니라 존재로 조작했다) “이러이러한 것은 이렇다고 나는 믿는다”는 가치평가가 ‘진리’의 본질이다! 가치평가 속에는 보존ㆍ생장의 조건들이 표현되어 있다. 우리의 인식기관이나 감관은 보존ㆍ생장의 조건들에 관해서만 발달하고 있다. ...... 참의 세계와 가상의 세계 이 대립은, 나에 의해 가치관계로 환원된다. 우리는 우리의 보존조건존재 일반의 술어(*속성)로 투영해왔다. 번영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믿음에 있어서 안정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 이것으로부터 우리는 ‘참의’ 세계는 생성하는 세계가 아니라, 존재하는 세계라는 것을 조작하고 만 것이다.

#517. ‘자아’는 하나의 존재(생성이나 진화의 영향을 받지 않는)로 여겨진다. ...... 생성상태에 있는 세상은 공식 같은 것으로 압축되지 않는다. 그것은 허위이고, 그 자체로 모순이다. 인식과 생성은 서로를 배척한다. 따라서 인식은 다른 그 무엇임에 틀림없다. 인식에 앞서 무엇보다 먼저 사물들을 알 수 있는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어떤 종류의 생성 자체가 존재라는 환상을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 #518. 결국 모든 것이 생성이라면, 인식은 존재를 믿는 것에 기초해서만 가능하다. / #520. 동일률도 똑같은 것이 있다는 현상적 사실에 근거하지만, 엄격히 말해 생성상태에 있는 어떤 세계를 이해하고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성의 세계는 엄밀한 의미에서는 '개념'되거나, '인식'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식’이란 것은 오직 ‘이해하고, 인식하는’ 지성이 대략적으로 조정된 어떤 세계를 이미 발견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 #521. '논리적 가상성'에 관하여- 개념ㆍ유ㆍ형식ㆍ목적ㆍ법칙의 형성은 세계의 확립이 아니라,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단순화된 이해하기 쉬운 세계를 만들어 낸다. / 우리는 부조화나 문제를 사물 속으로 넣어 읽는다. 이는 언어의 형식으로만 사고하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는 것이다(이를테면 주어, 술어 따위를).

#531. '모든 변화에는 원인이 없어서는 안된다'라는 추론은 신화이다. '번개가 번쩍인다'는 번쩍인다는 것을 활동으로서, 주체로서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사건과는 동일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생성'하지 않는 '존재'를 상정한 것이다. 사건을 결과를 야기하는 활동으로서 존재로서 설정하는 것은 이중의 오류, 혹은 해석이다. / #538. 존재와 사물들, 온갖 항구적 실체들에 대한 가르침생성과 진화에 관한 가르침보다 백배는 더 쉽다.

#556. 힘에의 의지의 한 형태로서, 해석하는 행위 자체가 하나의 열정으로 (그리고 하나의 존재가 아니라 생성으로) 나타난다

#585. 인간은 ‘진리’를 추구한다. 자체적으로 모순을 일으키지 않고, 속이지 않고, 변화하지 않고, 참의 그런 세계를 말이다. 이 대목에서 인간은 현실개념을 어디서 끌어내는가? 사라지고 변화하고 달라지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멸과 혐오. 그렇다면 안정에 대한 이런 높은 평가는 어디서 비롯되는가? 존재에 대한 이런 믿음은 결과로서만 나타난다. 진정한 제1 원동력이 모든 생성에 대한 불신과 경멸이기 때문이다. ···

#617. 생성에 존재의 성격을 불어넣으려 하는 것(*인식의 작업), 그것이 가장 높은 권력의지이다.

[2] 자연의 영역에서 :: 생성은 목표가 없으며, 존재 속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 생성은 매순간 정당화되어야 한다. 

#635. 역학적 힘의 양의 본질은 다른 모든 양과의 관계 속에, 다른 모든 양에 미치는 '결과를 야기하는 행동' 속에 있다. 힘에의 의지는 존재도 아니고 생성도 아니고 파토스Phatos이며, 이 힘에의 의지로부터 생성(결과를 야기하는 행동)이 나온다.  

#690. '힘에의 의지'는 절대로 생성을 끝낸 것이 될 수 없다. 

#708. ‘생성’의 가치에 관하여. ‘만약 세계의 운동이 하나의 목표상태를 갖고 있다’고 하면, 그것은 달성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유일한 근본사실은 “세계의 운동이 어떤 목표상태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따라서 목표상태가 필연적인 철학이나 과학적 가설(예컨대 기계론)은 저 근본사실(*세계의 운동은 목표상태가 없다!)에 의해 논박당하고 있다. ...... 생성은 그런 최종적인 설계 같은 것에 의존하는 일 없이도 설명되어야 한다. 생성은 매순간 정당화될 수 있어야 한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현재가 미래에 의해 정당화되어서는 안 되며, 과거가 현재에 의해 정당화되어서도 안된다. …. 절대적인 존재의 성격을 가진 것은 어떤 것이든 허용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경우에 생성이 가치를 잃고 불필요한 난센스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절대적인 존재에 관한 이 같은 가설(“보다 나은 세상”, “진정한 세상”, “이 세상 너머의 세상”, “물 자체” 등)이 이 세상에게 쏟아진 온갖 비방의 원천이다. 1) 생성은 목표상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존재' 속으로 흘러들어가는 일이 없다. 2) 생성은 가상상태도 아니며, 존재의 세계야말로 가상의 세계일 것이다. 3) 생성은 매순간 똑같은 가치를 지니며, 그 가치의 총계는 언제나 동일하다. 달리 표현하면, 생성은 전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않는다. 생성과 관련하여 '가치'라는 단어가 의미를 지닐 수 있는 측정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생성은 가치로 측정될 수 없고, '가치'라는 말은 생성과의 연관을 설명할 수 있는 의미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715. 가치라는 관점은, 생성과정 속에 나타나는 '비교적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복잡한 형성물에 관한 보존ㆍ상승의 조건'에 관한 관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지속성 있는 궁극적 단일체도 어떠한 원자도, 단자도 없다. 여기에서도 '존재하는 것'은 우리에 의하여 부여된 것이다. ...... (실제적이고 유용한 퍼스펙티브적 여러 근거로부터) '지배형태'는 끊임없이 계속 생장한다. '가치'는 본질적으로 이 지배적 중심의 증대/감소에 대한 관점이다. (가치 중심은 어쨌든 ‘복수(다수성)’이다. 그러나 ‘단일성’은 생성의 본성 가운데에는 현존하고 있지 않다.) 언어라는 표현수단은 '생성'을 표현하는데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불변하는 것', '사물'같은 조잡한 세계를 부단히 세우려하지만, 이는 우리의 보존욕구 탓이다. 상대적으로 극미한 세계야말로  ...... 어떠한 의지도 없다. 있는 것은 부단히 그 힘을 증대/상실하는 충동들의 동맹(*복합체)이다.

[3] 개인과 사회의 영역에서 :: 생성은 무구하다.

#786. '자아'라는 개념의 주위에도 거짓독단이 많이 모여있다. '자아'는 원자적이고 비아와 반대인 것으로 여겨졌다. '자아'는 또 생성으로보터 자유로워졌고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선언되었다. 자아의 엉터리 실체화가 아닐 수 없다. 

787. 목적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일의 절대적 필연성. 생성의 무구야말로 우리에게 최대의 기력과 최대의 자유를 부여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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