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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주 <김예슬과 '블랙리스트회'> 필독 자료 올립니다. 번역은 초벌이라는 점을 감안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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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ssociation of Blacklisted Students of Tokyo ZINE 01

 

일본 내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나카타 노리히토 仲田敎人

 

들어가며

2008년 금융공황에 잇따라 생긴 것은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전면화였다. 그리스 봉기를 시작으로 유럽에서는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프랑스 등 각지에서 대학 점거가 반복됐고, 미국에서도 뉴스쿨과 켈리포니아 대학 등에서 점거 투쟁이 진행되었다. 특히 프랑스에서는 2009년 2월부터 전국 대학에서 무기한 파업이 선언되어 ‘타낙Tarnac 사건’에 대한 저항 행동과 만나 ‘대학의 난’이라고 부를만한 사태로 발전했다 한다.

되돌아보면 2008년 금융 공황이 고하던 것은 ‘그린 뉴딜’의 거짓 케인즈주의의 옷을 걸친, 인지자본주의의 수탈체제의 강화였다. 지금까지 40년 동안 자본주의는 사람들의 인식과 정동이라는 빗물질적 영위를 포획해 자본으로 전화함으로써 성장의 물질적 한계와 이윤의 경향적 저하를 부추기려 해왔으며, 기본적으로 이 추세는 변하지 않는다. “너희들의 위기에 지불해줄 돈은 없다”, “자본주의는 죽게 놔둬라”라고 외치면서, 각지에서 학생과 교직원들이 대학을 점거한 것은, 옳게도 이를 직감하고 있던 것이리라. 인식과 감응을 생산하는 하나의 권위적 거점으로 기능해온 대학은, 자본주의에 있어서 점차 빠뜨릴 수 없는 포획 대상이 되고 있다, 상징적이던 사례 중 하나는 2009년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G8 서밋이다. 토리노에서 거행된 ‘대학 서밋’에는 만 명이상되는 저항의 군집이 출현하여, 그 동원 규모는 라크이라ラクイラ*에서의 수뇌부 서밋에 대한 저항 데모를 능가할 정도였다 한다. 운동의 초점은 대학 서밋에 있었다고 할 정도이다. 2001년 제노바를 떠올린다면 이는 커다란 전환이다.

이 글을 통해 나는 특히 2008년 이후 명확히 드러나기 시작한 일본에 있어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경향에 대해 논할 것이다. 솔직히 말해 화려한 에피소드는 없다. ‘그리스 봉기’도 ‘타낙 사건’도 ‘대학의 난’도 일본사회에서는 거의 어떤 쟁점도 되지 못했다. 2010년 4월 현재, 일본에서 학생운동은 전혀 활발하지 않다. 일본의 학생운동은 ‘68년’을 마지막으로 쇠퇴 일로를 걸어왔다.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캠퍼스의 재발견과 치안관리 강화로 인해 학생의 자율 공간은 일방적으로 좁혀져, 운동의 쇠퇴에 박차가 가해지고 있다. 캠퍼스의 도처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고, 새로이 들어선 학생회관 출입은 전자키로 기록되게끔 변했다. 삐라나 입식 대자보는 “캠퍼스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규제도고, 선언과 집회는 “학습환경을 해친다”는 이유로 규제된다. 학내에서 술을 마시거나 흡연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경비직이 아웃소싱된 결과, 수가 늘었을 뿐 아니라 흉폭해져 경찰과 같이 행동하게 됐다. 일찍이 운동이 한창이던 도쿄 사립대에서는 학생이 ‘무허가’로 삐라를 뿌리고 입식 데자보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경찰에게 쫓겨나*, 집회로 인해 강의를 방해했다는 이유와 함께 퇴학 조치 당했다. 한편 교직원들은 대학의 기업화에 의한 노무 관리 강화에 쫓겨 ‘경쟁적 자본배분’, ‘산학(産學) 제휴’라는 이름 아래 스스로의 교육과 연구가 갈수록 국가와 시장에 의해 통제당하는 것을 저항할 수 없다. 지금 일본의 대학에서는 쇼핑몰과 같은 건물 속에서 소비자가 된 학생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종업원이 된 교직원이, 신자유주의의 멘탈드릴mental drill을 만들어내는 풍경이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반복하건데 대학을 둘러싼 투쟁에 새로운 동적 편성이 생겨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운동은 지금까지와 다른 조성을 이루어 일본의 ‘68년’이 못다 푼 문제를 명확하게 전개하고 있다. 문제화되고 있는 것은 대학의 특이성이다. 대학이 폐허로 변해가는 한편에서, 교원과 학생들의 (이념으로서의) 대학에 대한 경도와 (전쟁기계로서의) 대학에 대한 욕망은 멈출 줄 모른다. 이 글을 통해 주로 The Association of Blacklisted Students of Tokyo의 운동에 초점을 맞춰 일본 내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고찰하겠다.

