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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간에는 교재 93쪽부터 97쪽 두 번째 문단까지 읽었습니다.

네 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이었는데요,

내용이 그리 어렵지 않아서 그랬는지 세미나가 10시도 안 되어 끝났지요.

 

또한 지난 후기에 공지해드린 것처럼,

저희 세미나의 부흥을 위한 ‘‘특별교재 무상증정식’’

저희 세미나에서 기획 부문을 담당하고 계신 김현석 선생님의 주도 하에 거행되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새로운 교재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듯이,

유한 실체에는 코기토와 물체 두 가지가 있는데,

코기토의 본질은 사유로 규정되고 물체의 본질은 연장으로 규정됩니다.

그런데 물체라는 실체의 존재를 제대로 규정하려면,

우선 무한 실체와 유한 실체에 공통적인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존재의 보편적의미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

존재가 물체에 적용되었을 때의 그 특수한의미도 올바르게 파악될 수 있겠죠.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데카르트는 존재의 이 공통적 의미를 탐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신은 있다, “세계는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두 발언에서 있다가 동일한 의미를 뜻할까요?

적어도 서양의 주류 전통 철학자들은 동일한 의미로 보지 않았습니다.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하는 스피노자와 그를 계승한 들뢰즈는 그렇게 보았지만요.)

신과 세계 간에는 무한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신의 존재와 세계의 존재는 결코 일의적 의미로 이해될 수 없다고 그들은 생각하였죠.

이 두 가지 있다는 상이한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그것들 간에는 단지 유비적 관계만 있을 뿐입니다.

이로부터 그들이 공통적, 보편적 존재 의미를 탐구하지 않았다는 것도 쉽사리 알 수 있죠.

 

이 같은 유비적 존재 이해의 사고방식은 중세의 스콜라 철학은 물론이고

저 멀리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대부터 행해져 왔습니다.

그것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킨 인물이 저 유명한 아리스토텔레스이고요.

 

문제는, 스콜라 철학이 최소한 유비적 관계로 사유하기라도 했던 그 존재 물음을

데카르트는 아예 처음부터 회피해 버렸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 근대의 그는 중세 시대보다 오히려 퇴보한 것이죠.

 

심지어, 그는 우리는 실체성(곧, 실체의 존재)을 전혀 알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존재는 우리를 전혀 촉발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를 촉발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존재하는 것, 곧 존재자뿐이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 자체에 대하여 아무것도 인지할 수 없다는 말이죠.

이런 점에서 존재는 실재적 술어가 아니다고 말한 칸트도, “존재는 무()고 말한 헤겔도

데카르트와 하나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처럼 존재는 존재자로서는접근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는 오로지 속성을 통하여 표현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상 존재자적규정에 지나지 않는 속성을 통해서 말이죠.

물론 실체의 존재에는 아무 속성이나 임의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암묵적으로 전제된 존재와 실체성의 의미에 부합하는 속성, 곧 연장이라는 속성만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는 세계의 본질을 연장으로 규정했던 것이고요.

 

지난 시간에 substantia라는 용어가 이중의 의미로 사용된다고 지적했었죠.

그 용어로써 데카르트가 의도하는 바는 물론 실체성이지만,

그 실체성은 실체의 존재자적 성질을 통하여 이해된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존재와 존재자를 혼동하는 존재 망각이,

존재론적인 것과 존재적인 것을 혼동하는 존재 망각이 바로 여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죠.

제대로 된 존재 물음의 탐구라고 한다면

존재적인 것을 존재론적인 것에 근거하여 이해해야 할 텐데,

데카르트는 거꾸로 존재론적인 것(실체성)을 존재적인 것(연장)에 근거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런 개념적 혼란으로 인하여,

그는 그 용어를 실체실체성을 뜻하는 이중적 의미로 애매하게 사용하였던 것이죠.

존재 물음을 올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단순한 낱말 뜻이 아니라 사태 자체에 기반하여

이 애매하고 미세한 의미의 차이, ‘뉘앙스를 명확하게 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제20절의 내용입니다.

 

이제부터는 <존재와 시간> 21절을 읽어볼 차례인데요.

제목은 <데카르트의 세계존재론의 해석학적 논의>라고 되어 있네요.

