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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정신분석] 『삐딱하게 보기』, 2월 16일 발제

염동규 2013.02.16 23:30 조회 수 : 3801

<횡단정신분석세미나>

「4. 어떻게 속지 않는 자가 오류를 범하는가?」, 「5. 히치코크식 얼룩」 발제

염동규

4-1. 무의식은 외부에 있다.
1) 앞으로 뒤로

유명한 영화인 <카사블랑카>에 대해서 흔히 떠도는 전설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다. <카사블랑카>의 결말 구성에 대한 감독과 작가들의 의견 차이가 심해서 촬영을 하면서도 계속 갈팡질팡했다는 것이다. 이 전설을 전설답게 과장된 측면이 있지만, 어쨌거나 라캉의 누빔점 [주석 1 간단한 차원에서만 누빔점을 정의해보는 게 좋겠다. 누빔점이란, 질서를 구성하는 것이다. 질서가 없는 상태라면 사회의 장 속에 머물고 있는 수 없이 많은 떠도는 기표만이 존재할 것이다.(혼란의 상태) 그러나 이 기표들을 일종의 질서로 구성하는(담론의 질서로 편입시키는) 것이야 말로 누빔점의 핵심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물론 인간이 사회의 ‘주체’로서 ‘호명’되는 과정과도 합치하는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옮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의 3장,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의 1장을 참고하면 된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을 참고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는 누빔점이라는 용어가 명시되어 있다기보다는 누빔점의 기능인 ‘봉합’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적는다.) ]
에 대한 한 가지 들여다볼만한 논점을 제시한다.
우리는 ‘우리의 질서를 통해서 구성된 것일 뿐’인 서사를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긴다.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결말=선행하는 사건들로부터 자연스럽게 귀결된 무엇’이라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자연스럽게’라는 표현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전혀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이 모든 일들은 앞선 사건들의 연쇄로 인해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 아니라, 우연히 일어난 일에 가깝다. 조금 다른 표현을 써보자면 “일어난 일은 얼마든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지젝이 말하고 싶은 것은 유기적인 흐름과 자연스러운 연쇄는 환영이라는 사실이다. 유기적인 흐름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부여한 것이며, 이미 끝난 일을 오늘날 그런 식으로 ‘자리 매김’ 시킨다는 점에서 ‘소급적으로 설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젝의 이러한 설명에는 한 가지 난점이 존재한다. 우리가 이미 이 모든 일들을 필연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면, 그것이 우연이라는 점은 도대체 어떻게 가시화될 것인가? 지젝은  역순행적으로 구성된 몇 편의 영화가 ‘소급적으로 설정된 필연’을 가시화한다고 주장한다. [주석 2 어떤 의미에서, 역순행적으로 구성된 영화들은 일종의 숙명론적 구성을 보여주는 듯하다. 우선 비극적인 결말을 제시한 뒤, 어째서 그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기 때문에 관객의 입장에서는 “주인공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결과는 정해져 있어”라는 마음을 먹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생각을 거부한다. 지젝에 따르면, 역순행적으로 구성된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은 오히려 “나는 잘 알고 있어(결말을). 하지만...(정말 그렇게 될까?)”에 가깝다. 앎과 신념의 분열을 겪게 되는 관객은 주인공이 겪은 일이 모든 결과가 정해진 기계적 필연성의 세계에 귀착되지 않는다는 점을 실감한다. 다시 말해, 역순행적 구성은 세계의 우연성을 강하게 암시한다.]


2) 타자가 전부를 알아서는 안 된다

우연에 근거할 뿐인 ‘질서를 존재의 차원에 붙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있을 수도 있었고 없을 수도 있었던 것을 항상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제 결론이 나온 것일까? 우리는 우연에 불과한 환영을 넘어서 가볍게 실재로 도약하면 되는 것인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현실은 모두 환영으로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영이 붕괴한다면 인간의 현실 또한 붕괴하는 공존 관계가 여기서 드러난다. 환영 없이 현실을 구성하고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면 어떻게 할까? 상황은 몹시 절망적인 것 같다. 하지만 히치코크의 <파괴공작원>으로부터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영화에서 ‘넘어섬’의 대상이 되는 나치 스파이는 주인공의 자기-중심적인 투쟁의 결과로 도출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주인공은 스파이를 이기기 위해 단순히 反스파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스파이와 동일한 규칙 속에 편입됨으로써 스파이를 안에서부터 파괴한다. 재미있는 것은 여기서의 나치 스파이는 자신의 규칙 속에 보다 엄격하게 사로잡힘으로써 심한 제한을 받게 된다는 점이다.
논의를 조금만 더 발전시켜보자. 어떤 의미에서 이 모든 일들은 응시-발견의 효과   [주석 3여기서는 굳이 응시라고 쓰지 않고 응시-발견이라고 쓰게 되었는데, 여기에는 꽤 많은 이유가 있다. 이유를 밝히기에 앞서서 응시와 타자와 주체와 욕망에 대한 짧은 주석을 달아보는 게 좋겠다. ①응시는 확실히 타자의 응시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 지젝은 우리더러 “세상을 ‘응시’하세요. 삐딱하게 보시라구요.”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애초에 그럴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②응시는 욕망의 차원이 다분히 함유된 말이다. 이는 우리의 통상적인 시각과는 분명히 다르다. ③라캉은 응시가 철학적 충만성의 세계에서 벗어나 있다고 주장한다. 철학적 충만성의 세계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의식이 되어 자신을 관조할 수 있는 주체로 여긴다.(데카르트적 주체) 라캉은 오히려 우리 모두를 세계의 광경 속에서 응시 되는 존재로 이해한다. 오직 응시됨으로써만 우리는 “욕망하는 주체”로 ‘구성’될 수 있다. ①, ②, ③을 통해 응시의 차원이 우리의 자발적 노력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만약에 그럴 수 있다고 믿게 되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데카르트적 주체로 회귀하는 것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응시’라는 개념어를 초월론적으로 독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니다. 응시는 분명 가시화‘될’ 수 있다. 응시를 우리의 자발적 노력으로 일궈지는 어떤 것으로 보는 대신에, 응시가 발견된다고는 말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응시-발견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도 문제는 생긴다. “결국 데카르트적 주체와 그게 그거”라는 점이다. 응시-발견이라고 애써 바꿔쓴다고 해서 그 점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응시-발견”이라고 말한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자발적으로 응시를 발견해야만 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꿈을 통해 설명해야한다. 라캉에 따르면 의식의 차원에서 우리는 결코 응시를 발견할 수 없다고 한다. 여기서 응시는 두 가지 명제로 결합된다. <응시=“그것이 응시한다”+“그것이 보여준다”>가 바로 그것이다. 꿈의 차원에서는 응시가 드러날 수 있는데, 여기서도 완전히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둘 중에 “그것이 보여준다”까지만 나타날 수 있다. 꿈이든 의식이든 응시의 차원을 온전히 알 수는 없는 무력한 주체는 결코 “보는 자”의 위치에 설 수 없다. “어떠한 경우에도 주체는 자신을 Cogito로 파악할 수 없다.” 장자의 나비-꿈에서도 사정은 같은데, 자신이 나비가 되는 꿈은 실제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는 나비가 보여주는 형상”을 본 것에 불과하다. 응시가 가시화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내가 보고 있는 응시”가 아니라 “내가 타자의 장 속에서 상상해 낸 응시”이다. 그런 점에서 응시는 우리의 시점을 통해 투명하게 기술될 수 없다. 오히려 타인의 현존이 곧 응시가 된다고 봐야 한다.(자크 라캉 저, 맹정현, 이수련 역, 『세미나 Ⅺ』 참고.) ]

