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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세미나]6월3일 후기와 공지

nomadia 2013.06.07 23:26 조회 수 : 6666

이번주 [철학사세미나]는 지난 주에 이어 '스토아철학'을 탐색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에 키케로의 [최고선악론]을 마무리했고, 이번 주에는 [그리스 철학자 열전]의 7권의 스토아철학자들로 논의를 이어 갔습니다. 이 책의 해당 권에는 스토아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키티온의 제논과 클레안테스, 그리고 크리시포스까지 그들의 인식론과 윤리학, 존재론이 일람되어 있습니다. 스토아 철학자들의 문헌들이 단편 형태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 단편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이 모여 있는 셈이지요. 이번 주에 토의된 것들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관념과 표상: 감각과 지각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기억은 감각적으로 '상기'되는 것인가?

 

 2. 스토아 철학자들은 플라톤적인 '구분' 즉, '선별'과 '배제'의 방법으로 존재자들을 나누지만, 특이한 점은 '중간항'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중간항으로부터 이런저런 논지들이 리좀처럼 뻗어 나간다.

 

3,. '스토아적 자살'에 대해서도 잠시 논의가 있었습니다.

 

4. 가장 중요한 존재론에서 '준원인'(quasi-cause)에 대한 내용을 반장인 제가 번역해 와서 토론했습니다. 이에 관한 내용은 주로 Cicero의 De Fato라는 저작에 있습니다.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았지요.

 

5. 이번 주 세미나의 백미는 '부정법'으로서의 '렉톤'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 렉톤 중에서 불완전한 렉톤(능동과 수동)이 스토아의 인식론과 존재론을 잇는 가장 중요한 경첩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6. 스토아 우주론에서 '허공'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었지요.

 

반장(박준영)의 발제문을 아래에 붙여 놓고 파일로도 올립니다. 주석은 파일에서 보입니다.

 

다음주는 키케로의 작품으로 돌아 갑니다.

 

텍스트: 키케로, [신들의 본성에 관하여] 1권

발제와 간식: 하장선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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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철학자 열전』7권 발제

한글파일: 그리스철학자 열전7권발제.hwp

박준영

I. 철학의 구분

1. 스토아학파는 보통 철학을 세 부분으로 구분한다. (1) 자연에 관한 것(피시콘), (2) 윤리에 관한 것(에티콘), (3) 언론(이성)에 관한 것(로기콘). 이런 구분은 각각의 스토아 철학자들에 의해 ‘토포이’, ‘에이데’, ‘게네’ 등으로 불린다(429). 이 세부분을 현대적 어법으로 쓰자면 자연학, 윤리학, 논리학(인식론)이라고 할 수 있다.

2. 스토아학파는 이 세부분의 관계에 대해서 (1) 세 분야의 혼합을 주장하는 쪽, (2) 세 분야의 선후를 따지는 쪽으로 나뉠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분야들의 혼합이 근거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가 문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삶’ 또는 ‘자연’(본성)이라고 할 수 있을 듯한데, 후자의 경우는 이러한 것이 자연학이라는 한 분야에서 시작된다고 볼 것이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분류를 중요시하는 쪽은 철학의 분야는 더 세분화된다. 예컨대 문답법, 변론술, 정치학, 자연학, 신학의 구분이 그것이다(크레아테스; 430). 어떤 학자들은 변론술과 문답법을 언론(논리학, 인식론) 항목의 두 부류로 취급하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여기에 정의를 다루는 부분, 판단의 규범(카논), 기준(크리테리온)에 관한 부문을 여기에 부가하기도 한다. 이를 통해 봤을 때 스토아 학파에게 논리학이나 인식론 분야가 매우 특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II. 인식론(논리학)

