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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임에서는 장희국 님께서 새로 합류하셨습니다.

(희국 님의 존재 방식에 대하여 아시는 분들은 다 알고 계시죠?)

원래는 <존재와 시간> 제2편이 시작하면 그때부터 세미나에 참여하실 계획이었다고 들었는데,

제가 희국 님을 반강제적으로 공부방으로 데리고 와서 어제부터 정식 세미나 회원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현재 본 세미나와 관련하여 모종의 프로젝트를 은밀하게 계획하고 있는데요,

반갑게도 희국 님은 이 비밀스런 프로젝트에도 선뜻 동참의 뜻을 내비쳐 주셨습니다.

 

말이 나오면 곧바로 실천에 옮기는 것, 아니 먼저 저지르고 그 다음에 (시간 나면) 말하고 생각하는 것!

이것이 <존재와 시간>을 일 년 넘게 공부해온 저희 세미나 팀이 이상적으로 추구하는 삶의 모습이지요.

하이데거 선생님의 말씀처럼, 인생(人生)이란 결국 “기투(企投)”, 요 한 마디로 가볍게 요약되니까요.

 

희국 님, 훌륭하게 기투하셨습니다.

오늘 희국 님의 기투가 훗날 좋은 피투성으로 남게 되기를 바라마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존재와 시간> 217쪽의 세 번째 문단부터 222쪽 첫 번째 문단까지 읽었습니다.

다섯 페이지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분량을 쉬지 않고 달렸지요.

세미나를 처음 시작했을 때보다 실력이 많이 향상되어서, 다섯 페이지도 큰 무리 없이 나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스피드로 계속 달려볼 생각입니다.

 

 

우리는 지금 진리의 전통적 정의에 해당하는 일치adaequatio에 대하여,

그 존재 양식에 대하여 물음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인식론 철학자들이 하듯이 물음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즉 판단을 판단의 실재적 수행과 판단의 이념적 내용의 두 가지 계기로 분리하고 거기로 소급하여

그 존재 양식을 해명하고자 한다면, 이는 우리의 논의를 앞으로 진전시키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두 가지 층으로 분리한 것들을 다시 접합한다고 해도

인식작용의 존재 양식을 제대로 적중시킬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시도는 기껏해야 판단 수행 및 판단 내용의 구분과는 별도로

인식작용의 존재 양식을 그 자체로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고 있을 뿐이지요.

(1) 인식작용 자체의 존재 양식을 해명할 필요성.

 

일치의 존재 양식에 대한 물음에서는, 이와 동시에 또 하나의 분석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즉, 진리의 현상—인식의 성격을 특징짓고 있는—을 우리의 시야 속에 가져와서 분석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2) 진리 현상을 시야에 가져올 필요성.

 

진리 현상은 인식의 성격을 특징짓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과연 어느 때에 인식작용 그 자체 안에서

진리가 현상적으로—‘현상학적으로’가 아닙니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일까요?

우리는 과연 어느 때에 진리 현상을 경험해볼 수 있는 것일까요?

하이데거는 짧은 한 마디로 대답합니다.

“인식작용이 자기 자신을 참된 것으로서 증시(證示)할ausweist 때이다.”

왠지 수수께끼처럼 느껴지는 표현이죠? 어찌 보면 동어반복 같기도 하고요.

이 말만 가지고는 하이데거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이해하기 어려운데요.

그는 다음 문단에서 일상적 경험을 사례로 들어서 그 의미를 상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너무 상세해서 오히려 갈피를 잡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어쨌든,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식작용의 이러한 자기 증시Selbstausweisung가 인식작용에게 그것의 진리(참)를 보증해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일치의 관계는 증시라고 하는 바로 이 현상적 연관 속에서 우리에게 가시화될 필요가 있는 것이고요.

(3) 인식작용의 자기 증시.

 

하이데거가 들고 있는 예를 살펴보기로 하지요.

어떤 사람이 벽에 등을 대고—따라서 이 사람은 현재 벽이 어떻게 생겼고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이 비뚤어졌다”는 발언을 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런데 이 발언이 참된 발언의 자격을 획득하려면,

다시 말해서 이 발언(곧, 인식작용의 외부적 표현)이 자기 자신을 참된 것으로서 증시하려면,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합니다.

즉, 발언하는 사람이 벽의 방향으로 몸을 돌려서 벽에 비스듬히 걸려 있는 그림을

스스로sich 지각한다wahrnimmt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저는 독일어 동사 wahrnimmt를 편의상 ‘지각’으로 옮겼지만,

이 동사는 ‘진리, 참’을 뜻하는 ‘wahr’가 포함된 낱말임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이 단어를 분철하여 문자 그대로 뜻풀이하면,

wahr-nehmen, 즉 ‘참으로-받다’, ‘참된 것으로-취하다’ 정도의 의미가 되겠지요.)

