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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에세이] 나의 니체에게 해가 쓰는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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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니체. 저는 한국에 사는 지해라고 합니다. 독일어는 전혀 못 해요. 그래서 당신의 책을 한국어로 누군가 번역해줘서 읽을 수 있었어요. 언젠가는 제가 누군가의 도움 없이 당신의 책을 읽을 수 있는 날이 올까요? 그랬으면 좋겠네요. 당신께서 쓰신 책을 읽다가 당신께 편지를 쓰고 싶어졌어요. 당신께서 이 편지를 읽어주실지 모르겠지만요. 만약에 읽으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궁금하네요.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거 같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래도 끝까지 읽어주셨으면 좋겠네요.

저는 당신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어요. 당신의 이름, 당신이 쓰신 책 목록 정도가 제가 알고 있는 전부죠. 그렇지만 저는 당신에 대해서 더 알아가고 싶어요. 아니, 더 솔직해진다면 당신을 통해서, 당신을 이용해서 나라는 사람을 알아가고 싶어요. 나는 지금도 너무 궁금해요. 왜 당신이었을까요? 지금까지 제가 스치듯 공부해온 꽤 많은 철학자, 교육학자들이 있었어요. 근데 왜 꼭 니체 당신이어야 했을까요? 저는 그게 너무 궁금해요. 알고 싶어요. 왜 당신이 나에게 그토록 매력적으로 다가왔는지. 당신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당신의 책을 읽고 이해하기보다는 멋대로 해석하고 오해하고 왜곡하면서도 왜 저는 계속 당신을, 그리고 나를 알아가고 싶을까요?

 

     ☀ 알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허물어가는 공부     

저는 공부를 통해서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면, 그리고 저에 대해서 꾸준히, 깊이 성찰하면 진리를 깨우치고 저라는 인간에 대해서, 무엇보다 제 삶의 목적과 의미를 이해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생각했어요. 아직은 공부하고 성찰하는 노력이 부족해서 잠시 방황하고 있을 뿐이라고요. 하지만 그 방향이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당신을 통해서 깨달았어요. 저는 솔직하게, 용감하게 유한성이라는 삶의 진실에 직면할 용기가 없어서 끊임없이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있었을 뿐이라는 걸. 전 죽음과 소멸을 두려워하느라고 제가 정말로 귀하게 여기고 향유 해야 하는 삶을 상실한 채로 살아왔어요. 허무와 우울이라는 약자적 감정을 소멸의 공포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어요.

또 삶의 목적이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사는 것이 제대로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어요. 너무나 어리석게도 목적이 없는 삶은 의미가 없고 허무하다는 이상한 생각에 사로잡혀서 삶은 삶 그 자체가 목적이며, 그 어떠한 것도 변화와 생성의 과정으로서의 삶의 의미를 규정하거나 대신할 수 없다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했어요. 당신의 책을 읽다 보면 제가 얼마나 많은 거짓과 착각 속에서 오만하고 멍청하게 살았나를 되돌아보게 될 때가 많아요. 읽고 또 읽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멈추지 않고, 물러서지 않으려고 해요. 저도 모르는 저를 만나기 위해서요.

당신은 궁금하지 않으실 수도 있지만 제가 당신의 책을 통해서 받은 귀한 선물에 관해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 오히려 당신을 화나게 만들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조그만 참고 들어주세요. 이렇게라도 당신께 감사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요.

 

     ☀ 영원회귀, 박제된 영원성과 변화하고 생성하는 현재성     

저는 ‘영원’, ‘영생’, ‘영원함’, ‘불멸’ 이런 단어를 떠올리면 아득해져요. 당신이 선물해주신 영원회귀를 알기 전에는 유한한 삶을 사는 나약한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당신께서 강조하시는 ‘영원회귀’를 통해서 고정불변하는 영원성, 박제된 영원성은 오히려 그 무엇보다 허무하고 지루하다는 것,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생성과 변화뿐이라는 걸 어렴풋하게나마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답니다. 저한테는 엄청난 발전이에요. 당신께서 주신 이 귀한 선물을 지금은 제 마음에 가만히 담아두려고 해요. 온전히 소화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경험이 더 필요할 것 같아요. 당신은 '자신의 소멸'(개체)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냉정한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시지만 저는 아직 멀었어요. 그래도 쉽게 포기하진 않을 테니까 응원해 주세요.