1. 정의론이나 판단론에서는 주로 ‘표상적 지식’의 형성과 분류가 이루어진다. 이들에게 정의가 중요해 지는 이유는 사물이란 ‘일반적인 개념’을 통해서 파악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 개념을 다루기 위해서는 ‘변론술’과 ‘문답법’이라는 기술적 과정이 필요해진다. 이 중 문답법은 표상적 지식을 다루기 위한 적절한 형식이 된다. 문답법은 (1) 의미를 다루는 분야와 (2) 음성(언어)를 다루는 분야로 나뉜다. 이 중 전자는 다시 ① 표상을 다루는 분야와 ② 표상에 의거해 성립하는 ‘이야기 되는 것’을 다루는 분야로 나뉜다. 여기서 표상이란 주로 레크톤(완전한 문장과 불완전한 술어), 능동과 수동의 술어 등으로 파악되는데, 레크톤은 스토아학파에게 비물체적인 것임과 동시에 의미를 담지하고 있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강조될 필요가 있다. 이는 들뢰즈에게도 상당한 함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레크톤을 통해 물체적인 것이 ‘표현’되며 일정한 효과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또한 문답법은 포세이도니오스에 따르면 참과 거짓, 그리고 어느 것도 아닌 것을 다루는 학문으로 정의된다(439). 여기서도 스토아 특유의 사유 방식 즉 ‘중간항’을 사유하는 방식이 드러난다. 이 중간항은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의미’를 지닌다.

2. 크리시포스에 따르면 이 ‘의미’를 다루는 분야는 다시 두 가지로 나뉘어진다. (1) 완전한 레크톤 즉, 명제(아크시오마) 및 삼단논법에 관한 이론, (2) 불완전한 레크톤, 즉 능동형 및 수동형의 술어(동사)에 관한 이론이 그것이다(440). 그런데 후자의 레크톤에 대해 스토아학자들은 더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술어’(카테고레마)로서 이는 능동형과 수동형, 어느 쪽도 아닌 것으로 나뉜다. 여기서 주목할만 한 것은 다시 이 ‘중간항’, 즉 어느 쪽도 아닌 레크톤이다. 이는 예컨대 ‘생각하는 것’, ‘산책 하는 것’과 같은 부정법 동사를 말한다. 이 부정법 동사의 특유성은 그것이 어떤 시제도 인칭도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뒤에 이야기될 ‘애매한 표상’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추론 가능하다. 부정법 동사와 애매한 표상은 둘 다 양방향의 잠재성을 모두 포괄하는 것이다. 스토아 학파는 이 중요한 역설적 요소를 발견한 사람들이다.

한편 완전한 레크톤은 명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질문(에로테마)이나 심문과는 다르다. 명제는 진위를 판단할 수 있지만, 질문이나 심문은 진위를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진리의 중간항=질문). 명제는 크리시포스 등에 따르면 (1) 단순한 명제 (2) 복합적 명제로 나뉜다. 전자에는 단정, 결여, 단정(긍정), 한정, 부정 명제가 포함되며, 후자에는 결합, 이유․귀결, 연언, 선언, 원인․결과, 비교 명제가 포함된다(443).

3. 명제를 통한 추론은 스토아 학자들에게는 주로 삼단논법을 의미한다. 이때 추론은 (1) 효과를 가지지 않은 것, 즉 참인 결론에 이르지 않는 것(아페란토스)과 (2) 효과를 가지는 것, 즉 참인 결론에 이르는 것(페란티코스)이 있다. 효과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명제의 추론과정이 ‘무의미’한 것을 말한다(예: ‘만일 낮이라면 빛이 있다. 그런데 낮이다. 그러므로 디온은 산책을 하고 있다’). 효과를 가진다는 것은 반대로 추론 과정이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예: ‘만일 디온이 산책을 하고 있다면 디온은 움직이고 이다. 그런데 디온은 산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디온은 움직이고 있다’). 특이한 점은 스토아 학자들이 ‘논증적이지 않은 추론’도 상정한다는 것이다. 이 추론은 명제들이 주로 ‘모순-대립’관계로 이어지는 것인데, 유효한 추론을 형성한다. 다시 말해 논증적이지 않더라도 유효하다면 그것은 의미가 있게 된다.

4. 한편 스토아 학자들은 추론은 네 가지 형식적인 규칙을 가지는 데 다음과 같다. (1) 참인 것에서부터는 참인 것이 귀결한다. (2) 거짓인 것에서는 거짓으로 귀결한다. (3) 거짓인 것에서 참인 것으로 귀결할 때로 있다. (4) 참인 것에서 거짓인 것으로 귀결하는 일은 없다(449). 여기에 속하지 않는 추론은 ‘사람을 당혹케 하는 추론’(궤변)이 있다.

