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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정신분석 20130302 반장님 발제

지젝 S.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한나래, 1997), 1~2장

 

 

1. 왜 편지는 항상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가?

 

 

[1] 죽음과 승화: <시티라이트>의 마지막 장면

 

 

목소리의 외상

채플린 영화에서 목소리의 등장은 단지 무성영화에 대한 애착이나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목소리가 지닌 파열적 힘, 유령적이고 망상적인 분열의 도입이며, 나아가 말[언어]은 인간-동물의 균형을 떨어내고, 그 균형을 다시 맞추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스꽝스럽고 무능한 몰골을 드러내게 만든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방랑자의 끼임

통상 <시티라이트>는 목적론적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다. 목적론이란 원인과 결과가 잘 들어맞는 정합성의 논리인데, 그러나 지젝은 방랑자의 ‘끼임(interposition)’을 통해 목적론의 정합성이 분리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방랑자는 우연히도 자신의 것이 아닌, 남의 자리를 차지하는 자로서, 응시의 대상이며 교란적인 얼룩의 이름이다. 채플린의 영화가 히치콕적인 것이 되는 게 이 지점이다. 손힐이 엄하게도 캐플란이란 첩보원의 자리에 겹쳐지는 것과 같이, 방랑자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우연히 차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부자로 응시된다. 이것은 착란이고 우연이기만 할까? Non! “상호주관적 관계들의 그물망 속에서, 우리 각자는 모두 타자의 상징적 구조 속의 어떤 환상장소와 동일시되고 그것에 못박힌다... 오직 우리가 타인들을 우리의 상징적인 환상공간 속의 어떤 특정장소와 동일시하는 한에서만, 혹은 그들이 우리 꿈에 미리 확립된 장소를 채우는 한에서만 우리는 타인들과 연관될 수 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질 때, 그 연인은 우리가 환상 속에서 이미 사랑하고 있던 존재다. 방랑자가 기능하는 것은 그가 타자의 이상적 형상일 때인 것이다. 자아이상과 자기의 분리가 일어날 때, 그리하여 타자의 응시를 이탈하는 지점에서 발견되는 것은 정확히 우리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이 아니라, 오히려 잔여이다. 즉, 타자에게 전달되는 메시지는 자아이상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라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우리 속의 대상이야말로 진정한 메시지가 된다(편지겉봉이 실은 내용이다!). 편지는 이렇게 그 목적지에 도달하고 만다.

 

분리

<시티라이트>의 마지막 장면에 대한 흔한 공상은, 방랑자의 정체가 밝혀진 마당에 소녀는 과연 그를 받아들일까? 였다. 하지만 질문은 거꾸로 던져져야 한다. 이제 정상적이고 건강한, 행복한 그녀를 받아들일 자리가 방랑자에게 여전히 있을까? 그가 과연 그녀를 아직도 사랑할까? 이웃과의 거리는 평화를 위한 절대적 조건이다. 이웃이 우리의 사랑을 받을 만한 대상a를 갖고 있다고 가정되는 한, 우리는 그들을 사랑할 것이다. 사랑에는 상상적인 무엇이 있고, 그것이 있어야 공동체라는 이웃관계도 성립하는 것이다. 즉 이웃과 소통하는 편지에는 무언가 정답고 사람다운 뭔가가 있을거야, 라는 가정이 무너질 때, 겉봉 속에는 아무 것도 없고 진짜 메시지는 단지 겉봉일 뿐이란 사실은 무시무시하다. 겉봉을 뜯음으로써 마주칠 파국을 면하기 위해 우리는 끊임없이 편지를 보내기만 할 뿐이다(행운의 편지!). 편지 자체는 결국 도래할 파국이 봉합된 물질적 잔존일 따름이다.

 

 

[2] 상상계, 상징계, 실재

 

 

데리다는 편지가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을 가능성은 왜 없느냐고 묻는다. 틀렸다. 편지는 늘 도착하고야 마는데, 목적론적 환영이 항상 있어서 편지의 도착을 필연코 성립시키기 때문이다. 편지의 발송자는 누가 그걸 받든, 부치는 순간 이미 대타자에게 송달됨을 전제한다. 즉, 편지를 쓰는 순간 이미 그것은 도착한 것이다(서간문학).

 

상상적 인지(오인)

알튀세르에 의하면 우리는 이데올로기적 호명의 수신인으로 오인하게 되어 있다(오인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니다!). 목적지의 정확한 주소는, 어디든 그것이 배달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편지는 그것의 도착지를 상징계의 한 장소로 설정한다. 문제는 그 장소를 우연하게 차지하는 누구든지 필연적으로 편지의 수신자가 된다는 사실이다. 수신자를 결정하는 것은 그의 정체성이 아니라, 그 장소다. 누가 왜 거기에? 라는 우연을 부르는 명칭이 운명인 것이다. 그 장소에 있게 된 우연한 계기는 그 운명(실재)의 한 조각으로서 기능한다. 수신인은 정해져 있지 않다. 누구든 그 편지가 도착한 장소에 걸려들게 될 때, 자신을 수신인으로 오인한다는 게 중요하다.

