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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딱하게 보기, SlavojZizek, 김소연, 유재희 옮김, 1995, 52-103(실재와 그 변이 the real and its vicissitudes) : 요약 발제 진쫑

2. 실재와 그 변이

실재는 어떻게 귀환하고 응답하는가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

충동에 대한 라캉의 공식이 S◇D인 이유는 첫 번째, 충동들이 정의상 부분적이며 육체 표면의 특정 부위들소위 성감대라고 부르는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충동은 사실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대한 의미화 작용적 구분parceling의 결과인 것이다. 육체 표면의 특정 부위들은 그 해부학적 위치 때문이 아니라, 신체가 상징적 그물망에 걸려드는 방식 때문에 성적으로 특권화된다. 이 상징적 차원은 라캉의 공식에서 D, 즉 상징적 요구로 명시된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결정적인 증거를 히스테리적 징후 속에서 흔히 마주치는 현상보통은 성애적 가치가 없는 육체의 특정 부위가 성감대로서 기능하기 시작하는에서 볼 수 있다.(, 코 등).
 
또한 이것은 충동과 요구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충동은 바로 욕망의 변증법에 포획되지 않는, 다시 말해 변증법화에 저항하는 요구다. 여기는 요구는 거의 언제나 어떤 특정한 변증법적 매개를 포함한다.(53) 문자 그대로의 요구, 나는 이것을 요구하지만 실제로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되뇌며 변증법적 술책으로는 잡을 수 없는 기계적인 고집스러움으로 이를 관철시킨다.

요구와 충동의 구분에서 우리는 두 번째 죽음의 관계를 주시한다. 유령들이 욕망 없는 순수한 충동의 화신이 된다. (안티고네가 오빠에게 적당한 장례를 고집하는 무조건적 요구, 햄릿의 아버지 유령이 햄릿에게 자신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요구하는 것, 뼈대만 남아 있을 때도 자신의 희생물을 추적하도록 프로그램된 로봇<터미네이터>(54), 자신의 생일파티 때 거듭 자신의 케이크를 고집하다가 딸에게 죽임을 당한 아버지가 무덤에서 나와 딸을 죽이고 아내의 머리를 잘라 쟁반에 얹은 다음 크림을 바르고 촛불로 장식한 뒤 만족해 하는 요구<크립쇼creepshow>, 인간 육체의 죽음 후, 로보캅으로 살아나 인간으로서의 삶의 기억하면서 점점 순수한 충동의 화신에 욕망의 존재로 재주체화되는 과정<로보캅>) (55) . 이것은 바로 살아있는 시체들의 귀환이라는 환상, 즉 죽음에 머무르려 하지 않고 거듭 산 자를 위협하기 위해 귀환하는 사람에 관한 환상일 것이다. 죽은 자는 왜 귀환하는가에 대한 라캉의 답변은, 그들이 제대로 매장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무언가가 그들의 장례식을 망쳐버렸기 때문에 귀환한다는 것이다. 죽은 자의 귀환이란 육체적인 사망을 뛰어넘어 지속되는 어떤 특정한 상징적 채무를 물질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6) 장례식이 가장 순수한 상징화의 예증인 것은 죽은 자는 장례식을 통해 상징적 전통의 텍스트 속에 각인되며,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의 기억 속에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받는 것이다. 이는 장례식이 상실에 대한 체념과 수용을 함축하는 반면 죽은 자의 귀환은 그들이 전통의 텍스트 안에서 정당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물론, 홀로코스트holocaust나 굴락 수용소군도gulag의 유령들 같이 그들 죽음에 대한 외상을 역사의 기억 속에서 통합시킬 때까지 우리를 추적하는 것도 있고, 최초의 부친 살해(원죄) , 죽은 아버지가 아버지의 이름의 상징적 대리자로 다스리기 시작해야(프로이트_토템과 타부) 부친 살해는 상징계로 통합 되는 것이다). 이러한 변형, 이러한 통합은 잔여없이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잔여가 언제나 존재한다.

