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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두 번째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두 번만 더 세미나 하면 올해의 공부도 마치게 되는 군요.

10개월 남짓한 시간동안 어려운 독일어 철학책을 부여잡고 120쪽 정도 함께 읽었던 건데,

지난 시간을 돌이켜보니 나름 뿌듯하기도 합니다.

올해 잘 마무리 하고 내년에도 다시 열심히 달려야겠지요.

<존재와 시간> 완독의 날을 위해서!!


이번 시간에는 교재 121쪽 둘째 문단부터 125쪽 첫째 문단까지 읽었습니다.

‘세계’ 부분이 지나고 ‘(세상)사람들’ 부분이 오면 내용이 좀 쉬워지나 싶었는데,

막상 또 책을 읽어보면 저~언~혀 그렇지 않네요. ㅠㅠ

군대에서 행군 훈련할 때도 50분을 걸으면 10분 휴식 시간을 주는데,

하이데거 선생님은 저희한테 쉬는 시간을 조금도 허락하지 않고

무조건 달리고 달리고 달려라, 라고 채찍질만 하고 계십니다. ㅠㅠ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의 자격으로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즉, 용재적 도구)에 대해 ‘배려’의 방식으로 관계합니다.

이와 비슷하게,

현존재는 ‘공동존재’의 자격으로서 세계 내부적 존재자(즉, 타인이라는 현존재)에 대해 ‘심려’의 방식으로 관계합니다.


심려’, 독일어 원어로는 ‘Fürsorge’.

오랜 만에 또 다시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였습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어요.^^

(이 개념을 이기상 교수는 “심려”라고, 소광희 교수는 “고려”라고 옮겼는데요.

저희는 이기상 교수의 번역을 따르고자 합니다.)


배려Besorgen든 심려Fürsorge든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염려’Sorge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어휘를 잠시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이,

염려는 현존재 ‘일반’을 그 존재에 있어서 규정짓고 있는 전체적이고 포괄적인 본질이지요.

Sorge → Besorgen, Fürsorge


배려와 마찬가지로, 심려 또한 현존재의 성격을 말해주는 실존범주입니다.

사람들에게 식량과 옷을 제공하고, 아픈 이를 돌보고, 공공복지시설을 짓는 것은 모두 심려입니다.

다른 사람과 협력하면서, 반목하면서, 무시하면서 서로 함께 있는 것도,

그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거나, 그들과 서로 아무 상관도 하지 않고 지내는 것도 모두 심려의 방식들입니다.

물론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우선 대개는 후자의 두 가지 방식(스쳐 지나감, 아무 상관 안함)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 함께 존재하고’(Miteinandersein) 있지만요.


그러나 서로 함께 있음의 무관심한 부정적 양태를 오해하여,

이 경우에 타인은 순수한 전재적 대상들로 존재한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군중 속의 고독’에서 군중이 전재적으로 존재하지 않듯이,

여기서 우리가 무관심하게 대하는 다른 사람들도 전재자로서 아니라 실존하는 현존재로서 존재하지요.


하이데거는 심려의 두 가지 극단적 경우를 보여줍니다.


1. 우리가 타인이 (배려)해야 할 일을 전부 대신 (배려)해주는 경우.

어떤 사람이 자동차 타이어에 펑크가 나서 오도 가도 못한 처지에 있을 때,

우리는 그를 위하여 자동차를 점검하고 새로운 타이어로 교체해줄 수 있습니다.

아내가 김장을 하다가 재료가 모자라서 당황스러워 할 때,

남편은 그녀를 위하여 얼른 동네 슈퍼에 달려가서 부족한 재료를 사올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심려란 타인에게서 그의 근심거리(일상적 의미의 “Sorge”)를 빼앗는 것,

자진하여 타인의 자리에 들어앉아서 그가 (배려)해야 할 일을 대신 (배려)해주는 것,

한 마디로, 타인을 위하여 ‘안으로 뛰어드는 것’(einspringen)을 말합니다.

타인은 그저 우리가 일을 다 끝마친 상태에서 나중에 숟가락만 가볍게 얹으면 되지요.

이러한 심려에서는, 타인은 우리에게 의존적으로 되고 심지어는 우리에게 지배되는 자가 됩니다.

자립심을 길러주는 대신에 그가 해야 할 일을 전부 대신해줌으로써 사실상 그를 우리의 노예로 만들어버린 셈이죠.


2. 타인의 존재 가능성을 위하여 그가 보고 배울 모범적 인격이 되어주는 경우.

우리는 아주 멋지고 위대한 사람을 만나면 그를 닮고 싶어 합니다.