 

일본의 장학금 제도와 ‘블랙리스트화’

블랙리스트의 모임이란 어떤 조직인가? 쿄토와 도쿄에서 블랙리스트의 모임을 자칭하는 운동이 시작된 것은, 2009년 1월부터였다. 블랙리스트의 모임이라는 이름은 2008년 12월 금융공황 중 일본학생지원기구(JASSO)가 발표한 장학금 반환 체납자의 ‘블랙리스트화’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일본의 장학금 제도와 ‘블랙리스트화’에 대해 설명해두자.

장학금을 ‘반환한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의아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학부생이 이용할 수 있는 공적인 급여 장학금 제도가 전무해, 장학금이란 학생 대출을 의미한다. 일본 사회에서 급여 장학금에 대해 언급하고 싶을 때는 ‘안 갚아도 되는 장학금’이라고 표현해야 한다. 지원기구는, 일본에서 특히나 사업 규모가 큰 장학금제도를 운영하는 독립행정법인으로, 현재 일본의 대학생 중 40퍼센트(전문대학 및 대학원생 포함)가 이 기구의 장학금 제도를 이용하고 있다. 장학금 종류는 무이자 대출과 이자 대출이 있다. 이자 대출은 80년대 전반, 나카소테中曾根 내각 때 제도화되었다. 수급 기준은 가정의 경제 사정과 학업성적으로 판단된다고 하나, 구체적으로는 명확하지 않다. 모든 학생이 무이자 대출을 원하지만, 심사를 통해 떨어지기 때문에 70퍼센트 이상의 학생은 이자 대출 말고는 달리 이용할 방도가 없다. 수급액은 무이자 대출의 경우 한해 54만 엔~77만 엔(약 750만원~1000만원), 이자 대출의 경우 한해 36만 엔~180만 엔(약 500만원~2500만원)이다. 이자 대출의 경우 수급액이 더 많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일수록 이자 대출을 이용하게끔 방향지어지는 제도로 되어 있다. 대학원생일 경우 수료 시 1000만 엔(약 1억 4천만 원) 가까운 채무를 지는 학생도 적지 않다. 10년 전까지는 반환의 면제 규정이 있었으나, 현재는 사망하거나 중도 장애자가 되지 않는 이상 면제될 수 없도록 바뀌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지원기구로부터 장학금 제도를 이용하는 학생 수는 2.5배로 늘고 있다.

일본의 대학 등록금에 대해서도 간단히 설명해두자. 2009년 국립대학 등록금은 53만엔(약 730만원)으로, 입학금을 포함하면 첫해 학비는 약 81만 엔(약 1100만원)이 된다. 한편 사립대학의 등록금은 (평균) 85만 엔(약 1200만원)으로, 마찬가지로 경비들을 합치면 약 131만 엔(약 1800만원)이 된다. 일본에서는 사립대학에 다니는 학생이 80퍼센트 정도 되므로, 대학생의 태반은 학비만으로 매년 100만 엔(약 1300만원) 이상을 지불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2008년에 실행된 지원기구의 ‘학생생활조사’에 의하면 약 80퍼센트의 학생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며, 그 중 약 40퍼센트는 학비를 벌기 위해 일하고 있다.

지원 기구가 장학금 반환 체납자의 ‘블랙리스트화’를 실시하게 된 이유는, 반환체납액의 ‘증가’라고 한다. 실제는, 장학금 이용 학생의 증가와 함께 액수도 증가하고 있는 것일 뿐이며, 회수율은 90퍼센트가 넘고 있다. 따라서 체납금의 ‘증가’는 수사rhetoric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한편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의 경제상황이 과혹해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지원기구의 조사에 따르면, 대출 변제의 연장 이유 중 80퍼센트를 차지하는 것은 “본인의 저소득”과 “부모의 경제적 곤란”이다. 지원 기구는 자신의 조사에서 이러한 사실을 짚으면서도 ‘블랙리스트화’를 결정했다.

‘블랙리스트화’는 짧은 문서로 발표되었다. 내용을 보면 그것은 기구가 소집한 ‘유식자 회담 유식자회담(有識者會談)’으로부터의 제안에 의해 “교육적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는 이유로 결정되었다고 명시돼 있다.

 

당 기구는, 작년 6월 <장학금 반환 촉진에 관한 유식자회의>가 정리한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장학금 반환 촉진에 대해>에 있어, 반환 개시후 일정 시기 연체자에 대해 해당 연체자의 정보를 개인신용정보기관에 제공함으로써, 연체자에 대한 각종 대출 등의 과잉 대부를 억제해, 다중 채무화를 향한 이행을 방지함은 교육적인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는 제언을 받아, ……개인정보기관에의 개인정보 등록을 실시하기로 하였습니다.