애완동물 묘지의 저편

오이디푸스 신화 및 『토템과 타부』의 최초의 아버지 신화는 대개 동일한 신화의 두 가지 변형으로 이해된다.(57) 즉 최초의 아버지 신화는 주체의 개체 발생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인 오이디푸스 신화를 신화적이고 전역사적인 과거 속에다가 발생학적으로 투영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오이디푸스 신화가, ‘우리가 쾌락(enjoyment)에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대리자로서 부정하는 아버지를 전제로 부친살해가 이러한 장애를 제거해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금지된 대상을 충분히 즐길 수 있게 해주리라는 사실과, 최초의 아버지 신화가, ‘부친 살해의 결과는 장애의 제거가 아니며 궁극적으로 쾌락(enjoyment)은 우리에 수중에 들어오지 않고 죽은 아버지가 금지된 쾌락의 열매에 대한 접근을 결정적으로 가로막는 상징적 법의 대리자로서 다스린다는 점에서 두 신화는 대립적이다. 『토템과 타부』에서 최초의 아버지 신화는 쾌락의 아버지라는 외설적인 형상으로 금지의 대리자 역할을 취하는 바로 그 형상으로 이 불가능한 쾌락을 구현함으로써 오이디푸스 신화를 보완한다. 하나의 주체_모든 여성을 소유하는 최초의 아버지_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환영이다.(58) 쾌락의 아버지의 형상이란 그가 결코 살아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간과하는 신경증적 환상에 불과하다. 이는 초자아의 불합리하며 예상 밖의 결과를 가져오는 엄격한압박을 합리적으로 인정된 중지, , 규칙들로 대체한다고 해서 그 압박이 축소되지 않고 오히려 쾌락의 일부가 아예 처음부터 상실되었다는 것, 그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하며 다른 어떤 곳즉 금지의 대리자가 이야기하는 장소에 집중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살아 있는 시체들의 귀환을 소설화한 스티브 킹의 <애완동물 묘지pet cemetery>는 외설적인 유령의 형상으로 귀환하는 죽은 아버지라는 모티프의 반전을 보여주는데(59) 이는 크리드가 현대의 파우스트적 영웅이 논리상 어떻게 귀결하는가를 재현하는 일종의 도착된 <안티고네>.

죽지 않으려는 시체

히치콕의 <해리의 곤경the trouble with Harry>은 죽은 자도 재미있는 방식으로 귀환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61) 이 영화의 교훈은 어떤 위안을 제공하는 금언__ 인생을 너무 진지하게 살지 말자. 죽음이나 성욕은 결국 하찮고 허망한 것들이므로__으로 요약될 수 없으며 쾌락주의적이며 무엇이든 묵인해주는 태도를 반영하는 것도 아니다. ‘쥐 사나이 rat man’에 대한 분석 결과 프로이트가 기술한 강박적 성격과 마찬가지로 <핸리의 곤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공식적 자아official ego’, 즉 개방적이고 관대한 성격은 모든 쾌락을 차단하는 규칙과 금지의 그물망을 은폐한다. 해리의 육체를 마주 대하는 인물들의 아이러니적인 초연함은 기저에 깔린 외상적 콤플렉스에 대한 강박적 중화(obsessional neutralization)를 드러내는 것이다. 아버지의 실재적 죽음과 상징적 죽음 간의 분열에 의해 체결된 상징적 채무로부터 실제로 강박적 규칙들과 금지들이 생겨난 것처럼(‘쥐 사나이의 아버지는 자신의 계산을 청산하지 않은 채죽었다) ‘해리의 곤경은 그의 육체가 상징적 차원에서 죽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에 있다. 따라서 이 영화의 부제는 죽지 않으려는 시체가 될 수 있을 것이다.(62) <해리의 곤경>은 전반적인 관점에서 볼 때 파국적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부는 아닌의 차원을 고려한다면 그것이 그리 심각한 어려움인 것은 아니다. ‘과소진술의 비밀은 바로 전부는 아닌 the pas-tout(not-all)’의 차원을 조사하는 데 있다. 그것은 전부가 아닌을 환기시키기에 적절한 영어식 표현이기 때문이다. ‘최악의 것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닌것으로 전환하여 하나하나씩 그 구성요소들이 비교되는 순간(전반적인 구조틀 속에서) 그것보다 더 나은 것은 있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정통 정신분석학 전통의 전반적인 구조틀 속에서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의심할 여지없이 최악의 것”, 총체적 파국이다.