이다. 이 책에서 ‘삐딱하게 보기’와 동의어로 취급되는 응시 말이다. 통상적인 시각(주체로서 구성된 우리가 지닌 일상적인 시선)으로 봤을 때는 전적으로 무無에 불과한 욕망의 대상-원인 a를 발견할 수 있는 응시를 사회적인 차원으로 확장(해서 투쟁의 전략으로 이용할 때)할 때 우리는 권력과 무능력이 동시에 드러나는 기이한 상황을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치 스파이는 무도회를 연 사람이며 무도회의 질서를 규정한 사람이지만(권력자)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주인공을 무기력한 시선으로 쳐다볼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관찰자(무능력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이해해 놓고도 중요한 문제가 하나 남아 있으므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서 도대체 타자가 전부를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전부를 알아서는 안 되는 타자는 (물론 그것이 대타자이기도 하지만) <파괴 공작원>의 손님들이다. 손님들은 진행되는 상황을 모두 지켜보고 있지만 그것의 참된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다. 그리고 손님들이 무지하다는 바로 그 점 덕택에 적과 주인공의 진짜 전쟁이 가능하다. 이처럼 응시가 가능케 하는 전쟁의 상황은 “순진무구한 제 3자”의 존재를 필요로 한다.
자, 그래서 이제 우리는 지젝이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것은 일종의 투쟁 전략인 것이다. 현존하는 이데올로기를 갈아엎는 일은 언제나 공통 도덕의 상식을 넘어서 있다. 공통 도덕의 상식을 넘어서는 방법은 흔히 대안-이데올로기를 구축해서 주류 도덕과 소위 맞짱을 뜨는 것으로 표현된다. 대중을 대안-이데올로기로 계몽하여, 혁명을 이뤄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전략이 간과한 점은 바로 무지한 타자의 필요성이다. 타자를 모두 유식한 타자로 계몽하겠다는 시도는 숨 쉴 수 있는 공간 자체를 축소시킨다.

 

3) 죄의 전이

타자라는 개념 자체가 특별한 종류의 이중 속임수를 기반으로 삼고 있다. 바로 이것이 동물의 속임수와 인간의 속임수가 다른 이유이기도 한데, 그 이중 속임수란 “인간은 진실 그 자체를 통해 속일 수 있다”는 것이다. 지젝에 따르면, 히치코크의 영화에도 이러한 차원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고 한다. 예를 들면 처음에는 우연히, 혹은 강제에 의해서 연인이 되었다가 진짜로 사랑에 빠지는 경우 말이다. [주석 4 이런 사례가 진실을 기반으로 속이는 것인 이유는 간단하다. 거짓이 진실을 구성했기 때문이다. 시작은 거짓이었지만 끝은 진실인 이 상황을 우리는 “진실을 기반으로 속인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이중 속임수에 대한 진술을 조금만 비틀어 보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즉, “외부로부터 내부로 들어가는 이동”이라고 말이다. [주석 5 우리의 외면은 일종의 상징적 가면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우리의 진짜 내면이 아니라 사실은 가면에 불과한 거야”라는 말로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부여된 상징적 역할을 축소시키곤 하는데, 지젝은 지금 우리의 상징적 가면이야 말로 우리의 내면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외면은 단순한 가면이 아니라 상징적 질서 그 자체이다. 가면을 씀으로써 우리는 상호주관적인 상징적 그물망 속에서 특정한 장소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와는 다르게, 이 가면이야 말로 우리의 진실에 속한다. 지젝은 이쯤에서 끔찍한 소리를 한 마디 한다. 만약 우리가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중적으로 자신을 기만하고 있는 셈이라는 것이다.(일차적 수준에서 상징적 가면은 ‘기만’이므로 이것이 일차요, 상징적 가면이야 말로 우리의 내면을 구성한다는 것이 지젝의 아이디어이므로, 그 점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것이 이차적인 기만인 셈이다) 지젝이 보기에, 진짜 속임수는 사회적 가면이 거짓이라는 것이다. [주석 6 여기서부터 혼란에 빠질 수도 있으나, 이 점을 명심해야 한다. 상징계적 질서는 실재에 한 발짝도 근접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 뿐이므로, 상징계적 질서야 말로 세계의 진실이라고 오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의미에서 상징적 질서가 우리의 내면을 실제적으로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상징적 질서가 우리의 내면을 완전히 관통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상징적 질서로의 편입이 이루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일종의 언어로 ‘분열’된 세계 속에 살게 된다. (주체는 빗금쳐져 있다.) 그런데 여기서 지젝이 “사회적 가면이 거짓이라는 생각”을 “진짜 속임수”로 취급하고 있으니 애매할 것이다. 하지만 이 말은 양가적인 것으로 이해하기만 해도 충분하다. 즉, 상징적 질서는 허위이기도 하고, 허위가 아니기도 하다. 어떻게 쓰냐에 따라 다를 뿐이다.]

죄의 전이도 이러한 배경을 고려하면서 논해야 한다. 먼저 히치코크 영화에 있어서의 살인에 대해서부터 살펴보자. 히치코크 영화에서 살인은 단순히 살인자 vs. 희생자의 구도로 나타나지 않는다. 히치코크의 영화에서 살인은 언제나 제 3의 가담자를 함축하고 있다. 살인자는 단순히 희생자를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제 3자를 위해 범행을 저지른다는 것이다. 살인자의 행위는 제 3의 인물과 맺는 상징적 교환 틀 속에 각인된다. 이 논리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살인자는 자신의 행위를 수단으로 해서 억압된 욕망을 실현한다. 이러한 이유로 제 3의 인물은 범죄의 책임을 떠맡는다. 한 마디로, 살인자는 자신의 죄를 제 3의 인물에게 전이한다. (죄의 전이) 우리가 언뜻 보기에 이런 현상은 모두 살인자 때문이다. 살인자의 내면적 진실이 엉망이라서 살인이라는 사건도 일어난 것이고, 죄의 전이도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살인자의 행위와, 살인자의 죄가 전이되는 현상은 살인자 본인의 내면 때문이 아니라, 살인자와 제 3자 간의 상징적 교환 틀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 영화에서 제 3자가 암묵적으로든 실제적으로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은 자신이 살인자와 맺고 있는 상징적 교환 틀 속에서 어떤 특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이것을 알게 되었을 때 제 3자는 유죄가 된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이 있다. 바로 ‘변화’이다. 제 3자는 원래 무죄였으나 ‘발견’ 이후에 유죄가 된다. 평화롭던 삶이 갑자기 유죄의 자리로 전환되는 것은 우리의 상징적 구조 변화 때문이다. [주석 7 상징적 구조가 변해서 유죄가 된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사실은 바로 여기에 있다. 무죄냐 유죄냐, 추악하냐 추악하지 않냐 …등의 수없이 많은 문제들은 결국 기준의 문제이고, 기준의 문제는 상징적 구조의 문제에 다름 아니다. 즉, 대상의 속성과 관계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괜찮아 보였던 사람이 상징적 구조가 좀 변했다는 이유로 한 순간에 추악한 사람이 된다. 이처럼 실제 속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우리의 평가나 감수성이 달라진다는 점은 알고 보면 좀 웃긴 일이다. 이 주제가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영화 <스미스 씨 부부>가 코메디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4) 기독교를 히스테리화 하는 법

