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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lles Deleuze, Emprism et subjectivité; Essai sur la nature humaine selon Hume(PUF, 1953;1993).

-------------, trans. by Constantin V. Boundas, Empiricism and Subjectivity; An Essay on Hume's Theory of Human Nature(columbia University Press:1991).

-------------, 한정헌, 정유경 옮김, 《경험주의와 주체성》, 난장, 2012.

 

 

1장. 인식의 문제와 도덕의 문제

 

1절: 흄은 정신의 심리학이라는 과학을 감응의 심리학이라는 [일종의 자연주의적이고 유물론적인] 철학으로 대체하고자한다. 이 과정에서 정신은 매우 부차적인 것, 수동적인 구성물로 드러나며, 정념과 사회라는 두 형식에 기반하여 촉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1; 17] 흄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il s'agit de) 정신의 심리학을 정동의 심리학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1. 번역어 문제에 있어서 ‘정동’이냐 ‘감응’이냐가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어떤 번역어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들뢰즈의 이 문장이 전달하고자하는 원어의 뉘앙스가 조금 달라질 뿐이다. 번역자가 밝혀 놓았다시피, “흄의 의도가 일반적인 과학적 심리학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이 정념으로 감응해가는 세세한 국면을 파헤치는데 있기 때문”에 어떤 심리적 기제의 문제라기 보다 ‘정서의 움직임’과 그것의 촉발(affect)과정이 중요하다. 난 그런 면에서 ‘감응’은 그 강도가 약하다고 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말을 통해 들뢰즈는 일단 흄의 인간본성론이 기반하고 있는 지점이 ‘정신’이라는 관념론의 전통이 아니라는 상식적인 관점을 재확인하고 있는 셈이지만, 그것을 ‘정동’이라고 함으로써 ‘운동’과 ‘촉발’의 측면을 강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뒤의 인용 문장을 보라.

이 구절에서 또한 보다 중요하게 살펴 보아야 할 것은(아마도 들뢰즈의 이 저작 전체의 형식이나 내용에 걸치겠지만) 스피노자와의(또는 들뢰즈의 스피노자와의) 관련성이다.

 

[2; 18]『논고』는 정신이 본질적으로 정념사회라는 두 가지 형식에 기반하여 촉발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근거 있는 과학 대상의 통일성을 확신하면서, 이 둘은 서로를 함축한다. 한편으로 사회는 그 구성원 각각으로부터 지속적인 반응의 표현을 기대하고 요구하는데, 정념의 존재(présence)는 동기와 목적을 제공한다. 즉, “그의 신민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영주는 그들의 복종(soumission)을 기대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정념들은 그들의 만족을 위해 다소 간접적인(moyen oblique) 수단으로서의 사회를 함축한다. 결국, 역사학 안에서 정념과 사회의 일치는 내적 통일성으로서 드러난다. 즉, 정치적 조직화와 제도라는 대상을 부여하기 위해 역사학은 대부분의 환경들에서 행위와 동기간의 관계들을 탐구하며, 또한 인간 정념들의 통일성을 표현한다(l'histoire a pour objet l'organisation politique et l'institution, elle étudie les rapports motif-action dans le maximum de circonstance données, elle manifeste i'uniformité des passions de l'homme). 간단히 말해서, 심리학자의 선택지는 역설적으로 표현될 것이다. 즉 그는 심리학자가 되기 위해, 심리학자이기 이전에 사회학자, 윤리학자 또는 역사가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학의 기획은 인식을 형성하는 것이 일반적으로 가능하게 될만한 조건에 다다른다. 정신은 촉발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그리고 저절로 본성이 아니다. 그것은 과학의 대상이 아니다. 따라서 흄이 다루는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정신은 인간 본성이 되는가?

 

2. 정신이 촉발되는 것이고, 그것의 두 가지 형식이 ‘사회’와 ‘정념’이라면, 정신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본성 또는 자연이 되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 보인다. 분명 들뢰즈는 흄의 정념론을 중심에 놓고 지성론을 들여다 보고 있다. 이것은 당대의 도덕론이 주로 감정론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해줌과 동시에 인간론 자체가 정념론에 기대어 구성 가능하다는 일종의 유물론적 확신을 가능하게 한다. 본성으로서의 정신이 아니라면 그것은 구성되어야 하는 것이고, 그런 측면에서 ‘칸트’가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들뢰즈는 여기서 더 나아갈 것이다.

 

2절: 형식적으로는 정념과 지성은 구별되지만 실제적으로는 지성이 정념에 종속된다.

 

[2;20]사실상, 우리는 흄에게서 두 가지 관점이 공존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즉, 정념들과 지성은 확실히 두 가지 구별되는 부분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그렇지만, 지성은 그 자체로 사회화 과정에서 단지 정념의 진행일 뿐이다. 가끔 우리는 지성과 정념이 두 가지 분리된 문제들을 구성한다는 것을 보지만, 다른 때에 우리는 지성이 정념에 종속되는 것을 본다.

 

3. 조금 전에 말했던 것처럼, 들뢰즈에게 지성은 확실히 정념에 대해 종속적 위치를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표현’의 측면에서는 바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더 문제일 것이다. 지성은 ‘구성되는 것’이고 구성된 후에는 정념보다 더 큰 ‘역능’을 발휘하는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성은 정념에 비해 보다 표면적이며 현실적인 것이지만 정념은 보다 잠재적이라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 사안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즉 질문은 다음과 같다. “어째서 지성은 그 표현에 있어서 정념보다 때로 더 강렬한가?”

그리고 이때 들뢰즈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정념과 지성이 문제의 차원에서 구별되는 것(형상적 구별)이 아니라 실재적 차원에서 지배-종속관계라는 것(실재적 일치)이라는 점이다.

 

3절: 정신은 주어지는 것으로서의 관념들의 활동이며, 상상력은 그것의 장소다. 이때 관념들의 연합은 그것의 표현과 대상을 상상력 안에서 발견한다.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상상력이며, 원리들은 그것에 어떤 규제를 가한다. 그런데 이 원리들의 필연성은 사실상 주체를 구성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성은 주체의 응시를 통해서만 가능해진다. 이때 주체성은 ‘반성의 인상’이며 연합론과 원자론이 그 설명근거가 된다.