실재의 응답

라캉의 실재의 역할은 근본적으로 애매하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균형을 탈선시키면서 외상적 귀환의 형태로 분출하지만 동시에 바로 이러한 규형을 버텨주기도 한다. 실재의 응답 속에서 몇몇 지원이 없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은 힘들어질 것이다.(66) 스티븐 스필버그의 <태양의 제국empire of the sun>에서 짐의 기본 문제는 육체적, 정신적 생존이다. 짐의 사회적 현실은 그의 부모의 고립된 현실이고 따라서 그는 거리를 두고 중국의 비참함을 인지한다. 짐은 부보의 롤스로이스 자동차 창문을 초해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를 발견한다. 그 때까지 자신이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외설이고 잔인한 세계로 던져졌다고 깨달았을 때 생존의 문제가 시작된다. 이 현실성의 상실에 대해 이러한 실재계와의 조우에 대해 짐이 가장 먼저 그리고 자동적으로 보인 반응은, 상징화의 일차적이고 남근적인 몸짓을 반복하는 것, 다시 말해 그의 전적인 무능력을 전능성으로 바꾸는 것, 실재의 침입에 대해 근본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처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가 피난해 있던 호텔에 일본이 포격을 가한 것을 두고 현실감을 유지하기 책임을 떠맡고 스스로 죄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영국 아가씨가 필사적으로 마사지하여 잠깐 눈 뜬 그녀를 보고 죽은 사람을 소생시킬 수 있다는 황홀경에 빠지는 것을 보면 어떻게 무능력을 전능성으로 바꾸는 그와 같은 남근적 전도inversion가 실재의 응답으로 속박되는가를 볼 수 있다. ‘병적인경우에 한정되는 것과 거리가 먼 이러한 실재의 응답은 상호주관적 의사소통이 발생하는 데 필수적인데 그러한 예는 루스렌들의 <이상한 사람들에게 말하기talking to strange men> 에서 잘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의사소통이 성공적인 오해라는 라캉의 논제를 완벽하게 보여는 일단의 상호주관적 짜임관계constellation을 구성하고 있다.(70) 실재는 상징화에 저항하는 어떤 것으로서 상징계로 통합될 수 없는 무의미한 잔여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상징화, 상징계의] 최종적인 버팀대로서 기능한다. 기호는 임의적인 지표mark와는 반대로 실재의 응답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사회적 위기(전쟁, 재해)의 순간에 이례적인 천체의 현상(혜성, 일식, 월식 등)이 예언적 기호들로 해독되는 것이다.

