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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임에서는 <존재와 시간>의 제17절 처음부터 79쪽까지 읽었습니다.
이제 '도구'를 다루고 있는 부분도 본 절과 다음 절만 남겨놓고 있네요. 

 

제17절의 제목은 "지시와 기호"로 되어 있지요.
이제까지 우리는 도구라는 용재자를 잠정적으로만 해석하여 지시 현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부터는 그 현상을 존재론적 발생의 차원에서 더욱 깊이 있게 탐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 절에서 다루게 될 '기호'(Zeichen)라는 용재자가 지시 현상을 더 정확히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지요.
기호를 탐구하면 지시 현상을 더 잘 파악하게 되고,
지시 현상을 더 잘 파악하면 세계 현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됩니다.
세계를 더 잘 이해하면 결국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는 셈이고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기호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구이고, 어떤 것을 '가리키기' 때문에 도구라고 합니다.
예컨대 이정표, 경계석, 폭풍경보용 공, 깃발, 장례식용 상장이 그것이죠.
그런데 기호의 '가리킴'은 지시의 한 종류로서 규정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시는 그 모든 내용을 추상하여 형식적 요소만 남길 경우 '관계'가 됩니다.
예컨대, 전투 상황에서 백기라는 기호는 항복의 의미를 가리키지요.
다시 말해서, 백기는 항복을 가리키는 방식으로 그것과 관계합니다.
그런데 이를 극단적으로 형식화하면,
'어떤 항은 다른 항에 관계한다' 라는 극히 형식적이고 추상적인 규정만 남지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관계는 지시의 다양한 종들--기호, 상징, 표현, 의미 같은--에 대한 유가 아니라고,
오히려 관계는 (아무 내용 없는) '형식적' 규정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물론 가리킴은 지시에 속하며 그래서 지시가 가리킴보다 일반적입니다.
그리고 지시는 관계에 속하며 그래서 관계가 지시보다 일반적이고요.
따라서 가리킴도 관계에 속하며 그래서 관계가 가리킴보다 (훨씬 더) 일반적이지요.
'일반성'의 관점에서 '가리킴 < 지시 < 관계'가 성립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관계는 형식적이고 일반적입니다.
하지만, 관계는 바로 형식적, 일반적이기 때문에, 아무런 내용이 없는 공허한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지시 현상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는 데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설명력이 전혀 없는 불모의 개념인 거죠.
하이데거에 의하면, 반대로 관계는 바로 지시 속에 존재론적 근원을 두고 있다고 합니다.
형식논리적 차원에선 관계가 지시에 우선하지만, 존재론적 차원에선 지시가 관계에 우선한다는 것이죠.
따라서 우리는 관계에 의거하여 지시 현상을 해명해서는 안 되고,
반대로 지시 현상을 잘 밝혀내어 이에 기초하여 관계를 분석해야만 합니다.

 

관계 개념의 형식적 불모성은 다른 경우에서도 보이는데요.
아시다시피, 기호에는 암시시고, 예고기호, 상기기호, 주의기호, 식별기호 등이 있지요.
물론 이런 기호는 특수한 종류의 지시 현상으로서,
흔적, 유물, 기록문서, 상징, 표현, 나타남, 의미와 같은 다른 종류의 지시 현상들과 구별됩니다.
그런데 이들 다른 현상 또한 그 형식적 관계의 성격 덕분에 쉽게 형식화할 수는 있지만, 
기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런 형식화를 가지고는 그 현상들을 존재론적으로 제대로 해명하지 못합니다. 

 

하이데거는 그가 살던 당시의 자동차에 달린 '붉은 회전식 화살표'를 사례로 듭니다.
이 화살표는 오늘날의 방향 표시등에 해당하는 기능을 갖는다고 하네요.
방향 표시등과 마찬가지로, 이 화살표 또한 운전자가 직접 방향을 조절합니다.
그렇지만 그 기호는 단지 운전자의 조종 행위에서만 용재자로 있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다른 운전자들과 보행자들에게 용재자로서 더 중요한 의미를 갖지요.
그들은 화살표를 보고서 곧바로 적절한 행동을 취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그들은 화살표 반대 방향으로 피하거나 그냥 멈추어 서있거나 해야 하죠.
만일 그들이 화살표가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아무런 대응도 취하지 않는다면,
곧장 교통사고가 일어나고 말 겁니다.
따라서 화살표라는 기호는 수많은 자동차와 교통 규칙들로 이루어진 '도구 연관의 전체' 안에서,
즉 그 운전자가 처해 있는 전체 교통상황 안에서, 용재적으로 있는 것입니다.
마치 망치가 작업장이라는 도구 연관의 전체 안에서 용재적으로 있듯이 말이죠.