 

[3; 20]지속적으로 흄은 정신과 상상력, 관념 사이의 동일성을 주장한다. 정신은 본성(nature)이 아니며, 본성(nature)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신 안의 관념과 동일하다. 관념은 소여(所與)로서 주어지며, 경험이다. [따라서] 정신은 주어진다(L'esprit est donée). 그것은 관념의 다발(collection d'idées)이지 어떤 체계가 아니다. (...) 관념들의 다발은 단어의 가장 애매한 의미에서 어떤 능력을 지시하기보다 어떤 것들의 배치(ensemble, assemblage)인 ‘상상력’을 의미한다. 즉 사물들은 앨범 없는 사진들이며, 무대 없는 연극이고, 지각의 흘러넘침이다. “연극의 비유는 우리를 결코 잘못 이끌지 않는다. ... 또한 우리는 그것을 구성되어진, 즉 그 장면들이 재현된 장소나 물질들에 대해서도 애매한 개념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 그 장소는 그 안에서 발생한 것과 다르지 않으며, 재현이 주체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번 질문은, 정신은 어떻게 주체가 되는가? 어떻게 해서 상상력은 능력이 되는가? 인 것이다.

 

4. 정신이 본성이 아니고 그것을 가지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것이 필연적으로 ‘소여’라는 것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당연히 어떤 ‘체계’도 아니다. 관념의 다발로서, 상상력으로서의 정신은 일종의 ‘배치’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정합적 ‘재현’도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재현’이 ‘주체’이기 때문이고, 그것을 구성하는 다른 것들, 즉 ‘정신의 지각’이라고 불리워질만한 그것이 주체의 그 배치적인 상(image) 자체이며, 재현 아래에 끓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재현의 배치라고 불리워질만한 그 ‘주체’가 흄에게서 격하된 의미로 쓰인다면, 그것이 들뢰즈에게 어떤 향후 방향을 제시할 것인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그리고 ‘지각의 흐름’이란 것이 대체 정신의 편에 있다면 어떻게 될 것이며(즉 정신의 지각이 어떤 의미이며), 또한 이때 감각과 지각의 위상은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라는 문제다.

또 하나 역자는 주에서 “들뢰즈는 흄을 단지 해체적인 회의주의자로 보는데 머물지 않고 오히려 그를 통해 독창적인 주체론”, 즉 ‘관념의 다발’이라는 격하된 의미의 주체가 아닌 주체론을 상상력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바탕으로 구성하려 한다는 주장은 음미될 필요가 있다. 과연 들뢰즈는 능력들 중의 하나인 ‘상상력’을 어떻게 볼 것인가? 또는 상상력과 지성의 관계에 있어서 ‘흄 이후에’ 어떤 문제설정을 하고 있는 것인가? 이 방향의 의문은 분명 ‘칸트’와 ‘클로소프스키’, ‘베이컨’ 그리고 ‘프루스트’와 ‘마조흐’, ‘카프카’로 이어질 것이다. 과연 여기서 ‘상상력’이 주체구성의 매질인가? 아니면 오히려 역자가 거부했던 그 해체 혹은 더 완화된 표현을 하자면 ‘비주체’(아니면 나의 표현으로 하자면 ‘잔여주체’)의 모습인가?

 

[3; 21]의심할 여지없이 흄은 관념들이 상상력 안에 있다고 반복한다. 그러나 이 전치사[‘안’, dans]는 여기서 주체에 내속(inhérence)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au contraire) 은유적으로 쓰인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들의 운동이 아닌 활동을 정신으로부터 배제한다는 것이며, 정신과 정신 안의 관념들 사이의 동일성을 보증하는 것이다. 그 전치사는 상상력이 어떤 사실(facteur)이나, 행위주체, 또는 판단의 결정자(détermination déterminante)가 아니라는 것을 표시한다. 다시 말해, 그것은 한정지어질 수 있는 어떤 고정된 것을 부분화해야만 하는 장소다(; c'est un lieu, qu'il faut localiser, c'est-à-dire fixer, un déterminable). 어떤 것도 상상력에 의해 이루어지지 않으며, 모든 것은 상상력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것은 관념들을 형성하기 위한 능력조차 아니다. 왜냐하면, 상상력에 의한 관념의 생산은 상상력 안의 어떤 인상의 재생산일 뿐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상상력은 그 자신의 활동을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조차 지속적이지도 않으며 통일되어 있지도 않으며, 변덕스럽고 착란적이다. 그것은 관념들의 움직임, 활동과 반응의 총체다.

 

5. 여기서 ‘상상력’의 능력으로서의 지위는 아예 없다고 봐야 한다. 대신 그것은 관념들의 활동과 반응의 총체이며, “장소”로 지칭된다. 장소라는 것, 이것은 무엇인가? 그리고서 상상력의 활동에 대해서는 인정하지만 그조차 변덕스럽고 착란적이라고 말한다. 하나의 장소라는 것은 그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공간의 이미지’를 띄고 우리에게 등장한다는 의미이며, 그 장소를 채우고 있는 것은 관념들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활동’이 있다. 그 활동은 말할 것도 없이 ‘관념들의 활동’이다.

여기서 유념해서 봐야 할 것은 들뢰즈가 ‘정신’과 ‘상상력’을 거의 동일한 논의 수준에 두고 논지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에 의해’가 아니라 ‘~안에’라고 규정하는 그 수준에서 정신과 동일한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뒤에서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식’은 어떻게 되는가? 내 생각에 이 인식조차 ‘텅 빈’ 잔여를 가리킬 것이다!!

그리고서 ‘망상’ 또는 ‘환상’에 대해 논한다.

