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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세미나][소피스트] 발제문

nomadia 2013.04.11 15:28 조회 수 : 7255

소피스트발제.hwp

 

플라톤, 『소피스트』 발제문: 236d~268d

발제자: 박준영

I. 있지 않음과 파르메니데스

플라톤은 이 저작의 후반부에서 본격적으로 ‘소피스트 사냥’에 나선다. 앞부분에서 ‘나눔의 방법’을 통해 소피스트의 ‘정의’에 근접하였으나, 이들의 정체는 아직까지 모호한 것으로 판명 났다. 이제는 단순한 ‘나눔’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우선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가정이다(237a). 가정 자체가 매우 반파르메니데스적이기 때문에 이 진술을 시험에 부친다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조차 시험에 부치는 것이다. 이 부분(236d-242b)에서 플라톤이 ‘손님’의 입을 빌어 전개하는 논변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

 

1.

1) ‘있지 않은 것’은 그 어떤 있는 것들에도 적용되어선 안 된다.

2) ‘어떤 것’을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어떤 하나’를 말한다.

그런데, 3) ‘어떤 것’이 아닌 것을 말하는 자는 ‘하나’조차도 전혀 아닌 것을 말한다.

그런데, 4) 우리가 ‘있지 않은 것들’을 말할 때에는, 우리가 여럿의 수를 그것들에 덧붙이려고 시도하는 것이다. ‘있지 않은 것’일 경우에는 하나의 수를 덧붙이는 것이다.

하지만, 5) ‘있지 않은 것’은 3)에 따르면 ‘하나’조차 전혀 아닌 것이므로, 무언가가 덧붙여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6) ‘있지 않은 것’은 하나에도, 여럿에도 참여할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말하는’ 자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하나’로 세거나 덧붙인다. 이는 모순이다.

따라서, 7) ‘있지 않은 것’은 심지어 ‘그것’이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

2.

그런데, 8) “참된 것과 비슷하게 만들어진 그와 같은 다른 것”을 모상이라고 한다. 이것은 참된 것이 아니라 다만 ‘닮은 것’이다.

9) 참된 것은 있는 것이지만, ‘닮은 것’은 있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10) 있는 것이 아니면서, ‘닮은 것’으로 부르는 것으로 있는 것이 있다. 즉 있지 않은 것이 어떤 점에서는 있다.

따라서, 11) ‘있는 것들이 있고 있지 않은 것들이 있다’고 말을 한다면, 그 진술은 거짓이다.

 

여기까지 논변이 진행된 후 ‘손님’은 다시 한 번 ‘있지 않은 것’의 속성, 즉 “언표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고, 사유될 수도 없고, 말이 안 되는 것으로 우리 사이에 확실하게 동의 되어 있다”는 점을 되새긴다(241a).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있지 않은 것에 있는 것을 자주 덧붙이”는 실수를 범한다(241b).

II. 있음에 관한 주장들

이후 ‘손님’은 논변을 더욱 강력하게 밀고 나가기 위해 ‘부친살해’(파르메니데스 비판)을 감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테아이테토스의 양해를 구한다. 그리고 그는 있는 것에 관한 철학사적 개관을 짧게 하면서(242c-243a), 이것이 존재와 생성의 문제이면서 일과 다의 분리와 섞임의 문제임을 밝힌다(243b-c). 이 문제에 대한 논변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242b-252c).

 

1) 원리들이 둘이라고 할 때, 그 둘이 각각 ‘있다’는 것은 둘 모두 하나로 말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2) ‘하나’는 전체와도 같은 것으로 말해진다.

그런데, 3) 있는 것은 중심과 끝 그리고 부분을 가지며, 이 부분들은 ‘하나라는 겪음’을 가진다.

하지만 4) 하나를 겪은 그것이 바로 하나 그 자체일 수는 없다.

5) 있는 것이 겪음을 통해 하나로 있다면, 그것은 하나와 동일하지 않으며, 따라서 그것은 하나보다 많다.

반대로 6) 있는 것에 하나에 의한 겪음을 겪기 때문에 전체가 아니라면, 그러나 전체 자체가 있다면,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을 결여한다.