5. 감각과의 연관성을 파악하기 위해 다시 표상으로 돌아와 보자. 표상이란 스토아철학자들에게 일종의 ‘혼 안의 각인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표상은 (1) 파악(인식)할 수 있는 것과 (2) 파악할 수 없는 것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사물의 본래 모습이며 현실적인 대상이 각인된 것인 반면 후자는 어떤 애매한 표상, 즉 ‘명석도 판명도 아닌 표상’을 의미한다(432). 이것은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거나 또는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에서 나오기는 하지만 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 그 자체대로는 아’닌 그런 표상을 의미한다. 그런데 스토아의 논법을 따라가면 이렇게 애매한 표상이 가지는 ‘효과’를 추론할 수 있다. 현실적이거나 현실적이지 않거나 의미를 가지는 두 번째 표상은 첫 번째 표상과 동일한 힘을 가지고 우리 인식에 관여하는 것이다.

6. 스토아 학자들에게 표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감각’과 직접적인 관련성이 있으며, 진리의 기준이기 때문이다(433). 표상은 그것에 동의하거나 동의하지 않는 사고의 작용 이전에 오는 것이고, 사고는 이를 표현한다. 이 측면에서 표상은 ‘현실적인 것’이 중요해진다. 즉 표상이란 현실과 ‘즉응’하면서 생겨 우리의 사고에 날인, 각인되는 것이 중요하지 현실적이지 않은 표상은 이제 중요하지 않다(434).

7. 표상과 감각과의 연관성은 (1) 감각적인 표상, (2) 감각적이지 않은 표상으로 분류되어 상정된다. 이 중 후자는 ‘비물체적인 것의 표상’ 또는 ‘이성에 의해 파악되는 표상’이다. 이런 분류는 에피쿠로스의 감각론에서도 발견된다. 에피쿠로스에게도 둔한 영상은 감각에 의해 포착되지만 섬세한 영상은 오직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측면에서 표상은 (1) 이성적인 표상과 (2) 비이성적인 표상으로 나뉘어진다. 전자는 ‘노에시스’라는 이름이 붙지만, 후자는 ‘이름 붙여지지 않는 것’이다. 물론 이때 후자도 사유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유하다.

감각(아이스테시스)을 좀 더 세분하면 (1) 혼의 통할적 부분(헤게모니콘)에서 감각기관까지 이르는 기식(氣息), (2) 감각기관을 통한 파악, (3) 감각기관을 둘러싼 상태로 나눌 수 있다(434). 이런 분류는 감각의 운동(기식), 감각적 인식(파악), 감각의 콘텍스트(상태)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중 세 번째 ‘상태’는 감각기관이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하는 듯하다. 감각기관은 언제나 상태, 즉 ‘환경’과 상호적인 관계에서 서로의 흐름을 주고 받는다.

8. 이에 반해 이성(로고스)은 ‘관념’을 얻는 주체로 상정된다. 이러한 관념은 (1) 직접만남, (2) 유사성, (3) 비교, (4) 치환, (5) 합성, (6) 반대와 같은 지각가능한 영역의 표상이기도 하고, (7) 레크톤이나 토포스 (8) 선의 관념 (9) 결여와 같이 지각불가능한 영역(의미)의 표상이기도 하다(435). 여기서 진리의 기준은 ‘현실적인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각불가능한 것이 현실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의미’는 그 자체로 현실적이며, 사고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비물체적인 것(레크톤과 토포스)을 포함한다. 그런데 크리시포스의 경우 진리의 기준은 ‘감각과 선취관념’으로 규정되는데, ‘선취관념’이란 보편적인 것을 낳는 관념이라 한다. 이렇게 보면 크리시포스의 규정은 일종의 ‘해석학적인 선입견’을 취급한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하나의 보편적 의미는 그 이전에 수많은 선취관념, 즉 선입견에 의해 좌우된다. 그런데 관념(에노에마)은 부정적인 규정을 가지기도 한다. 즉 이것은 사실상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것(실체)도, 성질(포이온)도 아닌 것일 수도 있으며, 단지 의사적 실체, 의사적 성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438). 이때 관념은 단지 ‘상념’일 뿐이다.