앞에서 살펴봤듯, 타자의 근본적인 외재성을 주체의 진실이 명료하게 설명되는 장소로 만든 게 히치코크였다. 그리고 히치코크 영화가 우리에게 보여준 이러한 차원은 곧바로 “무의식은 외부에 있다”는 라캉의 명제로 연결된다. 라캉을 통상적으로 이해하면, 이러한 주체의 진실이 설정되는 장소인 타자의 외재성은 대략 다음과 같이 이해되는 모양이다. 즉, “주체의 은밀한 자아-체험을 제한하는 형식적인 상징적 구조의 외면적이고 비심리적인 성격” 이라고 말이다. 지젝은 이러한 이해가 잘못된 것이라고 딱 잘라 말한다. 형식적인 상징적 구조는 주체의 은밀한 자아-체험을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체의 은밀한 자아-체험을 가능케 한다.
히치코크 영화에서 사랑이 갖는 기능을 보면 이 점이 조금이라도 명료해질지도 모른다. 히치코크 영화에서의 사랑은 무無로부터 빠져나와 히치코크류의 연인들을 구출할 수 있게 해주는 기적으로, 존 엘스터가 말한 바 있는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정신상태”와 일치한다. 지젝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정신 상태의 기본적인 역설은 그것이 아무리 중요한 것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그것들을 행동의 직접적인 목적으로 삼는 순간 우리를 피해 달아난다는 것이다. “연애를 해야겠다!”고 선언한다고 해서 연애를 할 수는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 사랑은 자발적인 (상징적)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적으로 나타나는 부산물에 가깝다. [주석 8 물론 사랑은 우리의 행동과 함께 따라다니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행동에 의한 것은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존재에 그 원인이 있다는 뜻이다.]
 이 부산물이 바로 라캉이 말한 대상 a [주석 9 우리는 앞서 대상 a는 근본적으로 무無인 것이라고 이해했다. 이 부분이라고 해서 그 사실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통상적인 시각(위의 용어로 하면 행위가 될 것이다.)으로는 절대로 발견되지 않는 것이 대상 a였다. 오로지 응시를 발견할 수 있을 때만 대상 a는 드러난다. 이처럼 대상 a는 상징적 구조화를 통해 완전히 봉합되지 않는 어떤 잉여의 지점이다. 그것을 응시될 수 없다면 전적으로 아무것도 아닌 무엇. 대상 a는 실재의 대용물로도 이해가 된다. 차이와 변별로 구조화된 상징계에 편입되는 동시에 주체는 완전 충만의 실재를 잃게 되므로 주체는 언제나 빗금쳐진 주체로 이해된다. 여기서 잃게 되는 실재를 대신하는 게 대상 a이다.]
이다.
이처럼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정신 상태를 가장 비극적이게 재현하는 사람이 바로 비정파 탐정 소설의 마음씨 고운 요부였다. 이 여자는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주위 남자들이 도덕적 부패에 빠지게 되는 것을 공포스럽게 지켜본다. 라캉의 타자가 등장하는 지점은 바로 이 지점이다. 부산물인 정신상태는 본질적으로 타자에 의해 산출된다. 타자는 우리 대신 우리의 입장에서 결정을 내린다. 그래서 우리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 된다. 존 엘스터가 이 부산물적인 정신상태를 헤겔의 이성의 간지 개념에 의거하여 보여주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주체는 명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목적으로 특정한 행위에 참여하지만, 여기서 그는 실패하게 된다. 그 렇게 말하는 이유는 그의 행위가 만들어낸 최종 결과가 전적으로 의도하지 않은 다른 상태의 상황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전적으로 다른 상황을 불러온 것은 “이성의 간지”로, 이것이 바로 주체의 행위를 통해 포섭되지 않는 부산물적인 정신상태가 타자에 의해 산출된다고 할 수 있는 이유이다. 이 경우, 타자는 역사 이성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이상한 냄새를 맡을 수밖에 없다. 도대체가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 경우, 역사의 주체는 인간이 아니라 타자인 것으로 보인다. 주체가 아무리 발버둥쳐봤자 이미 역사 이성이 모든 것을 정해놓았으니 편하게 순응이나 하라는 헛된 결론으로 빠져버릴 수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아니라는 데에 이 논의의 난점이 있다. 타자는 역사의 주체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며, 앞서서 말했듯이 목적론은 언제나 환영일 뿐이다. 타자는 본질적으로 부산물인 정신 상태가 우연히 창출되었을 때나 발견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타자는 우연한 응시-발견의 효과일 뿐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타인으로부터 진실하고 전도된 형태로 ‘그 자신’의 메시지를 받는다는 라캉의 명제 역시 이런 배경과 겸해서 읽어야 한다. 타자의 의도가 곧이곧대로 주체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타자가 하는 행위의 ‘부산물들’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주체가 그 결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히치콕의 <밧줄>, <열차 속의 이방인>에서 확인되듯, 타자로 등장하는 자들은 자신에게 전가되는 죄를 떠맡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히치코크의 또 다른 영화인 <나는 고백한다>의 경우에서 이 부분은 비틀어지고, 이 비틀어짐이 바로 이 장의 제목인 “기독교를 히스테리화 하는 방법”에 해당된다. <나는 고백한다> 역시 <밧줄>, <열차 속의 이방인>처럼 죄의 전이가 나타나지만, 여기서 타자로 등장하는 고헤신부는 고해성사를 듣기 때문에 애초부터 자신이 살인행위의 수신자임을 알고 있다. 신부는 스스로 타인의 욕망을 그 자신의 것으로 인식한다. 이처럼 타인의 죄를 자신의 죄로 인정하게 점이 기독교를 새롭게 볼 수 있게 우리를 도와주는 지점이다. <나는 고백한다>의 신부가 보여주는 바는 전적으로 예수의 그것과 같기 때문이다. 예수는 죄인들의 죄를 떠맡음으로써, 죄인들의 욕망을 그 자신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셈이다. 즉, 예수는 타인의 자리에서 욕망한다. 그가 죄인을 동정하는 근거도 여기에 있기 때문에 예수는 히스테리 환자인 것이다.

 

4-2. 사라지는 여인들
1)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적 질서가 애초에 기만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을 앞의 논의에서 유추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상징적 질서가 기만적이라는 점이 너무나도 역겨운 사람이라면 상징적 질서를 무시하는 정신병자가 되는 수밖에 없다. 이러한 정신병자의 입장을 ‘모든 사람이 부인하는 실종’이라는 주제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사라진 여인>을 통해서 알아보자. ‘모든 사람이 부인하는 실종’이라는 주제는 실제 세상에서는 있을 것도 같지 않은 터무니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이야기들에 자극을 받는다. 어쨌건 여기서 사라지는 것이 하필이면 아주 여자다운 여자였다는 점에 주목하자. 이처럼 여자가 사라졌다는 영화의 내용은 라캉의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로 이어진다.
라캉의 이론에 따르면 ‘그 여자The Woman’는 환영이다. 이 말은 남자 속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궁극적인 여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영화에서 ‘그 여자’가 없다는 사실은 사회-상징적 그물망 속에 그녀가 남긴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점을 통해 주인공에게 명백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그 여자’가 없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여자’는 참을 수 없는 매력을 풍긴다는 사실을 어디에 위치시키는 게 좋을까? 기본적인 차원에서 이 맥락은 아주 복잡하면서도 역설적인 측면을 내포한다. 즉, 여자가 없다는 것을 기본적인 원칙으로 하되, 여자가 마치 정말로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는 뜻이다. 통상적으로도 우리는 모든 것이 완벽한 여자는 없다는 점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정말 걷잡을 수 없이 매력적인 여자가 나타났을 때, 우리는 마치 “그 여자가 바로 저 여자야!”, 라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여기서, “여자는 있어! 바로 저 여자!”라는 착각을 범하는 자가 바로, 뒤에서는 정신병자로 묘사되는 “속지 않는 자”이다. 로버트 하인라인의 <그들이>를 보자. <그들이>에서 주인공은 속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에는 주인공을 속이는 진짜 인물이 존재한다. 주인공을 속이는 인물이 주인공을 속였다는 사실을 주인공이 알게 되는 것이 바로 지젝이 여기에서 “일종의 성공적인 조우”라고 부른 지점이다. 여기서 주인공은 현실과 허구를 분리하는 경계를 폐지하게 된다. 이제 허구는 현실과 뒤섞이게 되고, 그럼으로써 현실은 붕괴된다. 요컨대, 주인공은 편집증 환자인 셈이다.
편집증 환자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이 환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기만되지 않는 또 하나의 주체” [주석 10 이 또 하나의 주체가 라캉이 말한 타자의 타자이다.]
를 상정한다는 것이다. 즉, 정신병적 주체는 대타자를 불신하는데, 이 불신은 반드시 “타자의 타자”를 상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체 이게 무엇과 연관되는 것일까? 그래서 여자는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도 애매하고 주인공이 속는 것과 속지 않는 것 중 어떤 게 낫다는 것인지도 애매하다. 결론적으로 정리해보기에 앞서, 편집증자에 대한 설명을 조금만 더 구체화 해보자.
편집증자가 타자의 타자를 상정하면서 겪게 되는 핵심적인 오류는, 타자의 타자가 전제되는 순간부터 “여자는 없다”는 명제가 폐기된다는 사실이다. 그는 상징적인 질서가 기본적으로 기만의 질서라는 사실을 알지만, 그의 앎은 인정認定을 향한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게 다 속이는 놈 탓”이라는 음모론만을 구성하게 된다. 즉 편집증자의 해석 속에 “여자는 존재한다”. 바로 이 점에 정신병적 주체(속지 않는 주체)가 갖는 치명적인 한계가 있다. 그는 속지 않지만 반드시 뜬 구름만 잡게 된다. 기만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2) 승화, 그리고 대상의 붕괴