그러나, 7) 하나 혹은 전체를 있는 것들 안에 놓지 않으면, 존재도 생성도 있는 것으로 부를 수 없다.

 

이렇게 일과 다, 존재와 생성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플라톤은 이에 관해 소위 관념론과 유물론의 싸움을 각각의 입장에서 논변정리한다(246a-252c). 다음으로 플라톤 자신의 존재와 생성에 관한 논변은 다음과 같다.

 

1) 지성이 있으면 삶이 있는 것처럼, 운동하게 되는 것과 운동은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2) 만약 있는 것들이 운동하지 않는 것이라면, 어떤 것 안에도 어떤 것과 관련해서도 어디에서도 지성은 없다.

그리고 3) 만약 모든 것들이 옮겨지고 운동하게 되는 것이라고 우리가 인정하면, 우리는 지성을 있는 것들로부터 배제하게 된다.

따라서 4) 있는 것은 운동되어지지 않는 모든 것과 운동되는 모든 것이다.

그런데, 5) 운동과 정지는 서로 간에 가장 반대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6) 4)와 5)에 의해 운동과 정지와는 다른 ‘있는 것’이 어떤 세 번째 것으로 있게 된다.

따라서 7) 있는 것은 운동과 정지 동시에 둘 다가 아니고, 이것들과 다른 어떤 것이다.

따라서 8) 있는 것은 자신의 본성상 정지해 있지도, 운동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9) 정지해 있지 않으면 운동하는 것이고, 운동하지 않으면 정지한 것이다.

따라서 10) 이 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11) 운동과 정지 둘 자는 결코 존재의 몫을 나누어 가지지 않는다.

하지만 12) 이 둘 다 존재와 결합하지 않으면 있게 되지 않는다.

 

이렇게 해서 ‘손님’은 논의가 아포리아에 빠졌다는 것을 시인하게 된다.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 플라톤은 ‘형상들의 결합’이라는 주제를 끌어 들인다.

 

III. 형상들의 결합

이에 대한 논변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다(252c-259d).

 

1.

1) 어떤 것은 섞이려 하고, 또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2) 이런 결합과 분리에 대해 알기 위한 기술이 있다.

3) 유들은 이와 같은 식으로 서로와 결합 혹은 분리한다. 이러한 결합과 분리에 대한 앎은 가장 중요한 철학적 앎이다.]

4) 유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서로 결합하려 하지만 어떤 것들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어떤 것들은 적은 수의 것들과 결합하려 하지만 어떤 것들은 많은 수의 것들과 결합하려 한다. 또한 어떤 것들은 모든 것들을 관통해서 모든 것들과 결합함에 있어서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다.

그런데 5) 정지와 운동은 서로 섞이지 않는다.

하지만 6) 있는 것은 둘과 섞인다.

따라서 7) 있는 것, 정지, 운동, 이들 각각은 나머지 둘과 다르지만 자기 자신과 동일하다.

그러나 8) 운동과 정지는 다른 것도 아니고 동일한 것도 아니다.

즉 9) 이들은 동일한 것과 다른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진다.

2.

10) 있는 것과 동일한 것은 하나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운동과 정지를 동일하다고 부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1) 따라서 ‘동일한 것’은 네 번째 형상이다. 그리고 ‘다른 것’과 ‘있는 것’은 하나의 유에 대한 두 이름이다. 즉 있는 것들 중에서 어떤 것들은 항상 그 자체로 말해지고 그리고 또 어떤 것들은 항상 다른 것들과 관계해서 말해진다.

이에 따라 12) 다른 것들은 항상 다른 것과 관계한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섯 번째 형상이다.

그러므로, 13) ‘다른 것’은 본성상 다른 것들 모두를 관통한다. 왜냐하면 각 하나는, 자신의 본성 때문이 아니라 다른 것이라는 형상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 해서 나머지 것들과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모두 다섯 개의 형상(존재, 정지, 운동, 동일성, 차이)을 도출해 내며, 이것은 이후 논변 전개의 기본 전제가 된다. 이후로는 이 형상들을 차례로 하나씩 중심에 놓고 다른 형상들과의 결합관계를 살피는 논의가 진행된다.

