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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 그녀는 예뻤다

Ming 2022.12.15 21:16 조회 수 : 1023

       그녀는 예뻤다

 

메릴랜드의 겨울은 추웠다. 평균기온이 한국과 비슷한데도 더 많이 추웠다. 돌이 되지 않은 아이를 안고 남편의 빠듯한 월급에서 난방비를 아끼던 시절이었다. 걸으면 삐그덕 소리가 나던 마룻바닥, 두드리면 퉁퉁 북소리가 울리던 목조아파트의 벽은 하얀 페인트 색으로 인해 더 창백해 보였다. 어디선가 얻어온 앉은뱅이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던 거실에는 코끝을 아리게 하는 싸늘한 공기가 내려앉곤 했다. 그리고 어느밤인가는 밤새 기침이 멎질 않았다. 뜨거운 물을 가득 채운 페트병 두 개를 끌어안고서도 오들오들 떨던 밤이었다. 응급실에 가자는 말을 망설이고 있을 남편부터 안심시켜야 했다. 그저 감기일 뿐이니 병원엔 가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지만, 기침이 잠시도 멎지 않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남편이 초조해할까 베개로 입을 틀어막고 참는 통에 온 몸을 죄는 듯 힘이 들어갔다. 잠시만이라도, 단 1분이라도 이 발작 같은 기침이 멈춰주기를… 동이 터오던 새벽에는 호흡조차 쉽지 않았다. 큼지막한 볼에 팔팔 끓여낸 물을 채우고 코를 바짝 들이댄 후에야 숨이 좀 쉬어졌다. 나는 식어버린 페트병을 대신해 볼의 온기를 빼앗아볼 요량으로 커다란 볼을 끌어안고 숨쉬기를 하다가 기침의 발작과 함께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말았다. 손바닥만한 짙은 갈색얼룩은 그 후로도 몇 년을 가슴에 남아있었다.

그래도 나는 그 곳이 좋았다. 그 곳은 내 오욕의 역사를 머금고 있지 않은 땅이었다. 익숙한 길을 걸을 때 마주하는, 찬 바닥에 앉아 곱은 손가락 마디를 펴보던 아이의 낭패한 기억들이 숨어있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 곳은 교회권사인 내 엄마의 쌍욕이 미치지 못하는 땅이기도 했다. 나는 찌르는 듯한 배설의 말들을 봉변처럼 뒤집어쓰지 않아도 되는 그 곳이 좋았다. 그리고 그녀가 있었다. 그 땅에는 어여쁜 그녀가 살고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처음 만난 그녀는 돌쟁이 아이를 안고서도 반짝반짝 윤이 났다. 차도 없는 낯선 땅, 휑한 거실의 소파 마냥 놓인 나를 찾아와 드라이브를 가자고 말하던 그 날부터 나는 그녀에게 반했는지 모른다. 1불 짜리 커피를 마셔보는 게 소원이었다던 유학생에서 몇 채의 주택을 거느린 현재까지, 나는 그녀의 입지전적인 성공시대를 듣고 있는 것이 기꺼웠다. 그게 그녀의 이야기라서 기꺼웠다. 내 어눌한 영어발음을 교정해주고, 스팸 전화에도 쩔쩔매는 나를 위해 적절한 표현을 알려주던 그녀의 차분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아이장난감을 빌려가 돌려주지 않는 동네 아줌마를 푸념하면, 그 길로 찾아가 장난감을 받아주던 그녀의 당당함이 부러웠다. 남편이 한국에 다니러 간 사이, 이유도 모른 채 신호가 끊겨버린 폰을 잡고 어쩔 줄 몰라하던 아침, 상기된 얼굴로 문을 두드리던 그녀가 구세주 같았다. 연락이 안 돼 바로 달려오는 길이라며 내 안부를 살피던 사려 깊은 표정, 통신사와 몇 번의 통화 후에 신호를 복구시켜주던 그녀가 든든했다.

그것은 내가 아는 최초의 안온함이었다. 열아홉 살, 지갑에 만 원 한 장을 쥐고 어둑한 새벽길을 밟으며 집을 등졌더랬다. 등 뒤로는 내 아버지의 손이 뒷덜미를 잡아챌까 덜덜 떨려왔고, 앞으로는 시야를 구분하기 어려운 미명이 내 앞날처럼 막막하던 새벽이었다. 뿌리가 썩은 채로 생존에만 집중해야 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학교 동기들 앞에선 아무일 없는 척 연기해 가며, 뒤로는 전전긍긍 내일의 밥값을 벌어가며 아는 누구라도 마주칠까 몸이 절로 옹송그려졌다. 내게 사는 일이란 온통 그런 것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그녀로 인해 이토록 무해한 삶이 가능하다는 걸 처음으로 알았고, 실재로 살아보았다. 더갱이 진 얼룩 없이 트인 땅에서 나를 해치지 않는 이들과 느긋이 바라보는 풍경들… 이 곳은 매일의 가면을 쓰고 괜찮은 척 연기하지 않아도 되는, 실재로 괜찮은 세상이었다.

