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니체 세미나 - 3번째 시간 후기>
일시: 2020년 2월 3일 월요일/ 후기 : 덩굴나무
3부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 탈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진은영, 『니체,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그린비, 2007, pp.152~185.―
<들어가면서 : 그동안 읽은 것과 남은 것>
1부 니힐리즘의 극복과 영원회귀
2부 용수의 공(空)과 니체의 영원회귀 : 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3부 영원회귀와 차이의 철학 : 탈근대적 니힐리즘의 극복
4부 차이의 철학의 실천적 함의 : 능동적 니힐리즘의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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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체(1844~1900)에 대한 첫 인상 : 차이(망각/생성/어린이)를 사랑한 철학자
개가 너 때렸다며? 넌 자존심도 없어? 앞으로 놀지마!
그럼, 언제 놀아?
- 영화 <우리들> 중에서.
니체에 관한 책읽기는 이번이 처음이기에, 이 후기는 니체에 대한 첫 인상의 기록에 불과할 것이다. (저번 시간 결석으로, 겨우 2번째 세미나 참가라서, 단편적인 니체에 대한 첫 인상으로 후기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니체의 인상을 말하자면, 니체는 굉장히 투쟁적인 철학가다. 니체는 ‘극복’을 시종일관 강조한다. 이 극복은 자기 극복, 이를 통한 현실 극복이다. (물론 이것이 아닐 수도 있다!)
니체는 공연히 시비를 거는 사람처럼, 그동안의 절대적인 것 혹은 지배적인 것에 대하여 의심을 넘어서 ‘비판’을 한다. 그렇다면 그는 철학계의 이단아, 트러블메이커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남들과 ‘다름’을 그 스스로 몸소 보여준 것일 뿐이므로, 니체는 ‘자기애’(운명애)가 강한 철학자다.
우리는 현재 유일하게 ‘영원회귀’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을 함께 읽고 있다. 그 목차를 보면 알 수 있듯이, 니체의 영원회귀는 ‘극복’으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근대적 니힐리즘에 이어서, 탈근대적 니힐리즘도 극복해낸다. 근대가 아니라면 탈근대로 가고자 했던 정형화된 이분법적 도식을 깨고 있다는 점이 새삼스레 신선하다. 변증법에서 정이 아니면 반으로, 혹은 반이 주는 역동성으로 합이 도출될 수 있다고 믿었던 그런 선명한 도식의 불충분함을 새삼스레 보여주는 것 같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분법적 틀에 갇혀서 니체를 읽고 있다. 니체는 동일성을 혐오하는 철학자다. 여기서 동일성은 (내가 생각하기에) 고정관념, 편견과 같다. 과거에 대해서 동일한 말만 반복하는 것은 전혀 생산적이지 않다. 과거를 다르게 해석해야 현재에 또 다른 해석과 연계된 ‘생성’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잊어야 한다. 과거를 과거로 두지 말고 과거를 ‘망각’하고 새로운 ‘생성’을 해야 한다. 그러므로 과거에서 현재가 나왔다는 것은 여기서 뒤집어진다. 현재에서 과거가 나올 수 있다. 현재에서 새로운 해석을 가하면 과거는 뒤집힐 수 있다. ‘다른 과거’가 반복되면, 현재가 바뀔 수 있다.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2014)>처럼 과거의 조금씩 ‘다른 실패의 반복’은, 결국 현재를 바꾸고 성공으로 이어졌다.
본래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도식적인 흐름은 그저 인간이 추후에 주석을 달았던 것처럼 물리적인 구분을 가한 것에 불과하다. 시간의 흐름은 물의 흐름처럼 나누거나 쪼갤 수 없다. 그저 편의상 자시(子時, 23~01시)가 되었다가, 두루뭉술한 시간의 단위가 근대화되면서 세분화되었던 것일 뿐.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노예가 되어서 살고 있을 뿐이다.
니체는 첫 시간부터 우리에게 ‘차이’를 강조했다. 이 차이는 ‘생성’(때로는 ‘생산’)으로 ‘강도(强度, 센 정도)’로 대체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마주한 ‘영원회귀’는 이 ‘차이의 반복’이다.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다. (혹시라도 동일성이라는 말만 꺼내도 왠지 니체에게 혼날 것 같다! 니체는 동일성을 악마나 난쟁이의 말처럼 극히 혐오하고 있으므로!)