9. 표상과 감각, 이성이 어떤 비물체적인 것을 포함하면서 분류되고 있다면, ‘음성’은 물체적인 것으로 간주된다(436). 왜냐하면 음성이란 ‘타격을 받은 공기의 진동’이기 때문이다. 물체적인 것에 대한 이러한 기준은 그것이 단지 ‘촉각가능한 것’이라는 것에 있지 않으며, 감각가능한 것이라는 좀 더 넓은 층위를 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음성을 물체적인 것으로 정의한 후 스토아학파는 음성이 문자화된 ‘글’과 ‘말’(낱말)과 다르다는 논점을 제시한다. 말은 분절화한 음성으로서, 일정한 낱말을 형성하지만 이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낱말(βλίτυρι)도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 안티파트로스는 말과 의미의 ‘중간항’을 설정하기도 한다(437). 이는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이 ‘무의미’의 지대를 어떤 식으로든 철학적으로 고찰해 보려고 한 노력의 흔적이라 하겠다.

 

III. 윤리학

1. 윤리학은 (1) 충동이론, (2) 선악론, (3) 정념론, (4) 덕론, (5) 삶의 목적 이론, (6) 최고가치와 행위론, (7) 상응행위론, (8) 권고와 간지(諫止) 이론으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스토아 학파가 후대로 갈수록 더욱 정교해진다(450).

2. 스토아 윤리학의 근본 원리는 ‘충동’이며, 더 자세하게는 ‘자기보존 충동’이다. 이는 모든 생명체에 공통된 것인데, 해를 끼치는 것은 밀어내고, 친근한 것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충동에서부터 시작해서 이성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이 존재하게 된다. 여기서 스토아 학자들은 자연(본성)을 동물적인 자연과 ‘더욱더 완전한 자연’으로 나누는 것으로 보인다(451). 이 더욱더 완전한 자유의 ‘이끌림’에 의해 인간은 이성적 존재가 된다. 이성은 충동을 다루는 기술이며, 이는 ‘뒤에 덧붙여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성적 삶도 자연에 따르는 삶인 것은 마찬가지다. 스토아 학자들에게 덕스러운 삶은 곧 자연에 따르는 삶, 즉 ‘자연에 의해 생기는 사항의 경험에 즉응’하여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었을 때 삶은 자연과 ‘막힘 없는 흐름’을 형성한다. 자연에 따르는 것이 삶의 목적이 되므로 이성과 의지는 모두 이 흐름 가운데 있게 된다.

3. 덕은 스토아 학자들에게 삶의 완성태이며, 이성에 의해 통찰되기도 하고(사려) 그렇지 않기도(건강) 하다. 그런데 이때 ‘사려’는 선악과 선악 아닌 것(중간항)을 판별한다(454). 그리고 선한 것은 혼에 관한 것과 외적인 것,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아닌 것(중간항)이 있다. 선악에 관계가 없는 것이란 ‘행복에도 불행에도 이바지 하지 않는 것’이며 ‘선택과 기피에 대해서 완전히 같은 거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458-9). 이는 악한 것에 관해서도 적용된다. 그런데 완전히 선한 것이란 ‘자연이 요구하는 모든 수(적절함) 또는 완전한 균형’을 의미한다. 따라서 선은 곧 미와 통한다. 선은 아름다운 것이다. 또한 선한 것(덕)은 최고도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므로, 정도의 차를 가지진 않는다(457).

이러한 선은 ‘상응하는 행위’(카테콘)에 의해 이루어진다(460). 이는 제논이 맨 처음 제기했다. 카테콘은 행위에 대한 사후 변명이 가능한 행위를 말한다. 대체로 이 행위는 이성이 명령하는 바이며, 상응하지 않는 행위를 극복하라는 것이기도 하다. 여기서도 스토아 학자들은 어떤 ‘중간항’을 내세우는데, 그것은 ‘상응하지도 상응하지도 않는 행위’다.