 

[4; 22]관념들의 묶음이 될 때, 그것은 우주를 헤매고, 용과 날개 달린 말과 거대한 괴물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마음의 바닥(fond)은 망상이거나, 다른 말로, 무차별하고 우연한 사건들이다(hasard, indiférence). 그 자체로 보면, 상상력은 본성이 아니고 단지 환상이다. 내가 가진 관념 안에는 그 어떤 일관성도 통일성도 더 이상 없다. 상상력에 의해 관념들이 결합되는 방식에는 그 어떤 일관성과 통일성도 없다. 다만, 이러한 결합을 만드는 우연(hasard)이 있다. 관념의 일반성은 관념의 어떤 특성이 아니며, 상상력에 속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다른 원리들 하에 일체의 관념이 작동할 수 있는 어떤 역할(rôle)이지, 관념들의 공간들의 본성이 아니다(non pas la nature d'une espéce d'idées).

 

6. ‘역할’이란 말은 이러한 상상력 속에서 관념들이 벌이는 드라마에서 하나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일반성’(généralité)이라는 말에 주목해야 한다. 어째서 관념의 ‘일반성’이 역할을 맡는 것인가? 역할을 맡는 쪽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는 점에 착안하자. 들뢰즈가 항상 이러한 ‘진리에의 의지’라는 플라톤주의에 비판적이었다는 것도 함께 상기하자. 그렇다면 들뢰즈는 이 시기부터 흄에게서 플라톤주의의 비판을 읽어냈다는 것인가? 또 하나. 일반성과 보편성은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그러한 구별을 하는 것인가?

 

[4; 23]일관성과 통일성은 오직 관념들이 상상력 안에서 연합되는 방식으로만 현전한다. 세 가지 원리들(인접성, 유사성, 인과성) 안에서 연합은 상상력을 초월하며 또한 그것과 다르다. 연합은 상상력을 촉발한다. 연합은 그것의 기원을 상상력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표현(terme)과 대상을 발견한다.(Elle trouve dans l'imagination son trerme et son objet, non pas son origne.) 연합은 관념들을 통일하는 어떤 질적 특성이지, 관념들 자체의 질은 아니다.

 

7. 연합은 관념들을 결합하는 어떤 것이다. 그것 자체가 관념들의 질적 특성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연합이 세 가지 원리들을 통해 상상력을 촉발하면서 상상력을 넘어서기 때문에 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보기에 이때야말로 상상력은 순수하게 수동적인 것으로 남는다. 상상력은 연합이 결합하는 이미지나 관념의 ‘기원’일수도 없고, 다만 연합이라는 활동(이것은 곧 상상력의 ‘수동적’ 활동이기도 하다)의 터전일 뿐이다. 그런데 이 터전 안에 ‘표현과 대상’이 있다. 이 표현[항]과 대상은 어디서부터 오는가? 그것은 바로 감각지각이다.

 

[4; 23] 믿음(croyance) 안에서 그리고 인과성을 통해 주체는 소여를 넘어선다. 글자 그대로, 주체는 정신이 부여한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즉, 나는 내가 보지 않았거나 만지지 않았던 것을 믿는다. 그러나 주체는 무엇보다 정신 안에서 그 정신을 촉발하고 넘어서는 원리들의 효과이기 때문에 소여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 [5]우리는 이제 경험주의의 특유한 근원을 볼 수 있다. 즉, 그것은 그러한 원리들 안에서 인간 본성이 정신을 초월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정신 안에서 인간 본성을 초월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 어떤 것도 초월적이지 않다.(rien n'est transcendantal) 연합은 어떤 결과물이 아니라 상상력의 규칙(régle)이며, 그것의 자유로운 활동의 표현(une manifestation de son libre exercise)이다. 그것은 상상력에 통일성을 부여함과 동시에 규제를 가한다. 이런 의미에서 관념들은 정신 안에서 연결되는 것이지, 정신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 본성은 상상력이다.(la nature humaine est l'imigination) 그러나 다른 원리들이 그것에 일관성과 고정점을 부여한다(mais que d'autres principes ont rendue constante, ont fixée).

 

8. 여기서 ‘다른 원리들’이라고 하는 것은 ‘연합’일 것이다. 그리고 그 연합은 분명 ‘지성’의 권능이며, 더 본질적으로는 ‘습관’의 산물이다. 이런 한에서 “인간본성은 상상력이다.” 그리고 이 상상력은 결코 인간 본성을 초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신 안에서의 상상력의 활동으로서의 인간본성이 정신을 초월하는 것이지 이 능력이 정신을 초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험주의란 정신의 경험주의이며, 연합은 이 경험주의의 하나의 유일한 원리라고 하겠다.

그리고 여기서 첫 번째 절에서 던진 질문의 (잠정적인?)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인간 본성은 상상력이다.”

 

[5; 25]본질적으로 원리들은 그들이 촉발하는 정신(l'esprit qu‘ils affectent)을 가리키며, 본성은 상상력을 가리키는데, 그것 전체의 의미가 상상력을 규정짓는 것이다(les principes se réfèrent à l'esprit qu‘ils affenctent, la nature se réfère à l'imagination, tout son sens est de la qualifier). (...) 원인이란 경험 안에서 인식을 위해 그 자체의 어떤 것으로서 우리가 효과적으로 어떤 한정된 내용을 부여하는 모든 유비들을 넘어선다고 항상 생각되어지는 것이다.(Une cause peut toujours être pensée, comme quelque chose en soi, transcendant toutes les analogies par lesquelles on lui donne effectivement, dans l'expérience et pour la connaisance, un content déterminé). 그러나, 사실상 철학은 인간학에서처럼 원인을 탐구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차라리 결과를 탐구해야 한다. 원인은 알려질 수 없다. 원리들의 원인이나 그 능력의 원천은 없다. 원천은 상상력에 따른 그들의 효과다.

 

9. 결과를 통해 원인을 추론하는 과정은 따라서 일종의 ‘가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며, 이것은 ‘주체의 구성’과도 통하는 것이다. 철학이 결과를 탐구함으로써 원인을 구성하는 것, 그리고 원인을 ‘효과’라는 방면에서 재확인하는 것은 ‘재현’의 철학을 넘어서기 위한 ‘초월적 경험론’의 문턱이라 하겠다.