매일 밤 같은 꿈만 꾸는 것은 무섭다. 동일한 상황이 반복되는 것은 악몽이다. 가위에 눌린다는 것은 매일 밤 동일한 꿈이 반복된다는 것 아닐까. 니체는 이런 이들을 위해서 다른 꿈을 꾸라고 말한다. 다른 기억, 다른 과거, 다른 일상, 다른 욕망을 바란다면, 꿈이 억눌린 감정의 재현이라고 할 때, 다른 꿈이 가능해 질 수 있다.
영화 <4등>에서 늘 1등만 반복해서 외치는 엄마의 모습은 무척 무섭다. (간절해 보인다, 혐오스럽다, 불쌍하다는 감정보다 오직 그것만 바라고 꿈꾸는 모습이 무서운 영화다.) 1등만 바라고 꿈꾸는 엄마는 절대로 4등해도 괜찮아, 4등만 하는 아들의 다른 꿈을 바라지 못한다. 1등을 못하면 루저가 되는 것뿐이다. 모두가 동일한 꿈만, 늘 1등만 꿈꾸는 세상과 1등만 강요하고 기억하는 세계가, 우리의 서로 다른 꿈을 잠식해버리는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니체는 일깨워주고자 한 것은 아닐지.
남들과 비교하고, 열등감을 느끼고, 화를 내고, 자존감이 낮아지는 것은 모두 동일자에게 지배되고, 예속된 결과에 불과하다. 남들과 다른 차이의 지점, 오히려 남들과 같아지는 것을 경계하고, 나는 나만의 개체성(잠재된 능력)을 자유자재로 표출할 수 있는 삶에 가치를 두어야 한다. 누구처럼 아닌, 나는 나인 삶,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어야 한다.
니체를 읽다보면,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 혹은 지나치듯 보았던 어떤 일화들이 상기된다. 이렇게 여러 사건과 일들을 환기시키는 것이 니체의 힘(强度)이 아닐지. 그러므로 니체는 매력이 많은, 그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가능한, 그리고 그 어떤 것과도 접촉이 가능한 무궁무진한 잠재태(개체화, 비개체성)의 철학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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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배운 것들>
* 니체의 목표?
생성의 긍정 = 진정한 삶의 긍정 = 유머와 웃음 긍정 = 니힐리즘의 극복
* 생성이란?
생성 = 차이 = 망각 = 긍정 = 변이 = 생산 = 변화 = 창조 = 출산
* 생성 vs 존재 (존재= 동일한 것 = 고정한 것 = 고정적인 것)
* 질료 = 점토 = 무규정자 = 생성 가능성 = 잠재력
* 생성(삶)을 위한 파괴(죽음)란? 생성의 절대적인 긍정!
: 죽음은 삶의 한 형태다.
→ 삶은 죽음의 한 형태다. 죽음(소멸)속에 삶(생성)이 놓여있다.
* 니힐리즘(허무주의)이란? 최고의 가치들이 탈가치화되는 것.
: 니힐리즘이 이중적일 수 있다.
1)불완전한 수동적(염세적) 니힐리즘 = 약함의 징후. 가치전환 없이 일어남. 무의미.
2)불완전한 능동적(극단적) 니힐리즘 = 강함의 징후. 가치의 파괴. 긍정적 가치 생산.
= 완전한 가치 생성.
= 파괴를 통한 생성.
* 차이 인정(생성 없음/ 자존심?) vs 차이 긍정 (생성 / 자존감?)
: 가족 vs 다문화가족
: 정체된 사고 vs 사고의 전환
* 차이에서 차이로. 차이로 인해 차이 해소. 에너지 흐름 = 힘의 의지.
* 동일자(지배자, 다수자, 주류)의 사고방식 vs 타자(소수자)
* 근대철학(동일성의 철학, 차이 부정) vs 니체철학(차이 긍정)
* 기억(질병) vs 망각(능력/생성/차이 긍정)
: 최고의 능력자는 망각하는 어린이다.
: 망각해야 새로운 생성이 가능하다. cf. 들뢰즈. (차이와 반복)
: 새로운 영토 탈환 가능
: 망각 능력이 없다면, 원한의 인간이 될 수밖에 없다!
: 과거의 집착은 현재의 실존을 위협한다!
(과거-원한-복수는 현재의 행복-안락-평온을 방해한다.)
: 과거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의 왜곡된 기억의 부산물일 뿐이다.
: 과거는 새로운 생각의 형성을 방해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막는다.
: 과거의 반복과 대물림에서 벗어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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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 배운 것>
* 1부 전통적 종교적 니힐리즘(세계/삶에 대한 실체론 vs 반실체론)
플라톤주의, 기독교의 극복전략(그리스적?)
