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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4권(1288b10~1301a15) 발제문

 

박준영(수유너머 104, 철학사세미나팀)

 

1.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학’은 모든 학문 중에서 으뜸이라고 할 수 있다(Pol. 1282b16; NE 1.2). 이러한 인식은 직접적으로 인간이 ‘정치적 동물’(zōion politokon)이라는 근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Pol. 11253a1; 1278b18). 그렇다면 정치학의 대상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 네 가지 대상이 있다고 논한다. 첫째는 이상적 정체의 탐구이고, 둘째는 정체의 구체적 적합성의 탐구이며, 셋째가 국가발생과 소멸론이며 네 번째는 현실적 이념형의 탐구이다(Pol. 1288b21-34). 이러한 대상들을 탐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대상은 바로 ‘폴리스’ 자체다. 그 이유는 폴리스, 즉 국가(정체)에 대한 논의가 매우 분분하고, 그것이 모든 정치가와 입법자의 관심사의 초점인데다가 제도적인 실물이 존재하기 때문이다(Pol. 1274b32-36).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대상들과 ‘폴리스’가 기반하는 인간의 행동들(1)이 가변적이기 때문에 연구도 가변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고 논하는 것으로 보인다(NE 1. 3 참조). 즉 인간행위의 목적인 모든 ‘좋음’은 이런저런 폴리스들에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현실주의와 상대주의가 드러난다. 그는 최선의 정체를 도입한다는 것이 대부분의 국가에서 불가능하며, 그래서 그 국가에 맞고, 가장 쉽게 실현될 만한 정체를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최선의 정체를 탐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Pol. 1288b22 참조). 다시 말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서 네 가지 대상에서 논했다시피, 정체의 이상형과 현실형을 모두 고찰하는 신중한 접근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2. 정치학의 구체적 대상인 ‘폴리스’(국가, 정체)의 가장 보편적인 구성원은 ‘시민’(polites)이다. 즉 국가는 시민들로 구성된 복합체이다(Pol. 1274b39). 폴리스의 구성원으로서의 시민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완전시민’이라고 표현한다. 완전시민이란 민주정이든 과두정이든 간에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시민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여기에 재류외인, 이방인, 어린아이 노인은 제외된다(ibid.).

이 완전시민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공직 참여’다. 민회를 비롯한 모든 국가 직책이 여기에 해당된다. 그러므로 공직에 참여한다는 것은 공익에 기여한다는 의미이고, 이는 곧 시민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중대한 기준이 된다. 이에 따라 공직 참여는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라 할 수 있다(Pol. 1275a22; 1278a34; 1261a39; 1279a25 참조). 공직에 참여함으로써 시민은 특정 안건에 대한 심의원과 결정권, 특히 가장 중요한 명령권을 가질 수 있게 된다(Pol. 1299a26). 하지만 이러한 공직 참여의 양상과 임명 방법은 각각의 정체에서 다르게 나타난다(Pol. 1300a10; 1300a31 참조).

시민들은 이와 같이 어느 때는 공직에 참여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그렇지 않으므로, 지배자이면서 피지배자라는 양면성을 띠게 된다(Pol. 1283b40). 재미있는 것은 시민의 이러한 양면성으로 인해 시민은 정치적 기만술의 주체가 될 때도 있고 그 대상이 될 때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과두정에서 민회에 출석하지 않는 시민(특히 ‘빈민’)들에게는 벌금을 부과하지 않음으로써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술책이 그런 것이다(Pol. 1297a14-35 참조).

 

3.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정의’(dikaiosyne)는 ‘마음가짐’(hexis)이다. 즉 옳은 일을 원하고, 행하게 하는 마음의 ‘습관’인 것이다(NE 5.1 참조). 『정치학』에서 정의도 이 ‘마음가짐’과 연관된다. 즉 정의로운 마음가짐은 ‘평등’을 통한 공익에 마음 쓰는 것이다(Pol. 1283b38). 그렇다면 어떤 ‘평등’인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평등에는 두 가지, 즉 ‘수적 평등’과 ‘가치론적 평등’이 있다. 전자는 ‘양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후자는 ‘비례적으로 동등한 것’을 의미한다(Pol. 1301b29). 이 중 비례적 평등이 ‘절대적 정의’에 해당된다(Pol. 1301b35).(2) 그런데 여기에서도 아리스토텔레스 특유의 현실주의가 적용된다. 다시 말해 절대적 정의가 비례적 평등이라고 해서 수적 평등이 적용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두 평등이 유동적으로 적용될 때 정체가 지속된다(Pol. 1302a2; NE 5.7 참조).