 

 

상징적 회로I : ‘메타언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편지의 도달은 항상 연루됨을 전제한다. 아름다운 영혼마냥 홀로 세계의 비참으로부터 면제된 채 관조하는 주체는 없다. 역으로 그의 능동적 개입만이 세계의 비참과 불행을 조장하는 것이다. 세계와 자기를 파괴하는 고통스런 기쁨, 즐거운 비탄이 향락이다. “라캉은 영웅을 자기 행위의 결과들을 완전히 떠맡는 주체, 말하자면 자신이 쏜 화살이 완전한 원을 그리고 자신에게 되돌아올 때 옆으로 비켜서지 않는 주체로 정의한다.” 이러한 자기-연루야말로 편지가 항상 그 목적지에 도달하게 되는 본질적인 이유다. 니가 보냈으니 니가 받는 게 당연하지 않단 말인가? 내가 언제? 정신분석적 해석의 무시무시함은, 지엽적인 것(‘단추’)이 우리의 일상전체가 탈구되지 않도록 지지하는 근본적인 매듭임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아무 의미없고 하찮은 것일지라도, 그것을 잃어버리는 순간 삶은 돌이킬 수 없이 파괴될 것이다.

 

상징적 회로II : 운명과 반복

운명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상징적 부채는 변제되지 않을 수 없다. 목적지에 도착한 편지는 부채의 청구서인 셈이다. 타인을 위한 자기희생이란 테마는 일견 이타적인 숭고를 발휘하는 듯보이지만, 실제로는 자기의 부채를 자기에게 지급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항해자여>의 샤를로테는 자신의 성생활을 포기함으로써 어린 소녀를 구제하는 듯보이지만, 사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상하기 위해 구제를 행한 것이다. 그녀가 부친 편지가 그녀에게 되돌아왔고, 운명은 반복된다.

 

실재의 만남

죽음은 어느 누구도 반송할 수 없는 편지다. 마치 죽음의 편지가 우리를 찾아 헤매는 동안 우리가 살아가듯, 지불이 완료되지 않은 상징적 부채가 우리의 경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실재는 오히려 삶에 긴밀히 연관된다. 실재는 죽음이자 삶인 것이다. “삶의 충동과 죽음충동이라는 프로이트적 이원성은 상징적 대립이 아니라 전 상징적인 실재에 본래적으로 내재하는 긴장이고 적대다. 삶이라는 관념 자체가 상징적 질서에는 낯선 것이다.”

 

 

2. 왜 여자는 남자의 증상인가?

 

 

[1] 왜 자살은 유일한 성공적인 행위인가?

 

 

실재의 대답으로서의 행위

로베르토 로셀리니와 잉그리드 버그만. 실재의 응답. 정신분석의 핵심은 화행으로서의 언어에 있다. 처음부터 정신분석은 물질적 차원이 아니라, 말을 통한 치료라는 차원에 집중했었다(라이히의 일탈). 잃어버린 기억의 재생으로서 정신분석의 초점은, 과거를 현재에 불러냄으로써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창출한다는 데 있다. 이 과정이 끝나면, 주체는 더 이상 이전의 주체와 같지 않은 것이다.

 

<독일영년> : 말은 더 이상 강요하지 않는다.

상호주관적 공간은 수행적 차원에 의해 구성된다. 우리는 타인이 누구라고 그의 정체성을 확신할 때, 또한 우리가 누구라고 우리의 정체성을 타인이 확인할 때 공동체를 가정할 수 있게 된다. 상징적 동일시의 변증법, 상징적 위임의 변증법이란 이것이다. 가면을 벗고 진실된 너의 모습을 보는 것은 너와 나의 관계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차라리 거짓된 가면만이 우리 관계를 조화롭게 해줄 것이다(마음둘데 없이 방황하려면 차라리 교회라도 다녀라. 나는 안 갈거지만). 가면 안쪽의 맨얼굴을 볼 때 진정성이 성취되리란 기대를 버리라. 오히려 그런 것이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거짓이며, 無이다. 더구나 가면은 우리를 그 가면의 인격으로 만들어준다(수행성). 가면을 썼기에 우리는 우리인 것이다. 여기서 유일한 진정성이란 가면을 벗으려는 노력이 아니라, 그 가면이 가정한 인격을 가능한 한 최대한 진지하게 취하는 데 있다.