 

[6; 27]어떤 때에는 하나의 관념이 다른 것을 도입할 수 있는데, 다시 말해 그것은 관계다. 이 세 가지 경우[일반관념, 실체와 양태, 관계]에 있어서 연합의 결과는 관계의 본질이 정확히 이러한 무난한 변형이 되기 위해 하나의 관념으로부터 다른 관념으로 가는 정신의 수월한 경로다. 정신은 본성이 되며 마침내 하나의 경향(tendance)이 된다.

 

10. 세 가지 경로를 통해 정신은 하나의 ‘실체’로서 되는 것이 아니라, ‘경향’이 된다.

 

[7; 28]일반관념은 표상되어야 하지만 이는 (...) 환상 속에서만 있을 수 있다. 한편 상상력은 대자적으로 환상으로 존재할 때 비로소 즉자적으로 본성이 될 수 있다. 나아가 환상은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확장을 발견한다. 환상은 언제나 관계를 불러올 수 있고, 본성의 옷을 빌려 입을 수 있으며, 합법적 인식의 결정된 영역을 넘어서서 인식을 그 고유한 한계 너머로 가져감으로써 일반규칙을 형성할 수 있다. 그것은 그 고유한 환상을 드러내 보일 수 있다. (...)

[7-8; 29]사실상 흄은 일반 관념들이 표상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한정된 양과 질을 가진 특정한 관념의 형식 아래에서 단지 환상 속에서만 그러하다는 것에 주목한다. 한편으로 상상력(l'imagination)은 스스로 환상(fantaisie)이지 않으면서 그 자체로 본성이 될 수 없다. 더 나아가 환상은 여기서 전적으로 새로운 확대를 발견한다. 환상은 언제나 관계들을 일깨우며 자연의 의상을 빌려 일반 규칙을 형성하고 적법한 인식의 한정된 장을 넘어 그것의 적절한 한계들 너머로 지식을 가져간다. 그것은 그 자신의 환상들을 전시한다.(...)

다른 한편, 정신은 수동적으로 남지 않고, 본성의 원칙에 의해 활성화될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효과를 겪는 것이다. 관계는 연결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연결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인과성은 정념이며, 반성의 인상이며, 그리고 “유사 효과”이다. 인과성은 느껴진다.[ 그것은 정신의 지각이며 이해의 어떤 결과가 아니다. (...) 요약하자면, 필연적 연결이란 사실상 주체 안에 있는 것이며, 오직 주체가 응시하는 한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필연성이 주체의 편에 존재하는 한, 필연적 관계는, 사태들의 경우에, 오직 어떤 지속적인 연접(a constant conjunction)인 것이다. 필연성은 사실상 오직 그것이다. 하지만 필연성은 단지 주체가 응시하는 한에서만 주체에 속하는 것이지, 그것이 행동하는 한에서 그러한 것은 아니다. 지속적 연접은 전체적인 필연적 연결이다.

 

11. 관계가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 대목은 그것이 정신의 수동성, 그리고 그 반대급부로서 ‘정념의 적극적 활동’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응시’는 이러한 관계의 수동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개념이다.

12. 필연성이 주체의 응시를 통해서만 주체에 속한다는 것, 그것이 또한 전체적인 필연적 연결을 드러낸다는 이 지점이 중요하다. 이것은 들뢰즈의 니체와도 통할 것이다.

 

☞ ‘응시’와 관련한 [차이와 반복]의 구절들: “습관들을 취득하는 것은 행동하면서인가 … 아니면 거꾸로 응시하면서인가? (...) 여기서 던져야할 물음은 혹시 자아 자신이 어떤 응시가 아닌지, 혹시 자아의 본성이 어떤 응시에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데 있다. (...)

그러나 수축은 또한 응시하는 영혼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틱-탁들의 융합을 가리킨다. 이것이 수동적 종합이다. 이 수동적 종합은 우리의 삶의 습관을 구성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구성하는 것은 ‘이것’이 계속되리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두 요소 둥의 하나가 다른 요소 이후에 뒤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이다. (...) 우리가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반복의 융합이다. 영혼은 응시하는 영혼이며, 이 영혼의 모든 역할은 습관을 수축하는[붙이는] 데 있다. (...) 습관은 여기서 자신의 충만한 일반성을 드러낸다. 이 일반성은 우리가 (심리학적으로) 가지는 감각-운동의 습관들에만 관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우리 자신의 존재인 원초적 습관들에 관련되어 있고, 우리를 유기적으로 형성하는 수천의 수동적 종합들에 관련되어 있다. 우리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는 우리가 수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축하게 되는 것은 응시를 통해서이다. 이 둘은 동시적 사태이다. 우리는 어떤 응시들이고,, 우리는 어떤 상상들이다. 우리는 어떤 일반성들이고, 우리는 어떤 경쟁적 지망들이며, 우리는 어떤 민족들이다. 왜냐하면 지망의 현상은 수축하는 응시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수축하는 응시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수축하고 있는 것에 대한 우리의 권리와 기대를 천명한다. 우리가 응시하는 한에서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만족을 천명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응시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응시하기 때문에 비로소 실존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수축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가 있기 위해 먼저 있는 것을 응시하고 수축하며, 그런 가운데 실존한다. (...) 쾌락이 원리라면, 이는 그것이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응시는 이완과 수축으로 이루어진 경우들을 자기 자신 안에서 수축할 때 충만해진다. 거기에는 수동적 종합의 지극한 행복이 있다. 응시를 통해 우리는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물을 응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응시가 가져다 준 쾌락(자기만족)을 통해 모두 나르키소스가 된다. 우리는 응시에서 끌어내는 쾌락 때문에 나르키소스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훔쳐낸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이미지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먼저 다른 것을, 물, 아르테미스, 나무들을 응시해야만 한다. (...) 유기체들은 『엔네아데스』3권의 “모든 것은 응시이다!”라는 숭고한 말과 더불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 플로티누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오로지 자신의 고유한 이미지를 응시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래를 향하여 스스로 뒤돌아설 때만 그 이미지를 규정하고 향유할 수 있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주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오로지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 응시는 어떠한 행위의 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응시는 항상 뒤로 물러서 있다. 응시는 그 어떤 것도 ‘행하지’ 않는다.(비록 어떤 것이, 완전히 새로운 어떤 것이 응시 안에서 행해짐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우리는 응시를 망각하기 쉬우며, 반복을 전혀 끌어들이지 않고 자극과 반응의 전 과정을 해석하기 쉽다. 왜냐하면 반복을 끌어들이는 것은 단지 자극 및 반응들과 응시하는 영혼들의 관계 안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175- 181 이하]

