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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오이디푸스] 2장5절 발제

보헤미안 2020.04.26 00:12 조회 수 : 248

「안티 오이디푸스」 2장 5절 소비의 결합 종합 (통접적 종합)

발제 준형 20-04-26

결합종합의 두가지 사용 - 분리차별적 일대일대응적 사용 / 유목적 다의적 사용

  기관없는 몸들과 내공(강도)들

 

소비의 결합종합에서 기관없는 몸은 하나의 알이다. -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강도들의 관계인데, 이 관계를 통해 주체는 기관없는 몸 위를 가로지르고 그럼으로써 생성, 추락과 상승, 이주와 이동 등을 겪는다.

로널드 랭이 분열증의 과정을 통과의례의 여행, 즉 자아 상실의 초월론적 경험이라고 주장한 것은 전적으로 옳다. 여행에서 물질의 실재계는 모든 외연을 떠나 있다. 모든 것은 이 강렬한 생성과 이행과 이주 속에서 뒤섞인다. 그런데 모든 것이 이렇게 뒤섞인다면, 그것은 강도에서이다. 왜냐하면 공간과 형식은 새로운 질서, 강렬한 강도적 질서를 위해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여행들, 이행들 - 나는 생성한다.

이 질서는 무엇인가? 기관없는 몸 위에 맨 먼저 할당되는 것은 인종들, 문화들, 신들이다. 충만한 몸 위의 지역들, 강도의 지대들, 퍼텐셜의 장들을 지시하는 것이 바로 인종들과 문화들이다. 이 장들 내부에서 개체화, 성 구별 등의 현상이 생산된다. 한 장에서 다른 장으로 넘어가려면 문턱들을 넘어가야 한다. 그래서 인종들이 서로 싸우고 문명들을 파괴하는 일이 생긴다.

개체화가 생산되는 것은 오직 강도적 진동들에 의해 명백하게 규정된 힘들의 장에서이며, 이 장은 잔혹한 인물들을 오직 욕망 기계들의 유도 기관 내지 부품(마네킹)으로서만 살아 움직이게 한다.

재현의 무대 위에서 자신을 인종, 민족, 인물들과 동일시하는 하나의 자아는 없지만, 강도량의 생산 속에서 인종, 민족, 인물들을 지역, 문턱, 효과들과 동일시하는 고유명사들은 있다. 역사의 모든 이름(고유명사)은 그러하지만, 아버지의 이름은 그렇지 않다.

 

 

모든 망상은 사회적 역사적 정치적이다.

분열자는 실재계가 생산되는 어디에나, 실재계가 생산되었고 또 생산될 어디에나 있기 위해 이 거리를 조망한다. 실재가 하나의 원리이기를 그쳤다는 것은 진실이다. 분열자에게는 원리들이 없다. 분열자는, 삶과의 뭔지 모를 어떤 접촉을 상실하기는커녕, 오히려 실재의 고동치는 심장 가장 가까운 곳에, 실재계의 생산과 일체를 이루는 강렬한 지점에 있다.

 

 

인종들

모든 망상은 인종들, 문화들, 대륙들, 왕국들을 혼합하고 끌어들인다. <역사의 이름들>은 아버지의 이름에서 파생된 것일까? 슈레버의 망상의 경우처럼, 역사적 지리적 인종적인 것들을 엄청난 양으로 동원하지 않는 편집증적 망상은 하나도 없다. 파시스트가 단순한 편집증자라고 결론짓는 것이 잘못인 까닭은, 그런 결론은 망상의 역사적 정치적 내용을 가족 내적 규정으로 돌려보낼 것이기 때문이다. 골치 아픈 지점은, 이 막대한 내용이 프로이트가 행한 분석에서는 전부 사라진다는 것이다.

동일시가 의미하는 것

(모 마노니가 보고한 사례 해석에서) 라캉의 폐제라는 개념을 사용하면 반역자를 강제로 오이디푸스화하는 쪽으로 흐른다. 오이디푸스의 부재는 아버지 측의 결핍, 즉 구조 속의 구멍으로 해석된다. 이 결핍의 이름으로 우리는 오이디푸스의 다른 극, 즉 모태의 미분화에서의 상상적 동일시라는 극으로 내몰린다.

이중 구속의 법은, 상징계 속에서 폐제되는 것은 환각 형태로 실재계 속에 다시 나타나야만 한다는 의미에서, 우리를 한 극에서 다른 극으로 되던진다. 이렇게 오이디스푸화를 위해 환자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에 의존하면, 역사적 정치적 테마 전체가 상상적 동일시의 집합으로 해석된다. 분열증에서 제기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동일시의 문제이다. 분열증환자가 병든 이유는 그가 견딜 수 없는, 그리고 모두가 덩달아 그에게 덮어씌우는 오이디푸스화 (정신분석에 앞선 사회적 탄압) 때문이 아닐까?

