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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마지막 12월의 첫 시간에 진행된 이번 모임에서,

저희는 <존재와 시간> 제26절 앞부분을 같이 읽었습니다.

교재 117쪽 중간 부분부터 121쪽 첫 번째 문단까지 해당되는 분량이네요.


제26절의 제목은 “타인의 함께-거기에-있음[또는 공동현존재]와 일상적 함께-있음[또는 공동존재]”입니다.

앞 절에서 ‘일상적 현존재란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연구 방법론을 제시하였다면,

본 절과 다음 절에서는 그 누구가 누구이며 어떠한 성격을 지니는지를 구체적으로 해명하고 있습니다.


지난 후기에서도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앞의 제3장에서 ‘세계’라는 구조 계기를 고찰하면서,

다른 구조 계기들에 해당하는 ‘존재자’와 ‘내-존재’를 간접적으로 다루었습니다.

‘(세상)사람들’을 주제로 하는 여기 제4장이 ‘존재자’라는 구조 계기를 고찰하고 있기 때문에,

앞 장에서 간접적으로 다룬 바 있는 ‘존재자(현존재)’에 대한 논의를 잠시 환기시켜 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용재적 도구는 기본적으로 ‘지시’의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도구는 사용 목적, 재료, 작업장을 지시하지만, 또한 어떤 사람들도 함께 지시하고 있지요.

가령 도구를 사용하는 소비자, 그것의 재료를 대주는 납품업자, 그것의 소유자 등등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일을 사례로 들어 설명해보면요.

어제는 저희 세미나의 자랑이신 김현석 선생님께서 <수유너머N>의 무궁한 발전을 위하여

노란색 표지로 된 장대한 독일어 사전을 몸과 마음을 바쳐 연구실 책장에 비치하신 역사적 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생님 말씀으로는 그 사전은 ‘아시는 분’한테 선물 받으신 책이라고 하네요.

네, 그렇습니다.

이 독일어 사전은, 이 용재적 도구는 그것을 선사해준 ‘누군가’를 지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희 세미나에서 사용되는 특별 교재가 그것을 무상 증정해주신 김현석 선생님을 지시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죠.

한 마디로 도구는 ‘타인’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도구가 지시하는 이런 타인은 우리와 동일한 인간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도구처럼 용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고 사물처럼 전재적으로 존재하지도 않지요.

그들은 현존재 자신으로서 세계-내-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그들은 우리와 똑같이 거기에 존재하고 우리와 함께 거기에 존재합니다(ist auch und mit da).


그런데 여기서 타인이란 ‘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인간들’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나’를 출발로 해서 ‘타인’으로 나아가는 이 같은 사고방식을 하이데거는 극력 거부하지요.

그것은 고립된 주체를 기본 전제로 삼고 있는 근대 철학의 잘못된 사고방식입니다.

하이데거는 이와는 정반대로 사고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나 → 타인’의 방향이 아니라 ‘타인 → 나’의 방향으로 말이죠.

따라서 타인이란 내가 나 자신과 구별하지 않는 사람들, 내가 그 일원으로 속해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다음 절에서 ‘(세상)사람들’을 본격적으로 고찰하게 될 텐데,

이 절에서 말하는 타인이 바로 그 ‘(세상)사람들’이죠.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타인과 함께(mit) 똑같이-거기에-존재(auch-da-sein)합니다.

여기서 ‘함께’(mit)와 ‘똑같이’(auch)는 실존론적 표현들, 인간 현존재에 관련되는 표현들입니다.

우리는 전재적 사물과 함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동일한 다른 인간과 함께 존재합니다.

그리고 타인은 세계-내-존재로서의 우리 자신과 동일한 존재방식으로 똑같이 존재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의 세계-내-존재는 본질적으로 함께하는(mithaften) 세계-내-존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세계’는 타인과 함께 공유하는 공동세계(Mitwelt)가 되는 것이고요.

또한 그렇기에 우리의 ‘내-존재’는 타인과 함께하는 함께-있음 또는 공동존재(Mitsein)가 되지요.

(제12절에서 ‘세계’라는 구조 계기와 관련하여 내-존재는 ‘~에 거주하다, ~에 머무르다, ~에 친숙하다’의 의미를 갖는다고 했죠?

본 절에서 ‘존재자’라는 구조 계기와 관련하여 내-존재는 ‘공동존재 또는 ~와 함께 있음’으로 해명되고 있습니다.)