발언자가 그림을 스스로sich 지각하면, 발언은 자기 자신을sich 참된 발언으로서 증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증시 속에서 증시되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 발언은 참되다’고 확증하다Bewährung는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간직하고 있을까요?

(저희가 ‘확증하다’로 옮긴 독일어 낱말 Bewährung에도 ‘진리, 참’을 뜻하는 ‘wahr’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죠.)

 

이런 증시 속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은,

이를테면 “인식” 또는 “인식된 것”과 벽에 걸린 실재하는 사물 사이의 일치와 같은 것일까요?

우리가 “인식된 것”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바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즉 현상적으로 적합하게 해석하는가 하지 못하는가에 따라,

이 질문에 긍정으로 답할 수도 있고 부정으로 답할 수도 있습니다.

 

만일 발언하는 사람이 실재하는 그림을 스스로 직접 지각하지 않고 그것을 단지 머릿속에서 “표상하고만” 있고,

그런 단순한 표상 속에서 ‘그림이 비뚤어졌다’는 판단을 내리고 있다면,

그는 이러한 판단 속에서 과연 무엇을 향하여Worauf 연관을 맺고bezogen 있는 것일까요?

실재적 대상이 부재한 상황에서 그것에 대하여 판단하고 발언하는 사람은

과연 무엇을 향하여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일까요?

가령, 그는 이른바 “표상들”과 관계하고 있는 것일까요?

‘표상들’이 심리적 과정으로서의 표상작용을 말하는 것이라면, 확실히 아닙니다.

또한 ‘표상들’이 ‘표상된 것’을 의미한다면, 즉 ‘표상들’이 벽에 걸려 있는 실재적 대상에 대한 “심상(心想)”을 의미한다면,

이 경우에도 분명히 아닙니다.

표상은 표상작용과 표상내용의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을 뿐인데,

판단하고 발언하는 사람은 판단과 발언 속에서 이런 의미에서의 표상들을 향하여 연관을 맺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실재하는 사물 없이 단순히 표상하기만 하는 발언은,

자신의 가장 고유한 의미로 볼 때, 바로 그 실재하는 사물을 향하여 연관을 맺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발언과 실재적 사물 사이에 임의적으로 어떤 중간의 매개하는 존재자를 삽입하여,

이 중간 존재자를 단순히 표상하기만 하는 발언 속에서 의도되어야/지향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해석하는,

즉 인식의 현상을 ‘인식 주체 → 표상 → 실재하는 대상’의 두 단계로 해석하는,

기존의 모든 인식론적 입장들은, 하이데거에 따르면,

사태—이것에 관하여worüber 발언하는 사람은 발언하고 있는데—의 현상적 실상을 완전히 왜곡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 현존재는 어떤 것에 대하여 발언하면서-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발언은 존재적인 사물 자체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zu 하나의 존재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에 관하여 발언을 하고 있을 때,

우리는 발언 속에서 바로 그 실재적인 존재자 자체에 대하여, 그 존재자 자체를 향하여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점이 지각(참된 것으로-취함)에 의하여 증시되고 있는 것일까요?

발언이 향하고 있는 그 존재적인 사물이 바로 발언 속에서 의도/지향되었던gemeint 존재자 자체이다사실,

그 존재적 사물이 그 존재자 자체와 동일하다는 사실이 증시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점이 이런 증시에 의하여 확증되고 있는 것일까요?

‘발언된 것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zum 발언하는 존재aussagende Sein’가

‘존재자를 [현상학적 의미에서] 제시하는 것’이라는 사실,

다시 말해서 발언의 ‘발언된 것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 발언하는 존재’가

존재자—이것에 대하여(또는 이것을 향하여)zu dem ‘발언하는 존재’가 있습니다—를 발견한다사실

확증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확증을 이야기할 수 있으려면, ‘발견’의 계기가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존재자를 발견할 때, 발언의 진리가 확증됩니다.

 

결국 증시되고 있는 것은, 발언의 발견하면서-있음Entdeckend-sein입니다.

발언은 발견하면서-있습니다.

발언하는 현존재는 발언 속에서 존재자 자체를 발견하면서-있습니다.

그리고 이때 증시가 수행되는 과정 속에서 인식작용은, 발언과 마찬가지로,

오직 존재자 그 자체를 향해서만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이 실재하는 존재자 자체에 즉하여an (인식을 통해 획득하게 되는) 확증이 말하자면 놀이를 펼치고 있는 것이지요.