 

[8; 30] 흄이 정신의 활동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정신이 능동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능동적이 되며, 그리고서 정신이 주체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흄 철학에 고유한 역설은 그것이 그 자신을 초월하는(dépasse) 주체성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동적으로 제시한다는 점에 있다.(une subjectivité qui se dépasse et n'en est pas moins passive.) 주체성은 하나의 결과[효과]로 결정된다. 그것은 사실상 반성의 인상(impression de réflexion)이다. 정신은 그러한 원칙에 따라 촉발되는 것이며, 이제 하나의 주체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13. ‘정신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능동성 이전에(혹은 그 안에?) 수동성이 이미 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체성이 초월적이라는 것은 여전히 그것이 수동적이라는 것과 함께 간다. 즉 그것은 하나의 수동적 결과, 효과로서 초월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주체는 반성의 인상일 뿐이지만, 또한 그것이 정신 안에 효과로서 출현하지만, 수동적 초월성을 견지한다.

 

[9; 31]흄의 저작에서, 우리는 두 방향으로 분기된 영감의 불균등한 전개를 목격하게 된다. 한편으로 정신의 심리학은 관념의 심리학이며, 단순요소들과 최소단위 또는 개체의 심리학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해의 체계의 두 번째 부분 즉 “시간과 공간에 관한 관념”을 차지하고 있다. 이것은 흄의 원자론이다. 다른 한편으로 인간본성의 심리학은 기질에 관한 심리학이며, 아마도 그것은 심지어 인류학이며, 실천학이고, 특히 도덕, 정치 그리고 역사이기도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심리학에 대한 진정한 비판이다. 하나의 관념 안에 주어지지 않은 모든 결정요인들에, 또는 정신을 초월하는 모든 질적인 것에 그 대상이 정위되는 한에서 말이다. 영감에 관한 이 두 번째 방향이 흄의 연합론 구성하는데, 연합주의와 원자론을 혼동하는 것은 심각한 오해라 하겠다. 이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봉착한다. 어째서 첫 번째 영감은 흄의 저작들, 특히 그의 공간론에 존속하는 것인가? 우리는, 비록 정서의 심리학이 그 기획에 있어서 (어떤 지속불가능한 과학으로서) 정신의 심리학에 관한 비판과 심지어 제거를 담고 있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그 대상들 안에 자연적 특질에 대한 반론으로서 정신에 대한 본질적인 참조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이 그 자체로 원자들의 집합이기 때문에, 진정한 심리학은 즉각적인 것도, 직접적으로 가능한 것도 아니다. 즉 원칙들은 처음에 어떤 반대되는 본성을 부여함이 없이 가능한 과학의 대상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흄은 원자론적인 심리학을 발명한 것이 아니다. 그보다 그는 원자론 안에 어떠한 심리학도 허용하지 않는 어떤 정신의 상태를 지적한다.

 

14. 흄이 원자론적인 심리학을 감응의 심리학으로 포괄하려는 취지를 가지는 것은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매우 합당하다고 볼 수 있다. 데카르트 이후의 운동학은 홉스를 거치면서 완전한 기계론으로 변화했는데 이로써 일정정도 정신의 물질적 본성을 사람들이 알게 한 반면, 정신의 정념적 저변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흄의 시도는 그의 경험주의적 시도 전반과 잘 조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정념적 저변이야말로 인간 정신이 어떤 상상력의 활동, 관념의 활동일 뿐이라는 것을 잘 증명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해야만 흄으로서는 정념의 사회적 의미를 더 캐낼 수 있었을 것이다.

역자도 밝히고 있다시피 이러한 시도에 대해 들뢰즈가 (처음으로?) 주목했다는 점도 기억하고 있어야 하겠다. “들뢰즈가 이 장의 맨 처음에서 흄에게는 ‘정신의 심리학’을 ‘감응의 심리학’으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였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를 함축한다.

 

[10; 33][또한] 종종 이들은 특정한 원칙들이기도 한데, 이는 질료[물질]의 심리적 동등성을 심리학이 그것의 특유한 점과 가능한 대상, 그리고 그것의 과학적 조건을 발견하는 한도 내에서 구성한다. 흄은 연합의 원리로서, 후자의 경로를 선택했으며, 그것은 가장 난해하고 가장 대담한 것이다. 이것은 유물론에 대한 친연성이 출현하는 지점이며, 동시에 그의 유물론에 대한 침묵(réticence)이 출현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15. 여기서 과연 ‘유물론에 대한 침묵’이란 무슨 뜻인가? 아마 이것은 내가 14번 주석에서 언급한 바의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새로이 이런 질문도 가능할 것이다. ‘정념’과 ‘정신’의 유물론이 기계론과 그토록 다른 지점이 흄의 경험주의, 혹은 주체론 각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 것인가? 혹 그것을 지정해 줄 수 있는 어떤 개념이 있을 것인가? 수동적 초월성?

 

4절: 흄의 경험주의는 감각경험을 넘어(초월하여) 주체를 구성한다는 것(실천)을 말해준다. 그리고나서 반성인상은 그 주체에 자격을 부여한다. 하지만 이때 반성인상이 생산되는 이성은 정동의 한 변용이며 이렇게 해서 경험주의는 정동의 실증주의로 나아간다. 결과적으로 주체와 정신은 자아 안에서 하나가 된다.