 

 

정신분석은 사회 정치적 내용들을 어떻게 제압할까? (시작이 문제다)

가상을 가능케 했던 것은 (생물학적) 발달의 시작들이었다. 가령 세포 분할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시작의 단순성은 유도되는 것과 유도자 사이에 일종의 부합이 있다고 믿게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물을 그 시작에 의해 판단할 때 언제나 잘못 판단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시작에서부터 그 사물은 가면을 아주 다르게 사용하며, 이미 그 가면 아래서, 그 가면을 가로질러, 최종 형식들과 특유한 상위 상태들을 투자하여 궁극적으로는 이것들 자체를 정립하게 된다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마도 시작(?)에서는 오이디푸스적 유도자인 자극이 진정한 조직자라고 믿을 수도 있겠다. 아이의 삶의 시작부터 이미 문제되는 것은, 오이디푸스의 가면을 가로질러 꿰뚫는 전혀 다른 하나의 기획이고, 그 가면의 모든 구멍을 가로질러 흐르는 하나의 다른 흐름, 다른 모험, 즉 욕망적 생산의 모험이다.

부모는 무의식 속의 참된 제자리에, 즉 모종의 유도자 자리에 놓였지만, 조직자의 역할은 여전히 상징적 또는 구조적 요소들에, 즉 여전히 가족의 요소들 및 가족의 오이디푸스적 모태의 요소들에 계속해서 맡겨져 있다. 사람들은 가족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고질적인 가족주의

이것이야말로 정신분석의 치료 불가능한 가족주의이다.

<정신병자는 담당 의사라는 현실적 인물 속에서 전적으로 소외되는 반면, 의사는 정신병의 현실을 광기라는 비판적 개념 속으로 흩어 버린다>는 푸코의 글은 참으로 빛나는 글이다 !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병을 환자 내부의 가족 콤플렉스로 감쌈으로써, 그 다음엔 이 가족 콤플렉스 자체를 전이 또는 환자-의사의 관계로 감쌈으로써, 가족을 강도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와 반대로 그 사용이 다시 정신병과 대결해야만 하게 되었을 때, 갑자기 가족은 외연을 지니면서 다시 펼쳐졌고, 그 자체로 소외와 탈소외의 힘들의 등급을 측정하는 잣대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분열자의 가족에 대한 연구는, 오이디푸스로 하여금 전개된 가족의 외연적 질서를 지배하게 함으로써, 오이디푸스를 다시 살아나게 했다.

 

 

가족과 사회장

[제도분석, 반정신의학 등의 진보적(혁명적)운동들도 가족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오슈망의 정신병 가족의 변이형 ①융합형 가족, ②분파형 가족, ③관형 가족, ④폐제형 가족)

공동체 정신의학/가족 정신요법의 시도들은 성욕에 관한 정신분석 입장을 포기하게 하고, 기존 정신병원을 부수지만, 여전히 19세기 정신의학과 다시 관계를 맺는다. 혁명적 정신의학도 ‘결함이 있다면 금방 진단되어 말끔히 복원되는 구조적 오이디푸스 틀’로 떠밀려 날 위험에 처해있다. 정치적, 문화적 세계사적, 인종적 내용은 오이디푸스의 맷돌 속에 으깨진 채로 있다. 이것은 가족이 하나의 모태로, 하나의 소우주로, 하나의 표현적 환경으로 고집스레 다뤄지기 때문이다.

오이디푸스 삼각형이란 없다. 오이디푸스는 열린 사회장 안에서 늘 열려 있다. 오이디푸스는 사방으로 사회장의 네 구속으로 열려 있다(3+1도 아니고 4+n). 정상적 또는 규범적이라고 상정된 하나의 오이디푸스의 안락한 조건들 속에 실재적으로 투자된 것을 아는 문제는 언제나 더 멀리 밀려나고 있다.

 

 

욕망적 생산과 사회적 생산의 투자

혁명적인 자는 “오이디푸스, 그 따위는 몰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서로 분리된 파편들은 역사장 사회장의 모든 구석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파편으로만 존재하며, 무의식을 재현하는 동시에 집단의 갖가지 담당자들을 재현할 수 있는 하나의 형상 및 구조 속에서 조직되는 일이 절대로 없으며, 다만 항상 폭발하여 파편들이 되어 육탄전에서처럼 이 담당자들과 접촉하고 대결하고, 적대하거나 화해한다. 요컨대 결코 가족은, 설사 더 큰 집단 속에 기입되어 이것을 격하하고 이것을 표현한다 해도, 자율적 형상이란 의미에서는 하나의 소우주가 아니다. 그런데 바로 가족을 하나의 내부이게 하는 것을 방해하는 절단들과 이것들의 분배는 어디서 올까? 가족은 이 절단들을 낳지는 않는다. 가족들은 가족적이지 않은 절단들에 의해 절단된다. 구조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정신 속에 또는 팔루스의 보호 아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불가능한 직접적 실재계 속에 실존한다.