 

‘개인신용정보기관’이란 전국 주요 은행을 포함한 1400 금융 기관을 말하며, 반환을 체납하면 개인 정보가 데이터베이스에 실려 대출을 받거나 신용카드를 이용할 수 없게 된다. 문서가 발표된 다음 달, 장학금을 이용하는 모든 학생 앞으로 ‘블랙리스트화’에 대한 ‘동의서’가 송부되어, 이 계약의 변경에 동의하지 않을시 곧바로 지급을 끊는다는 내용이 통지되었다. 각 대학은 이 일방적인 계약 변경의 위법성이나 부당성에 대해 어떤 이견도 표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드시 ‘동의서’를 제출하도록 학생들에게 반복해 경고했다.

 

블랙리스트의 모임의 출현

지원 기구가 ‘블랙리스트화’를 발표하고나서 한달 후, 쿄토와 도쿄에서 블랙리스트의 모임을 자칭하는 이들의 운동이 시작된다. “장학금 체납자 블랙리스트화 반대!! 학비를 공짜로!!”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쿄토에서는 거리 집회와 사운드 데모가, 도쿄에서는 집회가 진행되었다. 도쿄 집회의 구호문에는 지원 기구 및 일본 고등교육정책에 대한 두 가지 비판이 전개되었다. 하나가 비정상적으로 높이 책정된 등록금이며, 또 하나는 학생의 ‘부불 노동’이다. 부불 노동을 외친 부분을 인용해보자.

 

대학 안에는 교직원뿐 아니라 학생도 연구활동이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은 학생이 대학에 학비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이 학생에세 임금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일본학생지원기구는 장학금을 통해 이 부불노동을 시정하기는커녕, 그저 빚 변제를 재촉하고, 체납자를 블랙리스트화하겠다고까지 합니다. 이게 어디 ‘학생 지원’이라는 겁니까?

 

더 나아가 도쿄에서는 집회에서 지원 기구를 향한 ‘요청서’가 채택되어 다음날 블랙리스트의 모임은 ‘요청’을 위해 지원 기구의 사무소를 방문했다. 조금 길지만 ‘요청서’의 내용을 인용해보자.

 

우리는 ‘블랙리스트화’를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교육의 역사상 보기 드문 어리석은 행태를 즉시 중지하길 원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장학금이 그 이름에 값하도록 바뀔 것을 요구합니다. 즉 장학금이 ‘대여’가 아닌라 등록금 및 생활비의 무조건적 ‘급부’가 될 것을 요구합니다.

우리의 요구는 턱없는 일도, 비현실적인 것도 아닙니다. 기구 조사가 밝힌 것처럼, 반환 연장자의 약 절반이 저소득자입니다. 그러한 정보를 신용정보기관에 통보하는 것은, 저소득자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한 예로 오늘날 주거지를 빌릴 때 [신용]카드 심사를 하는 부동산 회사가 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번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시책으로 인해 집조차 빌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속출할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부르는 것이 “교육적인 관점에서 매우 유의미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또, 학생을 ‘블랙리스트화’한다는 것은, 학생을 실질적으로 채권화하는 것이며, 교육적 관점에서 결코 허용될 수 없습니다.

본디 장학금은, 급부가 국제적인 원칙이며, 등록금 대출 대여와 엄밀히 구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급부 장학금이 주류이며, 예외적인 미국조차 학자금 대출 장학금의 비율은 절반에 그칩니다. 공적 기관인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장학금이 주되게 대여인 현황은, 국제적 현실에서 괴리된 비정상적 사태라 할 수 있습니다.

일본의 고등교육은 UN의 인권위원회로부터 “점차적인 무상화”(국제인권규약 13조 c항)의 추진을 경고 받아왔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고등교육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오늘날까지 이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들은 일본학생지원기구에 의한 등록금 상당의 장학금의 무조건적 급부가 현실적인 해결의 방도가 생각합니다. 다른 선진국에서는 상식적으로 시행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명확하듯, 재정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 것입니다.

학생을 빚쟁이로 만들고 사회가 행복해지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만연하는 고액 등록금과 학자금 대출은 비정상적인 사태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을 돈의 멍에에서 해방시키고, 그 힘을 널리 고양시킬 필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 일본학생지원기구의 시책은 학생이 가지는 가능성을 한층 박탈하려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블랙리스트화’의 즉각 중지와 등록금 및 생활비 상당의 무조건적 장학금 급부를 요구합니다.

 

지원 기구는 ①‘블랙리스트화’가 어디까지나 ‘다중책무화 방지’를 위한 ‘교육적 배려’이므로 중지할 생각이 없음, ②“현재 재정 사정에서 ‘급부제’ 장학제도의 창설은 어렵다”는 답변을 다음 날짜 문서를 통해 발표했다.