또한 이런 타인의 즉자 존재는 함께-거기에-있음 또는 공동현존재(Mitdasein)입니다.

(제15절에서 용재적 도구의 즉자 존재는 ‘용재성’으로 해명되었지요?)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타인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상적 만남은 ‘타인을 나 자신과 구별되는 또 다른 주체들로서 만남’이 아닙니다.

우선 선험적으로 나 자신을 먼저 정립하고

그 선험적 토대 위에서 나와 구별되는 ‘비-아(非-我)’를 추후에 별도로 정립하여

그런 ‘비-아’로서 타인을 만나는 게 아닙니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가 이런 식으로 사유하였죠.

오히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우리가 배시하고-배려하는 현존재로서 머물고 있는 세계로부터’ 그들과 만납니다.


이렇게 세계에 의거하여 현존재가 타인을 만나는 방식은 너무도 일반적이고 친숙하고 기본적인데요.

타인의 만남에서 세계의 의존성이 어느 정도로 일반적이고 친숙하고 기본적이냐 하면,

현존재가 자기 자신의 체험과 행위 중심을 못 본 척 지나칠 때,

심지어는 체험과 행위 중심을 전혀 보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 대한 망각이 절정에 달하는 그런 때야말로

역설적으로 현존재 자신의 모습이 우선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일상에서 우리 자신의 고유한 눈이 아니라

타인의 눈으로, 세상 사람들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면서 살고 있죠.

이처럼 우리는 일상적으로는 우리의 세계로부터 타인과 만나고 있다면,

타인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우선 대개는 우리 자신이기도 한다면,

세계란 용재적 도구들로 이루어진 환경세계를 의미하기도 한다면,

그렇다면 현존재는 우선 대개는 그가 배려하는 환경세계적 용재자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를 나 자신을 통해서 바라보는 게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도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죠.


‘나-여기’(Ich-hier)

인칭 대명사와 장소 부사로 결합된 이 표현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전재적인 인격 사물과 객관적 위치를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에 입각하여 이해되어야 할 표현이라고 합니다.

독일의 언어학자 훔볼트는 한 연구에서

“나”는 “여기”를 통해서, “너”는 “거기”를 통해서, “그”는 “저기”를 통해서,

문법적으로 표현하자면, 인칭 대명사는 장소 부사를 통해서 재현될 수 있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 ‘장소를 표현하는 말로서 인칭 대명사와 장소 부사 중 어느 쪽이 더 근원적인가?’

하는 점에 대하여 학자들 사이에 여러 논쟁이 있었던 듯합니다.

하지만 이는, 하이데거가 보기에, 장소 부사가 현존재와 연관된 표현임을 망각한 헛된 논쟁에 불과합니다.

“여기”, “저기”, “거기”는 전재적 사물들의 객관적 위치를 가리키는 규정들이 아니라

오히려 현존재의 실존론적 공간성을 가리키는 성격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범주’가 아니라 ‘실존범주’와 관련된 표현들입니다.

현존재 Dasein이 괜히 Da-sein이 되는 것이 아니죠.


우리는 ‘타인이 우리와 함께-거기에-있다’는 사실을 우선 대개는 세계 내부적 용재자로부터 경험합니다.

도구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그것을 만든 사람, 그것의 재료를 대준 사람, 그것을 소유한 사람을,

우리와 똑같이 실존하는 현존재로서 함께 만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타인이 이처럼 도구와 연관된 관계자로서가 아니라

‘그들의 현존재’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주목을 받게 되는 경우도 있을 텐데요.

이때에도 우리는 그들을 어떤 ‘전재적 인격 사물’로서 만나는 게 아니고,

우리와 똑같이 실존하는 현존재로서 만나는 것입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아무 하는 일 없이 주변을 배회하여 그냥 서성거리며 서있는 모습을 지켜볼 때도,

우리는 그들을 어떤 ‘전재적 인간 사물’로서 만나는 게 아닙니다.

‘주변을 배회하며 서성거리며 서있음’(Herumstehen)은 오직 인간 현존재만 할 수 있는 “실존적인 존재 양태”이기 때문이죠.


<존재와 시간> 제18절에서 우리는 ‘사용토록 해줌’(Bewendenlassen)의 존재론적 의미를

“존재자를 그 용재성에 의거하여 선행적으로 자유롭게-내줌(개현함)”으로 요약한 바 있지요.