 

발언과 인식작용의 참된 자기 증시와 참된 확증 속에서,

(발언 속에서 의도되고 지향되는) 존재자 자체는 그것이 자기 자신에 즉하여[즉자적으로] 존재하는 대로wie,

그렇게/그와 똑같이so 자기 자신을 보여주고zeigen sich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

이는 앞에서 수도 없이 언급되었듯이 바로 하이데거적 의미에서의 ‘현상’을 규정하는 개념이지요.)

다시 말해서, 이 존재자는, 그것이 존재자적으로 있으면서 발언 속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와 같이,

즉 발언 속에서 발견되고 있는 바와 같이als wie, 그렇게/그와 똑같이so

(발언 속에서의 그런 제시와 발견과의) 동일성Selbigkeit 속에서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발언과 실재하는 사태 사이의 이런 동일성이, 이런 So-Wie가 근원적 현상으로서의 진리의 조건입니다.

 

그러므로 증시 속에서 증시되어야 할 것은,

표상들 자체 안에서 그것들을 비교하여 그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도,

혹은 실재하는 사물과의 연관 속에서 표상들을 비교하여 그 동일성을 확인하는 것도 아닙니다.

증시되어야 할 것은,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의 일치도,

더욱이 심리적 존재자와 물리적 존재자 사이의 일치도 아닙니다.

또한 “의식의 내용들” 사이의 일치도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증시 속에서 증시되어야 할 것은, 오직 (실재적인) 존재자 자체의 발견되어-있음Entdeckt-sein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피발견성의 방식[어떻게 발견되고 있는가]Wie seiner Entdecktheit으로 있는 존재자뿐입니다.

 

존재자 자체의 이러한 피발견성은 스스로 확증되고 있는데, 오직 다음의 조건 하에서 그러합니다.

즉, 발언된 것—발언의 대상 또는 실재하는 존재자 자체—이 자기 자신을

(그것이 발언 속에서 제시되고 발견되고 있는 바와) 동일한 것으로서 보여주고 있을 때,

피발견성의 자기 확증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확증Bewährung의 개념은 이렇게 정의 가능합니다.

‘존재자가 동일성 속에서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

확증이란 이와 같이 오직 실재하는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발언에서 발견되고 있는 바와) 동일하게 보여주고 있을 때만,

오직 그런 한에서만 수행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확증의 이러한 수행은 또한 오로지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경우에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즉 발언하고 스스로sich 확증하는 인식작용이, 그 존재론적 의미에서 볼 때,

실재하는 존재자 자체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 발견하는 존재entdeckendes Sein zum에 해당한다는 조건이

충족되고 있을 경우에 말이지요.

 

따라서 진리의 확증에는 두 가지 요건이 필수적으로 요구됩니다.

1) 실재하는 존재자가 발언에서 그것이 제시되고 발견되고 있는 바와 똑같이, 그와 동일하게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것.

2) 발언과 인식을 행하는 현존재 자신이,

요건 1)의 방식으로 자기 자신을 보여주는 실재하는 존재자 자체에 대하여(또는 그것을 향하여) 발견하면서-있는 것.

그리고 이 두 가지 요건 중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단연코 두 번째의 ‘발견하면서-있음’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을 그것이 있는 그대로—즉, So-Wie의 방식으로— 발견하고 있는 현존재가 부재하다면,

진리의 현상은 도무지 성립할 수 없을 테니 말이죠.

무엇보다도, 진리의 현상을 ‘발견’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사유하는 한에서,

그 개념은 발견되는 대상보다는 발견을 직접 수행하는 자—곧, 현존재—의 존재를 일차적으로 전제하고 있기에,

두 번째 요건이 첫 번째 요건보다 논리적으로 우선한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제 우리는 ‘발언이 참이다ist wahr’는 명제의 의미를 이렇게 밝혀볼 수 있습니다.

‘발언이 존재자를 그것에 즉하여[즉자적으로] 발견한다.’

‘발언은 존재자를 그 피발견성에 있어서 발언하며(밖으로-말하며), 제시하며, “보도록 해준다sehen lassen(아포판시스).”’

따라서 발언의 참-임, 참되게-있음, 진리-임, 진리로-있음, 진리-존재Wahrsein, 한 마디로 발언의 진리Wahrheit는

발견하면서-있음entdeckend-sein으로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이로써 하이데거는 진리 현상을 현상학적으로 개념 규정한 셈입니다.