그 후 운동은 일단 쿄토의 경우 종식됐으나 도쿄의 경우 지속되었다. 그들은 지원 기구의 임원과 문부과학성의 관료 등이 참여하는 세미나 앞에서의 항의 행동, 블랙리스트화를 제창한 ‘유식자회의’ 대학 교수에 대한 잠복 대기 인터뷰 및 이에 대한 인터넷 공개, 류큐琉球대학 점거 투쟁 결합, 지원기구노조와 지역 노조가 주최하는 집회 결합, 프리터 메이데이 결합, Global Week of Action2009 !! Reclaim your education!! 결합(일본에서의 심포지엄 개최), 문화 연구 학회(Cultural Typhoon) 결합 등에 결합하였다.

 

조짐: 운동의 조성

이러한 블랙리스트 모임의 운동에서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어떤 새로운 조짐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우선 운동의 조성부터 살펴보자. 도쿄와 쿄토의 블랙리스트 모임은 사이에는 어떤 계통이라 할 관계가 없었다. 처음 운동을 일으킨 것은 쿄토의 학생들이었다. 거기에 촉발받은 도쿄의 학생들이 같은 이름을 내걸고 행동을 기도했다. 둘은 연락을 취하고 있었으나, 운동은 각각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누구라도 블랙리스트 모임의 멤버가 될 수 있다. ‘블랙리스트화’에 대한 반대를 내거는 외에는 어떤 동의도 규약도 없다. 멤버 중에는 학부생과 대학원생 뿐 아니라 비정규직 강사, 서점 직원, 편집자, 접시닦이, 교수 등이 있다. 그들은 반권위주의자들이며, 분파에 속하는 활동가는 없다. 20대도 있고 50대도 있다. 이 단체는 2008년 토야호洞爺湖 서밋 운동을 통한 연대 속에서 발생했다. 주로 캠프를 조직하던 대학원생들과 대학 서밋 저항행동을 기획해온 비정규직 강사들이 만난 것이다.

일본의 댁생운동의 역사에서, 이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들의 집단이 조직화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집단 중에는 장학금 대출을 받은 학생과 노동자가 있는가하면, 그와 관련이 없는 교직원도 있다. 물론 일찍이 학생운동에도, 학생과 함께 투쟁한 ‘양심적’인 교직원은 존재했지만, 현재와 비교할 때 환경은 크게 다르다. 일찍이 학생과 교직원 사이는 노동자와 자본가 같은 계급적 대립이 상정돼 있었다. 교수회에 의한 ‘대학 자치’( 및 그와 상보적인 종재 학생 자치조직인 ‘포츠담 자치회’)를 분쇄하여 어떻게 ‘진짜 학생 자치’를 확립할지는, 일본의 ‘68년’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였다. 그러나 블랙리스트 모임의 조성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이러한 대립을 상정하는 것은, 신자유주의가 대학을 포섭한 현재로서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있다. 대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미 교수회 자치가 아닌, 문부과학성과 이사회에 의한 관리 운영administration이며, 교직원들은 과혹한 노무 관리에 허덕이며 참담한 노동자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교직원과 학생 사이에는 간과할 수 없는 압도적 권위의 비대칭성이 있음은 사실이다. 교수회가 기업화의 논리에 적극적으로 따르고 있음도 사실이며, 엄밀히 비판되어야 할 개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오늘날 교직원도 자본에 포섭되는 대상인 것이며, 학생과 마찬가지로 인지노동자로서, 실제 연대 단체affinity group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단체 안에는 학생 운동의 경험이 없다는 점도 새로운 조짐을 보여주고 있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이 집단이 생겨난 계기는 2008년 반 서밋 운동이었지만, 일본의 맥락에서 이 사건이 지닌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대학원생들이 조직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띤 점에 있다. ‘68년’ 도쿄대학 투쟁이 그랬듯, 운동에서 대학원생들이 중심적 역할을 띠는 것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68년’에 대학원생들이, ‘학생운동’ 활동가들이며, 그 중에는 10년 가까이 운동 경험이 있는 이도 있었던 데 반해, ‘2008년’의 대학원생들은 운동 경험이 거의 없었다. 이러힌 ‘대학원 데뷔’ 활동가들은 비정규직 강사 노동조합 등, 오늘날 프레카리아트Precariat 등에도 곳곳에 존재해, 서서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이 생겨나는 배경에는 프리터 생산공장으로 변한 대학원과 학생운동의 괴멸을 꼽을 수 있다.