3. 운동과 정지, 동일성, 차이와의 결합관계

14) 운동은 정지와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15) 운동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에 있다.

그런데 16) 운동은 동일한 것과 다르지만 동시에 동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동일한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 때문이다.

17) 우리가 운동을 동일한 것이라고 할 때는, 운동이 자신과 관련해서 동일한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지 때문이며, 동일한 것이 아니라고 할 때는, 운동이 다른 것과의 결합이기 때문이다. 즉 이 다른 것과의 결합에 의해 운동은 동일한 것과 분리되어 다른 것이 된다.

그런데, 18) 운동은 동일한 것과 정지와 다른 것이었던 것처럼, 운동은 다른 것과 다른 것이다. 즉 운동은 다르기도 하고 다른 것이 아니기도 하다.

4. 운동과 존재와의 결합관계

19) 운동은 있는 것과 다른 것이지만 분명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에 있는 것이다. 즉 있으면서 있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

따라서 20) 운동에 관련해서 그리고 모든 유들과 관련해서 있지 않은 것이 있다는 점이 필연적으로 도출된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과 관련해서 다른 것의 본성은 각각의 있는 것을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 만듦으로써 각각을 있지 않은 것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반대로 21) 모든 것들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지기에 있는 것이기도 하다.

5. 차이로부터 ‘있지 않은 것’으로

22) 다른 것의 본성은 부분들로 잘리는 것이다.

그런데 23) 다른 것의 본성은 또한 있는 것이며 이에 따라 부분들도 못지않게 있다.

그러므로 24) 다른 것의 부분의 본성이 있는 것의 본성과 대비된다는 것은 반대가 아니라, 단지 다르다는 의미이다.

25) 이렇게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대비되는 것은 명백하게 저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당하게 하나의 형상으로 세어져야 한다.

 

이렇게 해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금언을 넘어서게 된다. 즉 있지 않은 것을 사유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차이를 통해 비존재를 도출한다’는 점이다.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이것을 다시 한 번 정리한다.

 

즉 유들은 서로 섞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것과 다른 것은 모든 것들을 그리고 서로를 관통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편으로 다른 것은 있는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바로 이 나누어 가짐 때문에 있지만, 몫을 나누어 주었던 그 대상은 아니고 그 대상과 다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있는 것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있지 않은 것이라는 점은 아주 분명하게 필연적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있는 것은 다른 것의 몫을 나누어 가짐으로써 나머지 유들과 다른 것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이 모든 것들과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이것들 각각도 아니고 이 나머지들 모두도 아니라, 단지 자기 자신입니다. 그리하여,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천 번 만 번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것들 역시, 각각이 그리고 다 함께, 많은 점에서 있고 많은 점에서 있지 않습니다(259a-b).

 

VI. 생각과 말 그리고 거짓

이렇게 비존재의 존재를 증명한 후 ‘손님’은 “말이 무엇인지 합의를 해야” 한다고 밝힌다(260a). 즉 “있지 않은 것은 다른 나머지 것들 중 하나의 유이며, 있는 것들 모두에 골고루 흩어져 있다는 것”을 밝혔고, 이번에는 이것이 말(logos)이나 믿음(doxa)과 섞이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존재론적 진술이 말이나 믿음과 섞인다면, 거기서는 필연적으로 거짓과 오류의 가능성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소피스트의 거짓은 여기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믿음과 인상들이 나타났을 때, 이것들과 있지 않은 것의 결합을 확인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거짓을 증명하게 되며 마침내 소피스트를 잡을 수 있다(260e-261a).

이에 관한 플라톤의 논변 재구성해 보자(261d-264b).

 

1.

1) 단어는 이름과 동사로 나누어지며, 전자는 행위주체, 후자는 행위에 대해 쓰인다.

2) 따라서 진술(logos)은 이름만이나, 동사만으로 연결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3) 동사들과 이름들을 섞어야 진술이 완성된다. 이 온전한 진술이 존재든 비존재든 지시하는 것이다.