만약 비례적 정의가 훼손되어 동등한 사람들이 그 몫을 못받거나 동등하지 못한 사람들이 동등한 몫을 받게 되면 파쟁이 발생한다(NE 5.3 참조). 이러한 파쟁은 5권에서 말하는 ‘변혁’의 실마리로 작동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절대적 정의의 관점에서 절대적 평등이 그 반대편의 절대적 불평등과 더불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통찰이다. 전자의 경우 민주정의 실패 원인이며 후자는 과두정의 실패원인이다(Pol. 1301a28). 이렇게 본다면, 절대적 정의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주의’에 기반한 관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4. 법이란 ‘욕구에서 해방된 이성’에 따른 중용으로서의 정의라고 할 수 있다(Pol. 1287a32-42 참조). 법철학의 측면에서 다소 애매해 보이는 논의가 있는데, 그것은 법과 정체의 관계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 ‘정체에 법을 맞추어야 한다’고 논한다(Pol. 1282b10; 1289a12). 정체를 기준으로 삼아, 올바른 정체의 법이 정당하며, 왜곡된 정체의 법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정체는 국가의 목표(telos)와 관련된 제도(taxis)이고, 법은 통치의 규칙이기 때문이다(이것은 ‘정치’가 ‘법’에 앞선다고 새길 수 있다). 그런데 다른 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이 최고 권력을 지니지 못한 곳에서는 정체가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한다(Pol. 1292a31). 이것은 일견 모순된 언사처럼 들린다. 하지만 전자의 언급을 ‘입법과정’으로 보고, 후자는 ‘법집행 과정’으로 보면 모순은 풀린다. 다시 말해 입법자도 자신이 정한 제도에 구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법이 모든 것을 해결할 수는 없으므로 공직자들은 개별적인 경우를 해결할 능력이 있어야 하고(ibid.), 법에 포함되지 않는 업무가 반드시 존재하기 마련이므로, 여기서는 정무적 판단이 필요하게 된다(Pol. 1287b19 참조). 이런 것을 보았을 때, 아리스토텔레스 법철학이 ‘실증주의’ 법학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에게는 정치적 정의가 보다 근본적이고, 법적 정의는 정치적 정의에 포괄되기 때문이다(NE 5.7 참조).(3)

 

5. 공동체의 바탕은 ‘우애’(philia)다(Pol. 1295b20). 국가는 하나의 공동체이며, 구성원들에게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훌륭한 삶’(eu zen)을 제공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Pol. 1280a30; 280b27; 1281a2).

이러한 폴리스는 동질적이지만 가변적이다. 왜냐하면 다양한 구성요소가 일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Pol. 1276a38; 1277a5). 특히 폴리스의 계급구성은 매우 복합적이고, 또 복합적이어야 한다(Pol. 1283a20; 1289b27). 그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체의 보편 원칙으로 ‘질과 양의 균형’을 말한다. 다시 말해 한 정체의 질과 양이 균형을 이룰 때 좋은 정체가 지속된다는 것이다(1296b14). 하지만 이러한 균형은 매우 힘겹게 유지되므로 어떤 정체든 근본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지는 못한다(Pol. 1281a28 이하). 그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폴리스가 다양한 계급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폴리스의 계급구성을 때로는 여덟으로(Pol. 1290b38-1291a37), 때로는 셋으로(1295b1) 본다. 이 중 경제적 등급에 따른 세 계급론이 기본적인 형태라고 보이는데, 그것은 ‘부유한 자들, 가난한 자들, 중간계급(hoi mesoi)이다.