4. 혼은 보통 8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된다. 즉 오감과 음성(언어)기능, 사고기능 그리고 생식기능이 그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념’인데, 스토아 학자들에게는 정념은 ‘판단’의 일종이다. 이 정념은 우주적인 기식 작용의 한 부분으로 그러한 자연으로부터 기인한다(483). 여러 정념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중 ‘욕망’은 이성을 잃은 욕구로 정의된다(462). 정념이 스토아학자들에게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기쁨(쾌락과 다름), 조심성, 소망은 긍정적인 정념으로 취급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현자는 정념에 빠지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움직이지 않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정념에 의해 과오를 범했다면, 그 과오에는 경중이 없다. 즉 과오라는 점에 동일하게 취급되어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런 과오에 대해서는 ‘시의적절한 징벌’이 수반되어야 한다.

5. 덕이란 하나의 덕이 이루어지면 다른 덕들은 수반된다고 주장된다. 그것은 여러 덕에서 ‘이성에 의해서 통찰된 것이 공통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468). 페리파토스 학파와 스토아의 차이는 바로 이 덕과 악덕의 관계를 논하면서 대립한다. 전자는 덕과 악덕 사이에 어떤 것도 없다고 주장하는 반면, 스토아는 그 중간에 아무것도 없다고 말한다. 덕의 충분성에 관해서는 스토아 철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분분하다. 덕은 그 자체로 인해 선택되어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측(제논과 크리시포스)과 그렇지 않고 여타 다른 것들도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측(파나이티오스, 포세이도니오스)이 있다.

6. 스토아는 현자의 삶이랄 수 있는 세 가지 삶의 유형을 구분한다. (1) 관상적 생활, (2) 행동적인 생활, (3) 이성에 걸맞는 생활이 그것이다. 스토아는 (3)을 선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한다. 이에 기반하여 스토아들은 여자들은 공유되어야 하며, 남녀 간의 우연적인 성관계도 인정한다. 이는 평등한 가족들 간의 관계를 지향하고, 간통에 따른 질투와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IV. 자연학

1. 만물의 가장 중요한 원리는 ‘능동과 수동’, 즉 ‘작용하는 것’과 ‘작용 받는 것’이다. 후자는 질적 구별이 없는 질료-실체이며, 전자는 질료 속의 로고스(이성, 형상), 즉 신이다. 가장 원초적인 신은 세계의 ‘종자적 이성’이다. 이 신이 낳은 것이 4원소다. 이 논지는 바로 스토아의 범신론적 경향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능동-수동의 원리는 생멸하지 않는다. 그러나 구성요소들은 생멸한다. 왜냐하면 원리는 비물체적이지만, 구성요소는 형체가 부여된 물체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물체란 연장성(길이와 폭과 깊이)을 가진 것이다.

스토아 범신론은 우주적 질서, 즉 코스모스라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코스모스는 ‘전 존재를 자기 안에 흡수함과 동시에 또 다시 전 존재를 자기 안에서 낳는 것’이다(474). 이는 스피노자의 능산적 자연(natura naturans)에 해당된다. 우주는 지성과 섭리에 따라 움직이며, 이때 지성은 우주의 모든 부분에 골고루 스며 있다. 다만 그 침투의 정도는 우주의 이런저런 부분에서 다르다. 이는 우주를 하나의 혼이자 생명으로 바라보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 우주의 바깥 쪽은 ‘공허’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우주 내부에는 공허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주는 한계가 있지만 공허는 한계가 없다(477). 공허는 ‘비물체적인 것’에 속한다. 일반적으로 스토아학파에게 비물체적인 것은 ‘공간’, ‘공허’, ‘시간’, ‘레크톤’이다. 이들은 물체에 의해 차지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제로는 차지되지 않고 있는 것들이다(475).

2. 우주는 그 총량에 있어서는 변하지 않지만 개별적으로는 증감이 발생한다. 또한 이것의 분할은 무한히 이루어질 수 있다. 분할이 무한히 계속될 수 있기 때문에 원소들의 혼합도 물리적이라기 보다는 화학적 합성의 과정을 거친다. 스토아는 이러한 과정들을 불의 활성과정으로 바라본다.

3. 인간의 혼은 감각력을 갖춘 것이다. 혼은 자연의 기식과정, 즉 불의 활성과정을 선천적으로 갖추고 있다. 불과 마찬가지로 혼은 물체적인 것이며, 사후에도 ‘한동안’ 존속한다. 하지만 만유의 혼은 불멸한다. 인간의 혼은 모든 이성작용, 충동작용, 표상작용의 근원이며 심장에 자리잡고 있다.