왕은 별 것 아닌 것이다

우리의 상징적 현실을 지지해주는 실재가 우연히 발견되는 것으로 생각되어야 하며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스렌들의 <손들의 나무>에서 살피면, 거기서 렌들은 프로이트의 충동 개념에 관한 교훈과 다르게 말한다. 그것은 만일 어떤 대상이 리비도적 공간 속에서 자신의 장소를 차지하려면 그 임의적인 성격을 은폐한 채로 남아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72) 라캉은 어떤 대상이든 사물의 빈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대상이 언제나 이미 거기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기서 실재의 응답으로서 발견된 것이었다는 환영illusion을 수단으로 해서만 빈 자리를 점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적 필연성은 인간 대 인간의 관계들 속에서 물신숭배적 전도의 논리에 대한 파스칼-맑스적 설명에 새로운 관점perspective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준다. 주체들은 어떤 한 개인이 이미 본질적으로 왕이기 때문에 그를 왕으로 대우한다고 생각한다(실제로는 주체들이 이 사람을 왕으로 대우하는 한에서만 그가 왕인데도) 맑스와 파스칼의 기본적인 역전은 그들이 왕의 카리스마를 사람인 왕의 직접적인 속성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주체들의 태도의 반성적(reflexive) 결정, 혹은 발언행위 이론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들의 상징적 의식의 수행적 효과로서 정의하는 데 있다.(73)  그런데 여기에서 왜 상징적 메커니즘은 실재의 어떤 조각인 사물에 고정되어야 하는가에 대해 라캉은, ‘상징적 장()은 본질적으로 언제나 이미 나의 내밀함의 중심에 있는 낯선 extimate 중핵에 가로막혀 있고 불구가 되어 있고 구멍 나 있으며 위와 같은 중핵(kernel), 즉 어떤 불가능성을 둘러싸고 구조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재의 작은 조각의 기능은 바로 상징계의 중심부에 크게 벌어져 있는 공백을 메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실재의 응답은) 때로, 상징적 현실을 떠받쳐주는 정신병적 중핵인데도 이는 카사노바의 도착적 경제(옥타브 만노니 논문에서의 벼락이 나를 때리지 않을 거라는)에 있어서 대립적인 방식, 즉 현실성의 상실을 촉발하는 충격으로 기능한다.(75)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실재의 응답의 궁극적인 형태로서, 생태학적 위기를 생각해 보면, 생태학적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이들의 전형적인 반응이 리비도적 경제의 차원에서 볼 때강박적이라는 것 역시 사실이다. 생태학적 위기에 대한 세 가지 반응은 첫째,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어, 하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어. 다 마찬가지라고”, 둘째, 강방적 행동, 셋째, 그것을 어떤 숨겨진 의미를 담고 있는 기호로 파악하는 것이다. 실재와의 대면을 회피하는 방식으로, 첫 번째 반응은 물신숭배적 분열, 위기의 상징적 효력을 중화시킴으로써 물신숭배를 부정하고, 둘째는 위기를 외상적 중핵으로 실경증적으로 변형시키고, 셋째는 위기를 실재 자체를 향해 정신병적으로 투사하는 것이다. 생태학적 위기를 강박적 행동에 의해 거리를 두고 유지되어야 하는 외상성의 중핵으로 파악하거나 메시지를 담지하는 것으로, 자연 속에서 새로운 뿌리를 찾아내라는 요청으로 파악한다면 나머지 두 경우 모두에게 실재를 그 상징화의 양상으로부터 분리하는 환원할 수 없는 간격을 볼 수 없도록 스스로 눈을 가리는 셈이다. 적절한 유일한 태도는 이러한 간격을 우리의 인간적 조건을 규정하는 것으로이다. 물신숭배적 부정을 그 간격을 유보하거나 강박적 행동으로 그것을 은폐하거나 (상징적) 메시지를 실재에 투사함으로써 실재계와 상징계 사이의 간격을 축소시키려 하지 않고 말이다. 인간이 말하는 존재라는 사실은 바로 인간을 구성하는 본질 자체로 볼 때 인간이 탈선해 있다는 것을, 즉 상징성 구성체계edifice가 회복시키려 헛되이 노력하는 환원 불가능한 균열을 표지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균열은 상징적 구성체계의 약점을 상기시키기도 하는데 그 하나가 체로노빌 방사물 사고이다. 이는 두 번째 죽음이라고 부른 것의 위협과 대면시켰다. 세계의 벌어진 상처가 결국 인간 자신이다. 프로이트는 인간에게 잠재하는 충동이란 사물, 즉 비어 있는 장소에 대한 충동들의 외상적 결부에 의해 이미 근본적으로 탈자연화되고 탈선해 있는, 또한 인간을 영원히 삶의 순환운동으로부터 배제하며 근본적인 파국인 두 번째 죽음 임박한 가능성을 열어주는 충동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의 결과라고 주장한다. 이제 이 재배적인 강박적 경제에서 우리 스스로 벗어나려면 한 걸을 더 나아가 죽을 지경으로 병든 자연으로서의 인간이 개입함으로써 엉망이 되어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자연의 균형이라는 바로 그 관념을 폐기해야 한다. 라캉이 여자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명제에 상응하여 어쩌면 자연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실재는 어떻게 표현되고 어떻게 아는가