따라서 진리를 인식작용과 대상 사이의 일치라는 구조로서,

즉 하나의 존재자(주체)가 다른 존재자(대상)에 동화된다는 의미에서의 일치라는 구조로서 사유하는 것은,

그 현상에 대한 완전한 오해에 불과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진리-임, 진리-존재를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 규정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리-존재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오직 세계-내-존재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의 진리-존재는 바로 ‘발언의’ 진리-존재이고,

발언의 진리-존재는 그 발언을 수행하고 있는 자, 곧 세계-내-존재를 전제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세계-내-존재라는 현상—우리는 앞에서 이 현상을 현존재의 근본 구성틀로서 인식한 바 있지요—이

바로 진리의 근원적 현상의 기초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b)절에서 하이데거는 이 근원적 현상으로서의 진리에 대하여 더욱 철저하게 추적하고 있습니다.

 

 

b) 진리의 근원적 현상과 전통적 진리 개념의 파생적 성격

 

하이데거에게서 ‘진리-존재’, 간단히 말해 진리는 ‘발견하면서-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념 규정은 진리에 대한 너무도 자의적인 규정이 아닐까요?

세상의 철학자들 가운데 하이데거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진리를 이렇게 생각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으니까 말이죠.

물론 진리 개념을 이런 식으로 규정함으로써,

우리는 전통적인 일치의 이념을 진리 개념에서 제거하는 데는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겨우 이 정도의 성공을 이득으로 취하는 대신,

“훌륭한” 옛 전통을 모조리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는 것을 그 대가로 치러야 한다면,

이는 너무도 큰 철학적 손실이 아닐까요?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는 손실이 결코 아닙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리 규정이 얼핏 보기에는 자의적인 것처럼 보여도,

그 정의는 실제로는 어떤 필연적인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훌륭한 옛 전통’보다도 더 오래된, ‘가장 오래된’ 고대 그리스 철학의 전통이 근원적으로 직감하였으며

또한 전-현상학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에 대한 어떤 필연적인 해석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지요.

하이데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단편들을 그 증거로 들고 있습니다.

 

고대 철학자들은 ‘로고스’를 ‘아포판시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로고스의 진리-존재를

‘아포파이네스타이’의 방식으로 있는 ‘알레테우에인’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런 방식으로 있는 ‘알레테우에인’이란, 현대어로 풀이해보면,

“존재자를 —은폐성으로부터 끄집어내어— 그것의 비은폐성(피발견성)에서 보도록 해주는 것sehen lassen”을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앞에서 인용하였던 <형이상학>의 구절들에 이어지는 부분에서

이러한 ‘알레테이아’를 ‘프라그마’, ‘파이노메논’과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알레테이아’는 “사태 자체”, ‘자기를 보여주는 것(현상)’,

자신의 피발견성의 방식에서의 존재자’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헤라클레이토스는 아시다시피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고대에 활동했던 인물입니다.

그런 헤라클레이토스는 명시적으로 진리 현상을 피발견성 내지 비은폐성의 의미에서 사유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철학 단편들을 찾아보면 잘 알 수 있지요.

그런데 가장 오래된 헤라클레이토스부터 그리스 철학을 집대성한 후대의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진리 현상을 피발견성 내지 비은폐성의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오늘날 전해지는 철학 단편들에서, 헤라클레이토스는 로고스와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을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대립시키고 있습니다.

거기 맥락에서 로고스는 ‘존재자가 스스로 행동하는/관계하는sich verhält 방식’을 뜻합니다.

로고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자신들이 행한 것이 은폐성Verborgenheit 속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말하고 행동한 것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죠.

그들은 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말하고 행동한 것이 다시 은폐성 속으로 가라앉아버립니다.

로고스에 대한 몰이해 = 망각 내지 은폐성.

로고스에 대한 이해 = 비은폐성.

따라서 우리는 ‘로고스에는 비은폐성, 알레테이아가 본질적으로 속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토록 중요한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알레테이아’라는 표현이

서양의 철학 전통에서는 다만 “veritats, Wahrheit, truth, vérité”로만 번역되었으며,

또한 이런 피상적인 번역에 의거하여 진리 개념이 ‘일치’로서 규정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런 번역과 개념 규정이 서양 철학을 지배하였기 때문에,

우리 현대인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철학 이전의 생활세계적인 이해를 가지고서

‘알레테이아’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자명하게” 그들 사유의 밑바탕에 놓고 있었던

바로 그 근원적 사태 실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던 것이죠.

 

물론 우리는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낱말과 용어를 전거로 끌어들일 때,

밑도 끝도 없이 허무맹랑한 어떤 단어 신비주의와 같은 것에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필요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이데거는 가장 기본적인 낱말들이 존재한다고,

또한 이 낱말들이 어떤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낱말들이 정말로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요?

단어가 힘을 갖는다는 것이 사실일까요?