가슴 속 영웅으로서 그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하죠.

하이데거의 강의를 들었던 수많은 학생들에게 하이데거는 그런 지적 영웅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을까요?

이와 같이 심려란, 앞의 경우와는 대조적으로,

타인의 실존적 존재 가능성을 위하여 타인의 ‘앞으로 뛰어드는 것’(vorausspringen)을 말합니다.

누군가에게 인격적 모범이 되어준다는 것은, 곧 그보다 앞서서—시간적으로든, 공간적으로든, 비유적으로든—,

그가 보고 배울만한 훌륭한 행위를 그에게 보여준다는 것을 뜻하지요.

이러한 심려에서는, 우리는 타인에게서 근심거리(“Sorge”)를 빼앗기는커녕,

오히려 정반대로 그에게 본래의 근심거리, 곧 본래적인 염려(인용부호 없는 진정한 Sorge)를 비로소 되돌려주는 것입니다.

하이데거가 보기에, ‘염려’는 ‘본래성’, 그리고 ‘자유’와 연관된 개념입니다.

“나는 장래에 꼭 저 훌륭한 사람처럼 되어야지!”라는 실존적 결심은

이미 염려를 자기 스스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증거입니다.

이로써 타인은 다름 아닌 그 자신의 염려 안에서(in) 스스로에게 투명하게 되고,

또한 그 자신의 염려에 대하여(für) 자유로운 존재자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이어서, 하이데거는 심려와 관계있는 ‘서로 함께 있음’의 두 가지 극단적 경우도 보여줍니다.


1. 사람들이 공동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데, 직업적 이유로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경우.

이들은 근무하는 장소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간에 거리감을 느끼고 아무 소통 없이 지내면서, 심지어는 서로 불신하면서 같은 일을 수행합니다.


2. 사람들이 공동의 일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들 스스로 자진해서 협동 단결하여 그 일에 매진하는 경우.

앞의 경우와는 반대로, 여기서 사람들은 본래적으로 결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결속하여 중대한 의미를 지닌 일을 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그들의 자유 안에서 그들 자신을 위하여” 개현되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하이데거는 나치즘에 참여한 지식인으로 악명이 높지요.

‘서로 함께 있음’의 두 번째 경우를 조금 변형하면, 이는 나치가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는 거리가 됩니다.)


배려에는 배시/둘러봄(Umsicht)이 속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심려에는 그것에 특유한 어떤 이 속해 있습니다. “Rücksicht, Nachsicht.”

이기상 교수는 “고려”와 “관용”으로, 소광희 교수는 “돌보아줌”과 “보살핌”으로,

영역본은 “considerateness”와 “forbearance”로 각각 옮기고 있네요.

배시/둘러봄이 <존재와 시간>에서 아주 많이 나왔던 중요한 개념인데 반해,

Rücksicht와 Nachsicht는 본 저서에서 개념적으로 거의 활용되지 않습니다.

저는 왠지 ‘배려 : 배시/둘러봄 = 심려 : X’의 구색을 맞추려고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듭니다.


세계는 용재자를 그것의 용재성 안에서 자유롭게-내줍니다(개현합니다).

세계는 현존재, 곧 타인을 그의 함께-거기에-있음 안에서 자유롭게-내줍니다(개현합니다).

세계는 단지 도구만 개현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동시에 타인도 함께 개현합니다.

일단 세계의 이중적 개현을 염두에 두시고 이야기를 더 풀어보겠습니다.


우리는 <존재와 시간> 제18절에서 세계의 세계성을 ‘유의미성의 지시 전체’로 해석한 바 있죠.

우리가 용재자를 그 사용사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우리가 세계성을, 곧 유의미성을 선행적으로 이해하면서 그것에 친숙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의미성은 또한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존재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에 해당하는 그런 고유한 존재와 연관되어 있죠.

현존재의 가장 고유한 존재는 사용사태에서 최종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용사태는 ‘무엇을 가지고 어디에(mit etwas bei etwas)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수단-목적의 연쇄는 무한정 계속되지 않고 어떤 항에서 종결됩니다.

그 종결 지점이 사용 사태의 최종적 ‘어디에’(bei etwas), 최종 목적이고,

이 궁극적 목적이 바로 ‘현존재의 존재’이지요.


다시 정리해보겠습니다.

1. 유의미성은 현존재의 고유한 존재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현존재는 궁극 목적에 해당하는 자신의 존재를 위하여, 유의미한 사용사태적 행위를 합니다.

2. 현존재의 존재—즉, 그의 존재에서 그에게 문제가 되는 바로 그런 존재—에는 타인과의 공동존재가 속해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전제로부터 다음의 사실이 도출됩니다.