세 계급 중 핵심적인 계급은 부자와 가난한 자들이지만(Pol. 1291a40), 균형을 유지하는데 필수적인 계급은 바로 중간계급이다(1295b20). 따라서 중간계급이 많은 정체가 ‘현실적으로’ 최선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1295b34). 즉 중간계급이 균형을 잡고 양대 계급을 잘 혼합한 정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정체는 그 ‘지속성’과 ‘안정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내가 보기에 아리스토텔레스 정치철학의 중추 개념이자 정체의 탁월성을 재는 바로메터는 바로 이 ‘지속성’과 ‘안정성’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이상적으로 최선인 정체는 왕정과 귀족정이라고 할 수 있다(Pol. 1289a29). 하지만 그의 현실주의에 비추어봤을 때, 정체의 이상형은 더 이상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없다. 오히려 현실적으로 그 정체가 계급들, 또는 그 시민들의 덕성과 더불어 어떻게 잘 ‘구성’되느냐에 따라 훌륭한 정체도 되고, 왜곡된 정체도 되고, 최악의 정체도 되는 것이다. 요컨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체는 구성과정에 있는 것이고, 어떤 ‘조건’에 따라 양 극단으로 가기도 하고, 중용을 이루기도 하며, 변혁을 통해 ‘이행’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고정된 형태의 이상형이나 현실형이 아니라, 그것이 모두 포함된 어떤 중간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렇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혼합정체’가 좋은 정체의 준거점처럼 기능하는 것으로 보인다(Pol. 1290a19 참조). 혼합정체로부터 이상적인 방향으로는 왕정과 귀족정이 있고, 현실적인 방향으로 민주정이 있으며, 그 아래 참주정, 과두정, 중우정이 있게 된다(Pol. 1279a26-b10). 이때 민주정도 혼합정체를 준거로 보면 왜곡된 형태지만 ‘가장 견딜만 한 것’이다(Pol. 1289a39). 최악은 참주정이다.

 

6.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체론에서 흥미로운 논의는 ‘대중’에 관한 것이다. 이는 ‘다수 시민’이라고 바꿔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대중들은 더 나은 판단을 내리는 집단이고(Pol. 1282a14), 도덕적으로 우월하지만(1286a31), 모두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 민중은 사실상 들짐승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1281b16).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대중에 대해 다소 불신을 드러낸다. 그 이유는 그가 기본적으로 중간계급에 기반한 혼합정체를 ‘최적화된 정체’로 보기 때문이다.

이런 대중관을 가지고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민주정’을 상당히 미심쩍어했을 것이며, 그것이 시민들의 덕성 함양의 토양이 되기는 하지만, 한 순간 무법의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경계했을 것이다(Pol. 1292a7 참조). 중우정으로 타락할 때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중간계급의 붕괴다(Pol. 1296a16). 이를 그는 ‘법 아닌 빈민의 통치’ 또는 ‘법 없는 빈민의 통치’라고 부른다(Pol. 1292b39).(4)

반대로 민주정에서 시민들의 덕성이 고양되고, 중간계급이 튼튼한 상태에서 법치가 행해지면, 그것은 현실적으로 가장 안정적이고, 지속적인 정체라고 할 수 있다(Pol. 1302a13). 그런데 시민들의 덕성이 고양된다는 것은 그들이 이상적인 귀족에 다가간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는 민주정이 중우정으로 타락할 수도 있지만, 시민 대다수가 고귀한 덕성을 가꿈으로써 일종의 ‘시민의 귀족제’ 또는 절대적 민주주의로 다가갈 수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중 더 나아가 ‘군중’(ochlos)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긍정적 언급들(Pol. 1286a25)과 그의 ‘절대적 정의론’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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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치학과 관련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의 연구가 정치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는 것을 줄곧 강조한다. 특히 ‘시민의 미덕’이라는 주제는 윤리학과 정치학이 만나는 지점이다. (NE. 1.3; 1.4; 1.9; 1.13 참조) 특히 미덕과 연관된 인간의 쾌락과 고통에 대한 언급은 ‘정치학’의 주요 관심사여야 한다고도 말한다(NE 2.3 참조) 대표적으로 다음 구절을 보자. “진정한 정치가는 무엇보다도 미덕을 연구하는 사람이[다.] (...) 우리가 말하는 미덕이란 몸의 미덕이 아니라 혼의 미덕이다. (...) 그렇다면 정치가는 분명 혼에 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한다”[NE 1.13]. 그리고 윤리학과 정치학이 만나는 또 하나 중요한 주제는 ‘훌륭한 시민과 훌륭한 사람은 일치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NE 5.2; Pol. 1276b16-40; Pol. 1277a21; 1278a40 등 참조.

2) 그리고 이 비례적 평등이 또한 ‘중용’이다. “정의는 일종의 중용이다. (...) 정의는 (...) 각자에게 비례적으로 동등한 것을 할당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다”(NE 5.6). 중용이 또한 바로 윤리학과 정치학이 만나는 개념이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중용의 삶이 최선의 삶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좋고 나쁨을 결정하는 판단 기준은 국가에도 정체에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정체는 말하자면 국가의 삶의 방식이기 때문이다”(Pol. 1295a37).

3) 이에 따르면, 정치적 정의는 ‘법적 정의’와 ‘자연적 정의’로 나뉜다.

4) 현대 철학자인 랑시에르라면 이를 ‘호모 사케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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