일본의 대학원생 수는, [일본]정부의 대학원 중점화 정책에 의해 지난 20년간 극적으로 증가했다. 대학원 재학자 수는 85년의 경우 7만명이던 것이 2006년 26만명을 넘기고 있다. 그러나 정부는 대학원생의 수를 국제 기준에 근접시킬 것만을 고려하고 취직처에 대해서는 어떤 고려도 하지 않았다. 일본 기업은 학부를 졸업한 젋은 학생을 찾아, 대학원 수료자, 특히 박사과정 수료자를 거의 채용하지 않는다. 다른 한편 대학 내 취직 자리의 수는 젊은 인구의 감소와 경영난으로 인해 갈수록 감소하는 경향에 있다. 매해 약 1만 6000명이 박사를 취득하는 데 비해 대학의 신규 취직자리는 5000명~8000명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일본에서는 대학원을 졸업한 워킹푸어가 격증하고 있다. ‘68년’의 대학원생들이 교수 밑으로 따르는 한 전임강사 자리를 대부분 약속받았던 데 비해 ‘2008년’의 대학원생들은 비정규직 강사 일을 얻어내는 일조차 힘들어지고 있다. 비정규직 강사의 노동 환경은 과혹한 것으로, 어떤 사회보장도 없이 각지의 대학을 뛰어다니며 강의를 하고, 200만엔(약 2750만원)을 넘지 않는 연수입으로 생활하지만, 이 조건마저 축복받은 형편으로 되어가고 있다.

학생운동의 괴멸에 대해서도 설명해두자. 일찍이 많은 일본 내 대학에서는 학생자치회와 자치조직이 존재했다. 전후 일본에서 대학은 일본공산당과 신좌파에게 중요한 자율공간이었다. 학생은 학생기숙사와 학생회관을 점거하여(당국에 자치권을 허가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자주적인 관리를 함으로써 운동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거기서 헤게모니를 쥐던 거은 많은 경우 일본공산당계의 학생조직 <일본민주청년동맹>(민청)과 신좌파 당파였으나, 단체에 속하지 않은 활동가들도 그러한 자율적 공간에 ‘동거’하여 다양한 운동을 만들어가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기술한 것처럼, 특히 90년대 후반 이후, 캠퍼스의 재개발과 치안 관리의 강화로 인해 이러한 자율적 공간은 박탈되었고, 동시에 자치조직과 작생운동은 일소되어 갔다.

현재, 대학에 무리를 이루지 못하게 된 학생들은 대학 ‘밖’에 유형의 그리고 무형의 자율공간을 만들기 시작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모임도 그런 흐름 속에 있다. 일찍이 학생운동은 각 대학에 자치조직이 존재했기 때문에 각 대학 저마다의 과제 해결에 합세하는 것이 주가 되어,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모이는 일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러한 자치조직이 해체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학내에 틀어박혀있던 학생들은 대학 ‘밖’에서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과 함께 운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장에서 ‘대학’이란 곳은 어디인지, ‘학생’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반복되고 있다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조짐: 운동의 요구

 

블랙리스트 모임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블랙리스트화 중지, 학비 무상화, 학생에 대한 임금 지불, 생활비 보장이다.

일본 학생운동에서 이러한 요구가 내걸어진 것은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학비에 대해 말하자면 지금까지의 운동은 “인상 반대‘를 내걸어 싸워왔다. 그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70년대 초두까지 학비가 그다지 비싸지 않았다는 점이다. 1971년 시점 대학의 등록금은 국립대학이 18,000엠, 사립 대학이 95,000엔이었다. 학비는 70년대 후반부터 90년대에 걸쳐 서서히 올라, 운동은 그 때마다 ‘인상 저지’ 투쟁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는 학비가 무상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더 엄밀히 말해 학비는 무상이어야 할이지 모르나, 재화의 재배분처로 더 우선시되어야 할 것이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이는 <학생에게 임금을>이라는 슬로건이 걸리지 못한 이유이기도 하고, 생활비 보장이 요구되지 못하던 이유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대학은 노동자와 민중으로부터 유리된, 일부만의 특권적인 장이라고 생각되어 왔고 또 학생들 역시 그러한 인식을 공유해왔다.

지금까지의 학생운동이, 대학에 대하여 질문을 던지지 못한 것은 아니다. 특히 ‘68년’에 있어 “대학이란 무엇인가?”, “학생이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그칠 줄 몰랐다. 일본의 맥락에서 ‘68년’이 획기적이었던 또 한 가지 점은 학생들이 시민사회의 요새라는 대학의 이미지를 분쇄해 대학의 가해(加害)[가능]성을 명확히 한 점에 있다. 당시 특히 유행한 슬로건은 <대학 해체>였다. 그 내용은 몇 가지 차이가 있었지만, 공통되던 것은, 현재 대학이 일본제국주의 및 독점자본주의체제의 재편을 떠받치는 장치에 다름 아니라는 인식이다. 그렇다고 해도 <대학 해체>의 슬로건과 함께 모든 것이 내던져진 것은 아니다. <반대학>을 필두로, 거기에는 대학의 특이성을 명확히 하기 위해 잠재력으로 가득한 물음이 수없이 존재했다. 그러나 그러한 물음이 <등록금 무상화>, <학생에게 임금을>과 같은 요구를 내거는 운동으로 생성돼간 일은 없었다. 특히 그것을 저지한 것은 혁명운동을 담당할 주체는 노동자이며, 학생은 그 예비군에 지나지 않는다는 교조적 레닌주의와, 체제를 변혁시키지 않는 한 대학 변혁은 불가능하다는, 혁명에 대한 권위주의적 이해와 엮인 ‘정치’주의이다. 69년과 70년 활발히 나온 <개별학원투쟁에서 중앙권력투쟁으로>라는 슬로건은, 그 상징이었다고 할 수 있다. ‘68년’에 있어서도, 그 후에 있어서도 당파의 입장에서 대학이란 당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장소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들은 외부에서 대학을 무너뜨린다고 말하면서, 거액의 자치회비를 얻기 위해 대학에 기생해왔다. 80년대, 분파sect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대학에서 분파 없는non-sect 활동가로 지내던 인물은 당시를 아래와 같이 회상하고 있다.

