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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세미나 시간에는 강독이 끝나갈 때 쯤 해서 새로운 분이 참여해주셨어요.

현재 <문학세미나>에도 참석 중이고 철학과 독일어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데요.

새로운 해를 맞이하여, 저희 세미나에 딱 어울리는 분이 오신 듯 하여 매우 기쁩니다.

민재님, 환영합니다.^^


어제 모임에서는 <존재와 시간>의 134쪽 둘째 문단부터 136쪽 첫째 문단까지 읽었습니다.

분량이 고작 두 페이지 남짓한 정도인데도, 헉헉거리며 읽었네요.

내용이 하도 어려워서 9시 30분 쯤 되니까 두뇌 에너지가 전부 방전되더라고요. ㅠㅠ

세미나 하면서 몇 차례 이런 힘겨운 때가 있었는데, 그런 시간이 어제 또 다시 찾아왔네요.

‘거기Da의 구성’을 다루고 있는 여기 A절(제29절~제34절)이 아마도

<존재와 시간> 전체를 통해서도 가장 난해한 부분이 아닐까 싶은데요.

저희에게 찾아온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하는) 고비인 것 같습니다.



제29절의 제목은 “심정성으로서의 거기에-있음”으로 되어 있죠.

‘거기에-있음’은 독일어 원어로 하면 하이픈이 들어간 “Da-sein”입니다.

하이픈 하나만 첨가된 것만으로 Dasein과 Da-sein 사이의 개념적 차이는 매우 커집니다.

Da-sein은 Dasein, 현존재 자체가 아닙니다.

그것은 현존재의 존재 방식 중 하나인 내-존재In-sein의 다른 표현이지요.

현존재는 ‘안에-있으’되, ‘거기에-있는’ 방식으로 ‘안에-있는’ 존재자입니다.


본 절의 주제로서 지금부터 살펴볼 현상인 ‘심정성’Befindlichkeit은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이것은 존재적으로는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지극히 일상적인 현상을 표현하고 있기도 합니다.

곧, ‘기분’Stimmung, 또는 ‘기분에 젖은 상태’Gestimmtsein을 지칭하는 개념이지요.

하이데거는 인간의 본질을 친숙하고 평범한 현상에서부터 사유하고 있습니다.

참고로, ‘심정성’은 소광희 교수의 번역이고, ‘처해있음’은 이기상 교수의 번역입니다.

저희는 편의상 소광희 교수를 따릅니다.


본 절에서는 두 가지의 탐구 과제가 제시되고 있습니다.

1) 심정성이라는 현상을 현존재의 근본적인 실존범주로서 보는 것.

2) 이 현상을 그 구조적 측면에서 조감하는 것.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기분에 젖어 있습니다.

길거리를 지나가는 무표정한 사람도, 냉정한 성격의 사람도, 삼성의 마무리 투수 오승환도 언제나 어떤 기분 상태에 있습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교 같은 종교에서는 인간이 일체의 기분과 감정에서 해탈할 수 있다는 초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비본래적 (세상)사람들은 물론이고

실존적 결단을 감행하는 본래적 현존재조차 언제나 이미 기분에 젖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른바 ‘무기분’Ungestimmtheit이라 불리는 현상은 어떠한 기분도 부재하는 무(無)의 상태가 아니라,

현존재가 자기 자신에게 싫증을 느끼고 있는 특정한 기분 상태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분에 젖은 현존재에게는 자신의 존재와 삶이 짐/부담Last으로서 다가옵니다.

반드시 짊어지고 가야 할 무거운 책임 같은 것으로서 느껴지지요.

이는 우리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기분이지요.

그러므로 기분 속에서 현존재는 거기Da로서의 자신의 존재 앞에 직면하게 되는 셈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때 어째서 삶이 부담으로 여겨지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

현존재는 그런 것을 도대체 인식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인식이 개시해주는 가능한 존재 영역이 기분이 개시해주는 가능한 존재 영역보다 훨씬 협소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지겨운 무기분에서 흥겹고 들뜬 기분으로 바뀌면 부담으로 여겨지던 존재가 감쪽같이 사라지기는 합니다.

TV, 영화, 스포츠, 게임, 취미, 수다, 음주가무 등의 다양한 즐길 거리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 ‘(세상)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아이템들이죠.

그러나 이렇게 들떠 있는 기분은 부담으로 느껴지는 삶을 사라지게 하지만, 또한 그것을 개시해주기도 합니다.

이 역설은 뒤에서 다시 살펴볼 것입니다.


기분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지내게 될지’를 드러내줍니다.