 

 

<독일영년>의 에드문트는 파시즘에 희생된 가련한 어린혼인가? 이 영화의 규정불가능성은 오히려 에드문트가 벌인 절대적 자유의 행위에 있다. 그는 말 속에서, 이데올로기 속에서 행위의 정초가 실패하는 지점을 드러낸 것이다. 친부를 독살하는 에드문트는 그 어떤 동일시도 허락하지 않는다. 관객들은 감정이입하기보다 끔찍한 이물감에 차서 그를 바라본다. 에드문트-주체는 텅빈 장소로 자신을 비워냈다. 상징적으로 죽음으로써 말(이데올로기)이 강요할 수 없는 공백으로 나아가는 데 성공했다(정신병). 이로써 에드문트는 순수한 자유, 자유의 절대성을 획득한 것이다.

 

<유럽 ‘51> : 죄의식 속으로의 탈출

이레네의 죄의식은 무얼까? 자기 죄를 달게 받는 숭고한 속죄인가? 오히려 죄의식을 떠맡음으로써 죄라는 외상으로부터 탈출한 게 아닐까? 죄의식 속으로의 탈출과 도피. 주체는 왜 그런 짓을 하나? 대타자의 비일관성과 무능을 감추기 위해. 숨은 작인으로서의 대타자(섭리, 이성의 간지, 보이지 않는 손, 역사의 객관적 논리, 유태인들의 음모)는 모든 것을 다 안다고 가정된 주체다. 대타자가 위협적인 것은 바로 피분석자의 향락을 박탈할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대타자는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닌, 알아서는 안 되는 주체이기도 하다. 대타자는 순수한 외관의 존재로서, 외관으로 족하지 외관 너머의 허술함이 결코 들켜서는 안 되며, 대타자 자신이 그것을 아는 것은 더욱 위험한 일이다. 공산주의 사회의 완벽함은 그것을 완벽한 것인양 말하고 행동하는 주체들의 수행성에 의해 작동한다. 완벽한 사회의 외관은 보존되어야 하는데, 왜냐면 그 보존된 완벽함을 통해 주체들은 완벽한 사회의 완벽한 주체들로 호명되기 때문이다. 아무도 믿지 않지만 모두가 믿고 있다고 가정해야 하는 대전제는 공산주의의 완벽함에 대한 믿음이다. 그 믿음에 금이 가는 순간, 사회의 일상은 무너지고 대파국이 도래하리라는 공포가 다시 그 믿음을 떠받친다. 설령 내가 간첩질을 안 했더라도, 공산주의 사회가 부패하고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보다는 내가 간첩질을 했다고 죄의식을 떠맡는 게 더 낫다.

 

 

<스트롬볼리> : 자유의 행위

“현실에서의 자살은 상징적 소통의 그물망 속에 붙잡혀 있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주체는 대타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려 시도한다. 즉, 그것은 죄의식의 승인, 정신을 맑게 하는 경고, 감상적인 호소로서 기능하는 행위인 반면, 상징적 자실은 주체를 주체들 간의 회로로부터 배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acting out vs. 행위로의 이행). 후자는 단순히 무언가를 했다는 게 아니다. 행위로 이행한 후, 이전과 이후의 주체는 판연히 다른 존재가 된다. 그런 점에서 행위는 ‘미친짓’이자 ‘범죄’, ‘위반’으로 등록되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로 맺어진 관계는 그것이 어떤 형태든 연속적이며, 새로운 게 없다. 새로운 것은 오직 그 연속성이 파열된 후에만, 본질적으로 부산물로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것은 정초가 아닌 파열과 단절로서 생겨나며, 여성적이다(안티고네).

 

 

[2] ‘세계의 밤’

 

 

정신분석과 독일관념론

현실과 심리의 이원론에 대한 통상의 설명은 후자가 전자로부터 이탈되는게 증상이고, 전자에 후자를 일치시키는 게 치료하는 것이다(자아심리학). 이를 지배질서에 대한 타협으로 간주하는 맑스주의도 사정은 비슷한데, 거부할 수 없는 객관으로서 현실이 상정되는 탓이다. 어쨌든 현실과 심리의 분열은 비정상이며 일시적인 이탈로 간주된다. 프로이트의 선견지명은 정반대다. 심리와 현실은 구성적으로 불일치하고, 본래 통합되지 않는 인간조건이다. 가령, 죽음충동은 심리가 교란되는 원인이 외부(현실)에 있는 게 아니라 본원적으로 심리 내부에 있음을 보여주는 가설이며, 쾌락원칙의 한계는 외부(현실)가 아니라 그 내부에 있음을 보여준다. 대상a는 쾌락원칙의 회로를 강제로 개봉하는 한계이며 장애물로서, 향락의 위치, 충동의 궤적을 보여준다.