 

그 때[1980년대] 분파는, 산리즈카三里塚공항 반대운동 등 학원 외부에 에너지를 완전히 쏟아 부어 등록금 인상 반대투쟁에 관해서는 극히 형식적으로 바리케이드 파업을 수행했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솜씨 좋게 2, 3일 내에 철수했다. 당시 내가 소속된 서클도 그 바리케이드 파업에 참가하고 있었지만,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는 채 철수가 결정된 기억이 있다. 실은 분파 사람들에게 등록금 인상은 그다지 흥미롭지 않은 투쟁이었음을 나중에 알았다. 그들의 관심은 대학 당국이 자동적으로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서 대리 징수하고 있는 자치 회비가 안정적으로 들어오는지 여부였다. 그 자치회비가 활동가를 먹여살리고, 비공연부대를 편성, 그리고 도내의 베이스 및 산리즈카 등 베이스가 유지돼야 하는 것이었다.

 

한편 비분파 운동도 혁명에 대한 권위주의적인 이해로부터 자유로웠던 게 아니다. 다른 비분리 활동가는 대학이라는 장소가 “신좌파적 문화에 오염”되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아무튼 대학에서의 운동이란 건 대표자가 모여 2사분기(한 학기)의 방침을 무언가 결정하고, 학습회를 조직하고, 10ㆍxx의 과제에 착수한다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는 것인데, 실제로는 그저 데모 등 선동 등 스케줄대로 해낼 뿐. 그리고 좌파 안에 있는 각 전선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오키나와 전선이라든가 부락해방운동의 전선 등 마치 코민테른의 관점을 따라가는 듯한.

 

무엇보다 비분파 운동이 “코민테른의 시점”으로의 딸 잘라 말하기 힘든 지점을 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80년대 중반에 행해진 비분파 활동가들의 좌담회를 읽으면 (혁명에 있어) 학생운동의 위치 평가에 대해 그들 자신이 잘 정리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별적 학원 투쟁의 틀을 어떻게 돌파하는가”라는 편집부로부터의 물음에 대해, 어떤 활동가는 “일본제국주의를 압박하는 투쟁을 만들어낸다는 것, 교육학원투쟁과 안보ㆍ한일 투쟁을 결합한다는 것은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교육 학원투쟁이란 대체 무언가라는 것, 그것이 학생운동의 시금석이 될 거라 생각한다”고 답하면서도 “우리의 말이, 이미 운동이 남아있지 않은 대학에 대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가 자신은 없습니다.”, “우리들이 명확한 답을 낼 수 없는 지점에서, 도리어 막연하게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 편을 당파 씨党派さん가 알기 쉬운 논리예요~라고도 말해버리기도 해요”라고, 솔직하게 혼란을 고백하고 있다. 이 좌담회에 질문받는 자로 참가하던 ‘68년’의 활동가는, 그들이 당파를 비판하면서도 행동의 틀을 실제로는 당파와 공유하고 있는 점에 위화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들의 인식에서 보자면 비분파 운동은 대학과 자기 정치적인 존재양식을 집요하게 되묻는 곳에 그 특이성이 있었을 터이다. 비분파 운동은 수업, 시험, 관리를 거부하는 논리를 끝까지 붙듦으로써だわりぬくことで 대학을 해체하려는 것이며, ‘교육 학원 투쟁’은 ‘개별적’ 정치 과제는 될 수 없었다. 그가 느끼던 것은 ‘68년’으로부터의 단절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좌담회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70년대부터 요 근래 자신의 존재를 사상적으로 천착하는 일つめて考える을 그다지 하지 않는 운동이 많았다고 느낀다. 정보분석만큼은 정말 엄밀했지만 사상적인 천착이 거의 없다는 느낌. …… 이러한 역사성을 어느 정도 자각화 해 이론적인 문제로 대상화할 수 있는지가 문제라고 생각한다.