분열분석은 직접적인 생산적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해, 언제나 인공적이고, 탄압적이면서 억압되고 가족에 의해 매개된 오이디푸스적인 표현적 무의식을 파괴하려 한다.

 

 

어린 시절부터

가족주의의 주된 논변은 <적어도 처음에는 ...이다>라는 것이다. 적어도 처음에는 무의식이 실재계, 상상계, 상징계가 뒤섞인 가족 관계들과 가족 성좌들 속에서 표현되리라는 것이다. 사회적 형이상학적 관계들은 나중에 마치 하나의 너머처럼 출현하리라는 것이다. <현행> 요인이 나중이라는 이런 형식으로 착상되는 한, 어떻게 사태가 달라질 수 있으랴? 우리는, 현행 요인들이 어린 시절부터 있고, 그것들이 가족 속에 도입하는 단절들 및 연결들과 관련하여 리비도 투자들을 규정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사실 전오이디푸스는 없으며, 오이디푸스를 그 가장 어린 나이까지 거슬러 가야 하되, 무의식의 탄압 차원에서 그럴 수 있을 뿐이다. 생산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무오이디푸스적이라 함은 어디까지나 진실이다.

 

 

정신분석의 셋째 오류추리 - 일대일대응적 적용으로서의 오이디푸스

[사회구성체를 아빠 엄마와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오류라는 뜻]

오이디푸스 조작은, 한쪽에 사회적 생산, 재생산, 반생산의 담당자들, 다른 쪽에 이른바 자연적 가족적 재생산의 담당자들 사이에 일대일대응 관계들의 집합을 세우는 데서 성립한다. 이 조작은 ‘적용’이라고 불린다.

욕망적 생산은 사회적 생산의 극한이고, 자본주의 구성체 안에서 늘 방해를 받고 있다. 오이디푸스는 극한을 이전하고, 극한을 내부화한다. 군집성의 비할 데 없는 도구인 오이디푸스는 유럽인의 유순하고 사적인 궁극의 영토성이다.

 

 

역사에서 정신분석의 수치

[팔루스 중심주의로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뜻]

이런 책들은 구역질난다. 이런 책들이 정신분석의 먼 과거에 속한다고 말하면서 물리치지 않기 바란다. 우리 시대에도 이런 책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팔루스 중심주의 때문에, 이들은 꼼짝없이 정신분석활동을 언제나 가족이라는 소우주 속에서 전개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야만 하게 되며, 사회장에 대한 리비도의 직접 투자들을 <융합하는 꿈>, <일자로 회귀하는 환상>? 따위는 고발해야만 하는 오이디푸스의 단순한 상상적 종속물로 다뤄야만 하게 된다.

 

 

분리차별과 유목

[소비의 결합종합의 잘못된 사용인 ‘분리차별’과 정당한 사용인 ‘유목’]

오이디푸스적 적용들이 출발 집합으로서 예속 집단의 규정과, 이 규정의 리비도 투자에 의존하고 있다. 무의식 속에서의 결합종합들의 분리차별적 사용은 지배계급에게 봉사하는 비길 데 없는 무기이긴 하지만, 계급들의 구별들과 일치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 분리차별적 사용이 <우리 편이어서 좋다>라는 느낌, 바깥의 적들의 위협을 받는 우등 인종에 속해 있다는 느낌을 구성한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이런 까닭에 개인이건 집단이건 주체들이 자기 계급의 이해관계에 명백히 어긋나게 행동할 때, 또 그들의 객관적 상황으로 보아 투쟁해야 마땅한 계급적 이해관계에 찬동할 때, “그들은 속았다, 대중은 속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그것은 욕망의 문제이며, 욕망은 하부구조의 일부이다.

(지젝 - “대중은 자신이 하는 일을 알면서도 그렇게 한다”)

무엇인가가 흐르고 흘러가는 것이면 어디에나 욕망이 있다. 이 욕망은 이해관계를 지닌 주체들뿐 아니라 취해 있거나 잠든 주체들까지도 죽음의 하구로 몰고 간다. - 소비의 결합종합의 부당한 사용인 분리차별적 사용. 반면, 무의식적인 혁명적 투자란, 욕망이 여전히 자기의 고유한 양태로, 착취당하는 피지배계급들의 이해관계를 재절단하여, 모든 분리차별 및 그 오이디푸스적 적용을 동시에 부술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며, 역사를 환각하고 인종들을 망상하고 대륙을 불태워 버릴 수 있는 흐름을 흘러가게 하는 그런 식의 투자이다. 난 이방인이고, 영토가 없어, <난 영원히 열등 인종이야, 난 짐승, 검둥이야>

여기서도 중요한 것은 무의식 속에서 투자하고 대체-투자하는 강렬한 권력이다.

어떤 텍스트를 읽는다는 것은 문학 기계의 생산적 사용이요, 욕망 기계들의 조립이요, 텍스트에서 그 혁명적 권력을 뽑아내는 분열증적 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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