우리는 그 사람의 표정과 기분만 살펴봐도 그가 지금 어떤 상태에 있고, 앞으로 어떤 상태에 있을지를 대충 짐작할 수 있지요.

현존재는 그냥 있는Sein 게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있는Da-sein 식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현존재가 현존재이고, 현-존재이지요.

현존재는 기분이 드러내주는 어떻게-지냄(wie ... ist)의 방식으로 거기에-있습니다Da-sein.

이처럼 기분은 ‘우리가 어떻게 지내는지’를 드러내줌으로써,

현존재의 존재를 그것의 거기Da 속으로 가져오는 기능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에서 과연 인간 현존재만 기분을 갖는 것인지,

아니면 동물도 그것을 같이 갖고 있는 것인지가, 좀 애매합니다.

하이데거는 기분이 인간 현존재의 고유한 특징이라고 생각하지만

—왜냐하면 기분은 현존재의 존재를 Da-sein의 Da 속으로 가져오니까요—,

실제로 애완견을 길러본 분들의 경험에 의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거든요.

애완견은 주인의 안색을 살필 줄 알고 집안의 분위기를 알아차릴 줄 안다고 하니까요.

그런데 안색을 살피고 분위기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하이데거 식으로 표현하자면,

바로 세계를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정말로 동물이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현존재Dasein는 오직 인간에만 해당하지는 않겠지요.

동물의 문제는 <존재와 시간>의 개념 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진짜 문제꺼리입니다.



현존재는 존재하고(ist), 존재해야만 합니다(zu sein hat).

이는 현존재가 짊어져야 할, 부인할 수 없는 절대적 사실Daß입니다.

앞에서 지겨운 기분의 현존재에게 자신의 삶은 무거운 짐/부담으로서 다가온다고 말했죠?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는 지금 살아 있으며 앞으로 죽는 날까지 어떻게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필연적인 숙명입니다.

이런 존재의 사실은, 우리 현존재가 존재하는 한, 우리에게 맡겨져/위임되어überantwortet 있습니다.

수임자인 현존재는 저 숙명의 존재론적 사실을 막중한 책임으로서, 무거운 짐으로서 떠맡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현존재가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 사실이 위임된 존재자로서 개시되는 것은,

그가 어떤 기분에 젖어 있을 때지요.

기분은 그런 개시/열어밝힘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서 얘기한, ‘기분은 현존재의 존재를 그것의 거기Da로 가져온다’는 것도 이와 똑같은 뜻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기분을 통한 개시되어 있음은 인식되어 있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분이 개시하는 존재 영역은 인식이 개시하는 존재 영역보다 훨씬 광대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지금 존재하며 앞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은 느끼며-이해하고 있지만,

‘우리가 어디에서Woher 왔으며 죽어서 어디로Wohin 가게 될 지’는 전혀 알지 못합니다.

이처럼 기분의 개시 범위와 인식의 개시 범위는 전혀 다릅니다.


일상생활에서 현존재는 기분에 좌우되지 않습니다.

보통은 기분을 자기 뜻대로 컨트롤하면서 지내고 있지요.

사실 감정과 기분을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한다면, 예컨대 열 받는다고 화를 막 내버리면,

도대체 사회생활을 할 수가 없겠지요.

감정과 기분의 억제, 이는 우리가 문화인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필수 방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기분을 통제하고 있다는 사실은

기분이 현존재의 존재를 거기Da 속에서 개시한다는 점을 반대하는 증명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점을 증명해주는 증거입니다.

억제하다, 회피하다, 달아나다 등은 모두 어떤 대상과 관계하는 행동들이기 때문이죠.

즉, 억제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억제하는 것이고, 회피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회피하는 것이며,

달아나는 것은 무엇인가로부터 달아나는 것이니까요.

무엇인가를 억제하고 회피하고 달아나는 것은 그 무엇인가를 이미 이해하고 있기에 가능한 행동들입니다.


그러나 일상적 현존재는 대개의 경우 그런 기분 속에서 개시되는 존재를 회피합니다.

예컨대, 지루함/권태의 기분 속에서 개시되는 부담으로서의 존재를,

또는 불안의 기분 속에서 개시되는 죽음 가능성으로서의 존재를 일상적 현존재는 되도록 피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피함의 존재적-실존적 사태는 존재론적-실존론적으로 보자면 다음을 의미할 뿐입니다.