그녀로 인해 이 땅은 아름다운 타지였고 우리는 거의 매일을 함께 했다. 나는 종종 내 인생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평화로운 시절일 거라는 말을 하곤 했다. 멀리서 귀를 쫑긋이며 거닐던 아기 사슴들, 농장 바닥에 철푸덕 앉아 베어먹던 사과의 향기, 두 손을 담뿍 물들이던 선명한 베리의 보라빛. 노는 어린것들을 바라보며 느리게 마시던 커피의 향, 아기팬더가 댓잎 사이를 굴러다닐 때면 들려오던 까르르한 웃음소리, 창문턱에 고개를 기대고 나와 아이를 태우러 오는 그녀를 기다리던 오전의 따스한 햇살, 그 날의 기다림들을 나는 사랑했다. 그리고 내 생에 가장 평화로운 시절일 거라는 말은 그대로 예언이 되어버린 듯 하다. 1년 8개월의 미국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한국땅에서 나는 다시 괜찮지 않아졌다. 다시 밟은 욕된 땅에서 엄마와는 이듬해에 연을 끊었다. 죽는 순간에도 나를 부르지 말라며 악을 쓰면서 끊어냈다. 그리고는 그녀를 생각했다.

기억이 빈곤한 이들은 얼마나 풍요로운가. 우리는 약간의 온기만 발견해도 금세 입을 대고 허겁지겁 배를 불릴 줄을 안다. 애틋한 추억들을 줄 세워 비교해볼 수 없는 우리는 일단 머금은 온기를 집요하게 부풀릴 줄을 안다. 사는 일이 부대낄 때마다 그녀가 떠올랐다. 여기저기 구멍투성이인 동네 아줌마들과 수군대다 문득 정신이 차려질 때에도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였다. 빈 구멍에 추를 매달 듯 아이에게 집착할 때에도 내 잰걸음을 멈칫하게 하는 건 그녀였다. 동생의 입을 빌려 욕지거리를 전하는 엄마가 쓸쓸할 때에도, 볼모인 양 엄마가 나를 대신해 남편을 괴롭히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그녀를 생각했다. 괜찮은 일이다. 내 기억 안에 반짝거리는 그녀가 있으니 다 괜찮은 일이었다.

받은 것을 돌려주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게 되었을 즈음에는 그녀에게 미안해졌다. 20대의 나는 어쩜 그리 개념이 없었는지, 그녀에게 줄곧 받기만 하면서도 그게 뻔뻔한 일인 줄을 몰랐다. 매일 운전을 해주는 그녀에게 개스비 얘기를 했을 때, 혹시라도 신경쓰게 할까 봐 기름 먼저 채우고 나를 만나러 온다던 그녀의 배려를 당연하게 누렸다. 부주의하게 문을 열다 그녀의 포르쉐 문짝을 크게 찍었을 때도 내가 들은 첫마디는 내 남편에게 알리지 말라는 당부였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말대로 했다. 나는 남편은 서둘러 살피면서도, 그녀에게는 어찌 그리 철없기만 한 어린애였을까. 그러니 나는 나누어야 했다. 온기의 주인을 향해서는 아니더라도 기꺼이 갚아야 했다. 그것은 에너지를 과하게 쓰는 일이기도 했다. 우리집은 늘 열려있어서 많게는 열댓 명의 사람들이 모여드는 공간이었다. 그이들의 끼니를 챙겨내면서, 다같이 한바탕 웃는 얼굴을 볼 때면 그녀의 빚을 벌충한 듯한 안도감이 들고는 했다. 사정이 좋지 않다는 아는동생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매일의 우유값을 대신 지불해 주는 일 따위였지만, 그것은 그 애가 이사를 갈 때까지 몇 년을 지속되었다. 누군가를 상처주지 않으려 애썼고 뾰족해지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게 전적으로 그녀 때문만은 아니더라도 고비마다 나를 이끄는 동력이어서, 이제 어려울 때 그녀를 떠올리는 일은 오랜 습관이 되어있었다. 모여드는 사람들의 상을 차리는 나를 보면서, 같은 말을 밉게 할 줄 알던 누군가는 전생에 죄가 많아 업보를 치르는 중인 거라고 했다. 상관 없었다. 나의 그녀는 매번 가난한 나를 대신해 밥값을 지불했고, 그 업을 갚는 일이 내게 구원과도 같은 일임을 그네들은 결코 알 리 없을 테니까. 그녀는 내 기억의 긍지였다. 자부심이었고 유일하게 반짝이는 길잡이였다.

