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님 /
(밑줄 부분에서 모두 깊은 절을 한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
저승에 가시어 사흗날에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 하늘에 올라 전능하신 천주 성부 오른편에 앉으시며
그리로부터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믿나이다.
성령을 믿으며 /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와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으며 / 죄의 용서와 육신의 부활을 믿으며
영원한 삶을 믿나이다. 아멘“
- 사도신경의 전문이다. 사도신경은 카톨릭 입문자들이 의무적으로 암송하여야 하는 – 입문한 이후에는 전두엽이 “마비된” 상태에서도 암송이 가능한 - 신앙고백문의 일종이다. 짐작하는 바와 같이, 사도신경 안에는 니체가 바울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는 기독교의 전모*가 드러나 있다.
* 신약은 4대 복음서를 포함하여 총 27권의 성경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21권이 서신(Letter)의 형태로 작성되었고, 서신 가운데 13개가 바울에 의해 집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울 서신의 주요 내용은 그리스도의 신성, 믿음을 통한 구원,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과 부활, 세상의 종말, 교회의 의미, 성찬의 전례, 성직자의 덕목 등이다.
- 바울이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예수의 모습은, 중세는 물론 현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을 이루고 있다. 니체가 주장하는 바울의 오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신의 모습으로 창조된 인간은 그 누구나 신의 자녀일진데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의 유일한 아들로 승격시킴으로써 예수를 신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둘째, 예수는 사도의 한 사람으로서 겸허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인간들에게 “진정한 삶(das wahre Leben)”이 무엇인지를 설파하였을 뿐, 원죄의식 따위로 인간을 협박한 적도 부활이나 영생의 기적을 약속한 바도 없다.
셋째, 예수가 부활하여 인간을 심판하러 온다는 바울의 훈계는, 야생마 같은 찬달라들을 길들임으로써 성직자와 교회의 권위를 공고히 하고자 한 바울의 간계(공포마켓팅)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본디 실체를 알 수 없는 두려움과 공포 – 로망 롤랑에 따르면 ‘망망대해에 있는 느낌’-를 견디지 못하기에, 교회의 길들임을 내면화하고, 교회의 보편화에 봉사하며, 죽은 성인들과의 영적 결합에 갈급하면서 구원과 영생의 기적으로 예수를 오마주하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 참고로 나는 열 살에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한 이후로 현재까지도 줄곧 카톨릭 신자임을 “표방”하고 있다. 그럼에도 니체를 읽기 훨씬 이전부터 이미 성경을 믿지 않았고 교회를 멀리하여 왔다. 니체를 읽고 내 신앙의 허구성을 직시하게 되었음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우습게도, 얼마 전 어머니가 유방암 진단을 받았을 때 - 지금은 건강하시다-, 나의 교만을 통렬히 반성하며 신께서 나의 오만함을 아시고 나에게 벌을 주려는 것이라는 생각에 휩싸였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뼈 속 깊이 데카당이다.
- 종교의 길들임, 그리고 또 다른 종교로서 내 안에 자리 잡은 “물신주의”와 직면하기 위하여, 좀 더 거창하게 말하면 이 노예 같은 삶에서 빠져나와 단독자로서 나의 길을 가기 위하여, 나는 목하 이 방대하고 난해한 ‘니체’와 씨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원 안에서 달리며, 빠져 나갈 구멍을 찾고 있구나.
헛되이 달리고 있네. 넌 그걸 알고 있어.
잘 생각해 봐.
유일한 출구는 너에게 있어:
네 안으로 들어가렴.“
- 에리히 캐스트너, ‘덫에 걸린 쥐에게’
- 동물들이 사는 에덴동산과 초인(위버멘쉬)이 사는 광야. 그 사이에 놓인 아득한 심연. 인간은 그 심연 위에 가로 놓인 밧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에덴동산에서 광야로 넘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떨어지기를 각오하는 것, 그것뿐이다. 몰락하려는 자만이 심연을 건너갈 수 있다. 고로, 부디 이 방대하고 난해한 '니체'를 읽는 내내, 몰락과 쇠퇴가 늘 함께하기를..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면 달리 사는 법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서문 4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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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1) 나에게 니체를 “적극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잠시 니체가 되어서 그의 세상을 유영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니체의 여성 혐오, 영웅주의, 귀족주의는 나의 ‘니체되기’를 심히 방해한다. 그럴 때마다 의식적으로 ‘여성’이라는 단어를 ‘수동성’으로, 영웅주의나 귀족주의를 ‘힘의 숭배’ 내지는 ‘강한 자에 대한 예찬’으로 바꾸어 읽는다. 이것이 니체에 대한 반감을 극복하는 나만의 독법이다.