실체=고정불변의 본질
2부 근대적 무신론적 니힐리즘(전형적 인과론)의 극복전략(상호인과론)
3부 탈근대적 니힐리즘(차이의 승인/인정)의 극복전략(차이의 생산/긍정)
* 시간/인과를 실체론적으로 바라본다.
: 시간/인과에 대한 실체론(불변/비가역성) vs 반실체론(변화/생성/가역성)
* 차이에 대한 실체론(관계의 고정성) vs 반실체론(관계의 유동성)
* 실체화된 시간(고정불변) vs 과거 긍정/자기 극복/생성과 변화/ 이시적 상호의존성
: 현재가 과거를 바꾼다.
: 주사위 6(현재)이 4(과거)를 바꾼다.
: 과거에 자유를!
: 영원회귀는 동일성의 반복이 아니라 생성이다.
: 과거-현재-미래는 우리가 만들어낸 상상
(시간의 절대적 흐름)
: 과거가 현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우연(순간의 선택들)이 현재의 사건을 만든다.
(나비효과) 카타스트로피(파국, 종말)
* 원한, 미움 → 변화, 운명 사랑, 자기 극복, 변화
* 니체의 철학적 과제 : 무엇이 생성을 가로막는가?
: 니힐리즘, 실체론적/고정불변 사고, 자포자기
* 반복/무기력 vs 영원 회귀 / 생성의 연속성 /
힘에의 의지(잠재성/ 잠재태?)→ 현행화(개체화 /현실태?)
* 개체성을 벗어나서 비개체성을. 개체적 사고 벗어나기.
비개체성(생성/생성 순간의 도래) - 개체성(불변성) = 영원회귀
* 위계/거리의 파토스 = 동일자의 사유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확보하는가?
(차별성/차이)
*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을 만들고, 차이의 반복을 통해서 생성한다.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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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덩굴나무의 후기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지난 수업에 배운내용까지 기억하고 요약하니 매우 놀랍습니다. 오라클이 왜 후기를 강조하나,그 이유가 드러나는 후기입니다.저는 실은 읽고 발제하는 동안, 상기되는 내용이 돌아서면후루룩 소멸되곤 하거든요. !!
-
프라하
기억은 실체적 사유이고,망각은 생성의 사유이다.!
-
해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분법적 틀에 갇혀서 니체를 읽고 있다." 덩굴나무님의 이 말씀이 저를 돌아보게 합니다. 저 또한 어떤 견고하고 편협한 이분법적인 틀을 가지고 니체를 해석하고, 그 틀에 끼워 맞추려고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니체를 가장 니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잘못 해석하고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면서도 니체를 잘 이해하고 있다고 혼자 오해하고 착각하고 있는 거라면 어떡하지? 이런 무서운 생각도 듭니다.
저도 니체를 읽고 공부하면서 제가 겪은 경험들, 기억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되는 경험을 종종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렵지만 더 니체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하고요.
저도 덩굴나무님처럼 니체에 관한 책을, 혹은 니체의 책을 제대로 읽어보는 경험은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서 더 설레고 재미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합니다.
덩굴나무님의 솔직한 후기를 보며 저도 다시 용기를 내보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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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삶의 기술로서 니체철학
덩굴나무가 두번째 세미나에 결석해서 걱정했었는데, 걱정이 무안해지는 좋은 후기입니다. 저절로 댓글이 써지는 후기야말로 다른 사람의 사유를 촉발하는 훌륭한 글임에 틀림없습니다. 우리의 공부도 마찬가지겠지요 ㅎㅎ
"니체를 읽다보면, 문득 무심코 지나쳤던 일들, 혹은 지나치듯 보았던 어떤 일화들이 상기된다. 이렇게 여러 사건과 일들을 환기시키는 것이 니체의 힘(强度)이 아닐지. 그러므로 니체는 매력이 많은, 그 어떤 형태로든 변형이 가능한, 그리고 그 어떤 것과도 접촉이 가능한 무궁무진한 잠재태(개체화, 비개체성)의 철학자다."_덩굴나무
특히 니체에 대한 이런 감각이야말로 니체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를 삶의 기술로 활용하고 있느니까요.... ㅎㅎ 우리의 삶, 우리의 시간들은 다시(니체적으로!! ㅎㅎ) 해석되기를 기다리며 우리 앞에 놓여있을 것입니다. 새로운 해석은 새로운 생성을 낳는 법입니다!