 

     ☀ 내 고통의 원인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약자를 위해 스스로 희생한 최강자, 십자가에 매달린 신’, 당신께서는 이게 전율할 만한 역설이며 인류에 대한 최대의 유혹이자 복수라고 말씀하셨어요. 왜 유혹적인, 상상의 복수일까? 곰곰이 생각해봤어요. 그리고 저는 스스로 죄인으로 만들고 단죄하면서 남들도 단죄하고 있는 제 부끄러운 모습을 발견했어요. 저는 자기 파괴와 자기 극복의 고통, 자기 판단과 해석, 그에 따르는 책임의 무게를 철저히 외면하고 누군가의 구원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어요. 그러면서 제가 가지고 있는 힘에의 의지를 앞으로 나아가는 데 활용하지 못하고 저를 과거의 기억과 원한, 그로 인한 고통에 얽매어두는 데 써버렸어요.

인간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도, 인간의 죄를 용서해주고 구원해주고 ‘강자’로 만들어주는 것도 신이라면, 그 신은 인간의 모든 힘과 가능성을 원천봉쇄하는 자라는 걸, 그는 인간의 구원자가 아니라 파괴자라는 걸 당신 덕분에 생각해볼 수 있게 되었어요. 그리고 제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해석, 책임, 판단은 오롯이 나에게 있다는 걸 받아들이고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이라고 외치는 그 용기가 곧 삶의 향유를 가능하게 하는 명랑한 용기라는 것도요. 여전히 고통을 피하고 싶고, 누군가 탓할 사람을 찾고 싶고, 끊임없이 단죄하고 판단하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통의 노예지만, 다시 한 번! 이라고 힘있게 외칠 수 있도록 지금, 여기의 삶에 더 충실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해요.

 

     ☀ 물음표가 가득한 삶               

당신께서는 가치들의 가치를 문제 삼아야 하고, 진리와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는 그 의지 자체를 점검해야 한다고 강조하셨어요. ‘모든 것에 의문 부호를 붙이는 태도’가 필요하다는 당신의 말씀을 마음 깊이 간직하려고 해요. ‘도덕의 계보’라는 길고 어렵고 난해한 책을 읽고 제 마음속에 남은 단 하나의 문장은 ‘가치들의 가치를 문제 삼기’에요. 제가 오해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저는 당신께서 그 책 전체를 통해서 전하고 싶었던 핵심 메시지가 이것이 아닐까 생각했어요. 당연한 것은 없고, 그래야만 하는 것도 없다. 모든 것은 관점과 해석의 문제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관점과 해석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다. 그 간단한 진실을 망각하는 순간, 인간의 성장 또한 멈춘다.

저는 단 하나의 느낌표가 있는 삶이 아니라 수많은 물음표와 함께 하는 삶을 살고 싶어요. 나의 정답을 단 하나의 정답이라고 모두에게 강요하는 삶이 아니라, 나만의 물음표를 가지고 나의 관점과 해석을 만들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모두의 진리가 아니라 나만의 해석을 추구하고 싶어요. 당신께서 진리를 향한 의지는 비판이 필요하다고 지적하셨을 때, 깨달았어요. 저는 정말로 진리의 존재를 믿고, 그 진리를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고정불변하고 모두가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절대 진리를 찾아서 그 뒤에 숨고 싶었던 거에요. 하지만 이제 그러고 싶지 않아졌어요. 비겁한 관조, 절대적이고 고정불변하는 진리 뒤에 숨는다면 영영 저라는 인간에 대한 이해에 가까이 갈 수 없고, 생기와 명랑함, 관능과 욕망을, 삶 그 자체를 잃어버리게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무의미한 고통과 공허함’이라는 공포를 피하려고 삶으로부터 도주하는 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의 제 삶과 온전히 집중하고 제 욕망에 충실한 삶을 살아갈 방법을 열심히 찾아볼게요!

 

     ☀ 나의 욕망을 마주하는 시간          

금욕주의는 욕망은 곧 고통의 근원이며, 죄라고 하면서 욕망의 부정, 통제를 통한 구원을 이야기하지만, 저는 당신을 통해서 욕망 자체에서 도망치려는 욕망은 곧 삶을 부정하고자 하는 비틀린 욕망임을 깨달았어요. 욕망을 원망하지 않고, 제 욕망을 마주하고 긍정할 수 있는, 욕망함으로써 고통받는 게 아니라 자기 극복과 성장을 지향해가는 씩씩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니체, 저는 멋진 어른이 되고 싶어요. 제가 생각하는 멋진 어른은 지금, 여기의 제 삶에 충실하면서 안주하지 않고 꾸준히 성장을 지향하는 사람, 자기 삶, 자기 존재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에요. 제가 그런 멋진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지켜봐 주세요. 다음에 당신께 편지를 쓸 때는 지금보다는 아주 조금은 더 멋진 어른이 되어 있길 바라면서 이만 줄일게요.

 

고맙습니다, 니체. 당신의 책을 통해서 당신에 대해 알 수 있어서,

그리고 당신과 교감할 수 있어서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곧 또 만날 수 있길 바랍니다. / 2020년 4월, 지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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