실재를 묘사하며

실재의 모호함은 단순히 외상적 귀환응답의 형태로 상징적 질서 내에서 갑작스럽게 출현하는 비상징화된 중핵인 것인 아니다. 그 실재는 동시에 바로 상징적 형식 속에 포함되어 있는 실재는 이러한 형식에 의해 직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라캉은 『앙코르encore』에서 기호, 바로 기표와 대립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다시 말해 실재와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으로서의 기호의 개념을 복귀시키면서 기표의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문자의 지위를 말한다(1962년과는 다르게). 일례로 미셸 시옹Michel Chion이 모방표현rendu 개 모사물 개념을 통해 한계를 지은 것이 이러한 문자-쾌락의 지위이기 때문이다. 모방표현은 영화에서 현실을 묘사하는 제3의 방법으로서 (상상적)모사물simulacrum 및 상징적 약호와 대립되는데 그것은 상상적 모방에 의한 것도 상징적으로 약호화된 재현에 의한 것도 아닌 현실의 직접적인 표현에 의한 것(음향을 예로 듦)이기 때문이다.(84) 디제시스적 공간에 적응할 수 있게 해주는 기본적인 참조의 틀로서 기능하는 것이 아니라 사운드트랙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조망perspedctive, 지도를 제공하며 상황의 연속성을 보장하고 반면 이미지들은 포괄적 매체 속(음향의 수족관)에서 떠다니는 고립된 파편들로 환원된다. 정신병에 대한 좋은 은유다. 사물들의 정상 상태와는 반대로 상징계의 고립된 섬들을 에워싸는 실재의 수족관을 경험한다. ‘모방표현된실재란 프로이트가 심리적 현실이라고 불렀던 것과 같다. 데이비드 린치의<엘리펀트 맨elepahant Man>에 나오는 심장 박동소리와 기계의 규칙적인 리듬 사이의 어디쯤에서 나오는, 상태가 일정하지 않은 리드미컬한 비트가 전부인 것이다. 이 소리들은 심리적 현실의 실재이다.  이러한 모방표현의 효과는 고전 영화(40년대말~50년대 초에 만들어진)들에서 볼 수 있는데 이 모두는 정상적인내러티브 진행과정에서의 중심 요소들인 형식적 요소들의 금지에 의해 구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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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몽고메리 <호반의 여인lade in the lake>
à객곽전 쇼트금지, 주관적 쇼트, 카메라의 눈=주인공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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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히치콕 <밧줄rope>
à 몽타주의 금지, 롱쇼트(10,기계적 한계에도 화면을 어둡게 처리, 이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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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 로우즈 <도둑 the thief>
à 음성voice 금지(보통의 영화는 대화에 의지)

이 세가지 금지들(영화들)은 유일하고(hapax), 밀실공포증적인 폐쇄적이고 자폐증적으로 각기 고유한 정신병을 만들어낸다. <호반의 여인>객관적 쇼트의 금지를 통해 편집증적 효과를 낳고, <밧줄>은 몽타주의 금지를 통해 정신병적인 행위 이행을, <도국>은 음성을 금지함으로써 정신병적 자폐성, 즉 상호주관성으로 이뤄진 담론의 그물망으로부터의 고립을 표현한다.(89) 여기서 영화의 메시지는 바로 형식 그 자체다. 이들 영화가 기반으로 삼는 금지는 금지되지 않았을 수도 있는 어떤 것의 금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어떤 것(상징적 거세, 근친상간 금지와 같은 본질적으로 달성할 수 없는 Jouissance의 금지를 규정하는 근본적인 패러독스)이 아닌 것이다. 여기에는 참을 수 없는 근친상간의 숨막힐 듯한 느낌이 있다. 상징적 질서를 구성하는 근본적인 금지는 결여하는 것lacking이며 그것을 대체하는 임의적인 금지는 이러한 결핍에 대한, 즉 결핍 그 자체의 이러한 결핍에 대한 증거를 구현하고 담지할 뿐이다.