다음은 오타에 대한 사소한 수정입니다. ㅎㅎ :: ① 플라톤주의, 기독교의 극복전략(그리스적?) ..... 그리스적 불멸성(그리스인들이 폴리스라는 집단적 기억을 통해 유한성과 허무를 극복하려고 했던 사유) ② 2부 근대적 무신론적 니힐리즘(전형적 인과론)의 극복전략(상호인과론) ...... 선형적 인과론(선형적=선형태의=직선적)
2. 영화 [우리들]에 대한 니체적 해석
선(누나) : 야, 윤! 너 바보야? 그러고 같이 놀면 어떡해?
윤(동생) : 그럼 어떡해?
선(누나) : 다시 때렸어야지.
윤(동생) : 또?
선(누나) : 그래, 걔가 다시 때렸다며... 또 때렸어야지.
윤(동생) : 그럼 언제 놀아?
선(누나) : 어?
윤(동생) : 연호가 때리고 나도 때리고, 연호가 때리고... 그럼 언제 놀아? 나 그냥 놀고 싶은데...
기억은 질병(실체적 사유)이고, 망각이 능력(생성의 사유)이다!
영화 [우리들]은 저도 아주 좋아하는 영화입니다. 초등학생 누나(선)와 동생(윤)이 나누는 이 대화는 정말 흥미롭지요 ㅎㅎ 이것은 니체가 말하는 기억이 어떻게 질병(원한 같은)이고, 망각이 어떻게 능력(새로운 생성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사례처럼 과거의 기억에 사로잡히는 것은, 상대/관계/사건을 고정된 것으로 바라보는 실체론적 사유입니다. 이렇게 상대/관계/사건을 바라볼 때, 새로운 관계의 생성이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과거의 기억은 잊으려고 할수록 더 생각난다'는 것입니다. 윤(동생)처럼 연호와 다시 놀고 싶은 욕망이 새로운 관계를 생성합니다! '과거의 기억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하고자 하는 욕망'이 현재에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고 과거를 재배치합니다.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실체론적 시간관)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바꾼다(생성의 시간관)!
그런 의미에서 이 역시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과거를 생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멋진 사례입니다. 선(누나)의 방식대로, 과거의 기억(연호가 나를 때린)에 사로잡혀 윤이 연호와 계속 싸우거나 관계를 단절할 경우, 과거는 현재를 규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싸움은 끝나지 않고 '원한의 사슬'은 계속될 것이고, 나중에는 싸운 이유는 사라지고 싸운 기억만으로 싸우게 되는 일조자 발생할 것입니다. 하지만 윤(동생)의 방식대로, 놀고 싶은 욕망으로 관계의 배치를 새롭게 할 경우 '원한의 사슬'은 자연스럽게 무화될 것이며, 과거(윤과 연호의 싸움)조차 다시 생성될 것입니다. (윤과 연호는 그 싸움을 통해 상대를 더 잘 알게되었음이 틀림없으며, 이러한 이해는 둘의 관계를 더 깊게 할 것입니다.) 이때 원한의 사슬을 끊어내고 관계를 새롭게 생성하는 자(긍정하는 자, 능동적인 자)가 바로 강자입니다!! 이와 반대로 과거에 집착하여 현재를 과거의 연장으로 만드는 자(부정하는 자, 반동적인 자)는 약자입니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현재가 과거를 바꾼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현재를 바꾸려는 시간여행이 왜 필요할까?
이처럼 현재를 통해 과거를 바꿀 수 있다면, 시간여행은 무의미할 것입니다. 현재의 불행을 낳은 과거를 향해 되돌아가는 시간여행은 영화의 흥미로운 소재입니다. 이러한 시간여행이 애초의 의도대로 과거의 변경을 통해 행복한 현재를 만들 것인지, 이것이 영화의 관전포인트입니다. 대부분 주인공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지요. 과거사건 하나를 바꾸자 모든 것이 달라져서, 현재가 의도와는 다른 방향으로 펼쳐지는 것입니다. ㅎㅎ 어쨌거나 이러한 시간여행은 '과거는 되돌릴 수 없다'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니체적 시간관을 갖게 된다면,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뭐 있을까요? 현재가 과거를 충분히 바꿀 수 있는데 말이지요 ㅎㅎ 그런 의미에서 과거로 가는 시간여행은 현재의 생성(현재의 생성을 통한 과거의 변경)이 불가능한 사람이, 선형적 시간에 의존하는 무능력을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ㅎㅎ 정말 니체야말로 '과거에 자유!'를 주는 혁명적인 철학이 아닐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