말은 그냥 말일 뿐이지, 기본적인 말이 따로 있고 기본적이지 않은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본래적인 말이 따로 있고 비본래적인 말이 따로 있는 것일까요?

고대 그리스어와 독일어를 존재의 언어로 사유하는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이런 이분법이 본질적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이 이분법에 속하는 한,

그리고 근원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을 둘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속하는 한,

이는 또 다른 의미에서 문제 많은 전통 형이상학의 반복 내지 재현에 해당한다는 비난을 피하기란 어려워 보입니다.

실제로 낱말의 근원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철학자가 바로 자크 데리다이지요.)

따라서 진정한 철학자라면, 이런 기본적인 낱말들과 그것이 가진 힘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 낱말들 속에서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밖으로-말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 낱말들을 통해서 현존재의 존재론적 진리를 추적해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결국 철학이 해야 할 임무란, “로고스”, “파이노메논”, “알레테이아”와 같은

(철학적 심오함을 담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낱말들이 우리들의 일반적 상식에 의해 몰이해되고 평준화되고,

그리하여 나중에는 사이비 철학 문제의 원천으로 기능하게 되는 불상사를 방지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존재와 시간> 제7절에 있는 ‘로고스’ 개념의 의미를 다루고 있는 B절에서,

하이데거는 상당히 독단적인 방식으로 ‘로고스’와 ‘알레테이아’를 해석한 바 있었지요.

그러나 이제 여기 제44절에 와서 그런 독단적 해석들은 현상적인 증명을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본 절에서 제시된 대로 진리를 “정의하는” 것은 전통을,

진리를 지성과 사물의 일치로 규정해온 그 전통을 마구 흔들어 털어버리는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그런 정의는 그 전통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전유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진리의 근원적 현상에 토대를 두고 있는 이론이 결국에는 일치의 이념에 이르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그런 이념에 이르지 않을 수 없는 그 방식을 증명하는 데에 우리가 성공하면 할수록,

진리의 새로운 정의는 그만큼 더욱 더 전통의 전유라는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와 같이 진리를 피발견성 및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 “정의하는” 것은

단순히 낱말의 의미를 해명하는 작업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런 정의는 현존재의 태도들/행동들—일상생활에서 보통 “참되다” “진실되다”고 일컬어지곤 하는—을

존재론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통해 저절로 생겨나는 것입니다.

 

발견하면서-있음으로서 규정되는 진리-존재는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해당합니다.

현존재는 ~~하게-있습니다. 즉 현존재는 참되게-있습니다, 그는 발견하면서-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이러한 발견함 자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존재한다면,

그 가능 조건은 용어의 훨씬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참되다”고 언명되어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발견함 자체를 가능케 해주는 실존론적-존재론적 ‘기초들’이야말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을 비로소 보여주고 있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발견하면서-있음이 현존재의 존재 방식인 한에서,

발견함 자체는 세계-내-존재의 존재 방식에 해당합니다.

현존재는 존재자를 그 용재성의 측면에서 배시적으로 배려하기도 하고

또는 존재자를 그 전재성의 측면에서 가만히 앉아서 관조하는 형식으로 배려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배려함 속에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발견합니다.’

이런 발견함 속에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는 ‘발견된’ 존재자가 됩니다.

그리고 이 발견된 존재자는 이차적 의미에서 “참되다”고 말할 수 있지요.

일차적 의미에서 참된 것은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아니라 ‘발견하면서-있는’ 현존재 자신입니다.

a)절의 논의에서 잠시 지적한 바와 같이,

발견이라는 낱말은 일차적으로는 발견되고 있는 대상보다는 발견을 수행하고 있는 주체를 전제하고 있으니까요.

따라서 이차적 의미에서 진리는 ‘발견하면서-있음(발견작용Entdeckung)’이 아니라,

‘발견되면서-있음entdeckt-sein(피발견성Entdecktheit)’으로서 규정됩니다.

그 일차적 의미는 말할 것도 없이 ‘발견하면서-있음’이고요.

 

<존재와 시간> 제15절~제18절에서 우리는 세계의 세계성과 세계 내부적 존재자에 대하여

존재론적으로 분석한 바 있습니다.

이 분석을 통하여,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은 세계의 개시성 안에 근거한다’는 점이 밝혀졌지요.

(우리는 선행적으로 전체로서의 방을 배시하고 있어야만,

그 안에 있는 개개의 가구와 집기들을 바로 그 가구와 집기들로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시성은 현존재의 근본 양식에 해당하며,

현존재는 이 양식에 따라 자신의 거기Da로 존재합니다.