[부록]

V. Long, Sedley, The Hellenistic Philosophers 중 주요 구절들

1. 적합한 기능들

키케로, 《의무론》I. 15, 152

도덕적으로 선하고 명예로운 것 전부는 다음 네 개의 부분 중 하나에서 나온다. 그것은 첫째 진리에 대한 통찰과 이해에서 생각되거나, 둘째 인간사회를 유지하며, 각각의 것은 각자에게 나누어주며, 계약된 것에 대한 신의에서 생각되거나, 셋째 고귀하며 굽히지 않는 정신의 위대함과 강직함에서 생각되거나, 마지막 네 번째로 행해지고 말해진 모든 것에 절도와 인내가 내재해 있는 질서와 온건함 속에서 생각되는 것이다. 이러한 네 부분은 비록 상호 간에 중복되거나 혼합되어 있다 하더라도, 어떤 유의 의무들은 단일 부분에서 나오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지혜와 예지를 포함시키고 있는 첫 번째로 분류된 부분에서 진리에 대한 탐구와 발견이 행해진다. 그리고 이것이 덕의 고유한 열매이다.

 

이제는 도덕적으로 선한 것들에 속하는 네 가지 부분에서 의무들이 어떻게 나오는지 충분히 설명된 것 같다. 그러나 도덕적으로 선한 것들 자체에서도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 경우, 어떤 것이 더 도덕적으로 선한지에 대해 상충과 비교가 흔히 발생할 수 있는데, 이 점이 파나이티우스에 의해 간과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해 도덕적으로 선한 모든 것들은 네 가지 부분에서 나오는데, 첫째가 지식탐구, 둘째가 공동체의 사회적 유대 관계, 세 번째가 꿋꿋한 불굴의 정신, 네 번째가 자제하는 행동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의무를 설정함에 있어 종종 이들 자체에서도 상호 비교될 필요성이 있다.

2. 덕과 악덕

키케로, 《투스쿨란 논박》(Tusculan disputation) 4.29, 34-5

(1) 사악함이란 삶 전체에 불일치하고, 그 자체와의 조화에서 벗어나는 성향이나 성품이다. ... (2) 이것은 이성을 이간질하고 매순간 정신과 삶의 평화를 위협함으로써 정신의 운동을 지체시키고 혼동시키는 장애의 근원이다. (3) 이러한 것들은 문제와 심각한 질병을 야기하므로, 정신을 억압하고, 그것을 공포로 약하게 만든다. 또한 이는 과도한 욕망으로 마음을 태워버리고 ... 인내와 중용과 반대로 완벽하게 정신의 무력함을 [야기한다.] ... (4) 따라서 이러한 악덕들의 유일한 치유책은 덕 안에 있다.

3. 도덕적 책임

키케로, 《운명에 관하여》39-43(SVF 2.974)