사라진 여자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히치코크의 <현기증>에 드러나 있다. 지젝이 보기에 이 영화는 라캉의 명제들 중 하나인 “승화는 탈-성욕화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오히려 죽음과 관계된다”를 입증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 명제에 잘 부합한다고 한다. ‘숭고한’ 이미지가 발휘하는 매혹의 힘은 언제나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차원의 징조를 나타낸다. 그런데도 통상적인 라캉 해석자들은 승화를 탈-성욕화와 동일시하는데, 이들은 죽음을 부르는 치명적인 차원으로 “승화”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문명으로 이행”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이 승화를 리비도의 커섹시스의 전치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단언컨대, 지젝은 승화를 이렇게 간단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라캉의 출발점은 직접적이고 육욕적인 만족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 이 점을 예견한다.(애초에 통상적 해석자들과는 출발점이 다름) 오히려 라캉의 출발점은 본원적인 결핍이다. [주석 11 우리가 앞선 장을 읽으면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본원적인 결핍의 주위를 순환하는 것은 충동이다. 그리고 이 본원적 공백의 자리를 일시적으로 매우는 실재의 대용물이 바로 대상 a이다.]
 여기서 본원적인 결핍은 실증적 존재를 숭고한 대상(프로이트의 사물 : 쾌락의 불가능하고 도달할 수 없는 신체)으로 포장하는 효과를 낳는다. 숭고한 대상이란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 즉, 무無이며, 개념적으로는 대상 a라고 불릴 수 있는 차원이다.
사실상 아무것도 아닌 것이나, 숭고한 것으로 격상된 ‘사물’은 단지 그림자로만 존속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그 사물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게 됨으로써 우리의 환상이 깨지게 된다면, 사물은 해체되고 말 것이다.(p. 27의 <검은집>을 보라!) 히치코크의 <현기증>에서 주디 마들레인도 이와 같다. 주디 마들레인은 이 영화에서 일종의 숭고한 대상으로 기능한다. 그녀가 숭고한 대상이라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의 운명엔 죽음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죽는다는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뒤에서 밝혀지듯, 그녀는 가짜로 죽는 거고, 후반부에 주디라는 이름으로 다시 돌아온다. 주인공 남자는 그녀가 진짜 마들레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서는, 필사적으로 주디를 죽은 마들레인의 이미지로 재창조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다가 주디=마들레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주인공은 완전히 흥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현기증>의 스토리 라인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살펴보아야 승화와 대상의 붕괴에 관한 이 장의 교훈을 관통할 수 있으므로,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우선 주인공 남자가 주디를 (죽었다고 그가 생각하는) 마들레인의 이미지로 재창조한다는 부분부터 보자. 이 장면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인공 남자가 마들레인이 죽었다고 생각한다는 그 조건 하에서만 마들레인을 사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그녀는 없어야 한다. 없어져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불가능한 대상으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지만 그녀를 숭고한 대상으로 설정할 수 있다. [주석 12 “(궁극적으로 보편적인) 여자는 없다”는 라캉의 명제와도 상통한다. 모든 여성은 궁극적인 절대 여성이 아니다. 그런데 이 중 어떤 한 여성을 숭고한 대상으로 끌어올리면 올릴수록, 언제나 그 여성에게 죽음의 위험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없는 존재를 있다고 생각함으로써만 숭고한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 대상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마침내 그것이 별 게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숭고한 대상은 시큰둥해지고, 해체된다. <현기증>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세속적인 주디가 마들레인과 같은 인물이라는 사실을 주인공이 알게되는 순간, 마들레인의 숭고함은 해체된다. ]
 이 점을 ‘상실’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상실’은 숭고한 대상의 운명이다. 숭고한 대상이 숭고한 대상으로 남아 있으려면, 숭고한 대상은 반드시 죽어야만 한다.(마들레인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이유.)
다음으로, 마침내 주디와 마들레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를 살펴보자. 이 때는 마들레인을 상실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었던 어떤 것을 완전히 상실하게되므로, 이중적인 상실이 나타난다.(상실의 상실) 이 단계에서 마들레인의 형상은 완전히 해체된다.

 

5-1. 남근적 왜상
1)구순기, 항문기, 남근기

<해외특파원>에서는 전원적인 풍격 속의 낯선 측면이 발견된다. 지젝에 따르면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누빔점을 가장 순수한 형태로 발견하게 해주는 장면이라고 한다. 우리가 이 낯선 측면을 알게 되는 순간, 그 상황에 속한 세부는, 그 상황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은 완전히 낯선 것으로 변하고, 이 모든 것들이 공허에  휩싸인다. 낯선 세부. 그것이 바로 주인기표(텅 빈 기표, 기의 없는 기표)이다. 상황 속에 배치된 모든 것들에는 각자의 기의가 있다. 튤립은 튤립. 하늘은 하늘……. 그러나 거꾸로 도는 풍차에는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것은 기의 없는 기표이며, 바로 이 기의 없는 공허한 기표가 우리를 낯선 세계로 인도한다. 낯선 세계 안에서 우리는 원래 튤립이었던 튤립과, 원래 하늘이었던 하늘의 의미를 일대일로 생각할 수 없게 된다. 어쩐지 튤립은 튤립이 아니라 다른 존재인 것 같고, 하늘 역시 마찬가지이다. 공포는 이런 식으로 내면화된다.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줄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 자”이다. 주인 기표의 출현은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 그 타자의 응시 [주석 13 응시, 삐딱하게 보기가 주체의 역량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계속해서 밝혀지고 있다. 홀바인의 <대사들>을 다시 떠올려보는 게 좋겠다. <대사들>을 보는 자가 방문을 나설 때 발견하게 되는 해골의 형상은 단순하게 “발견했다”로 이해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다. 우리가 해골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해골이 나를 보는 것을 내가 보는 것’이라는 뜻이다. 여기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이다. 주인공은 삐딱하게 보려는 의도를 가져서 삐딱하게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많이 알고 있는 자로서의 타자”의 응시를 마주했을 때 비로소 모든 것이 달라 보임을 깨닫게 된다.]
에 기초를 두고 있다. 아무튼 이러한 응시의 메커니즘을 영화와 프로이트의 발달 단계 이론을 통해 설명해보자.

①구순기
이는 영화 제작의 영도이다. 이 단계는 그냥 특정한 사건을 촬영만 할 뿐이며, 관객은 그것을 일방적으로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직접적인 현실의 묘사인 것은 아니다. 여전히 쇼트들은 선택되며, 현실의 ‘일부’만이 프레임 안에 편입되거나 배제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류의 영화는 환유적이다. 한 사건에서 그 다음 사건으로 장면은 이동하고 옮겨갈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쇼트의 프레임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너머의 것을 알고 싶다는 욕망을 지니게 된다. 그런 점에서 구순기는 “욕망은 환유이다”라는 라캉의 문장을 기본적인 수준에서 보여주는 단계라고 할 수 있겠다.

②항문기
여기서부터는 몽타주가 등장한다. 몽타주는 행위를 절단화하고 파편화하며 다각화하므로, 구순기에서의 단순히 연속적이기만 한 환유적 이행은 상실된다. 몽타주의 기능에 따라 영화에 등장하는 장면들은 장면 그대로의 것 이상의 의미를 수반하게 되는데, 이는 은유적인 것과 동일하다. 따라서 항문기의 영화는 은유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항문기적인 영화의 대표적인 표현 방식은 평행편집이다. 평행편집은 동시간에 일어나는 두 가지의 사건을 수평적으로 공존하게 함으로써 두 사건 사이의 긴장을 창출하는 방식을 가리켜 말한다.