현존재는 ‘현-존재하는’ 존재자, 곧 ‘거기로서-존재하는’ 존재자, 곧 ‘거기에-있는’ 존재자,

곧 ‘개시되어-있는’ 존재자, 곧 ‘개시하고-있는’ 존재자를 말하지요.

바로 개시성이야말로 현존재를 현존재Dasein로서 만들어주고 있는 근본 규정성입니다.

하이데거에게서 개시성Erschlossenheit와 현존재Dasein의 거기Da는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갖는 개념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시성은 심정성, 이해, 말에 의하여 구성되고 있고,

따라서 (심정성에 상응하는) 세계, (이해에 상응하는) 내-존재, (말에 상응하는) 자기에 동근원적으로 관계하고 있습니다.

개시성의 개념에 이러한 동근원적 전체성이 포함되어 있다면,

염려의 구조는 자기 안에 현존재의 개시성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염려의 구조는 개시성과 똑같이 하나의 전체적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구조 속에는

‘(1)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몰입하여) 있으면서 — (2) 이미 세계 안에 있고— (3) 자기를 앞질러 있음’이라는

세 가지 구조 계기들이 하나의 전체적, 통일적 현상으로서 융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염려의 구조와 더불어, 그리고 그 구조를 통하여

도대체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피발견성이 가능한 것입니다.

현존재가 염려하지 않는다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리의 가장 근원적인 현상에 현상학적으로 도달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현존재의 개시성으로부터, 즉 염려의 구조가 내포하고 있는 이 개시성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 됩니다.

거칠게 말하자면, 개시성과 염려야말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이다, 고 할 수 있지요.

예전에 읽어본 <존재와 시간> 제5장—A절은 ‘거기Da의 실존론적 구성’을 다루었고,

B절은 ‘거기Da의 일상적 존재’를 다루었지요—에서 말하고자 했던 바도

사실은 이러한 진리의 가장 근원적 현상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를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거기에-있다. 즉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자신의 개시성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개시하는 존재자로서 그는 세계 내부적 존재자를 개시하고 발견한다.

이처럼 현존재가 개시성으로 존재하는 한에서, 그리고 그런 자격으로서 개시하고 발견하는 한에서, 그는 본질적으로 “참되게” 있다.

오직 그런 한에서, 현존재는 진리로서-존재한다.’

현존재의 진리-존재를 가능케 해주는 가장 근원적인 조건은 현존재의 개시성입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현존재의 본래적 개시성입니다.)

 

현존재는 참되게-있다, 현존재는 진리로서-존재한다. 즉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

우리는 이 발언을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 발언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 발언은 현존재가 존재적 차원에서 언제나 “모든 진리 속으로” 입장한다거나

또는 존재적 차원에서 이따금씩 입장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명제는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에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eigensten 존재에 대한 개시성이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잠깐, 이하의 논의를 위하여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 즉 현존재의 ‘본래적eigentliche’ 존재와

그의 진리-내-존재ist in der Wahrheit가 상호 연관 속에서 논의되고 있다는 점을 일단 지적해두고 싶네요.)

 

하이데거는 지금까지의 논의로써 획득한 사유의 성과를 토대로 하여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는 명제의 온전한 실존론적 의미를

다음의 네 가지 규정들을 통하여 다시 제시하고자 합니다.

 

1.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는 본질적으로 개시성 일반이 속해 있다.”

그냥 개시성이라고 하지 않고 개시성 ‘일반’이라고 적었습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개시성은 세계, 내-존재, 자기에 동근원적으로 관계하는 전체적 현상을 뜻하기 때문이지요.

즉, 개시성은 현존재의 존재 구조의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개시성이 포괄하고 있는 이러한 구조는 염려 현상을 통해서 명료하게 밝혀지지요.

그런데 염려에는 단지 세계-내-존재만이 아니라 또한 ‘세계 내부적 존재자 곁에 (몰입하여) 있음’도 속해 있습니다.

따라서 현존재가 존재하고 또한 개시하고-개시되어 존재한다면,

세계 내부적 존재자 역시 이와 동근원적으로 현존재에 의하여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현존재의 개시성과 존재자의 피발견성은 언제나 이미 동행하고 있습니다.

 

2.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는 피투성이 속해 있고, 이것은 그의 개시성의 구성요소이기도 하다.”

피투성의 존재론적 의미는,

‘현존재는 그때마다 이미 나의 것meines으로서 존재하며(이것이 현존재의 ‘각자성’이지요),

이 각자성은 이미 정해진 세계 안에, 그리고 이미 정해진 세계 내부적 존재자들의 이미 정해진 범위 속에 존재한다.’

이를 간략히 표현하면, ‘개시성은 본질적으로 현사실적이다.’