 

[10-1; 33-4]흄의 문제는 그래서 사실에 대해 배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따라서 경험론이다. (...) 인식[지식]의 사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초월(transcendant) 또는 넘어섬(dépassement)이다. 그것은 나는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확신한다는 것이고, 나의 판단이 관념 너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른 말로 그것은 나는 주체라는 것이다. (...) 나는 믿음을 가지고, 또한 나는 관계를 형성한다. 이것이 사실이며 실행(pratique)이다. (...) 사실이란 이러한 실행들이 즉각적으로 모순되는 관념이 없이는 관념의 형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16. ‘사실’은 흄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실성’(Factizität)라는 문제로서 하이데거의 그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여기서 ‘초월’, ‘넘어섬’이라는 것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것을 곧장 ‘실존’의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섣부를 것이다. 이것은 일단 실존의 자기초월성이 아니라 정신이라는 흄의 주제 내에서 관념의 활동 자체가 ‘초월성’을 가진다는 뜻으로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서 중요하게 제기되는 문제: 초월적 경험론은 정신이 관념이나 상상력으로서 인간본성이 될 때, 그것이 주체로 구성된다는 것 그것이 더 문제인가?

 

[12; 36]하지만 마침내 왜 철학이 이러한 비판을 수행하며, 하나의 관념에 있어서 초월성을 표현하고, 모순을 생산하며, 그리고 인식의 사실로서 양립불가능성을 표명하는 것인가?

왜냐하면 그것은 논의 대상인 초월적인 것이 하나의 관념 안에 주어지지 않고 정신에 의해 참조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신에게 그만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와 동시에 정신은 비판의 대상이면서 필연적인 참조의 한 항인 것이다. (...) 흄의 방법은 정신 안의 관념의 부재로부터 정신의 변용(affection)의 현전으로 나아간다. (...) 초월이 첫 번째이며 가장 중요한데, 이는 초월하는[39] 것의 부정적 관계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대로 초월성의 구조에 있어서는, 정신은 외부로부터 오는 어떤 실증성을 발견한다.

 

17. 초월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정신 안에 관념이 부재한다는 사실에 기반한다. 다시 말해 초월을 통한 정신의 변용이 없다면 정신은 어떤 작용도 불가능해진다. 이것이 바로 ‘외부로부터 오는 실증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때 이 실증성은 어떤 소박한 ‘실재성’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재성’은 내 생각에 실증성을 건너뛰어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식간의 순서로 거의 함께 오거나, 때로는 매우 늦게 오는 것이기도 하다.

 

[13; 37]반성의 인상들의 적합한 역할은, 원리의 결과로서, 이러저러한 방식으로 정신에 주체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관념”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동일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정동의 심리학이 구성되는 주체에 관한 철학이 되는 것이다.

이성주의[합리주의]는 이 철학을 상실한다. 흄의 철학은 표상[재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인 것이다. 그것은 관계성에 대한 비판에 열중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표상의 비판이다. 그 이유는 정확히 표상이 관계를 현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주의는 정신적 요인들을 외부 대상들로 이전했으며, 그에 따라 철학에서 의미, 그리고 실천과 주체의 지성적 특성을 탈각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이 이성은 아니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성은 정신의 어떤 변용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은 본능, 습관 또는 본성으로 불리워질 것이다.

 

18. 일반적으로 흄의 ‘혁명’이라고 알려진 부분이 여기서 기술되고 있는데, 훨씬 극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들뢰즈는 이성을 ‘본능’, ‘정념’의 파생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 흄의 공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데카르트에 홉스에 이르기까지 이성은 일종의 신성불가침의 영역처럼 정념과 의지가 범접하지 못하는 초월적 영역이었으며, 칸트식으로 이야기 하자면 ‘목적의 왕국’이었다. 그곳에는 ‘자유의지’가 있으며, 따라서 기계론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애초부터 이러한 파악에는 파열구가 마련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현대적인 의미에서 ‘심신론’이 뚫어 놓은 구멍이라고 하겠다. 신체와 정신의 실체 이원론을 견지한 데카르트라 할지라도 이 방면에서는 ‘송과선’이라는 해체적인 시도를 하고 있다는 것은 정신이 얼마나 애매한 관념이었는지 알게 해 준다. 흄의 경우에 이 구멍을 피해가기 위한 도주로는 ‘정동의 심리학’에 놓여 있으며, 정신을 상상력과 함께 관념의 놀이터로 만듦으로써 가능해졌다. 이 시도는 매우 유물론적이었으며, 따라서 위험했지만, 이제 들뢰즈는 그 ‘고귀함’을 알아챈 것이다.

 

[14; 39]이성은 감정(sentiment)의 한 종류이다. 결론적으로 철학의 방법이 관념의 부재로부터 인상의 현전(présence)으로 나아가듯이, 유사하게도 이성에 관한 이론은 어떤 종류의 회의주의로부터 실증주의적인 것으로 옮겨간다. 그것은 이성에 관한 회의주의로부터 정동의 실증주의로의 이동이다. 여기서 실증주의는 자격을 부여 받은 정신(esprit qualifié) 안에 정동의 반성으로서 이성을 포함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19. 먼저 ‘esprit qualifié’ 와 관련하여 이 부분을 볼 필요가 있다.(이제부터 번역수정에 대해서는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겠다.) 들뢰즈는 흄의 정동의 철학(정념의 철학)이 이성을 포함하는 것이라고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회의주의를 극복하고 실증주의(이것은 경험주의라고 읽어도 무방할 것이다)로 가는 지도리라고 한다. 그런데 이때 ‘정신’은 스스로가 자격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자격을 부여받는다. 실증주의 단계에서 정신은 자신의 능동성을 버리게 되고 “이성을 포함하는” “정동의 반성”이 된다. 이를 다시 풀어 말하면 정신은 정동을 반성하는 이성의 파생물이다. 흄에게 ‘반성’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상보다는 약한) 관념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단계다. 이 다음 구절들을 살펴 보자.

 

[14; 39]감각의 인상들과 반성의 인상들(또는 감각의 관념과 반성의 관념)에 가능한 한에서 동종성(homogènes)을 부여하고 그 둘이 동시에 현전한다고 함에도 불구하고[Treatise p. 8], 둘 사이의 차이는 실재로는 본성의 차이이다. (...) [15]감각 인상이 정신의 유일한 원천이다. 반성의 인상은 정신의 자격부여(qualification), 정신 안에서 원리의 결과[효과, effet]이다.

