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쪽 근원적 기의는 빈자리요 결핍이라고 합니다. 근원에 대한 사유가 가질 수 밖에 없는 숙명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ㅎㅎㅎ
351쪽 전제군주적 기표에 의한 배제이지만, 동시에 탈주의 선을 그릴 수 있는 잉여를 가진 사형수. 그런데 여기에는 과한 일반화가 작동할 여지가 있습니다. 전제군주적 기표는 나쁘고, 탈주의 선을 그리는 자는 좋은가? 나의 호의가 전제군주적 기표로 작동할 수도 있고,정염에 휘말린 자가 탈주의 선을 그릴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배제된 자리에서 탈주선을 그리지 못하는 경우를 무능력이라는 단어로 일반화한다면, 이 또한 다른 방식으로 배제시키는 권력을 작동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65쪽~ 탈기표적 기호체제는 정염에 이끌리어 수난을 동반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시 재영토화되는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99쪽 탈주의 선은 정염의 이끌림에 무력하다는 점에서 무능력하다고도 보고, 탈주선이 죽음과도 같은 검은 구멍으로 이어질 우려를 적고 있습니다. 그래서 402쪽부터 절대적 탈영토화를 추구할 것을 이야기하죠. 현실적으로는 상대적 탈영토화, 재영토화, 정념의 검은 구멍의 상황이 반복될 테고, 때때로 절대적 탈영토화를 위한 노력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탈주선의 흐름을 한두가지 사례를 가지고 부정적인 죽음의 검은 구멍으로 보는 건 동의하기가 어렵습니다. 정염이라는 단어를 부정적으로 쓰신 거라면, 탈주선의 흐름이 정염이 아닌 감응이 될 수도 있겠죠. 또 다시 재영토화가 될지라도 말입니다.
어떤 사태가 정염에 의한 검은 구멍인지, 어떤 방식의 탈영토화인지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할것 같습니다. 권력, 절대군주의 기표는 비단 우리가 생각하는 거시적인 상황이 아니어도, 우리 주변에 늘 일상적으로있고 내가 그런 권력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죠. 권력이나 권위주의라는 건 늘 상대적이니까요. 그 곳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만을 강요한다면, 이상적인 상황을 가지고 실제 현실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사유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복합적으로 뒤엉킨 상황들에서, 명쾌한 해결책을 바라지 않고 주변의 존재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요. 절대적 탈영토화만이 궁극적으로 긍정되지 않는 다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