피투성은 동사 werfen의 과거 분사 형에서 나온 표현이고 독일어 원어로는 Geworfenheit입니다.

이 과거 분사 형에서 암시되듯이,

피투성은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사실, 그래서 변할 수 없는 기정(旣定)의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이데거가 여기서 ‘이미 정해진bestimmten’이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는 것은

피투성의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두고 있기 때문이죠.

 

3.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는 기투가 속해 있다.”

앞에서 우리는 기투의 개념을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을 향하여 자신의 존재를 던지는 것’으로 규정하였지요.

이를 더 간단히 표현하면, ‘자신의 존재 가능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zu 개시하는 존재’가 될 것입니다.

앞의 a)절에서 우리는 발언과 인식작용을

‘실재하는 존재자 자체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zu 발견하는 존재’로서 규정하였지요.

이 두 규정을 비교해보면,

기투와 발언이 ‘어떤 것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zu ~하는 존재Sein’이라는 동일한 형식적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하는 존재’에서 기투는 ‘개시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발언은 ‘발견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있기에,

기투와 발언은 내용적 연관성도 갖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 발언의 현상은 해석에서 생겨난 것이고, 해석은 이해에서 생겨난 것이며,

이해는 가능성의 기투로서 규정되고 있으니까,

기투와 발언이 형식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밀접한 연관성을 갖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겠지요.

 

현존재는 이해하는 존재자로서 자기 자신을 “세계”와 타인—즉, (세상)사람들—에 의거하여 이해할 수도 있고,

아니면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에 의거하여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두 가능성들 중에서 후자—즉,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에 의거한 이해 가능성—이 의미하는 바는,

‘현존재는 자기 자신을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 속에서 그리고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개시한다.’

이해 현상을 주제적으로 다루었던 제31절과 제32절을 제대로 이해하였다면,

결코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오히려 저는 형식적 관점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sich ihm selbst”라는 표현에 주목하고 싶네요.

현존재가 자기 자신sich을 개시하고 있는 상대방은 바로 자기 자신ihm selbst입니다.

그는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으로서의 자기 자신을 다름 아닌 그 자신에게 개시하고 있습니다.

즉, 현존재의 경우에는 개시하는 주체도 개시되는 대상도 하나의 동일한 존재자에 해당한다는 얘기입니다.

개시하는 것도 똑같이 현존재요, 개시되는 것도 똑같이 현존재라는 말이지요.

그런 의미에서 현존재는 ‘동시에 개시하고-개시되고 있는’ 자로서,

즉 ‘동시에 발견하고-발견되어 있는’ 자로서 규정 가능한 유일한 존재자입니다.

현존재가 아닌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경우에는 오직 현존재에 의하여 개시되거나 발견될 수 있을 뿐인데 말이지요.

그런 존재자는 개시작용과 발견작용의 능동성 내지 적극성을 누릴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존재는 이른바 자기 개시가 가능한 유일한 존재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현존재의 이 같은 ‘자기 개시’ 덕분에 a)절에서 언급한 바 있는,

발언과 인식 작용에서의 ‘자기 증시’와 ‘자기 확증’의 현상이 비로소 존재론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진리 현상의 일차적이고 근원적인 의미를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발견되면서-있음(피발견성)’에서 찾지 않고,

오히려 현존재의 ‘발견하면서-있음(발견작용)’에서 찾고 있는 사정의 일부도 여기에 있습니다.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가장 고유한eigensten 존재 가능 속에서,

또한 그러한 존재 가능으로서 자기 자신에게 개시하고 있는 한에서,

우리는 이러한 개시성을 본래적인eigentliche 개시성으로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런 본래적 개시성이 본래성의 양상 속에 있는 ‘가장 근원적인’ 진리의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냥 근원적인 진리 현상이 그냥 개시성과 연관되고 있다면,

‘가장’ 근원적인 진리 현상은 ‘본래적’ 개시성과 연관되고 있는 것이지요.

하이데거는 여기서, 가장 근원적이며 따라서 가장 본래적인 개시성을 이른바 실존의 진리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실존Existenz”이라는 낱말이 ‘가장 실존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이 진리는 바로 ‘실존’의 진리이기 때문에, 곧 현존재의 존재 방식과 연관된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진리의 실존론적-존재론적 규정성을 획득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필히 현존재의 본래성을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이 분석은 <존재와 시간> 제60절에서 ‘결단성’의 주제를 다룰 때 행해진다고 합니다.

 

4. “현존재의 존재 구성틀에는 빠져있음이 속해 있다.”

아시다시피, 현존재는 일상적으로는 우선 대개 자신의 “세계”에 빠져 있습니다.