4) 사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 결합에는 어떤 규칙이 있다.

2.

5) 진술이 있다면 필연적으로 지시(“어떤 것에 관한”)가 성립된다.

따라서 6) 진술은 어떤 속성을 가진다.

이에 따라 7) 진술은 필연적으로 참과 거짓으로 나뉜다.

8) 참인 진술은 있는 것들을 있다고 말하고, 거짓 진술은 있는 것들과 다른 것들을 말한다. 즉 있지 않은 것들을 있는 것들로 말한다.

그러므로 9) 다른 것들이 동일한 것들로서, 있지 않은 것들이 있는 것들로서 말해지고, 진술이 이에 따라 만들어진다면 이는 거짓진술이다.

 

이와 같이 논변을 전개한 후 ‘손님’은 생각과 말을 구분하고 “영혼 안에서 음성 없이 생겨나는, 영혼 자신과의 대화”를 생각이라고 하고, “영혼으로부터 출발해 음성을 동반하면서 입을 통해 나오는 흐름”을 말이라 정의한다(264e). 이에 따라 믿음은 “생각을 통해 그리고 침묵과 함께 영혼 안에 생겨”나는 것이며, 이러한 “믿음이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지각을 통해서 어떤 자에게 생기면 그런 겪음을 인상이라”고 정의한다(264a). 이제 ‘손님’은 거짓 믿음과 거짓 진술을 판별할만한 기준을 발견한 것이라 생각하며 이에 따라 마지막 논의를 전개한다.

 

V. 마지막 분할

이제 플라톤은 앞서 실행했던 분할을 기억해 내면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소피스트의 논지를 확인하고,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전복하면서 근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지금까지의 논의를 종합하여 소피스트를 논박하는 것이다(마지막 분할). 이렇게 본다면 ‘최초분할’은 준비단계이며 ‘결합’은 일종의 ‘근거구성’의 단계이고, 이 ‘최종 분할’은 논박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 모상제작술은 닮음꼴 제작술과 유사닮음 제작술, 둘로 나뉜다.

2) 결합논변을 통해 존재론적 근거가 없을 때에는 이 분할은 효과가 없었으나 이제 그 근거가 마련된 만큼 분할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264c 참조).

3) 만드는 기술(제작술)은 신적인 것과 인간적인 것으로 나뉜다.

4) 이 분할은 다시 각각을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두 부분 중 하나는 사물자체를 제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상을 제작하는 것이다.

5) 모상들은 가상(phantasmata)을 산출하는데, 이는 꿈속의 가상과 낮의 가상으로 나뉜다.

6) 이제 모상제작술로 되돌아 와서, 닮은 꼴 제작술과 유사닮음 제작술 중 후자를 선택한다.

7) 유사닮음 제작술은 다시, 도구들을 통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도구로 이용하는 것으로 나뉜다. 이 중 후자를 ‘모사술’이라 부른다.

8) 모사술은 모사하는 대상을 알면서 하는 것과 모르면서 하는 것으로 나뉜다. 전자는 아는 모사술, 후자는 믿음에 의한 모사술이다.

9) 소피스트는 믿음에 의한 모사자이다. 이것은 다시 믿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자와 겉으로는 알고 있는 양 모습을 취하지만 실제로는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 자로 나뉜다. 전자는 단순한 모사자며, 후자는 위장하는 모사자다.

10) 소피스트는 위장하는 모사자다. 이들은 다시 긴 연설을 하는 대중선동가와 짧은 말을 하는 소피스트로 나뉜다. 이렇게해서 최종분할이 끝난다.

 

최종분할 이후 플라톤은 늘 그러하듯이 정의를 “끝에서부터 처음까지 함께 엮어 짜서 묶”어 낸다(268c).