 

물론 기호도 하나의 도구이기에 '지시'에 의해 구성됩니다.
즉, 그것은 '~을 하기 위하여(Um-zu)'란 성격을 갖지요.
기호는 무언가를 '가리키기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런 가리킴-지시가 곧 기호의 존재론적 구조는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가리킴-지시는 '유용성'(Dienlichkeit zu)-지시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유용성-지시가 도구를 도구로서 규정하는 존재론적-범주적 규정성이지요.
가리킴-지시는 다만 유용성의 '어디에'(Wozu)를 존재적 수준에서 구체화할 뿐이고요. 
위의 사례로 말해보자면,
화살표는 한편으론 왼쪽과 오른쪽의 방향을 '가리키는 지시'를 갖지만,
다른 한편으론 운전자로 하여금 자신이 갈 방향을 남들에게 알려주도록 해주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그 자동차에 대하여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해주는 데 '유용한 지시'를,
그리하여 결국엔 전체 교통 상황이 원활하게 소통되도록 해주는 데 '유용한 지시'를 갖기도 하죠.   
따라서 가리킴-지시와 유용성-지시는 동일한 것이 아니라,
이 두 지시가 하나로 합쳐져서 어떤 것을 기호로 구체화시키는 것입니다.
유용성을 지닌 도구에 가리킴-지시가 합쳐질 때, 그것은 기호가 되는 것이죠.

 

앞 장에서 도구는 사용할 수 없게 될 때 도구 전체와 세계 적합성에 대한 연관을 갖는다고 했죠?
기호 또한 도구이기에 도구 전체와 세계 적합성에 대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망치나 시계와 같은 도구와는 달리 어떤 독특하고 탁월한 방식으로 연관을 맺습니다. 
즉, 기호는 배려하는 교섭 속에서 탁월한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이죠.
본 절에서 우리가 다룰 주제는, 기호가 갖는 이 탁월성의 존재론적 근거와 의미입니다.

 

이런 탁월한 연관을 가진 기호의 가리킴이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런데 기호는 그 자체로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 곧 그것과 교섭하는 현존재와 더불어서만 의미 있게 존재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위의 물음을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습니다.
(현존재가) 기호와 적절하게 교섭한다는 것, 그것과 적절하게 관계 맺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화살표의 사례로 보자면,
이 경우에 현존재가 취해야 할 적절한 교섭이란,
화살표라는 기호에 대응하여 취해야 할 적절한 행동(존재)이란, 
우리 앞으로 달려오는 자동차의 반대 방향으로 피하거나 또는 멈추어 서는 것이죠.
그런데 피하는 행동도, 심지어 그냥 서 있는 행동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으로서
그 행동들은 본질적으로 현존재의 세계-내-존재에 속한다고 합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떤 방향을 취하고 '있고', 어떤 길 위에 '있기' 때문이죠.
화살표라는 기호는 이처럼 독특한 의미에서 '공간적인' 세계-내-존재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입니다.
(<존재와 시간> 이하의 절에서 자세하게 다루어지겠지만,
여기서 공간성은 객관적으로 확인 가능한 '전재적' 공간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우리가 화살표를 보면서 피하지도 멈추어 서지도 않고, 그냥 그것을 전재적 대상으로 응시만 한다면,
혹은 그것이 가리키는 방향을 다만 시선으로 쫓아가서 그 근방에 객관적으로 있는 사물들을 확인만 한다면,
이는 기호를 '본래적으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호를 가리키는 도구로서, 용재자로서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응시만 하고 시선으로 쫓아만 갔다가는 곧바로 교통사고로 이어지게 되죠.

 

기호라는 도구를 만나는 상황에서도 우리가 앞서 여러 번 살펴본 '배시/둘러봄'이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기호는 배려하는 교섭(Umgangs)의 배시/둘러봄(Umsicnt)에 의존하며, 
그래서 기호의 지시를 따르는 배시/둘러봄은 환경세계(Umwelt)의 환경적인 것(Um-hafte)을 분명한 조망/개관으로 가져온다."
(이 인용문에서 'um'이 반복하여 사용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주세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차의 화살표를 보면서, 우리는 단지 그 기호만 보는 게 아니라,
주위의 다른 자동차들, 교통 신호, 교통 규칙, 도로와 교통 상황 등을 전반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것이죠.
지금 처해 있는 전반적인 교통 상황(환경세계의 환경적인 것)을 이해하고(둘러보며 조망하고) 있을 때,
우리는 화살표를 보면서 다른 방향으로 피하거나 멈추어 서는 적절한 행동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배시/둘러봄이 없으면 바로 사고가 일어나고 말죠. 
이런 이해와 배시/둘러봄에서 취하는 행동이 바로 기호와의 적절한 교섭, 적절한 관계 맺음인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교재 79쪽 마지막 문단부터 제17절의 남은 부분을 마저 읽어볼 생각입니다.
나날이 재미와 난해함을 더해가는 <존재와 시간>이네요.

 

그럼 9월 8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문의는 O1O-7799-O181이나 plateaux1000@hanmail.net로 해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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