 

[15;40]정말 중요한 것은 반성 인상의 측면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체로서 정신을 승인(qualification)하기 때문이다. 경험주의의 기원과 운명은 원자의 차원이 아니라 연합의 차원에 결합되어 있다. 경험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신의 기원이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구성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 게다가 경험주의는 주체의 구성을 창조의 산물로서가 아니라 초재적 원리들(principes transendantes)의 결과로서 정신 안에서 탐구한다.

 

20. 이 말을 잘 새겨 보자. 즉 들뢰즈의 흄은 정신이 어디에서부터 오는가라는 기원의 문제와는 상관없고, 혹은 그것은 주체 구성의 파생물일 뿐이고, 따라서 정신이 형성되는 원자적 인상이나 관념이 아니라 주체가 구성되는 ‘연합’의 차원이 더 관건이라는 것이다. 이때 연합의 원리는 말 그대로 ‘초재적’이다. 이 부분을 잘 이해해야 한다. 일단 질문부터 던져 보자. 도대체 ‘연합이 초재적 원리들’이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분명한 것은 이것이 주체구성의 원리이며, 주체구성은 ‘반성인상’으로부터 비롯된다. 그러면 여기서 들뢰즈의 흄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즉 주체란 직접인상보다 더 희박한 반성인상 또는 관념이 연합의 원리에 의해 초재적으로 구성되는 것, 즉 ‘인상들의 파생물’이라는 것이다. 한 가지 부언하자면, 따라서 여기서 ‘초재적 구성’의 ‘초재적’이라는 것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파생물의 생산과 관련되며, 연합의 원리가 실행되는 상상력의 장에서 습관이라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내재적 구성’으로부터 형성되는 또 다른 파생원리일 뿐이다.

 

[15;41]정신은 주체(sujet)가 아니라, 예속된(assujetti) 것이다. 그리고 주체가 원리의 효과(effet) 아래에서 정신 안에 구성될 때, 그와 동시에 정신은 [이 구성에 의해] 인증받기 때문에, 스스로를 자아로 파악(Moi)한다. (...) 주체와 정신은 최후에 어떻게 자아 안에서 하나를 이룰 수 있는가? 자아는 관념의 다발이면서 동시에 경향, 정신 그리고 주체여야 한다. 자아는 종합적이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기원과 승인의 일치 없이 자신의 상념(notion) 안에 결합되어 있다.

 

21. 결국 자아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스스로를 자아로 파악하는 과정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런저런 ‘복합물’들이 결합되는 방식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주체이면서 정신이면서 자아인 어떤 대상이 또 스스로를 어떻게 결정하는지 알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5절: 지성과 도덕은 분리되는 체계를 이룬다. 전자에게는 믿음이 후자에게는 공감이 중요하다. 하지만 이 둘이 모순된 것은 아니다. 다만 지성적 실천은 자연이 그러하듯이 부분에서 부분으로 진행하지만 도덕적 실천은 그 부분들 전체를 감정이 수용함으로써 진행된다는 점에서 다르다.

 

[16-7;42-4]흄의 철학은 [인간] 본성의 두 가지 양태, 즉 감응의 두 가지 종류를 제시한다. 한편으로 연합의 결과가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정념의 결과들이 있다. 이들은 각각 체계의 결정인데, 지성의 체계, 정념과 도덕의 체계이다. 우선 이 둘 사이에는 평행성(parallélisme)이 수립되어, 정확하게 서로를 따른다. 믿음과 공감은 서로 대응한다. 나아가 공감에 속하면서 믿음을 넘어서는 모든 것은 분석에 따르면 정념이 관념의 연합에 덧붙인 것과 유사하다. 다른 면으로 보자면 연합이 정신에 필연적인 일반성, 그러니까 이론적 인식에 필수불가결한 한 가지 규칙을 고정시키듯이 정념은 정신에 항상성의 내용을 제공하고, 실천적이고 도덕적인 활동을 가능케 하며, 역사에 그 의미를 준다. 이런 이중의 운동(double mouvement)이 없이는 인간의 본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상상력은 환상에 머물 것이다. 대응은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동기와 행위의 관계는 인과성에 동질적인 것으로서 역사가 인간의 물리학으로서 해석되기에 이른다. (...) 흄은 유일하게 가능한 이론은 실천의 이론이라고 보았다. 지성을 위해 개연성의 계산과 일반규칙이, 도덕과 정념을 위해 일반규칙과 정의가 있다.

그러나 아무리 중요해도, 이 모든 대응은 철학의 현시와 그 결과의 분배일 뿐이다. (...) 우리는 철학의 동기(mobile)를 자문하는 것이다.

 

22. 정념의 체계와 지성의 체계 사이에 있는 ‘평행성’이란 ‘대응’(répondent)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가 더 주의깊게 지켜봐야 하는 것은 ‘이중의 운동’이다. 이 운동으로 인해 흄의 ‘실천의 이론’이 가능해지고, 필연적이 되는 것이다. 지성은 ‘정신에’ 필연적인 일반성을 정념은 ‘정신에’ 항상성의 내용을 제공한다. 다시 말해 이 두 활동들이 모두 ‘정신’에 수렴한다. 앞서 보았듯이 정신은 파생적인 활동이며, 주체를 구성하는 동안 형성되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념과 지성의 체계를 활용하고 어떤 것을 ‘발명’해야 하는데, 이 과정은 철저하게 ‘내재적’이며, 정신으로의 수렴성을 띈다. 즉 주체의 구성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유념해야 하는 것은 이 주체의 구성이라는 것이 단지 실험적 발명물이라는 점이다. 들뢰즈의 흄은 이 방면에서 ‘실험’이 가지고 있는 어떤 모순된 특성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필연적이지만 개연적이고 계산이 필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사유들이 바로 철학의 임무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철학이야말로 아무 것도 없는 무바탕 상태에서 사유를 진행하며, 그렇다고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없기 때문이다. 회의주의는 어쨌든 실증주의로 다가가야 하고, 그것이 철학의 운명애(amor fati)다. 그래서 들뢰즈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17-8;44]이성이 고유의 영역과 관련된 이성의 문제를 가지기 위해서는 이성을 피한 영역, 우선 그 안에 질문을 놓아야 한다.