③남근기
남근기의 영화는 항문기와는 다르게 분절된 행위 둘의 나란한 연결을 이루는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 오히려 둘을 하나로 만든다. 항문기의 영화에서 서로 다른 두 사건을 공존하게 만듦으로써 일종의 긴장을 창출해냈다면, 남근기의 영화에서는 항문기 영화에서의 긴장을 한 사건 안으로 옮겨놓는다. 다시 말해서, 남근기 영화의 공포는 목가적인 세계의 외부에서 진행되는 사건 때문이 아니라, 바로 목가적인 세계 내부 자체에서 발견되는 오점 때문이다. 이러한 오점은 앞서도 설명했듯이, 목가적이고 평화로우며 아무런 이상도 없어 보이는 공간을 통째로 기괴한 것으로 만들면서, 그 공간의 모든 요소들이 이중적인 의미를 지니게 만든다. 모든 요소들이 이중적인 의미를 갖게 되므로, 영화는 일종의 해석학적 운동을 수반한다.

남근기가 중요하므로, 남근기에 대해서 더 설명해 보아야 한다. 남근기 영화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리비도적 경제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를 수반할 수 있다. 이 영화 속에서 ‘진실한’ 행동은 억압되고 내면화되고 주관화된다. 모든 것은 욕망, 환각, 의혹, 강박, 죄책감의 형태로 제시된다. 따라서 우리가 겉으로 보는 모든 모습들은 단순한 표피에 지나지 않는 것이 되며, 그 아래에는 금지된 것의 영역이 있다.(무의식) 이처럼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조차도 불투명한 총체적인 모호함 속에서 주인공은 점점 더 모든 것들을 위협적인 것으로 만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결국 ‘응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주인공은 여기서 응시를 만난다. 타인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을 내가 보게 되는 그 섬뜩한 응시 말이다. 그 섬뜩한 응시가 만들어내는 오점(주인기표)이 해석적 운동을 추동해낸다. 따라서 주인기표는 자연스럽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해석 하게 해주는 것이다. 모든 것들은 주인기표의 영향 아래 보충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이해되며, 새로운 의미 공간을 열어주는 무無이다.

 

2) 타인의 응시로서의 얼룩

앞에서 우리는 해석적 운동을 추동하는 주인 기표에 대해 이야기하였다. 근데 이것은 분명 응시의 효과라고 했다. 좀 더 자세히 이 부분을 지적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창>이라는 영화의 피날레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영화에서의 해석적 운동은 감시자 제프의 응시가 살인자의 응시와 마주칠 때 지연된다. 이렇게 해석적 운동이 지연되었을 때, 제프는 중립적 관찰자의 입장을 상실하고 사건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게 됨으로써, 자신이 관찰하던 사건의 일부가 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프는 억지로 떠밀려서 자기 자신의 욕망의 문제, 즉 그가 이 사건으로부터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의 문제와 대면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당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그 유명한 “Che Vuoi?”이다. 이 질문은 <이창>에서 발설되기까지 한다는 데 우리의 초점이 놓인다. 제프가 필사적으로 플래시 전구의 빛으로 살인범을 제지하려 할수록 살인범이 접근해오는 마지막 장면 전체는 비현실적으로 촬영되는데, 비혀실적이라는 점이 문제다. 신속하고 정확한 움직임이 기대되는 곳에서 도리어 정상적 리듬의 왜상적 변형을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형은 곧바로 주체에 대한 환상 대상의 운동정지 및 무력화(원래 살인자에 대한 환상을 품었으나, 그것과 마주하게 되었을 때 환상 대상의 운동은 무력화된다.) 효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말은 결국 주인공이 자신의 아내를 죽인 살인범을 매혹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뜻이 된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일까? 지젝에 따르면, 살인범은 주인공 제프의 욕망을 실현시켜준다. 제프는 아내인 그래이스 켈리가 죽기를 바랐던 것이다! [주석 14 사실 꼭 죽었으면 좋겠다는 건 아니었고, 성관계의 불가능성이라는 실질적 곤경에 직면한 제프가 해결책으로 삼을 수 있었던 상상적인 측면들이 이창 너머로 보이는 광경들이었다고 하는 게 더 맞다. 이창 너머로 보이는 영상들에는 살인도 있지만, 행복한 신혼부부가 되는 것도 있고, 그래이스 켈리를 포기하는 것도 있으며, 은둔생활을 하는 것도 있었다. 살인은 그것들 중 하나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점이 존재한다. 살인은 그것들 중 하나였지만, 분명 이 영화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살인자의 응시와 제프의 응시가 만나는 순간, 해석적 운동의 지연이 일어났다”는 설명도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두 응시가 만났을 때, 살인자와 주인공은 둘 다 욕망의 변증법 속으로 휩쓸려버린다. 이제 더 이상 그들은 동떨어진 관찰자로서의 위치에 머무르지 못한다.
 그리고 이 욕망은 살인마가 이뤄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아직도 모호하게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성관계의 불가능성이 바로 그것이다. 도대체 뭐가 어쨌길래 성관계가 불가능한 것일까? 사실, 앞에서 말했던 “여자는 없다”라는 명제를 통해서 읽어볼 수도 있는데, 이것은 보편과 전체로서의 여성은 없다는 의미일 뿐이므로 <이창>에 나타나는 성관계의 불가능성과는 완전히 부합하지 않는 지점이 있다. 제프는 “궁극의 여성은 존재하는가, 아닌가”의 문제에 빠져든 것이 아니라 그냥 성관계 자체를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난점을 해결하기 위해 지젝이 도입한 것은 모성적 초자아라는 개념이었다. 제프가 성관계를 할 수 없게 하는 참을 수 없는 내면의 목소리가 있다는 것이다.(영화에서는 소프라노의 음성으로 형상화되었다.)

3) 트래킹 쇼트

얼룩, 즉 두드러져 있는 실재계의 잔여 [주석 15 우리는 이제 용어 사용에서의 혼돈을 조금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용되는 개념어들은 대체로 다음의 등가·유사관계를 이룬다. 즉, <두드러져 있는 실재계의 잔여=얼룩=기의 없는 기표=주인기표=해석 순환운동을 촉발시키는 것=응시의 효과=대상 a> 정도로 정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다짜고짜 다 똑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특히 이 책의 7장에서는 저런 등가 관계가 거의 완전히 파괴된다.) 단순히 강조점만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얽힐 수 있는 개념의 변동이 수반될 때도 있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읽어나가면서 맥락적으로 비슷한 차원이 ‘충분히’ 존재한다는 점만 유념하는 게 좋겠다.]
를 고립시키기 위한 히치코크의 방식은 트래킹 쇼트로 실현된다. 트래킹 쇼트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트래킹 쇼트가 어떻게 변환되는지에 대해서 살펴봐야 한다. 먼저 <새>를 살펴 보자. 주인공의 모친이, 새들에 의해 파괴된 방을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양쪽 눈이 파인 잠옷 바람의 시체를 보게 되는 장면에서 히치코크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눈이 파인 시체’의 얼굴 부분으로 갑작스럽게 ‘트래킹’한다. 도대체 이것의 효과는 무엇일까?
효과는 바로 욕구불만이다. 그 쇼트들이 공포스러운 대상을 더 가까이 보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만족시킬 때도, 우리에게 일종의 욕구불만을 일으킨다는 기묘한 원리가 작동된다. 아무리 공포스러운 대상을 가까이 보고 싶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은 채로 공포스러운 대상을 가까이 보게 될 뿐이라면, 일종의 욕구 불만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히치코크의 <새>에 등장하는 트래킹 쇼트가 일반적인 트래킹 쇼트와 차별화되는 것이다. 일반적인 트래킹 쇼트라면 대상에 특정한 무게를 부여하겠지만,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에서 우리는 대상을 놓친다.
대상을 놓친다는 사실 때문에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가 갖는 가치가 떨어진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상에 특정한 무게가 부여되는 것과 대상을 놓치는 것은 강박과 히스테리의 차이에 준한다. 강박이나 히스테리나 둘 다 대상 a에 주목하는 특정한 방식이다. 자, 우리는 이런 식으로 히치콕의 얼룩이 지니는 ‘대상적 차원’ 과 만날 수 있다. 환유적 욕망을 작동시키는 것과 ᄆᆞᆫ가지로, 해석적 운동을 작동시키는 보충적 의미를 이미지의 모든 요소에 부여하며 의미를 이중화하는 그 오점의 효과와 대상 a의 연관성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오점을 이렇게 단순히 이해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오점은 양가적이기 때문이다. 오점은 해석적 운동을 추동시킬 정도로 충분히 활동적일 수도 있지만 비활동적이고 불투명한 측면도 있다. 즉, 대상 a는 현실을 구성하게 해주는 전진기지이기도 하지만, 현실이 출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은폐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대상 a의 측면은 다음과 같은 라캉의 말에서 무엇보다도 잘 드러난다. 라캉은 이렇게 말했다. “현실의 영역은 대상 a의 추출에 의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상 a는 현실의 영역을 틀에 짜맞춘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떻게 빠져버린 것이 여전히 현실의 틀에 짜맞출 수가 있는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자크-알랭 밀레의 주석은 이 어려움을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해결하였다.