 

블랙리스트 모임의 요구로 돌아가자. 왜 학비는 무상화되어야 하는 것인가? 왜 학생 생활비는 보장돼야 하는가? 물음을 역전시켜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왜 학비는 유상이어야 하는가? 왜 학생의 생활비는 보장되어서는 안되는가? 이미 본 것처럼 일본학생지원기구가 블랙리스트 모임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는 “교육적 배려”와 “재정 사정”때문이었다. 그러나 시라이시 요시하루白石嘉治와 타니구치 키요히코谷口清彦는 이러한 회답에 대해, 신자유주의적인 공갈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정부는, 대학을 무상화하는 것 그 자체를 주저하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교환 논리의 단절에 대한 불안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잘 생각해보면 ‘블랙리스트화’란 기묘한 시책이다. 통치의 관점에서 보면 학생을 빚쟁이로 만드는 것은 합리성이 인정된다. ‘부채’란 결국 “아직 생겨나지 않은 노동자들의 착취를 위한 수속”이다. 많은 학생은 졸업시 ‘졸업증서’와 맞바꾸게 될 ‘장학금 반환 계약서’를 쓰면서 ‘연대보증인’이 되어 있는 부모와 형제들의 이름을 확인해 임노동의 치욕을 받아들일 각오를 하는 것이다. “‘부채’야말로 폭력과, 폭력적인 불평등에 기초지워진 관계를 만들어내, 그것을 누구에게도 정당하고 도덕적인 것처럼 보여줄 가장 유효한 방법”인 것이다. 그러나 빚쟁이가 된 학생을 더욱 ‘블랙리스트화’하여 자기파산으로 이끄는 것은 자본축적이라는 관점에서 과연 합리적일까? 여기에는 실로 신자유주의와 똑같은 파탄이 있다. 인지자본이란 인간의 인지능력이며, 하트Michael Hardt와 네그리Michael Hardt는 이를 커먼the common이라 부른다. 자본은 실로 커먼의 포획을 필요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랙리스트화’와 같은 ‘삶의 폐기’를 향한 시책은, 커먼 그 자체를 빈곤하게 만들어버릴 터이다.

시라이시와 타니구치의 지적은 사태를 바르게 분석하고 있다.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재정 적자가 아니라 교환의 논리가 단절되고 마는 점일 것이다. 실제로 빗물질적인 생산의 프로세스(‘서비스’가 ‘소비’되는 프로세스)는 교환의 논리를 통해서 이해할 수 없다. 사람이 무언가를 말할 때, 말과 감응은 교환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나눠갖게 될 뿐이기 때문이다. 대학에서 수행되고 있는 말과 인식에 관련된 영위는 고액의 등록금 징수를 통해 금전과의 교환 관계로 둘러싸여버리는 일에 다름 아니다. 대학의 생산은 증여와 그 능산적인 무상성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진실은, 정부와 자본에게 아직 은폐돼야할 추문인 것이다. 블랙리스트 모임이 요구하는 것은 등록금 및 생활비 상당의 ‘무조건적’ 장학금 급부임을 주목하자. 그들이 요구하고 있는 것은, 복지국가적인 재정의 재분배가 아니라 커먼으로서의 대학을 자본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그 방도로서 대학의 무상화이며, 생활비 보장인 것이다.

시라이시와 타니구치는, 블랙리스트 모임의 출현을, 파리 제1대학을 점거한 학생들의 출현 등과 함께 ‘골리아르들Goliards의 귀환이라 부른다.

 

톨비악Tolbiac[파리제1대학]을 점거하는 학생들과 ‘블랙리스트 모임’의 말을 다시금 읽길 바란다. 귀환한 골리아르들에게 대학이란 무엇보다 ‘생활, 통행, 만남, 재생산의 장소’이며 ‘행복’이 시작되는 기점이다. …… 질문이 되고 있는 것은 호혜와 재분배, 혹은 시장을 세계의 무상(無償)성의 지평으로 다시 묻을 방도이다. ……국가에 의한 무조건[적] 증여를 통해 그 폭력을 해방시키는 한편 시장과 호혜를 향한 자유로운 약속commitment을 손에 넣는 것. 전환의 관건은 대학의 무상화이다. 지금 선진국에서 진학률은 50퍼센트를 넘는다. 프랑스혁명 때 프랑스어를 말하는 이도 같은 정도였으며, 그 속어를 말하는 ‘혁명적 군중’(Gㆍ르페브르)가 근대국가의 모태로서 네이션이 되었다. 그것이 대학으로 대체되려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야말로 네이션의 반(反)대학 캠페인은 노골적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무수한 텍스트를 만들고, 새로운 ‘공동재’를 함께 나눌 것이다. 천천히 사물을 생각하고 지금까지 없던 일하기 방식을 취한다. 콜리아르들의 귀환은 그 시작인 것이다.