 

모순을 만드는 기술에서, 위장하는 기술에서, 믿음에 의존하는 기술에서 나온 모사자 그리고 유사닮음을 만드는 종족에서, 모상 제작술에서 나와서 신적인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것을 제작하는 부분 그리고 말로써 볼거리를 만드는 부분으로 구분된 자, 바로 “이런 가계와 혈통으로부터” 진정한 소피스트가 나왔노라고 누군가라도 주장한다면, 그는 가장 진실된 말을 하는 것 같습니다(268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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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앞 부분에서 플라톤은 소피스트에 대해 어떤 긍정적인 정의의 도달한다. 이에 대해 조지 커퍼드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소피스트술(sophistry)의 특별한 측면 혹은 종류가 이른바 ‘논박술’(Elenchos)이라는 일종의 언어적 검토작업으로 판명되는데, 이는 영혼으로부터 지혜에 대한 헛된 가식을 쓸어냄으로써 이루어지는 교육이다. (...) 그가 이 논박술이라는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기능을 ‘고귀한 태생의 소피스트술’이라 이름 붙였을 때, 그것을 소피스트적 활동 중에도 그나마 바람직하지 못한 정도가 덜한 결과들 가운데 하나로 여겼던 것 같다. 이는 아마도 그것을 소피스트의 활동들의 다른 측면들과 구별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발제자] 마지막으로 긴 곁길 뒤에 대화편의 끝 부분에서 우리는 소피스트가 알지도 못하면서, 실재보다는 현상(appearnace)과 의견에 근거를 둔 모순을 만들어내는, 철학의 거짓된 야바위꾼으로 드러나는 대목에 이르게 된다”(조지 커퍼드 지음, 김남두 옮김, 『소피스트 운동』, 아카넷, 2003[이하 ‘커퍼드’], pp. 14-15).

 

2) 정의(definition)에 대해서도 플라톤과 소피스트들은 현격한 차이들 드러낸다. 커퍼드는 이를 다음과 같이 논한다. “그[프로디코스]는 ‘x가 무엇이냐?’를 묻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x는 y와 다르냐?’를 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접근을 단지 ‘x가 무엇이냐?’고 묻는 소크라테스의 접근과 구별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핵심적인 것들에서 그는 통상적으로 단지 ‘x가 무엇이냐?’를 묻는 소크라테스의 선행자로 남는다 (...) 그들 모두에 있어서 한 단어의 의미는 그것이 지시하는 것에 있었다. (...) 소크라테스도 동일한 길을 가긴 하지만 그가 ‘x가 무엇인가?’를 물을 때 그가 찾고 있는 것의 오노마 또는 이름이 보통은 하나의 단어로 찾아지지 않을 것이고, 오히려 일련의 단어들로 구성되는 하나의 공식, 또는 로고스 또는 정의일 것이라는 점에서 다르다”(커퍼드, 124-25).

 

3) “플라톤과 반론술의 수행자들[소피스트들-발제자] 모두가 이 한 가지 점, 현상들의 반론적(antilogic) 성격에는 동의한다. 플라톤이 그들에게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 근본적인 유일한 지점은 현상들의 흐름이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참된 앎의 대상인 진리를, 그리고 흐름의 이해와 우리가 더 영원하고, 확실하며 믿을 만한 실체들, 그 유명한 플라톤의 형상들에게로 가야만 하는 이유들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한다. 이는 다시 플라톤이 소피스트들에게 대한 반감을 가진 진정한 근거는 그들이 그의 눈에 전적으로 그릇되게 비쳤기 때문이 아니다. 즉 그들은 사물들이 그에서 비롯하는 원천과 이 원천의 (현상적) 귀결들을 뒤섞어놓음으로써 부분적인 진리를 완전한 진리로 격상시켰기 때문임을 암시한다(『파이돈』101e1-3). 이것은 그들을 훨씬 더 위험하게 만든다. 실로, 다른 곳에서 플라톤이, 그가 반복적으로 그렇게 하듯이, 소피스트들은 진리에 관계하지 않는다고 암시할 때, 우리는 이것이 소피스트들이 플라톤이 진리라고 여기는 것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진리라 보는 것에 관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플라톤이 그렇게 말하고 싶어하지는 않았지만, 그에게 있어서 반론술은 변증술에 이르는 실의 첫 번째 단계이기 때문이다”(커퍼드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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