3. 공동존재로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타인을 위하여 존재한다.


세 번째 명제는,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존론적 본질 발언’입니다.

현존재가 단지 세계-내-존재이기만 하다면, 그는 오직 자신만을 위하여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현존재는 또한 공동존재이기도 하기에, 그는 동시에 타인을 위해서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우리에게는 오직 우리 자신만 우리 삶의 궁극 목적이 될 수는 없으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도 우리의 삶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공동존재의 의미는 ‘타인을 위하여’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공동존재로서 타인을 우리와 같은 현존재로서 이미 개시하고 있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렇게 공동존재에 의하여 선행적으로 구성되는 타인의 개시성이

유의미성을, 즉 세계의 세계성을 함께 구성하고 있다고 합니다.

물론, 세계-내-존재에 의하여 선행적으로 구성되는 용재자의 개시성이

그 세계의 세계성을 함께 구성하고 있는 다른 것이고요.


“(…) 세계의 세계성은 환경세계적 용재자를 만나도록 해준다.

그런데 (…) 용재자와 더불어, 또한 타인의 함께-거기에-있음을 같이 만나도록 해주는

방식으로 그 용재자를 만나도록 해준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오직 용재적 도구만 순수하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도구를 사용하고 배려하는 순간, 그 사용과 배려는 이미 타인의 존재를 함의하고 있으니까요.

유의미성, 세계의 세계성의 문제를 사유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용재자뿐만 아니라 반드시 타인이라는 현존재도 함께 사유해야 합니다.


현존재는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 이해에는 언제나 세계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존재는 공동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존재 이해에는 언제나 타인에 대한 이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물론 이런 이해는 ‘근원적인 실존론적 존재양식’입니다.

결코 인식, 지식과 같은 존재적 차원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자기를 안다는 것Sichkennen도, 존재론적으로 보자면,

이러한 ‘근원적인, 타인을 이해하는 공동존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현존재는 언제나 타인과 더불어 환경세계 안에서 도구를 발견하고 사용하는 덕분에,

타인과 함께 하는 공동생활 덕분에, 자기에 대한 인식도 가질 수 있는 것이죠.

나면서부터 혼자만 지내온 사람은 자기 인식은 물론이요, 자기의식조차 지닐 수 없을 겁니다.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나는 나이다’라는 강한 자의식은 타인의 존재를 전제하고 있습니다.


1) 서로 함께 있음 → 타인에 대한 존재 관계 (O)

2) 타인에 대한 존재 관계 → 서로 함께 있음 (X)

하이데거에 의하면, 현상적으로 우선적인 ‘타인을 이해하면서 서로 함께 있음’이

타인에 대한 존재를 근원적으로 가능케 해주고 구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반대로, 즉 2번의 방식으로 사고하지요.


사람이 사람과 맺는 관계가 사람이 물건과 맺는 관계와 다르다는 점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1)‘타인과 함께, 타인에 대해 있음’에는 (2)‘현존재 대 현존재의 존재 관계’가 놓여 있습니다.

사람들은 (1)에서 (2)가 나오는 게 아니라, 거꾸로 (2)에서 (1)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현존재가 타인과 관계할 수 있는 것은, 현존재가 타인과 함께 존재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존재 관계가 현존재의 본질에 이미 구성적으로 장착되어 있고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부터(von ihm selbst) 존재 이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이죠.

<‘타인’에 대한 ‘존재 관계’>가 포인트는 ‘타인’이 아니라 ‘존재 관계’에 있기 때문에,

그것은 어느덧 ‘자기’에 대한 존재 관계로 바뀌고 맙니다.

다시 말해서, 타인과의 관계를 자기 관계에 의거하여 사유하는 것이지요.

이 경우, 타인 관계는 자기 관계의 변종이 되는 셈입니다.

타인은 자신의 복사물, 자신의 이중체가 되고 말지요.


타인과의 관계 문제는, 더 나아가 타인이라는 문제는,

‘내가 타인과 함께 존재한다’에서 출발해야만 올바르게, 곧 타인을 타인으로서 사유할 수 있습니다.

이와 반대로 내가 자신과 맺는 ‘자기 관계’를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게 되면,

다른 자로서의 타인은 사라지고, 단지 나와 동일한 자로서의 타인만 남게 될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이데거 식 타자 철학의 일단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요?


다음 시간에는 교재 125쪽 두 번째 문단부터 읽습니다.


그럼 12월 15일 토요일 저녁 7시에 뵙겠습니다.

날씨가 많이 추워졌는데,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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