그런 그녀가 돌아온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연락을 받았을 때부터 어린애 마냥 가슴이 뛰었다. 드디어 아무 대가 없이 따뜻하기만 했던 장본인을 향해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는 푸지게 밥을 살 수 있고, 낯설어 할 한국생활을 도와줄 수도 있게 되었다. 어쩌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 이야기를 고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에게 할 말들을 고르고 고르면서 오랜만에 설레인다. 십여 년의 세월이 서먹하지 않도록 아무렇게나 버려두던 흰머리를 처음으로 염색해보았다.

민망했던 과거를 한 마디로 압축해 사과한다. 사는 동안 내가 망가뜨린 차문을 종종 떠올렸노라고 고백한다. 내가 괜한 일로 마음을 쓰게 했구나, 차문을 방치해뒀던 자신의 게으름을 탓하면서 나를 달래는 그녀는 여전히 따뜻하다. 그리고 이제는 나와 함께 이 곳에 있다.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있을 테고, 그러니 오늘 그녀가 앞장서 지불해버린 식사비 같은 건 별 일 아니다. 갚을 기회는 앞으로도 많을 터이니…

당황은 서둘러 찾아왔다. 이상하다. 밥 한 번을 사는 일이 쉽지가 않다. 밥은 커녕 커피값도 계산을 할 수가 없다. 오늘은 내가 사겠다고 미리 엄포를 놓아도 어느 틈에 그녀가 식사비를 지불해놓곤 한다. 마음이 불편해져 식사 전에 몰래 계산을 해버렸더니 그녀의 표정이 눈에 띄게 냉랭하다. 다시는 그러지 말라는 그녀의 낮은 목소리는 분명한 경고이다. 이상하다. 예전처럼 매일 보는 건 아니더라도 우리는 자주 만나 이야기를 한다. 세를 주고 있다는 그녀의 빌딩 사정, 주식 상황, 아이의 사교육 이야기가 두서 없이 섞인다. 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녀가 하는 이야기이니 듣는다. 들으려고 노력하다 자꾸만 집중을 잃어버리긴 하지만 그녀의 이야기이니 들어야만 한다. 그런데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오면서 차 사고가 날 뻔한 얘기를 설명하기 시작하니 미간을 찌푸리면서 자신의 얘기로 서둘러 넘어간다. 그 날 내내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호응하다가 자꾸만 멍해졌다.

나는 오늘도 밥을 사지 못 한다. 애를 먹이던 세입자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내게 밥을 사야겠다는 생각부터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아무 저항 없이 묵묵히 밥을 먹는다. 밥을 먹으면서, 그녀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돌아오는 길은 내내 현실같지 않았다. 운전대를 잡은 창 밖의 시야는 의식하지 못 한 채로 느닷없이 바뀌어있곤 했다. 달그락, 숨어있던 생각들이 몸을 뒤채다가 어느새 들썩들썩, 끓어오르기 시작한 주전자의 뚜껑처럼 요란스럽다. 이 생각들은 위험하다. 감각이 알아버린 것을 언어가 말하지 못하게 해야한다. 주차를 하자마자 집 근처를 급하게 걸어다닌다. 헉헉대며 빠르게 걷고 있는데도 말들이, 장면들이 걸음보다 빨리 들이닥친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내가 추억하는 미국에서의 이야기들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 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내 가족 이야기 같은 건 아예 궁금했던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는 그녀의 엄마가 계란거품을 내서 케이크를 만들던 과정이나, 유학을 반대하던 그녀의 오빠가 했던 말까지를 다 기억하는데, 그녀는 나에게 자매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한다. 배려라고 믿어왔던 그녀의 무심은 어쩌면 그대로 무관심이었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그녀에게 밥을 살 수가 없다. 내가 그 일 해결하자마자 자기 생각부터 났잖아, 자기한테 밥 사야한단 생각이 퍼뜩 들더라구… 나는 그 이유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녀 역시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액땜을 하듯, 개평을 주듯, 고수레를 하듯 던져지는 음식에 허둥대며 입을 대는 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아는동생의 우유값을 지불하던 따위의 일과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아는 동생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그 애가 도리어 내게 밥을 사려 했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들었을까.