“대상 소문자 a가 현실을 틀짓는 것은 바로 대상 a가 현실 영역으로부터 제거되기 때문이다. 이 그림의 표면에서 빗금친 네모로 표시된 부분을 빼내면 프레임이라고 부르는 것을 얻게 된다. 이것은 구멍을 위한 프레임일 뿐만 아니라 표면의 나머지의 프레임이다. 어떠한 창이라도 그러한 프레임을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대상 a는 그러한 표면의 단편이며, 그 표면을 틀짓는 것은 현실로부터 대상 a를 빼내는 것이다. 가로막힌 주체로서의―결핍의 존재로서의―주체는 이 구멍이다. 존재하는 것으로서 그것은 추출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거기서부터 주체와 대상 a의 등치가 나온다.”(p. 191)

솔직히 이것도 어려운데, 몇 가지 가정을 통해서 그림을 더 효과적으로 이해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왼쪽의 그림에서 저 빗금친 네모칸이 빠져나가는 그 부분이다. 일단 저 부분이 빠지지 않은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를 얘기해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다. 빗금친 부분이 빠지지 않은 상태는 “상징적 현실”이 출현하지 않은 무질서의 상태이다. 이 상태는 차이와 구분의 논리가 아직 도입되기 이전의 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점에서 대상 a를 추출해낼 때, 비로소 상징적 현실이라고 부를만한 것이 출현한다.[주석 16 다음의 설명을 주석으로 달아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지금 설명하고 있는 지점은 오이디푸스 과정과 거의 같다. 오이디푸스 과정은 근친상간적으로 구성되어 있던 어머니와 아이를 분리해놓는 과정으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이 분리의 과정은 아이에게 있어서 “최초의 법”으로 작용한다. 이와 같은 분리가 있기 이전에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모든 것, 어머니의 삶의 조건이 되고 싶어 한다. 막연하게나마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적 관계를 알아차린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자신이 스스로 남근인 대상이 되고 싶어 한다. 이러한 상태에 놓인 아이에게 아버지의 법이 등장한다. 아이는 이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자신이 남근인 존재가 아니라 남근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다. 바로 이 과정이 상징적 거세라고 불리는 사건이다. 이 설명이 이 부분과 관계되는 이유는, 아이의 무질서하고 분절되지 않은 현실이 아버지의 금기로 인해서 분절된다는 점에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의 금기는 아이를 “남근인 존재”에서 “남근을 지닌 존재”로 만듦으로써 아이의 상징적 거세에 성공한다. 이와 같은 제거가 없다면 아이는 어머니의 욕망에 예속된  상태에 고착되고 말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도 전적으로 이 논리와 같다. 현실을 구성하려면 뭔가가 빠져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이 구멍이 없다면 현실은 구성될 수가 없다는 점에 있다. 대상 a의 근본적인 역설이 여기서 드러난다. 대상 a는 분명 제거되는 어떤 것이지만, 자신의 결여로서 역설적이게도 자신의 존재를 현시한다. 이것이 바로 대상 a의 양가적인 측면이다. 대상 a는 빠져야만 하는 것인 동시에 ‘부재로서’, 현실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을 바탕으로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를 독해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가, 현실에 대한 전반적인 관점에 우선 우리를 위치시킨 다음에, 그 프레임을 가지고 현실에 제공하는 오점을 향해 갑작스레 우리가 나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를 통해 우리는 현실 쪽에서 떨어져 나와 이동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실재계(실재의 작은 조각)와 나란히 접해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가 ‘몽타주’와 단절하는 것도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몽타주에서 문제가 되는 것이 불연속적인 커트들을 일관된 전체로서 파악하는 것이었다면, 히치코크의 트래킹 쇼트에서는 오점을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일관된  전체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게 된다. [주석 17 트래킹 쇼트의 종결점인 이 실제 대상은 두 가지의 주요한 형식을 취할 수 있다. 하나는 관객인 우리의 위치가 이미 영화 속에 각인되어 있는 한에 있어서 타인의 응시, 즉 그림 자체가 우리를 응시하는 시점이다.(눈에 구멍이 뚫린 시체는 우리를 바라본다. 그것을 우리가 본다.) 다른 하나는 주체들 간의 상징적 교환의 구조적 그물망을 구현하고 보장하면서도 한 주체로부터 또 다른 한 주체로 순환하는 실재의 한 조각이다.]
 
5-2. 모성적 초자아
1)왜 새들이 공격해 오는가?