(1) 고대 철학자들은 두 가지 관점을 가졌다. 만사가 운명에 의해, 즉 그 운명이 필연성의 힘에 적용되는(applied) 방식으로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데모크리토스, 헤라클레이토스, 엠페도클레스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와 같은 관점을 취했다. (2) 이와 다른 관점을 취한 사람들은 우리 마음(minds)의 의지적인 운동이 있는데, 이것은 모든 운명으로부터 자유롭다고 믿었다. (3) 나는 크리시포스가 비공식적으로 이러한 관점을 판정하려 하면서 어떤 행복한 중간을 취하려고 한 것이 인상 깊었다. 하지만 그는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우리 마음의 운동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로 좀 더 쏠렸는데, 그의 개인적인 사유가 발전해 나가면서 그는 운명의 필연성을 주장하는 쪽으로 의도치 않게 미끌어져 들어가는 난점에 처하게 되었다. (4) 이것이 어떤 일치(assent)의 맥락에서 작동하는지 살펴 보도록 하자. 나는 이에 대해 나의 첫 번째 논고에서 다루었다. 만사가 운명을 따라 발생한다고 주장했던 고대의 사상가들은 일치의 활동이 힘과 필연성의 결과라고 말했다. 다른 한편 그들의 적수들은 필연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는데, 만약 운명에 종속된다면,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그것을 거부하면서 운명으로부터 일치의 활동을 자유롭게 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만약 모든 것이 운명에 따라 발생한다면, 그것들은 이전의 원인에 따라 발생할 것이다. 그리고 만약 충동이 이와 같다면, 충동에 따르는 것들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일치의 활동도 마찬가지가 된다. 하지만 만약 충동의 원인이 우리 안에 있지 않다면, 충동은 그 자체로 우리의 힘이 아님에 분명하다. 만약 이러하다면, 심지어 충동의 결과마저도 우리의 힘에 속하지 않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일치의 활동도 행위도 우리 안에 있지 않는 것이 된다. 결론적으로 칭찬도 비난도 명예도 처벌도 정의다.’ 이 논변은 건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이것이 모든 사건들이 운명에 따라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타당한 추론이라고 생각한다. (5) 그러나 크리시포스는 필연성에 반대하면서 그리고 동시에 이전의 원인이 없이는 어떤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여기는데, 이 원인은 흔한 원인이 아니며, 이러한 시도는 운명에 제한을 두면서 필연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원인에 대하여’ 크리시포스는 ‘어떤 것은 완전하며 일차적(primary)이지만, 다른 것은 부수적이며 어림잡는(준-, proximate)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모든 것이 앞선 원인들에 의해 운명에 따라 발생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것이 '완전하고 일차적인 원인들에 의해서'라고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부수적인 준원인'(proximate causes)에 의해서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6) 그는 따라서 내가 조금전에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했던 논증에 반대한다. 즉 ‘만약 만사가 운명에 따라 발생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이 이전(antecedent) 원인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원인은 일차적이고 완전한 원인들이 아니라, 부수적인 준원인이어야 한다. 만약 후자가 우리의 능력(power) 안에 있지 않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충동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지는 않는다. 다른 한편으로 만약 우리가 모든 것이 완전하고 일차적인 원인들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한다면, 이로부터 충동이 우리의 능력 안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추론되는데, 이는 이러한 원인들이 우리의 능력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7) 필연성을 도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운명을 끌어들이는 사람들에 반대하므로, 초기의 논증은 타당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완전하고 일차적인 것으로서의 이전 원인들에 대해 말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에 반하여 타당성이 없다고 하지는 못할 것이다. (8) 그는 일치의 활동이 앞선(prior) 원인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명제를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것이 어떤 인상에 의해 촉발되지 않는다면, 일치는 발생할 수 없다고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일차적 원인이 아니라 그것의 준원인으로서의 인상이 발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크리시포스는 내가 방금 전에 언급했던 이유(the rationale)를 가져야만 한다고 요구한다. 적어도 그는 일치가 어떤 외부적인 힘의 자극 없이 발생할 수 있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왜냐하면 일치는 인상에 의해 촉발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그의 원통과 팽이의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들은 어떤 자극(push) 없이는 움직임을 시작할 수 없다. 하지만 한번 그것이 발생하면, 그는 이후로 그것들 자체의 본성에 따라 원통은 구르고 팽이는 돈다는 점을 주장한다. (9) ‘그러므로 원통에 그것의 구르는 능력이 아니라 운동의 시작을 주는 사람과 같이, 비록 인상이 각인(print)되고 그 자체로 정신에 그것의 외양을 선명히 새기게 될 지라도, 일치는 우리의능력 안에 존재하게 된다. 그리고 일치는 우리가 원통의 예에서 말한 것과 마찬가지로, 비록 외부로부터 자극을 받을지라도, 이후로는 그것 자체의 힘과 본성을 따라 움직이게 된다. (10) 만약 어떤 것이 이전 원인 없이 발생한다면, 모든 것이 운명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은 진실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모든 사건들(events)이 이전 원인을 가진다는 것이 수긍할만 하다면, 모든 것이 운명에 따라 발생한다는 것에 찬성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 수 있는가? 구별(distinction)과 차이가 원인들 사이에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4. 목적과 행복