앞의 두 절에서 하이데거는 데카르트의 존재론적 견해를 소개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면,

본 절에서 그는 데카르트의 견해를 자신의 해석학적관점에서 비판적으로 논구하는 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시작부터 비판적 물음을 던지고 있습니다.

데카르트의 세계 존재론은 세계 현상을 탐구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최소한 세계 적합성을 보여줄 수 있는 어떤 존재자를 규정하고 있는가?’

물론 그는 어느 쪽도 수행하지 못한다고 하이데거는 평가합니다.

데카르트가 연장으로 파악했던 물체는 일차적으로는 그런 (전재적) 물체가 아니라

오히려 (용재적) ‘도구로 이해되었어야 하니까요.

 

데카르트는 비록 신, 자아, 세계를 근본적으로 구별하고 있기에,

어떤 점에선 그에게도 역시 세계의 존재론적 문제를 제기해볼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론 그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는데요.

왜냐하면 그는 세계에 대한 존재론적 규정을 수행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세계 해석은 세계 현상과 세계 내부적 존재자(, 용재적 도구)의 존재를

그냥 무시하고 생략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세계성의 문제를 고찰하려면 그 현상에 대한 올바른 접근 방법이 중요하다고

예전에 <존재와 시간> 14절에서 지적한 바 있습니다.

하이데거는 이 방법으로 현존재의 평균적 일상성의 존재방식을 거론하였고요.

데카르트 철학에서도 이 같은 접근 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세계의 존재를 연장으로 사유하도록 해준 특정한 접근 방법, 특정한 현존재의 존재방식을 찾아볼 수 있죠.

데카르트는 그것을 수학적 인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수학적 인식만이 세계라는 존재자의 존재를 확실하고 안전하게 확보할 수 있는,

유일하고 올바른 방법이라고 본 것이죠.

다시 말해서, 수학적 인식으로 파악되는 존재자만이 본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존재자의 존재는 수학적 인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그것은 영속적 머무름의 성격을 갖습니다.

수학은 시간을 초월하는, 영원한 대상을 인식하고자 하는 학문이니까요.

존재를 영속적 전재성과 동일시하는 특정한 존재 이념에 입각하여,

그리고 수학적 인식만이 존재자를 참되게 인식케 해준다는 특정한 인식 이념에 입각하여,

데카르트는 세계의 재판관이 되어 그 세계의 존재를 연장이라고 선고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념이란 표현에서 암시되는 것처럼,

데카르트의 세계 존재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것은 수학이라는 특정 학문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를 영속적 전재성으로 보는 암묵적인 존재이념에 입각한 특정한 존재론적 방향 설정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 설정은 일종의 플라톤주의라고 봐도 무방하죠.

수학은 플라톤주의를 전파하기 위한 하나의 훌륭한 표현 수단인 셈이고요.

따라서 비록 그의 철학이 근대 수학과 물리학으로써 세련된 겉치장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 내면은 여전히 전통적 존재론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데카르트는 전통적 존재론으로부터 압도적 영향을 받고 있었기에,

어찌 보면 그는 올바른 접근 방법을 문제로서 제기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단순히 전통적 입장을 추종하여,

그것이 적합한 접근이라고 간주했던 노에인, 수학적 인식을 그대로 수용하기만 하면 되었으니까요.

플라톤은 아카데미아의 입구에다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들어오지 마라고 적어놓았다고 하는데요,

데카르트야말로 그런 점에서 플라톤의 충실한 후계자가 아닐까요?

노에인을 존재와 진리를 파악하는 유일한 접근법으로 생각한 점에서,

그리고 감각을 지성에 대비하여 비판적으로 바라본 점에서 특히 그러하고요.

감각은 사물의 참된 본질, 곧 그 본래적 존재를 알려주지 못하며,

단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무엇이 해로운지만 알려줄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감각은 진리의 접근 수단으로는 자격 미달인 셈이죠.

 

 

다음 시간에는 교재 97쪽 세 번째 문단부터 이어서 읽습니다.

아마 여기 제21절을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400 여쪽이나 되는 <존재와 시간>에서 드디어 100페이지를 읽게 되는 군요. ㅎㅎㅎ

 

세미나 후기는 이상으로 마치고

다음 시간에, 1020일 토요일 저녁 7에 다시 뵙겠습니다.

 

문의는 언제나처럼,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 net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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