(덧붙여2) 번역 관련 수정의견:
1) 책 전반에 문화(Cultur), 관능성(Sinnlichkeit)이라고 번역된 단어들은 각 ‘문명’, ‘감각’으로 번역하는 것이 어떨지.
2) 아포리즘 145 “만약에 지배 계급의 산물인 아리아인의 긍정적인 종교를 보길 원한다면, 마누 법전을 읽어야 한다. 만약에 지배계급의 산물로 나온 셈족의 긍정적인 종교를 보길 원한다면 코란을 읽거나 구약성경 중 초기 부분을 읽어야 한다. 만약에 억압받는 계층에서 나온 셈족의 부정적인 종교를 보기를 원한다면, 신약성경을 읽어야 한다. 만약에 지배계급의 산물이면서 부정적인 아리아인의 종교를 보길 원한다면, 불교를 공부해야 한다.(..)”
=> 니체의 구분에 따르면 “예스”라고 말하는 종교와 “노”라고 말하는 종교가 있는데, 쉽게 말해 “예스”라고 말하는 종교는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하여도 좋은 것들을 알려 주는 종교라고 한다면, “노”라고 말하는 종교는 피지배계급으로 하여금 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알려 주는 종교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아포리즘 145에서 “긍정적인(ja-sagend) 종교” 또는 “부정적인(nein-sagend) 종교”라고 번역된 단어들은 오히려 있는 그대로 “‘예스’라고 말하는 종교” 또는 “‘노’라고 말하는 종교”라고 번역하는 게 더 적합할 것으로 보인다.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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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뤼바인
네 선생님, 제가 어떤 유형의 인간으로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종교를 대하고 있는지 차분히 정리해 볼게요.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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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글뤼바인님의 후기, 잘 읽었습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글이네요. ^^
저도 니체의 책을 읽는 동안은 니체가 되어보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글뤼바인님 말씀처럼, 여성혐오나 귀족주의적 면모가 보일 때는 낯설고 당황스럽고 때때로 화가 나기도 합니다. 그 표면적인 표현에만 집중한다면 니체 읽기를 계속할 수 없을 거 같아서, 저도 그 표현 뒤에 숨은 의미, 니체적 의미나 의도를 떠올려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쉽지는 않지만요. 비판이나 비난은 잠시 미뤄두고 우선은 깊이 니체의 세계에 빠져보고 싶은 것이 제 현재 마음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이야기 많이 나눠주시면 좋겠네요! ^^
1. 종교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적 긍정
우리에게 까다로운 독일어 원문독해의 기쁨(?)을 안겨주시는 글뤼바인 덕분에, 우리세미나가 한층 깊고 풍성해지는 것 같습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이 남는 글입니다.! 다비도 그러하고 글뤼바인 역시 삶에서 종교의 의미가 특별한 분들이니 만큼, 니체의 종교에 대한 퍼스펙티브(#61)에 대해 말해보려고 합니다.
니체의 퍼스펙티비즘Perspectivism은 그 자체로서 강자의 무기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종교에 대한 니체의 퍼스펙티브적 긍정은 놀랍습니다. 특히 [힘에의 의지] 뿐 아니라 니체의 저작 모든 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처럼, '니체가 기독교적 사유에 어떻게 비판적인지'를 보면 더욱 그렇습니다. 니체는 [선악의 저편] 3장에서 퍼스펙티브적 종교관(#61)과 독단주의적 종교관(#62)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선악의 저편] #61에서 니체는 '힘에의 의지' 차이(인간유형)에 따라 종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종교를 어떻게 긍정(활용)할 것인가를 말합니다. 글뤼바인의 종교에 대한 태도변화도 우리 신체가 갖는 '힘에의 의지'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 신체가 강할 때 종교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지만, 우리 신체가 약해지면 종교는 쉽게 우리를 지배하려 들 것입니다.