 

실재 내의 지식

만일 모든 상징적 형성 속에 작동 중인 정신병적 중핵이 존재한다면, 또 이러한 형식이 궁극적으로 의미화 연쇄(S2), 즉 지식의 연쇄 형식이라면 적어도 어떤 특정한 차원에 실재 자체 속에서 작용하는 지식이 존재해야 할 것이다. 톰이 절벽이 있다는 것을 모르고 제리를 추격하다가 깨달았을 때에야 떨어지는 것 같은 행동, 꿈의 해석에서 아버지가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실에는 어떤 환상의 시나리오가 지원되고 있다. 특정한 국가나 이데올로기적 장치들에서 우리는 종종 동일한 느낌과 마주치는데 비록 그것들이 시대착오적이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스스로 그 점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존속하다. 누군가는 이 불쾌한 사실을 그들에게 일깨워주는 무례한 의무를 떠맡아야 할 것이다.(91) ‘심리적 현실속에서 우리는 말 그대로 어떤 오인을 기초로 해서만 존재하는 다시 말해 주체가 무엇인가를 모르는 한에서만 무엇인가가 이야기되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따라서 상징적 세계로 통합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만 존재하는 일련의 실체들와 만난다. 자아는 무엇보다 이러한 질서의 실체다. 그러나 주체가 지나치게 많이 알게되는 순간, 즉 무의식의 진실에 필요 이상 가까이 접근하게 되는 순간 그의 자아는 와해된다. 오이디푸스가 마침내 진실을 알게 됐을 때 그는 실존적 발붙일 땅을 잃어버리게도며 참을 수 없는 공허를 느끼는 것이다. 이러한 패러독스는 우리가 특정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무의식은 억압이라는 방어기제로 인해 주체가 그에 관해서는 아무것도(예를 들면 그의 도착적, 불법적 욕망들) 알지 못하는(알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실체라고 가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무의식은 오히려 어떤 비지식__ 무의식의 명백한 존재론적 조건은 무엇인가가 상징화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것, 즉 무엇인가가 말로 표현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_의 토대 위에서만 그 일관성을 유지하는 긍정적인 실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는 징후에 대한 가장 일차적인 정의이기도 하다. 징후란 주체가 자신에 관한 어떤 근본적인 진실을 무시해야만 존재하는 어떤 특정한 형성물인 것이다. 그 의미가 주체의 상징적 영역으로 통합되는 순간, 징후는 스스로 와해된다. (초기 프로이트의 해석과정의 전능성) 아지작 아시모프Isaac Asimov의 단편소설<신의 90억 가지 이름들>에서 징후의 논리는 그러한 세계, 현실이란 항상 징후라는 것, 다시 말해 어떤 핵심기표의 사전처리foreclose(폐제)에 기초한 것이라는 라캉의 기본 테제를 확증해 준다. 현실 그 자체는 상징화 과정에 있어서의 봉쇄bockage를 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가 말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라캉이 기표의 논리에서 공식한 개념들, 즉 어떠한 과학적 가치도 없는 패러독스들을 가지는 노는 단순한 지적 유희로 보일 수도 있는 개념들 전체는 소립자 물리학의 몇몇 핵심 개념들(실재 내의 지식의 성과), 몇몇 핵심 개념들에 상응하는 것이다. ‘실재적시간과 상상적 시간간의 구분이 우리가 우주를 개념화하는 두 가지의 유사한 방식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스티븐 호킹은 명확히 지적하고 있다. ‘남성적masculin’측면을 남근적 배제를 통해 구성된 보편적 기능으로서, ‘여성적female’ 측면을 전부는 아닌비보편적인, 그러나 배제는 없는 하나의 세트로 규정하는 라캉의 성차 개념화가 우주의 원리에도 부합되는 것이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지식, 우리가 실재를 상징화하는 방식은 궁극적으로 항상 그와 같은 언어 고유의 역설들과 결부되고 결정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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