 

골리아르란 중세 유럽에서 교회의 권력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앎을 구하며 도시를 방랑하던 노마드들을 말한다. 처음부터 대학은 그러한 불량학생들이 만든 생디칼리즘syndicalisme으로 시작됐다. 그들이 내건 것은 새로운 도덕이며, 새로운 ‘삶의 형식’이고 행복이다. 그러한 ‘내깃돈’은 오늘날의 대학을 둘러싼 투쟁에서도 전혀 바뀌지 않았다. 대학은 다시금 네이션과 대치하려 하고 있다. 블랙리스트 모임의 케릭터는 프랑소와 비용Francois Villon이다. 블랙리스트화 된 학생들은 중세의 기억을 상기함으로써, 대학이라는 전쟁기계의 특이성을 회복하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조짐: 운동의 공명(혹은 ‘국제연대’)

지금까지 나는 일본 내 대학을 둘러싼 투쟁의 새로운 경향에 대해 고찰해왔다. 단 운동은 국민운동으로서 조직돼 있는 것도 아니며, 일본 내 맥락만을 참조하면서 조직되는 것도 아니다. 투쟁의 새로운 경향이 아닌, 보편적인 경향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운동은 세계의 운동과 공진(共振)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얘를 들어 블랙리스트 모임이 ‘프리터 메이데이’에서 반복하던 구호 중에는 “학생에게 임금을”, “모든 실업자에게 학적을”, “알바는 소용없다” 등 외에도 “줄리엥 쿠퍼를 해방하라”가 있었다. 데모에 참여하던 자들도 포함해 ‘줄리엥 쿠퍼’가 누구인지를 알던 자들은 거리에 거의 없었을 것이다. 또한 2009년 3월 류큐대학 점거 투쟁은 뉴스쿨에 “상당한 영향을 받고” 수행된 것이라고 한다. 이 투쟁을 조직화하던 학생들은 블랙리스트 모임과 마찬가지로 학생운동경험이 전혀 없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일본의 학생운동이 아닌, 뉴스쿨과 그리스의 봉기에서 “세계적으로 점거라는 수단이 있음”을 안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블랙리스트 모임과 류큐대학의 운동도 전지구적인 공명을 부르고 있다. 블랙리스트 모임의 활동은 프랑스에도 소개되었다. 예를 들면 프랑스 국립 동양언어문화대학은, 파업 중에 블랙리스트 모임에 대한 지원을 모든 모임이 일치하여 결정했다. 또한 블랙리스트 모임을 자칭하는 학생들은 파리와 코펜하겐에서도 출몰, 2010년 3월 빈에서 진행된 볼로냐 프로세스에 대한 대항행동에도 그 모습이 드러났다. 류큐대학 투쟁에는 세계 각지로부터 연대의사가 전해져, 켈리포니아대학의 점거투쟁에서는 류큐대학의 점거성명이 인용되었다.

나는 이 글에서, 대학이 폐허가 되는 한편으로 대학을 둘러싼 투쟁에 새로운 동적 편성이 생겨나, 대학의 특이성이 새로이 질문으로 떠오른 점에 대해 썼다. 그러나 “대학이 네이션으로 바뀐다”는 테제를 필두로, 몇몇 물음은 열린 채로 있다. 이후 대학은 둘러싼 물음은 인지자본주의와 코뮨을 둘러싼 물음과 함께 깊어질 것이다. 블랙리스트화 된 학생들은 서로 나누는 것만이 허용되고, 모든 것으로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생각하는 것이다.

 

덧붙임

2010년 4월 현재, 블랙리스트화를 향한 수속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2009년 9월 정권교체가 있었지만, 고등교육을 둘러싼 정책에는 변화가 없다. 블랙리스트화에 대해서는 반대운동에 의한 얼마간의 ‘성과’가 있으며, 연 수입 300만엔 이하의 경우, 변제가 5년간 유보되는 조치가 명문화되었다. 그러나 6년째부터는 어떻게 될 것인가? 어쨌든 이대로 수속이 지속된다면 장악금을 변제할 수 없기에 카드가 정지되고, 생계를 이어갈 수 없는 젊은이들의 속출은 틀림 없을 것이다. 더욱이 정부와 재계는 학생지원기구를 민영화 해 장학금을 증권화 시키려는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규모를 생각할 때 장학금은 꽤 매력적인 금융상품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금융화는 채무불이행의 위기를 전지구로 확장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학금이 증권화됨과 동시에, 운동은 대출금과 신용시스템 그 자체를 밞고 넘어서려 하는 자에게로 ‘비약(飛躍)해 갈 것이다.

 

 

 

*이 글은 Sabu Kohso, Go Hirasawa, Jim Fleming(ed), Radical Social Movements in Contemporary Japan, Autonomedia(근간)에 수록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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