 

 

대상a는 실정적 실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쾌락원칙이 봉합되지 않게 찢어진, 그럼으로써 외적 세계에 눈길을 돌릴 수 있게 하고 현실과 이어지게 만드는 틈새다. 우리가 현실에 다가가는 것은 그 틈새를 경유함으로써만 가능하다. 향락/실재가 상징계를 지지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그렇다면 현실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이 과정을 경유한 다음에 나타나는 구성된 무엇이란 말이 된다. 현실은 쾌락원칙의 내부순환을 ‘거부’함으로써 구성된 결과다.

 

 

현실이라는 허구

현실은 구성되었고 주체에 의해 정립된 것이다. 헤겔이 보여주듯, 현실/상징계는 이름을 부여하는 힘으로서 언어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데, 즉 어떤 시원적 전체성(‘세계의 밤’)이라는 가정된 대상에 말의 폭력을 가해 만들어진 효과가 우리 앞의 세계인 것이다. 라캉의 힘으로서의 기표에 정확히 대응하는 이 도식은, 우리의 현실이 존재론적으로 본래 무효임을 드러낸다. 문제는 그래서 말짱 헛소리라고 냉소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그 허구를 통해 우리 존재의 일관성을 보증받기 때문이다(가령 조국, 국가). “인간이란 그의 삶이 상징적 후구들에 의해 통치되는 동물이다. 이것이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가 일어나는 방식으로, 부정성 자체가 긍정적인, 일정한 존재를 획득하는 방식이다. 공동체의 현실적 삶이 상징적 허구들에 준거함으로써 구조화되는 것.” 행위란 상징적 허구의 그물망을 정지시키고, 그 허구가 정초하는 부정성과 다시 대면하는 것을 가리킨다.

 

 

행위는 온갖 질서, 말을 넘어서 무언가 몸을 움직거려보자는 즉자적 차원에서 이해될 때 쉽게 통속화된다(먹물들이 뭘 알아? 혹은 먹물이라 죄송해요). 우리가 뭘하든 일상에서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상징적 그물의 도식들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 상징의 그물을 찢는 행위는 적합한 말을 통해 테마화됨으로써, 말-행위가 됨으로써 절대적 행위성을 획득해야 한다. 달리 말해, 어떠한 담론적 준거를 갖출 때 비로소 우리는 행위로의 이행을 감행할 수 있다(나는 99%다! 우리는 모두... 다!). 이는 또한 우리가 이방인의 위치를 차지할 때, 외부의 응시가 자리한 위치를 발견하고 자리할 때 현실화된다.

 

 

희생의 매혹

정신분석의 영웅주의. 대개 희생이란 대타자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현실적 일관성을 위해 미리 전제된 구조를 유지시키려는 짓거리에 불과하다. 그래서 희생이 비록 그것이 의도한 바에 실패하더라도, 결과적으로 전체 구조를 유지하는 데는 성공하는 것이다(적의 탱크를 향해 폭탄을 안고 돌진하는 병사와, 탱크가 파괴되지 않았음에도 그의 희생이 다른 병사들 사이의 숭고한 일체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 따라서 진리의 효과는 그 상징계 내부와 외부의 두 시각을 동시에 교차시킬 때 나타난다. 특히 후자의 시점에 신체를 부여하고 목소리를 내게 하여 주체화하는 것이야말로 관건이다.

 

 

통상의 영웅주의를 전복시키는 효과는 무엇인가? 영웅적 행위 너머로 아무것도 없음을 보여주는 것. 폭탄을 안고 몸을 던진 병사의 희생은 그의 고유한 윤리적 행동을 보여주는 것이지, 그 너머의 조국의 명령 따위는 없음을 알려주는 것. 대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네가 희생하면 조국/그리스도가 응답할 것이란 기대를 버려! 너의 희생이야말로 거꾸로 네가 믿는 그것의 선 정립하는 행위니까. 주체의 궁핍이란, 이러한 환상들을 걷어내는 것, 대타자에 대한 기대를 기각시키는 것이다. 네 곁에는 항상 너를 이해하고 사랑해줄 이웃이나 조국 따위의 대타자가 없다. 상징적 망은 네가 정립하는 것이니까.

 

 

로셀리니 영화에 대한 세련된 비평은 그의 작품이 개방된 것이라고, 열린 예술이라고 상찬하는 것이다. 마치 우연에 모든 것이 맡겨져 있고, 거기서 일어나는 사건들이 있는 그대로 보여지는 것이라는. 하지만 라캉의 말대로, 신이 없다면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기에, 오히려 그런 해석이야말로 로셀리니 영화가 대타자를 전제한다는 것을 가장 확고히 보여주는 셈이다. 차라리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하다. 로셀리니는 자신의 영화에 조작과 통제의 오성적 노력을 가했다고(주체화, 행위의 테마화). 무단히 흩뿌려지는 우연의 파편들을 안간힘을 쓰며 붙잡아 직조하려는 노력과, 그것이 무망하게 분해되는 실패의 기념비가 그의 영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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