23. 이성을 법정에 세우기 위한 칸트의 작업을 예고하는 이 말 속에서 우리는 보다 소극적인 뉘앙스의 경험주의 재판정을 떠올릴 수 있다. 하지만 이 재판정의 판결은 이성을 더욱 사지로 몰아 넣을만큼 강력하다. 나로서는 아직 이 이유를 뚜렷하게 제시하지는 못하지만, 흄과 들뢰즈의 흄을 더 따라가 보기로 하자.

 

[18; 45]하지만 우리는 이성이 어떤 행위를 산출한다고, 정념이 그것에 반한다고 또는 심지어 이성이 정념을 좌절시킨다고 말할 수 없다. 모순은 적어도 관념들과 관념이 재현하는 대상들 사이의 불일치를 함축한다.

 

[19; 45-6]이성은 선재하는 세계에 대해 노력을 기울이며, 이전의 윤리와 목적들의 질서를 전제한다. 따라서 이것은 이성에 무관심한 그것의 본성 안에(그리고 그것의 환경 안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때 이성은 그것의 차이를 추구한다. 이성은 외부세계로부터 베제되기 때문에, 내적으로도 배제되며 광기와 회의주의로서 발견된다.

 

[19; 46]정념과 윤리의 실증주의는 이성의 회의주의를 양산한다. 이 내면화된 실증주의는, 이성의 회의주의가 되면서, 실천의 이론으로서 지성의 실증주의를 야기한다. 이러한 지성의 실증주의는 이성의 회의주의라는 이미지 안에 함축되는 것이다.

 

24. 불분명한 것은 ‘내면화된 실증주의’라는 것이다. 이 내면화의 과정은 어떤 것인가? 이는 분명 철학사적인 과정임에는 틀림없다. 흄 외에 누구?

 

[19-20; 47]이미지에 따르는 것이 옳으며, 유사성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윤리의 체계와 지성의 체계 간의 차이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정서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두 가지 개념을 구분해야 한다. 즉 그것은 정념적인 또는 도덕적인 정동과 지식의 차원으로서 초월성이다. 의심할 여지 없이, 도덕의 원칙, 즉 정념의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특질은, 연합의 원칙이 그러한 것과 마찬가지로 정신을 촉발하고 초월한다. 경험적 주체는 정신 안에서 모든 원칙들의 결합된 효과로서 확고하게 구성된다. 하지만 이것은 오직 다른 것이 아니라 연합의 원칙들의 영향력 아래에서만 그러하다. 이때 주체는 주어진 것[소여]을 초월할 수 있게 된다. 즉 주체는 신념을 가진다. 이런 정확한 의미에서 초월성은 배타적으로 지식의 대상이 된다. 다시 말해 그것은 관념에 어떤 역할을 부여하면서, 대상을 확증하면서, 그리고 대상과 관념의 연결을 구성하면서 그것 자체 너머로 실어 나르는 것이다. 따라서 오성의 체계 안에서, 정신을 촉발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은 무엇보다도 실천 안에서, 다시 말해 소여를 초월하는 주체의 움직임 안에서 탐구될 것이다. 즉 인과관계의 본성은 추론의 맥락에서 파악된다. 하지만 도덕의 경우는, 심지어 그것이 초월성의 전개방식과 유사하게 취급될 때라 해도, 완전히 다르다. 이 경우에는 도출되는 어떤 추론도 존재하지 않는다.

 

25. 지성이 추론의 경로를 따른다면, 이제 내가 보기에 들뢰즈의 흄은 도덕이 ‘직관’의 차원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이것은 일정한 베르그송주의를 내포하고 있다.

 

[20; 48]도덕은 관념들을 오직 연관된 상황들에 속한 하나의 요인으로 받아들이며, 연합을 인간본성의 구성된 요소로 수용한다. 다른 한편, 지성의 체계 안에서 연합은 일종의 구성적 요인, 사실상 인간본성의 유일한 구성요소다.

 

[20-2; 48-51]현격한 차이를 가진 특성들에 의해 즉각적으로 차이를 드러내는 두 종류의 실천이 존재한다. 지성의 실천은 본성의 내적 경제를 결정하며, 연장이라는 수단을 가지고 진행한다. 물리학의 대상으로서의 자연은 부분 밖의 부분(partes extra partes)이다. 이것이 자연의 본질이다. 왜냐하면 인과관계는 대상들의 질적인 특성 중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 자연은 사실 하나의 연장적인 크기이며 그렇기에 그것은 스스로를 물리적 실험이나 측정이 가능한 것으로 내 놓는다. 본질적인 것은 부분들을 결정하는 것이며, 인식의 한계 안에서, 이것은 일반 규칙의 기능이다. 자연은 어떤 전체가 아니다. 전체는 그것이 발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발명될 수 있을 뿐이다. 전체성은 단지 어떤 집합이다.

(...) 하지만 도덕의 실천은 난해하다. 여기서 부분들이 즉시 주어진다. 어떤 추론도 요청됨이 없이, 그리고 어떤 필연적인 적용도 없이 말이다. 하지만 이 부분들은 서로 간에 확장되기보다 배타적이다. 이들은 자연에서 그런 것처럼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으로 존재한다. 윤리적 실천의 경우, 난점은 그러한 부분적 특성들이 편향되거나 거스르는 데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발명하는 것이다. (...) 본질적인 과제는 전체 도덕을 구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의란 하나의 도식(schéme)이며, 도식이란 사회의 원리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 항상 부분에서 부분으로 진행하는 이성과는 달리 감정은 전체에 대해 반응한다. 이것이 도덕의 영역에서 일반규칙이 다른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26. 도덕의 일반규칙에서 원리적인 것은 이제 ‘감정’이 될 것이다. 부분들 전체에 반응하는 감정은 25에서 제시된 ‘직관’의 원천이거나 최소한 그것과 친연적일 것이다. 2부를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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