키케로, 《투스쿨란 논박》(Tusculan disputation) 5.40-1

[스토아 윤리의 방어] (1) 내 생각에 덕 있는 사람은 또한 최상의 행복을 누린다. 왜냐하면 만약 어떤 사람이 그가 가진 재산을 신뢰한다면, 그가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있어서 부족함을 느낄 무엇이 있겠는가? 또는 결여 되어 있는 누군가가 어떻게 행복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재산이라는 삼중의 차원에 적응한 어떤 사람은 필연적으로 확신을 결여한다. 그는 어떻게 신체적인 힘이나 비밀스런 운을 확신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안전하고, 안정되어 있으며, 지속적인 어떤 선이 없이는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다. ... (2) 이러한 것들 중 어떤 것이라도 상실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은 행복할 수 없다.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 안전하고, 확고하며, 방어될 수 있으며, 굳건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는 그저 대체로 두려움이 없는 것이 아니라, 완전해지는 것이다.

5. 행위의 윤리

키케로, 《의무론》I.46

[아마도 파나에티우스에 대해 말하면서] 우리는 완벽하고 현명한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 아니라 덕과 유사한 것, 즉 사이비 덕만 지녀도 훌륭하게 행동할 수 있는 사람들과 살아가고 있는 이상, 나는 심지어 약간의 덕이라도 보이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건 간에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키케로, 《의무론》I.107, 110-11, 114-17(파나에티우스 단편 97 포함)

(1)또한 우리는 자연에 의해, 말하자면 두 가지 성격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 중 하나는 공통적인 것으로서, 우리 모두가 이성을 소유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짐승보다는 우월하다는 사실에서 생긴 성격이다. 바로 여기서 모든 도덕적 선과 데코룸이 유도되며, 의무를 창출하는 합리적 사유가 모색되는 것이다. (2) 이와는 반대로 다른 하나는 각 개인에게 고유한 것으로 주어진 것이다. ... 정신에 있어서 차이는 이보다 더 다양하기까지 하다. ... (3) 우리가 탐구하고 있는 저 데코룸을 보다 더 쉽게 유지하게 해주는 자신의 특성을 지니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인간본성의 보편적인 법칙들을 거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 되며, 심지어 다른 어떤 더 중대하고 좋은 것이 있다 해도, 우리가 추구하는 바를 우리 자신의 본성이 명하는 규범에 따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연, 즉 인간 본성에 대항하여 싸운다든가, 네가 도달할 수 없는 목적지를 가보려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 데코룸이란 어떤 것인지가 더 잘 나타난다. 그 까닭은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의 뜻에 반하는 것, 즉 성격에 맞지 않는 것 모두가 데코룸하지가 않으므로, 사람들이 말하듯이 그것은 본성에 위배되며 대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4) 대체로 말해, 만약 데코룸한 어떤 것이 있다면, 참으로 전 생활 과정과 개별적인 행동들의 시종일관된 일치 이상의 것은 없을 것이고, 만약 네가 다른 사람들의 본성을 모방하면서 네 자신의 본성을 무시한다면, 너는 결코 그 일치를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 (5) 그러므로 각자는 자신의 고유한 재능과 특성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자신의 장점과 결점들에 대해 정확한 판단을 내리도록 해야 한다. ... (6)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적합한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어, 여기에 가능한 한 온갖 노력을 쏟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때든지 만의 하나라도 그야말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을 떠맡게 되었을 때에는, 맡은 일이나 역할이 데코룸하지 않다 하더라도, 가급적 최소한의, 데코룸하지 않은 것으로 서행할 수 있도록 전심전력해야 할 것이다. ... (7) 그리고 내가 위에서 말한 두 가지 역할에 부가되는 것으로서 세 번째는, 어떤 기회 내지 상황이 부여하는 역할이다. 네 번째로 역시 우리 자신의 신중한 판단에 따라 우리가 선택한 역할이 있다. 즉 왕의 지위, 군사령관직, 귀족신분, 정무관직, 부와 세력, 그리고 이와 정반대되는 것들은 기회가 있는 것이며, 상황에 따라 조종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자신이 무슨 역할을 선택하여 수행해야 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하여 착수하는 것이다. ... (8)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어떤 인물, 어떤 유의 사람이 되고자 하는지, 또 어떤 종류의 삶을 영위하며 어떤 직업을 택하고자 하는지 결정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문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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