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 세미나 7월 21일 『비극의 탄생』 후기
니체의 『비극의 탄생』은 그리스 비극의 탄생(1∼11장)과 그 몰락(11∼16장), 그리고 그 부활(17장 이하)을 다루고 있는데요. 지난 주에는 1장에서 10장까지 읽었습니다. 여기에서는 여러분들이 궁금해하셨던 개념들을 중심으로 정리를 해볼까 합니다.
_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란?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
1장의 첫 문장입니다.
다시 말해 예술의 근본원리에는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는데, 전자는 조각이나 건축과 같은 조형예술이나 서사시에 해당되는 반면에, 후자는 서정시나 음악과 같은 비조형예술에 해당합니다. 이러한 두 예술원리는 인간의 근본충동 내지 근본의지와 밀접한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아폴론적인 것’은 꿈에 대한 충동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도취에 대한 충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아폴론 신은 꿈속의 형상이 갖는 완벽함, ‘절도와 균형’을 상징합니다.(“인간은 꿈속에서 완벽한 예술가가 된다.”) 꿈에의 충동은 아름다운 가상假象appearance을 형성하고 그것을 관조하면서 쾌감을 맛보려는 충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 인간에게는 술의 힘이나 축제 분위기에 젖음으로써 자신을 망각하고 만물과 하나가 되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니체는 이를 디오니소스적인 충동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아폴론적인 아름다운 꿈의 가상들은 조형적인 형상들과 언어를 통해서 표현되는 반면에, 디오니소스적인 도취는 신체의 모든 부분을 통해 표현되며 특히 리듬과 강약과 화음을 통한 음악의 상상력을 통해 표현됩니다.
니체는 그리스인들은 그 어떤 민족보다도 훨씬 강력한 고뇌의 능력을 지녔다고 봅니다. 이러한 고뇌란 세계의 분열과 만물의 사멸에 대한 고뇌인 바, 디오니소스적인 합일에의 욕구가 강한 민족일수록 그 고뇌도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고뇌의 상징으로써 현자 실레노스의 말을 기억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루살이와 같은 가련한 족속이여, 우연과 고난의 자식들이여, 그대는 왜 나에게 그대가 듣지 않는 것이 가장 복된 일인 것을 말하도록 강요하는가? 가장 좋은 것은 그대가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지 않는 것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고 無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대에게 차선의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죽는 것이다. ”
니체는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인들이 뼈저리게 절감하고 있었던 이러한 염세주의( 삶의 잔혹함과 무상함, 그리고 어두움)와의 대결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을 병약하게 만들면서 염세주의를 극복하는 기독교인적인 방식과는 달리 그리스 비극은 현실세계의 욕망과 본능을 인정하고 신성한 것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인생의 염세주의와 고통을 극복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인들이 염세주의를 극복한 방식에는 3가지가 있는데, 그 첫째가 아폴론적인 예술(건축)이고 둘째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며, 셋째가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인 예술의 결합으로서 기원전 5,6세기 고대 그리스의 비극예술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기원을 디오니소스제祭에서 디오니소스에게 바치는 주신찬가酒神讚歌(디티람보스) 합창곡에 두고 있습니다. 니체는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도취와 황홀경의 상태에서 우주 만물과 혼연일체가 되어 사지가 갈갈이 찢겨지는 죽음을 극복하고 부활하는 강인한 생명력(디오니소스의 별명인 자그레우스가 티탄들에게 찢겨 다시 제우스에 의해 태어났듯이)을 상징하는 것으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 말합니다. 가령, 니체가 “예술의 발전은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부되어 있다. ”고 말할 때, 비극의 경우를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디오니소스적인 것’은 코러스의 합창(음악)이라면,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를 통해 표현되는 서서적인 이야기는 ‘아폴론적인 것’입니다. 비극을 보는 관객들은 자신을 비극적인 주인공, 가령 오이디푸스 왕과 동일시하지만 동시에 이러한 비극적인 주인공을 영원한 디오니소스적인 세계의지가 취하는 하나의 일시적인 현상이이라고 느끼게 됩니다. 따라서 관객들은 오이디푸스의 몰락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의 본질이자 근원은 영원하며 자기자신도 영원한 것으로 경험하는 것입니다. 즉 관객은 삶을 모든 현상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결코 파괴되지 않는 강력하고 즐거움(“그리스적인 명랑성”)이 가득한 것으로 경험함으로써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근원 일자와의 합일을 통해 염세주의를 극복하고 삶을 긍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를 거쳐 그리스비극은 에우리피데스에 이르러 코러스(음악)가 대폭 축소되고 배우들의 대사가 중심을 이루게 됩니다. 이는 논리적 지성주의자인 소크라테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에우리피데스와 소크라테스는 친구지간이기도 하지요.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비극의 몰락(11-16장)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다시 25세기가 지나 신화적 배경을 지닌 바그너의 합창극에서 비극의 부활을 보는 것입니다. 니체는 『비극의 탄생』5장에서 “삶과 세계는 미적현상으로서만 정당화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바그너의 합창극이 대중과 영합하는 사태를 지켜보면서 그와 결별하게 되면서 15년이 지난 뒤인 1886년에 <자기비판의 시도>란 글을 『비극의 탄생』 서두에 덧붙이게 됩니다. 그리고 니체는 삶을 정당화하는 데에는 굳이 ‘예술’이라는 매개가 없이 삶 그 자체를 긍정하는 철학, 다시 말해 생을 긍정하는 철학자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지요.