그러면 도대체 히치코크 식의 얼룩이 리비도적으로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 충분히 봤듯, 히치코크 식 얼룩의 논리는 남근적이다. 그러나 정신분석학 개념들의 사용에서 흔히 발견되듯이, 남근적 논리라고 해서 순수히 남근적인 논리이기만 할 리는 없다. 개념들은 서로 연루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도 마찬가지이다. 히치코크 식 얼룩은 남근적임과 동시에 모성적 초자아를 물질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한다. 다시 한 번 <새>를 살펴보자. 도대체 새들은 왜 공격을 하는가? 관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기계적 독해의 방법을 따르기로 한다. 이 독해는 주요 인물들의 상호주관적 관계 속에서 영화의 핵심을 찾아낸다. 주요 인물들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새> 안에서 새의 공격 플롯에 가려서 부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새야 말로 사소하다. 새는 단순히 근본적인 부조화를 구현하는 수준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새>에 대한 기계론적 독해에 주목할 때만이 라캉의 이야기에 근접할 수 있다.
우선은 라캉이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유명한 논문에서 활용한 방식을 동원하여 히치코크 영화 5편을 중복을 허용해서 세 편씩 끊어 보자. 먼저 첫째 그룹은 <누명 쓴 사나이>,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이다. 이 세 편의 영화들은 허위적 정체성과 관련이 있는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에서는 인물의 정체성이 부당하게 오해된다.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모두 상징계적 체계의 균열과 간극을 나타내는 영화라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점이 우리로 하여금 히치코크 영화의 두 번째 그룹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해준다.
두 번째 그룹은 <현기증>,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이다. 이 영화들은 첫 번째 그룹에서 나타난 결핍과 균열을 보상하려는 요소들을 드러낸다. 보상의 차원은 세 영화에 차이가 있다. 먼저 <현기증>의 경우, 보상은 상상적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의 부재를 시각적 스타일 등의 차원에서 재창조하려고 애쓴다. 다음으로,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는 상징적 차원에서의 보상을 보여준다. 사람은 없는데 기표만 덩그러니 있는 상황(결여)에서 기표는 우연히 주인공에게 결착되고(보상), 그 결착이 서사를 이끈다. 마지막으로 <사이코>는 실재적 차원에서의 보상을 나타낸다. 이 영화의 주인공 노먼 베이츠는 어머니의 이미지를 부활시키지도(상상적 차원의 보상을 거부), 어머니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것(상징적 차원에서의 보상을 거부)도 원치 않는다. 다만 그는 어머니의 장소를 실재 안에 두는 것만을 원할 뿐인데 [주석 18 영화를 봐야 무슨 뜻인지 정확히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
, 이것은 정신병적 상태나 다름없다고 한다.
세 번째 그룹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사이코>, <새>이다. 이 영화들은 모성적 초자아라는 모티브와 결합된다. 세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아버지가 없는 주인공인데, 그들의 어머니는 모두 굳세고 소유욕이 강하며, 정상적인 성관계를 방해하는 사람들이다. 세 영화를 들여다봄에 있어서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특징은, 한 영화에서 다음 영화로 이동해가면서 새의 모습을 한 위협의 형상이 더 거대한 돌출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에서는 강철로 된 새가 등장하고, <사이코>에서는 박제된 새들로 가득 찬 방이 등장한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의 강철로 된 새는 은유적이고, <사이코>의 박제된 새들은 환유적이라는 사실이다. 왜 이 점이 중요하느냐면, 은유와 환유는 기본적인 수준에서의 구조화 논리이기 때문이다.(꿈은 은유와 환유를 통해 무의식을 언어처럼 구조화한다.) 반면에 <새>에서는 은유와 환유로써 창출된 형상이 아니라 정말로 살아 있는 새가 나타난다.
세 번째 그룹의 영화들에서 발견한 두 가지 주요 특징을 결합하는 것이 관건이다. 즉, 영화들에서 나타나는 공포스러운 새들의 형상은(두 번째 특징)은 상호주관적 관계에 있어서의 부조화(첫 번째 특징 ; 정상적인 성관계를 방해하는 데다가 암시적이게는 아버지가 없다.)를 드러낸다는 말이다. 세 번째 그룹에서 관계의 부조화는 모성적 초자아(새)로 채워진다. 아버지는 부재하며, 아버지의 역할은 지연된다. [주석 19 우리는 이 부분에서 “초자아는 실패한 호명의 결과로 출현한다”는 명제(슬라보예 지젝, 박정수 역,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서울 : 인간사랑, 2004), p. 91.)와 조우한다. 그들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이는 애초에 이들의 호명행위가 잘못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시사한다. (아버지의 금기를 통해 발생하는 것이 오이디푸스 과정이라면, 아버지가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과정은 어려울 것이다. 물론, 호명의 모든 측면이 아버지의 금기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나, 이 맥락에서는 아버지가 없는 상황이 실패한 호명을 불러올 수 있는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수 있다.)]
 결핍된 부성적 자아-이상 [주석 20 자아-이상은 상징적 동일시이다. 상징적 동일시는 상상적 동일시(이상적 자아ideal ego)의 차원과 구분된다. 상상적 동일시란 우리 자신에게 좋아할 만하게 보이거나,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은 이미지와 동일시하는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이다. 반면에, 상징적 동일시는 우리가 ‘타자에게’ 관찰당하는 위치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위치와 동일시한다. 이런 구분에서 건져가야 할 점은, 상징적 동일시에는 기본적으로 대타자의 차원이 고려되어 있다는 점이다.(참고 : 상상적 동일시는 상징적 동일시에 포섭된다. 우리가 그렇게 되고 싶은 이미지는 언제나 타자의 응시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타자의 차원이 강조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상징적 동일시는 부성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아버지의 금기=상징계의 시작)[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서울 : 인간사랑, 2001), pp.184-193 참조.]]
이 성적 쾌락에 악영향을 미치면서 법을 잔혹한 모성적 초자아로 퇴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2) 오이디푸스적 여행에서 병적 나르시시스트까지
모성적 초자아의 형상을 히치코크의 작품 전체 속에서 어떻게 위치시킬 수 있을까? 히치코크의 주요 3단계를 성관계의 불가능성이라는 세 가지 변주로 이해하면 모성적 초자아의 형상 역시 적당히 위치시킬 수가 있다고 한다. 먼저 <39계단>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생생한 연기는 사랑하는 부부를 시험대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재결합시킨다. 이런 주제가 30년대 후반의 히치콕 영화를 묶는다. 우연히 맺어진 부부가 시련을 겪은 뒤 성숙하게 된다는 주제 말이다. 최초의 시련은 연인관계를 시작하는 여정에서 상실되는 결백함 때문에 일어난다. 상실된 결백함은 <39계단>의 메모리씨에 의해 잘 드러난다.
메모리 씨는 모든 것을 기억하는 인물으로, 순수한 자동성을 의인화한 인물이다. 기표의 절대적 도덕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데, 이런 방식들로 부르는 이유는, 그가 말함으로써 겪게 될 위태로움을 무시하고 말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메모리 씨는 순수하게 무성적이고 틈새없는 지식, 의미화 자굥적 경로를 방해하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철저하게 자동적인 의미화 작용적 연쇄를 구현하는 인물인 것이다.
이런 인물이 죽는 시점은 시사하는 바가 있다. 즉, 그가 죽는 시점은 이야기를 추진하는 비밀인 맥거핀 [주석 21 …히치콕적인 대상인 그 유명한 맥거핀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오직 이야기를 가동시키는 역할만을 하고 있는, 하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닌 순수한 구실이다. 맥거핀의 유일한 의미는 그것이 등장인물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 그것이 그들에게 생사를 좌우할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는 사실에 있다. … 그게 바로 맥거핀이다. 순수한 무無이지만 결과는 확실한 것. 맥거핀이 라캉이 대상 a라고 부르는 것, 다시 말해 욕망의 대상-원인으로서 작동하는 순수한 구멍의 가장 순수한 사례라는 사실은 덧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이수련 역,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서울 : 인간사랑, 2001), pp.276-277 참조.)]
을 밝히는 시점이다. 메모리 씨가 음악회장에서 맥거핀을 밝힌 덕에 하네이는 가해당하는 가해자의 처지에서 해방된다. 하네이를 뒤쫓는 경찰의 궤도가 진짜 용의자를 뒤좇는 하네이의 궤도와 같다는 사실이 하네이의 무죄를 입증하는 증거가 된다.
그럼 도대체 하네이가 애초에 죄를 뒤집어 쓴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지젝에 따르면 하네이가 죄를 뒤집어 쓰게 된 이유는 외설적인 항문기의 아버지의 죄가 하네이에게 전이되었기 때문이다. 외설적인 항문기의 아버지 [주석 22 이게 뭔지 모르겠다.]
는 영화 속에서 두목으로 체현된다. 아무튼 이 영화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죽음이 존재한다. 하나는 메모리 씨의 죽음으로, 두목 일당이 메모리 씨를 죽인다. 다른 하나는 두목의 죽음이다. 메모리 씨나 두목이나 둘 다 전-오이디푸스적 국면의 양면을 차지한다. 메모리씨는 분할되어 있지 않으며 틈새 없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전-오이디푸스적이며 [주석 23 전-오이디푸스적인 단계의 특징은 분할-없음이다.]
, 두목은 분할이 없는 자동지식 장치를 조종하는  [주석 24 자동지식 장치를 조종하는 것과 전-오이디푸스가 어떤 관계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비천한 항문기적 아버지를 체현했다는 점에서 전-오이디푸스적이다.
이 정도의 정리를 되새기면서, 이야기의 시작으로 돌아가서 이 문제를 다시 살펴보도록 하자. 30년대 히치코크의 영화들은 주인공을 주체화하는 호명 행위로 출발한다. 주인공을 호명하려면 당연히 대상 a의 차원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영화의 호명 행위는 맥거핀(대상 a)을 환기시키고 주인공을 욕망하는 존재로 구성하면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이 영화들의 종결은 언제나 두목을 추적하다가 종결된다. 즉, 이 영화들은 항문기적 아버지를 살해함으로써 오이디푸스적 여행을 종결시키는 것이다. [주석 25 이 부분 역시 애매하기는 마찬가지인데, 일단은 다음과 같이 이해해보도록 하겠다. “라캉은 상징적 거세의 과정을 아버지의 은유라는 공식으로 요약했다. … 일단 어머니로부터 분리되면 어린아이는 자기를 아버지와 동일시하고 아버지를 자기의 표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때의 아버지는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주체를 거세하는 ‘아버지의 이름’ 즉, 아버지의 상징이다.”(김인환, 『비평의 원리』, p.307), “아버지의 죽음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장소를 은유로서, 아버지의 이름으로서 취할 수 있으며…”를 연결시켜 이해해보자. 주체가 오이디푸스 과정을 겪어낸다는 것은 상징적 거세이며, 그 상징적 거세를 통해서 주체는 비로소 자신의 자리를 은유(아버지의 이름)로서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상징적 거세의 작용은 실제의 아버지를 죽이기도 한다. 아버지는 더 이상 실제의 아버지가 아니라 이름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오이디푸스 과정은, 어떤 의미에서는 주체의 상징적 거세임과 동시에 아버지를 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사보타주>라는 영화를 시작으로 히치코크 영화의 다음 단계로 이동해보자. 이 영화는 악당과 선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한 여자의 시점에서 서술된다. 이런 식의 삼각 관계는 <해외 특파원>과 <오명>에도 나타나는데, 모두 악당과 선남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는 주체의 모습이 발견된다.
세 번째 단계의 영화들에 와서야 비로소 모성적 초자아가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앞에서 봤던, “정상적인 성관계를 방해하는 모성적 초자아”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단계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지하다시피 성관계의 불가능성에 대한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세 단계는 뭐가 어쨌다는 걸까? 세 가지의 단계를 이론적 일관성을 가지고서 설명하려면, 사회학적 답변이 필요하다.
첫 번째 단계인 오이디푸스적 여행의 시기는 프로테스탄트의 자율적 개인이라는 인간의 처지에 부합한다. 이들― 항문기적 아버지가 죄를 뒤집어 씌우는 바람에 예상치 못하게 찾아온 시련을 성공적인 방식으로 극복하는―의 도덕적 만족감의 원천은 주변의 압력에 저항하고 자신에게 진실을 유지했다는 느낌에 있었다.(하네이는 자신을 가해자로 보는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끝끝내 진실(?)을 지켜낸다.) 두 번째 단계인 삼각관계는 타율적인 조직 인간의 사정과 다르지 않다. 이 단계에 속한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내적 진실을 일종의 분열된 것으로 이해한다.(그들은 악당과 선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일종의 선택을 내리는데, 그 선택은 집단에 대한 충성심에 의거한다. [주석 26 맥락상 이렇게 쓰이는 게 합당할 것 같기는 한데, 영화의 최종 선택이 어떠한지가 명시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아서 확신할 수는 없다.]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는 공통적으로 자아-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세 번째 단계는 사정이 다른데, 세 번째 단계의 경우 자아-이상과는 단절하는 병적인 나르시시스트(지젝은 오늘날 가장 흥하는 애들이 얘네란다.)의 모습이 드러나 있다. 이들에게서는 첫 번째 단계와 두 번째 단계에서 엿볼 수 있었던 법의 내면화가 없다.(첫 번째의 경우, 자신의 진실을 유지했다는 것이 바로 법의 내면화라고 볼 수 있고 두 번째의 경우엔 집단에 대한 충성심을 내면화 했다는 점을 법의 내면화로 볼 수 있었다.) 이들에게 법은 내면화된 법이 아니라, 단순히 준수해야 할 규칙일 뿐이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법을 맘대로 조종한다고 느낀다. 그들의 규칙은 타인을 조종하는 기제로 작용한다. 얼핏 보기에 이들의 포지션은 상당히 애매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법자인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법이 없는 정신병자는 아니며, 일종의 역할을 맡고 있기까지 하기 때문이다. 이다지도 애매한 이들의 포지션을 지젝은 단순하게 정리한다. 즉 그들은 “자신을 무법자로 체험하는 순응주의자”인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런 역전이 발생하는 것일까? 그들이 순응주의자라니? 지젝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초자아 때문이다. 병적인 나르시시스트들에게도 호명은 적용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사회 속에서 일정한 역할을 맡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을 무법자로 체험하고 있으며, 실제로도 그렇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다. 이는 호명이 실패했다는 점을 단적으로 지시하는 내용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정신병자가 되지 않는 이상, 호명이 실패하게 되면 초자아가 수반된다. 호명이 실패하는 대신에 훨씬 더 억압적인 대리자의 부활을 불러오는 것이다.
그러면 도대체 이 멍청이들을 어떻게 보살피는 게 좋을까? 단서는 크립키의 기술이론에 담겨 있다. 크립키의 기술이론에 따르면 사물 또는 주체에 부여되는 이름과 그에 따른 기능은, 사물/주체의 실제 속성과 아무 상관이 없다. 병적 나르시시스트들의 문제는 바로 이 점을 인정하지 못한 데 있다. 그들은 자신의 속성과 상관없이 자신들에게 그런 상징적 역할들이 주어진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니체가 그러했듯이 자신의 비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그래서 니체는 자신이 ‘속성의 차원에서’ 잘 났다는 내용을 담은 책을 한 권 내기까지 했다.) 이런 자들을 곤경에 빠뜨리는 방법은 정말로 그가 하고 있는 일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역할을 그들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아니 그런 걸 왜 날 시켜? 그건 내가 아니잖아. 넌 왜 내가 그런 나라고 생각하지?” 나르시시스트의 입장에서는 분명히 충격적일 이러한 방식은 그들을 다시 자아-이상의 영향 아래로 돌아가게 만들 것이다. [주석 27 솔직히 이 부분의 논리가 찰지게 이해되는 것은 아니다.]