곧, 권태나 불안 같은 기분이 향하지 않는 것들에서, 위에서 예로 든 각종 즐길 거리에서

오히려 현존재의 숙명적인 존재 사실이 자기 자신에게 위임되어-있음이 밝게 드러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역설적이긴 하지만, 특정한 기분을 억누르고 피하는 행동 자체에서야말로

오히려 현존재의 거기Da는 이미 개시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심정성과 더불어 또 다른 핵심적 개념이 등장합니다. Geworfenheit.

소광희 교수는 ‘피투성(被投性)’으로, 이기상 교수는 ‘내던져져 있음’으로, 영역본은 ‘throwness’로 각각 옮기고 있네요.

저희는 편의상 이번에도 소광희 교수의 번역을 따릅니다.

이기상 교수에겐 쬐끔 미안하네요.


Geworfenheit는 동사 werfen의 과거분사형 geworfen에 접미사 heit를 덧붙여서 추상명사로 만든 개념입니다.

werfen은 ‘던지다, 투사하다, 투척하다, to throw’의 뜻을 지닌 낱말이고요.

그런데 ‘이해’를 고찰하는 제31절에서 나오게 될 ‘기투’, 즉 Entwurf

Geworfenheit와 마찬가지로 원래는 werfen에서 파생된 낱말입니다.

<werfen → entwerfen → Entwerfen → Entwurf>의 방식으로 파생된 개념이죠.

따라서 피성의 개념도 기의 개념도 공통적으로 ‘던지다’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개념은 던지는 대상이 다르고 던지는 주체가 다르며, 던지는 시간이 다릅니다.

(1) 피투성이 ‘현존재가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Daß’을 던지고 있다면,

기투는 ‘현존재의 존재 가능성’을 던지는 것이지요.

(2) 피투성에서 그 사실Daß를 던지는 행위 주체가 신이라고 한다면,

기투에서 그 가능성을 던지는 행위 주체는 현존재 자신입니다.

피투성은 신이 인간에게 ‘너 존재해!’라고 명했던 행위를 가리킨다면,

기투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에게 ‘나 존재할 거야!’라고 명하는 행위를 가리키지요.

(3) 피투성은 과거분사 geworfen에서 나온 말이라서, 이미 종료되고 완결된 과거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세상에 태어난 이상, 우리의 존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이죠.

기투는, 위에서 가능성을 던지는 행위라고 하였듯이, 기본적으로 미래와 관련된 행위입니다.

기투라는 행위 자체는 현재에 일어나더라도 그 행위의 대상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지요.

그래서 기투는 단순히 던지는/투사하는[投] 행위가 아니라 또한 기획하는[企]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영역본은 이런 의미를 살려서 기투를 ‘projection, project’로 옮깁니다.


피투성이란, 현존재가 존재하고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즉, 현존재 자신에게 이미 개시되어 있는 바로 그 사실을 지칭하는 실존론적 개념입니다.

물론 이 존재론적 사실은 현존재에게 이미 개시되어 있기에,

이 피투성은 단순한 피투성이 아니라, 언제나 현존재의 거기Da 속으로의 피투성입니다.

인간 현존재에게는 그의 존재 사실이 단순히 던져져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사실은 언제나 자신의 거기Da 속으로 던져져 있는 것이지요.

바로 이 점에서 현존재는 다른 존재자와 다르며, 그래서 Da-sein인 것입니다.


이상의 논의만으로도, 피투성의 개념이 앞서 살펴본 맡겨짐/위임됨의 개념과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죠.

두 개념 모두 텍스트에서 ‘수동태 과거분사형’으로 사용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존재해야만 한다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주체적으로 결정한 사항이 아닙니다.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의 의지로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삶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이를 신이라 부르든, 자연이라 부르든,

운명이라 부르든, 우연이라 부르든, 하이데거는 아마도 ‘존재’ 자체라고 부르겠지요—

우리에게 그야말로 주어진 혹은 맡겨진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 자체로 이미 ‘증여받은 선물’ 혹은 ‘위임받은 책임’입니다.

이를 überantwortet, Geworfenheit의 개념이 어휘적, 문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요.

더욱이 현존재는 자신에게 주어진/맡겨진 존재를 이미 이해하고/개시하고 있습니다.


피투성과 위임됨이 표현하고 있는 사실Daß은 현사실성Faktizität입니다.

이 사실은 사실성Tatsächlichkeit과는 확연하게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실성이 전재자와 관련된 사실이라면, 현사실성은 현존재와 관련된 사실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사실성은 이론적인 관찰과 실험에 의해 확인할 수 있지만,

현사실성은 그런 관점에서는 조금도 접근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존재의 기분과 심정성 속에서 개시되는 사실이지요.

따라서 현사실성, 곧 현존재의 존재 사실Daß는 실존론적 규정성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습니다.