2. [선악의 저편] #61 퍼스펙티브적 종교관
[종교 일반의 의미 :: 인류의 육성ㆍ교육수단] 자유정신의 철학은 인류의 총체적 발전에 양심을 지닌 포괄적인 책임을 진 인간이다. 자유정신의 철학은 인류의 육성사업ㆍ교육사업을 위해 종교를 이용한다. 종교의 속박ㆍ보호 아래 다층적이고 다양한 인간 종류가 육성된다.
[첫째 유형, 강자에게 종교의 의미] 강한 자, 독립적인 자, 명령하도록 준비된 자에게 종교란, 저항을 극복하고 지배할 수 있는 수단 이상이다. 그것은 지배자와 예속자를 공동으로 묶는 유대의 끈이고, 예속자의 양심이며 복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속마음을 지배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둘째 유형, 은둔자에게 종교의 의미] 만일 고귀한 혈통을 지닌 개인이 높은 정신성으로 은둔적ㆍ명상적 생활에 기울어질 경우, 종교는 조야한 지배의 소란스러움을 벗어나 안정을 취하게 하고 정치적인 더러움을 벗어나 순수하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다. 브라만승려들은 종교조직에 힘입어 왕을 임명할 권한을 백성에게 부여했지만, 그들은 왕을 초월하는 과제를 지닌 인간으로 멀리 떨어져 밖에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나는 왕보다 위대하다.” (cf. 왕보다 자유로운 노예, 왕에게 휘둘리지 않는 노예)
[세째 유형, 새롭게 부상하는 계층에게 종교의 의미] 지배받는 사람에게도 언젠가 지배하고 준비하는 가르침ㆍ기회를 준다. 종교는 서서히 등장하는 계층을 위한 것이며, 그들 안에서 의지의 힘과 자기지배의 의지가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종교는 더 높은 정신성의 길을 가도록, 자기극복, 침묵 고독의 감정을 시험하는 자극을 제공한다. 천민 종족이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면, 금욕주의와 청교도주의는 불가결한 교육수단이다.
[네째 유형, 평범한 사람들에게 종교의 의미] 평범한 사람들에게 종교란 모든 일상이나 총체적인 영혼의 천박함이나 반동물적인 빈곤함을 미화하며 정당화한다. 삶에 대한 종교의 중요성은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태양빛을 주며, 자신의 모습을 견딜 수 있게 한다. 에피쿠로스 철학이 했던 것처럼, 고통을 이용하는 것처럼 하면서 정당화시킨다. 그리스도교나 불교의 경건함은 비천한 사람들을 높은 가상적 질서로 들어가도록 가르치고, 참혹하게 사는 현실의 질서에 만족하도록 하는 기술이다.
3. 종교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관점으로 나누어지는 인간유형에 따라 종교가 다른 의미를 가질 것이며, 그런 방식으로 종교는 인류의 육성수단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심지어 종교는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태양빛을 주며, 자기 모습을 견딜수 있게 한다'고 약자에게 종교가 갖는 의미를 말합니다. (즉 종교는 마취제가 필요한 사람에게 진정제와 마취제의 역할을 합니다.) 약자적 '힘에의 의지'가 우리 신체를 지배하고 그래서 우리가 고통과 절망에 빠져있을 때, 종교가 우리에게 태양빛을 주고 자신을 견디게 한다면 그것은 좋은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약자적 신체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종교를 활용하여 그러한 약자적 상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고통과 절망을 극복할 수 없는데, 종교나 외부를 활용하지 않는 것도 자신에게 나쁜 일입니다. (극단적으로 스스로를 포기하는 사태로 갈 수도 있으니!) 반대로 우리가 충분히 힘에의 의지를 가지고 있는데도, 외부에 의존하는 것도 자신에게 나쁜 일입니다. (자신의 잠재력을 스스로 믿지 못하는 것이니!) 그리고 최종적으로 니체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의 신체는 힘에의 의지의 어떤 상태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