3) 정신적 실험 : 새들 없는 <새>

<새>를 보면서, 그리고 지젝의 글을 보면서 우리가 절대로 오해하지 않아야 하는 측면이 있다. 이 텍스트를 대충 읽으면 우리는 <새>에 등장하는 사납고 공격적인 새들의 출현은, 모성적 초자아의 개입으로 인한 정상적인 성관계의 차단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기가 쉽다. 이러한 접근이 문제인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접근 방식이 완전히 틀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새는 상징화의 차원에서 뭔가 성취되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실재 내에 현존하게끔 보여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새는 실패한 상징화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니까 좀 오묘하고 애매한 지점이 생기는 셈인데, 간단한 차원에서 말해보자면, <새>를 요소비평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될 것이다. 지젝은 이 점을 조금 더 투명하게 진행해보기 위해서 일종의 실험을 단행한다. 즉, 우리가 오해하는 대로 영화가 만들어질 거였다면 영화는 어떻게 만들어져야 했을까 하는 상상에 대한 결론을 나름대로 내보는 것이다. 만약 영화가 그런 식으로 만들어졌다면 <새>에는 새가 등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젝의 생각이다. 우리가 오해하듯이 <새>의 새가 모성적 초자아의 개입으로 인한 정상적인 성관계의 차단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전면에 나서는 것은 당연히 가족드라마여야 한다. 실제 작품 <새>처럼 메인 플롯의 강조점이 새에 있어서는 안 된다. 전면에 가족 드라마가 나섬으로써, 엄마의 심리가 당연히 강조될 것이다. 그러다가는 마지막에 갈등이 생겨나고,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즈음, 어디선가 새가 울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모성적 초자아의 개입이 새라면, 작품 속 엄마의 감정이 격앙되었을 때, 새는 반드시 울어야만 한다.
하지만 히치코크는 물론, 이 정도의 일을 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새들은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으로서, 대상의 전면에 등장한다. 새들은 불가능한 실재로서 이야기 속에서 직접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오히려 가족 드라마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등장한다. 새들은 의미화 작용을 그런 식으로 봉쇄한다. 새들은 그저 까악까악거리면서 모든 것을 해치우고 공격할 뿐이다. 의미화가 불가능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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