_개별(개체)화의 원리(Principium Individuationis)란?
“태산 같은 파도를 올렸다 내리면서 사방으로 끝없이 펼쳐진 채 포효하는 광란의 바다 위에서 뱃사람 하나가 자신이 탄 보잘 것 없는 조각배에를 믿고 의지하면서ㅓ 그것 안에 앉아 있는 것처럼, 고통의 세계 한가운데에 인간 개개인은 개별화의 원리를 믿고 의지하면서 고요히 앉아 있다. ”
_쇼펜하우어의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 『비극의 탄생』에서 인용
니체는 『비극의 탄생』에서 쇼펜하우어의 사상과 개념도식에 의거하면서 음악의 신비와 인간과 세계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때로 보편적인 언어라 불리는 음악을 들으며 황홀경에 빠져 자기자신을 망각하면서 주변 사람들과 하나로 융합하기도 하지요. 하지만 대체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란 자신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분리된 하나의 개체로 느끼며 자신의 생존과 우월한 지위의 확보를 위해 투쟁합니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이러한 세계가 “개별화의 원리Principle of individuation”가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음악이 흐를 때 이러한 개별화의 원리를 초극하여 서로 간의 차별을 망각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개별화의 원리가 지배하는 경험적인 세계의 근저에 보다 근원적이고 심원한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라고 추측해볼 수 있겠지요. 쇼펜하우어는 이를 개별화된 원리에 의해 분열되기 이전의 세계의지(니체의 언어로는 근원일자Primal Unity))라고 부릅니다. 음악은 이러한 세계의지의 표현입니다. 이에 반해 개별화의 원리는 개념적인 언어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논리적인 지성(소크라테스주의)에 입각한 학문이 아니고 음악의 리듬과 멜로디인 것입니다.
니체는 세계의 본질은 음악적인 선율에 가깝다고 보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두뇌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온몸과 정서 전체를 동원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는 달리 개별화의 원리를 넘어서 세계의지와 하나가 될 수 있고, 그러한 세계의지의 소리를 음악을 통해서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존재인 것입니다.
“음악에는, 무엇보다도 멜로디의 본질에는 인간의 궁극적인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가 들어 있다.”
예술 중에서 오직 음악만이 개별화된 사물들의 근저에 있는 세계의지 자체를 표현합니다. 음악은 형이상학적 의지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계의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음악가나 서정 시인이야 말로 세계의 본질을 이해하는 진정한 형이상학자라 할 수 있겠지요. 음악은 우리를 세계의 심장부로 인도하면서 현상세계를 이러한 심장부로부터 경험하고 보게 합니다. 이러한 음악 속에서 죽음이 극복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도취경을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황홀경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부족하나마 정리를 해보았고요. 이 글은 박찬국 역의 『비극의 탄생(이카넷)』역자해제를 참고한 것입니다. 다음시간 7월 28일(일요일)에는 11장부터 나머지 전부를 읽습니다. _박아무개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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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무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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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연
후기가 참 멋지네염~~복습이 잘 되는 듯 합니다!
특히 근원일자에 대한 이해가 좀 더 명확해 지는 듯...
헌데 나중에 니체가 예술 자체를 포기한다기 보다는
형이상학적 위안을 필요로 하는 삶의 정당화 작업을 거부하는 건 아닌지...
초기의 예술가-형이상학에 대한 플랜을 니체는
바그너 비판을 통해 일단 폐기하지만
말기에 가서는 예술에 대한 긍정적 태도를 다시 불러오는 듯 해서요.....
암튼, 차근히 읽어가면서 좀더 확인해야 할 부분들인 것 같습니다...
일욜날 뵙고 좀더 논의 하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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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롱
지나가는 나그네입니다 ㅎ
좋은 후기 발자취가....
또 상당한 여운으로 남네용 ㅎ
잘 읽고 갑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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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아무개
그러네요. 니체의 후반기 사상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가 없는 나로서는. 다만 나로서는 <<비극의 탄생>>은 예술이 마치 삶을 구원할 수 있다는 “예술을 위한 예술”, 탐미주의 예술적인 발언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삶의 긍정’으로서 애매한 매개를 상정하지만). 그러나 내가 기억하기론 니체는 삶을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완성하고자 노력한 인간이고, 그리하라고 우리를 질타(?)했습니다. 이는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방점은 삶에 있는 것이지 예술은 아니지요. 다만 니체는 방점을 과감하게 찍을 자리가, 어차피 찍어야 한다면 (우리 삶의 존재에서는) 예술이었던 것이 아닐까요?(다른 가능성도 무수히 많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나는 문학예술을 하는 사람이지만요.) 삶은 어차피 수수께끼이니까요. 창작자는 자신의 작품을 위해 최대한 노력하고 완성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의 작품이 되도록 살아야한다는 것은 니체의 (삶에 대한) 진정성으로 읽힙니다. 나는 니체가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되라고 말하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다만 예술가의 특질이랄까? 자유로운 인간이 되라고 말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술이든, 그렇지 않든. 어차피 삶은 신비이니까요. 우주에는 중심이 없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 중심이 될 터이니까. 물론 나는 예술을 위해 내 삶의 중심은 결코 양보하지 않을 겁니다.
약간(?) 보충 설명을 덧붙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