그 속에서 본래의 자기 자신을 상실하고 있지요.

존재 가능성들을 향하여 기투함으로서 정의되는 이해도,

빠져있음의 지배 하에서는, 그런 세계로 자리를 옮기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존재가 (세상)사람들에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은

단지 그들의 공적인 해석되어-있음(상식)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뜻할 뿐이지요.

이렇게 현존재가 세계에 빠져있고 (세상)사람들의 상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다시 말해서 우리의 평균적/일상적 생활 속에서는,

발견된 것과 개시된 것은 모조리 빈 말, 호기심, 애매함에 의한 위장성과 은폐성의 양상으로 존재합니다.

존재자에 대한(또는 그것을 향한) (개시하는-발견하는) 존재가

이 경우에는 완전히 기반을 상실하고 뿌리가 뽑혀져 있습니다.

존재자가 발견되기는 하되 본래적으로 발견되지 않고 위장의 양상 속에서 발견되고 있을 뿐이고,

개시되기는 하되 본래적으로 개시되지 않고 은폐의 양상 속에서 개시되고 있을 뿐이지요.

존재자가 자기 자신을 보여주기는 하되, 다만 가상(거짓)의 양상 속에서 보여줄 뿐입니다.

 

따라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와 (세상)사람들에 빠져있기 때문에,

그 존재 구성틀에서 보면, “비진리” 안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사용되는 ‘비진리’라는 명칭은,

<존재와 시간>의 제38절에서 살펴본 바 있는 ‘빠져있음’이라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존재론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비진리’는 존재론적 개념으로서 존재적 차원에서의 어떠한 부정적인 가치평가도 함의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일상적 생활 방식을 비판하고 비난하기 위하여 그런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비진리’라는 명칭은, 현존재의 현사실성에는 폐쇄성Verschlossenheit과 은폐성Verdectheit가

본질적으로 속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지요.

그러므로 “현존재는 진리 안에 있다”는 명제의 의미를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온전하게 밝혀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현존재는 비진리 안에 있다”는 명제의 의미 또한 동근원적으로 함께 밝혀내야만 합니다.

앞의 명제의 존재론적 의미와 뒤의 명제의 존재론적 의미는 언제나 이미 동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여기서 한 가지 사항을 더 지적하면서 문단을 끝맺고 있는데요.

‘오직 현존재가 개시되어 있는 한에서만, 그는 또한 폐쇄되어 있을 수 있다.

오직 현존재의 개시성과 더불어 그때마다 이미 세계 내부적 존재자가 발견되어 있는 한에서만,

그런 존재자는 은폐(은닉)되거나 위장될 수 있다.’

현존재의 비진리-존재란, 그의 존재 방식을 비난하는 존재적 개념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실상을 규정하는 존재론적 개념입니다.

또한 비진리는 존재론적 위상을 가지기에 진리와 동근원적 자격을 가집니다.

우리는 현존재의 진리-존재를 이야기하면서 그의 비진리-존재를 빠뜨릴 수 없습니다.

진리-존재를 말할 때마다 언제나 비진리-존재도 반드시 함께 말해야만 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진리-존재와 비진리-존재 사이에 어떤 우선성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현존재의 폐쇄성은 그의 개시성만큼이나 본질적이지만,

그럼에도 오직 개시성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세계 내부적 존재자의 은폐성과 위장성은 그것의 피발견성만큼이나 본질적이지만,

그럼에도 오직 피발견성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비진리-존재 또한 오직 진리-존재에 근거해서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진리는 비진리에 우선한다고, 그러므로 본래성 역시 비본래성에 우선한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우리는 과연 본래성이 비본래성에 우선하는 것인지,

반대로 어째서 비본래성이 본래성에 우선하면 안 되는 것인지

—니체는 <선악을 넘어>의 서문에서 이렇게 역전된 방식의 사고 실험을 잠깐 보여주고 있지요—,

이런 우위성을 사고한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 많은 전통 형이상학의 반복 내지 재현에 속하는 것이 아닌지,

물음을 던져볼 수 있습니다.

자크 데리다가 이런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요.)

 

 

 

다음 시간에는 <존재와 시간> 222쪽 두 번째 문단부터 읽습니다.

b)절은 무난하게 다 읽을 것 같고, 가능하면 c)절의 앞부분까지 나갈 수 있을 듯 싶네요.

얼마 안 되는 c)절까지 읽으면 드디어 <존재와 시간> 절반을 정복하는 셈입니다.^^

 

그럼 2013년 7월 20일 토요일 저녁 6시에 뵙겠습니다.

 

세미나 문의는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 net 로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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