서부 멀리 떨어져 사는 남편 몫의 육아까지 홀로 감당하던 그녀였다. 내 눈에 무결해 보이던 그녀에게도 녹록한 시절이 아닐 수 있었음을 이제야 이해한다. 외로웠을 그녀에게 나는 무지한 상태로 이국에 떨어져 그녀의 이야기를 마냥 들어주는 귀였다. 이 나약한 아이에게 이야기하고 또 베풀면서 그녀 역시 이국의 시간을 단단히 버텨내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대가 없는 애정이라 믿어왔던 그것은 제 말을 못 하는 귀로서, 절대적 약자라는 대가를 지불할 때에만 베풀어지는 시혜였는지도 모른다. 그게 뭐 어떻단 말인가. 따뜻했던 감각까지를 부정하진 말아야지. 우리에겐 서로가 필요했고 그녀 덕분으로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왔다. 나는 그녀에게 동등한 무엇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의 권력을 선하게 쓰는 방법을 알고 있지 않았는가. 그녀는 예전과 달라진 바 없다, 감히 말하고 싶어했고 함부로 밥값을 지불해버렸던 내가 문제였다. 그러니 괜찮은 일이다. 이런 일은 숨 쉬듯 벌어지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이고, 그러니 이 통증은 오래전 가슴에서 사라져버린 갈색얼룩의 기억, 그러니까 환각일 따름이다.

그만해야 한다. 이 생각들은 좋지 않다. 검은 해캄처럼 엉겨드는 생각들이 잠시라도, 단 1분만이라도 제발 멈춰주기를… 어느새 느릿해진 걸음을 다시 한계까지 끌어당긴다. 나는 병에 걸려 제 속도의 수 배로 바닥을 기어다니던 벌레를 본 적이 있다. 그 역시 이 같은 통각을 제 몸뚱이만으로는 고스란히 감당해내지 못 했던 걸까. 그러니까 이것은 병증이다. 어느 차디찬 밤의 기침처럼, 잠시도 멈출 줄을 모르는 발작이다. 20대의 내가 사랑이란 걸 해볼 여유가 있었다면 오늘의 나는 좀더 의연할 수 있었을까. 다른 이들은 몇 번이고 체득했을 감각을 나는 겨우 이제서야 살아보고 있는걸까. 나는 어떻게 이런 것들을 모를 수 있었을까. 마른 입술에서 거스러미를 찢어낸다.

신앙이었다. 사랑받았다고 믿은 순간부터 내 안의 그녀는 초월자로 살아있었다. 수음의 세계였다. 나는 그녀의 기억을 잡고 온통 나를 부풀리는 일에만 몰두했다. 차라리 그녀이고 싶었고, 열아홉에 썼던 멀쩡한 집 딸의 가면을 대신해 그녀의 흉내를 내는 동안 흡족했다. 자기암시에 지나지 않는 환영을 기도문처럼 붙들어야 이 추위를 잊어버릴 수 있었고, 빈 구멍을 환영으로 메꾼 뒤에야 비로소 마음이 놓여졌다. 그게 무슨 문제인가, 환각을 붙들고 사는 게 대체 왜 문제란 말인가. 어차피 너와 나의 기억이 같을 수 없고, 그것이 망상이든, 유아적 해석이든, 기억이 아니라면 취향 나부랭이라도 붙들었을 때에만 삶을 기어다닐 수 있는 게 아니었던가. 나는 주저 없이 매트릭스 속 파란 알약을 집어 삼키고 싶다. 그러나 선택 또한 허구의 몫, 그 역시 내 것은 아니다. 발을 딛고 선 공간이 땅이 아님을 자각한 사람처럼 몸뚱이가 기우뚱 댄다. 사는 일이 조롱 같다. 나는 왜 이렇게밖에 살지 못 하는 걸까.

오늘로 두 번째 그녀와의 약속을 미루는 중이다. 어떤 표정으로 그녀를 만나야 하는지를 나는 모른다. 이모들 라이드 때문에…,핑계마저 궁색하다. 그녀에겐 오늘의 내가 봉변일 것이다. 이 시간을 지나고 나면 나는 디디고 설 가난한 땅을 잃어버린다. 미명의 어디쯤을 부유하게 될런지도 나는 모른다. 온기를 잃어가는 삶이 누추하다. 그 곳엔 아이가, 여전히 자라지 못한 아이가 찬 바닥에  웅크려 떨리는 몸을 참아낸다. 어슴푸레한 저녁, 하나둘 켜지는 노점상의 촛불들이 황홀하다. 어둑한 밤, 저 멀리 흔들리는 촛불들이 따뜻해서 얼어버린 두 손으로 감싸쥐어보는 환상의 세계, 가둬도 가둬도 내 것이 되지 않는 온기의 세상. 환상은 가고 삶이 남는다. 그녀는 예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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