전재자의 사실성이 “범주적 규정성”으로 이해되는 것과 대조적으로 말이지요.

현사실성은 전재자의 둔중한 사실의 사실성이 아니라, (…) 현존재의 존재 성격이다.



현존재는 자신의 거기Da입니다. 그는 자신의 거기Da로 존재합니다.

그런데 이 거기-임, 거기에-있음, 거기의 존재란,

명시적이든 아니든 ‘피투성 속에서 자기를 발견함(sich ... befindet)’을 말합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기를 발견하는 방식으로 거기에-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발견하다’에 해당하는 독일어가 befinden인데요,

바로 이 동사 befinden에서 제29절의 주제인 Befindlichkeit라는 개념이 파생된 것입니다.

따라서 심정성이란, ‘기분 속에서 자기의 존재를 발견함’으로 규정할 수 있겠네요.

심정성 속에서 현존재는 언제나 이미 자신을 발견한(sich ... gefunden) 상태입니다.

심정성 자체에 이미 ‘무엇을 발견하다’는 뜻이 담겨져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물론 심정성의 발견은 ‘무엇을 눈앞에서 인지하는 발견함’(Sich-vor-finden)이 아니라,

‘기분에 젖은 상태에서 자신을 발견함’(gestimmtes Sichbefinden)입니다.

기분은 기분이되, ‘피투된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는 기분’을 지칭하는 존재론적 명칭이 바로 심정성인 셈입니다.

따라서 기분과 심정성이란, 단지 느끼는 것만 의미하지 않고 ‘이해하면서-느끼는’ 것을 의미하지요.


현존재는 그의 존재 사실이 맡겨진/위임된 존재자입니다.

그러나 이 규정만으론 현존재와 다른 존재자 간의 차이가 불분명합니다.

인간이 아닌 존재자들도 존재 사실이 위임되었다는 점에서는 인간과 똑같으니까 말이죠.

현존재가 독특한 것은, 그에게 하나의 사실이 더 위임되어 있다는 점에 있습니다.

곧, 현존재에게는 언제나 이미 자신을 발견했어야 한다는 사실이 위임되어 있는 것이죠.

현존재는 단순히 있기만 한 게 아니라, 그런 존재의 사실을 언제나 이미 발견/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존재는 Sein이 아니라 Da-sein으로 불리는 것이지요.


기분은 현존재에게 자신의 피투성의 사실을 개시해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숙명적인 존재론적 사실을 이론적 관찰의 방법으로 개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기분 자체가 혹은 피투성에 직면하여 그것을 향하는 것(Ankehr)으로서

혹은 피투성을 회피하는 것(Abkehr)으로서 그것을 개시합니다.

기분은 피투성의 사실로 향하거나 그것을 회피하는 ‘방식’인 셈이지요.


반복해 말하지만, 기분의 개시 영역은 인식의 그것과는, 또한 믿음의 그것과도 차원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는 기분이 개시해주는 대상(곧, 피투성의 사실)과 그 방식(곧, 향함과 회피함)을

현존재가 인식하고 믿고 있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기분은 세계-내-존재로서의 현존재의 전체 삶을 포괄하는 광대한 현상이지만,

인식과 믿음은 그 삶의 극히 일부분에만 관계하는 협소한 현상입니다.

인간의 신앙과 학문이 제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기분 앞에서는 쉽사리 무너지고 맙니다.

인간 현존재는 그 만큼 기분에 의해 절대적으로 좌우되는 존재자인 셈입니다.

본 절의 첫머리에서 기분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하고 잘 알려진 현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죠?


그럼에도 이토록 중요한 기분이 전통 철학에서는 무시당하기 일쑤였습니다.

하이데거의 스승인 후설만 해도, 이 자명한 심정성의 현상을

“순수한 전재자에 대한 이론적 인식이 갖는 필증적 확실성”이라는 그럴듯한 명목으로 현상학의 사유 영역에서 괄호쳐버렸으며,

여타 다른 철학자들 역시 기분의 현상을 비합리적 것이라 치부하여 그들의 사상 밖으로 추방하였지요.



내용이 어려워서 다른 때보다 내용 정리가 조금 장황해졌는데요.

제29절에서 어제 읽은 부분이 제일 이해하기 어려워서 어쩔 수가 없네요.

양해 바랍니다.


다음 시간에는 <존재와 시간> 136쪽 두 번째 문단부터 읽어갈 예정입니다.

후반부는 그래도 전반부보단 쉬운 편이니까, 아마 제29절은 다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럼 1월 19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문의는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 net 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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