용재적 도구는 용재성이라는 그것의 존재에 의거하여 세계 내부적으로 개현됩니다.

타인의 자유롭게-내줌(개현)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타인을 우리와 동일한 현존재로서 만난다는 것은,

타인이 ‘함께-거기에-있음 또는 공동현존재’라는 그들의 즉자 존재에 의거하여

세계 내부적으로 개현된다는 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현존재가 타인을 자신과 동일한 현존재로 만나고 있을 때,

현존재는 선행적으로 ‘타인이 함께-거기에-있음’을 세계 내부적으로 개시하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우리의 세계 속에서 타인을 인간으로 만나는 것은,

타인을 그 즉자 존재에 의거하여 세계 내부적으로 자유롭게-내주는(개현하는) 것은,

타인의 함께-거기에-있음을 세계 내부적으로 이미 개시하고 있는 것은,

타인이 우리와 함께-거기에-있다는 사실을 선행적으로 이미 이해하고 있는 것은,

이 모든 사태는, 존재론적으로 살펴보자면,

현존재가 본질적으로 Mitsein, 함께-있음 또는 공동존재로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공동존재이다.’

이는 실존론적-존재론적 의미를 가진 현상학적 진술입니다.

단지 ‘실존적-존재적’ 의미만을 가진 ‘현상적’ 진술과는 차원이 아주 다릅니다.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는 근본적인 명제입니다.

제4장에서 다른 내용은 다 잊어버려도 ‘현존재는 공동 존재이다’, 이거 하나만큼은 반드시 기억해두어야 하지요.


위의 진술은 실존론적-존재론적-현상학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공동존재는 현존재의 한 특성이 아니라 실존론적 규정에 해당합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구조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함께 존재합니다.

다른 사람이 눈앞에 한 명도 없을 때도, 심지어는 지구상에 오직 자기 혼자만 남겨져 있을 때조차도,

그는 함께-있음/공동존재의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이것과 대비되는 ‘혼자 있음’(Alleinsein)은 단지 이 본질적인 ‘함께-있음’의 파생적 양태에,

그것도 결여적인 파생적 양태에 지나지 않지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함께 있기’ 때문에 ‘혼자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함께 있음’은 존재론적 사태이고, ‘혼자 있음’은 그것에 의해 가능케 되는 존재적 사태입니다.

하지만 이런 ‘혼자 있음’은 ‘여러 사람이 전재적으로 있음’에 비해서는 존재론적으로 우월합니다.

여러 사람이 전재적으로 존재하는 경우에도, 현존재는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여러 사람 가운데(unter) 혼자 있음,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에서

여러 사람 또는 군중은 단지 전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닙니다.

그들 또한 인간이기에, 혼자 있는 현존재와 마찬가지로 실존적으로 존재합니다.

즉 그들 또한 함께-거기에-존재하는 것이지요.

다만 그들 서로 간에 무관심과 낯설음의 방식으로 함께-거기에-있다는 점이 혼자 있는 현존재와 다르지만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타인의 부재는 타인의 함께-거기에-있음의 한 (부정적인) 양태입니다.

도구의 현저성, 강요성, 반발성이 도구의 용재성의 (부정적인) 양태들이듯이 말이죠.

이처럼 타인의 부재가 그 존재의 양태가 되는 것은,

오직 현존재가 공동존재라는 본질적 자격으로서 타인의 현존재를 자기 세계 속에서 만나도록 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합니다.

도구의 현저성 등이 그 존재의 양태가 되는 것이,

오직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라는 본질적 자격으로서 용재자를 자기 세계 속에서 만나도록 해주기 때문에 가능하듯이 말이죠.


함께-있음 또는 공동존재는 고유한 현존재를 본질적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으로서 고유한 현존재이다’는 발언이 가능한 것은,

현존재가 언제나 이미 본질적으로 공동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함께 있다.’ → ‘나는 나다.’


또한 타인만 우리 현존재와 ‘함께-거기에-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현존재 자신도 타인과 ‘함께-거기에-있을’ 수 있는 데요.

이 사태가 가능한 것 역시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현존재가 공동존재라는 본질적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죠.




다음 시간에는 교재 121쪽 두 번째 문단부터 이어서 읽겠습니다.


그럼 12월 8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세미나 문의는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 net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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