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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정신분석 제3기 “지젝과 이데올로기의 문제”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박정수 역, 인간사랑, 2004) - 반장님 발제

 

 

제2판 서문 오직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향락

 

 

변증법적 유물론을 향한 험난한 도정

<숭고>의 철학적 결함으로서 라캉에 대한 유사-초월적 서술. 모든 행위는 실패한 행위이며, 진정으로 윤리적 자세는 그 실패를 마다않는 태도라는 식의 서술은 문제적(이것이냐 저것이냐). 그러나 실재-상상-상징의 삼항구조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1) 실재적인 실재, 상징적 실재, 상상적 실재 (2) 실재적 상징계, 상상적 상징계, 상징적 상징계 (3) 실재적 상상계, 상상적 상상계, 상징적 상상계. 이런 상호연관은 제2판 서문 내내 반복적으로 변주되고, <모르나이다>의 핵심 주제라고 지적된다. 즉 “메타언어란 없다”란 테제가 중요하다. 언표된 내용이 언표행위의 위치에 반성적으로 기입되지 않은, 오염되지 않은 언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언표행위의 과정이 언표내용에 간섭을 일으키는 파열의 형태로 항상 기입되기 마련이다. 언어의 한계는 이미 언어 속에 포함되어 있다. 그런 한에서 실재는 거리를 두고 ‘이해하는’ 게 아니요,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실재가 만드는 간극은 살아가는 사태 자체에 있다. 정신분석적 해석 작업이 어떤 이해의 메타적 위치를 확보하는 게 아니라, 혼란스런 첫 인상에 주목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두 번째 독서는 책의 내용을 이해하게 만들지만, 실상 독서의 효과는 첫 번째에, 이해할 수 없는 혼란과 충격 자체를 노린 것이다. 두 번째 독서는 항상 너무 늦다.

 

 

오늘날 가상화된 삶이 지닌 근본특징은 우리의 온전한 참여를 방해하는 반성적 거리다. 전자오락하듯, 삶 하나가 죽으면 다음 삶을 시작하고, 다 죽으면 리셋하면 새로 살 수 있다. 반면, 실존적 참여는 까딱 잘못하면 모든 것을 상실하는 “All or Nothing!”의 순간이다. 절대적인 궁지, 뒤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이야말로 반성적 거리가 없는 삶 날것 그대로의 삶 자체다. 선택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어도) 단지 강요된 전진만이 남아있다.

 

 

프로이트적 대립, 그것은 규칙에 온전히 종속된 디지털 존재의 삶과 생활세계에 매몰되어 전-이해적 삶 사이의 대립이다. 문제는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실존을 밝혀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문제는 죽음충동, 즉 구체적인 생활세계의 요구들로부터 비껴나되 규칙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것도 아닌, 오직 자기 길만을 추구하는 맹목적 고집에 있다. 그것이 주체다. “주체는 ‘그 자체로’ 세계라는 직물 속의 어떤 근본적인 전치, 어떤 상처내지 절단에 붙여진 이름이며, 모든 주체적 동일화란 근본적으로 이 상처를 꿰매려는 일련의 실패한 시도들일 뿐이다”(18). 실재는 저 먼 나라에 있는 게 아니다. “바로 거기, 그 현실의 상징적 구성 속에 실재가 존재한다”(18-9). 그러므로 현실 역시 외설적일 수밖에 없다.

 

 

공포는 맨 살에 있다. 껍데기가 아닌, 허물이 벗겨진 맨 살덩어리야말로 진정 그로테스크하다. 無라기보다는 어떤 것, 그것이 실재다. 지금-여기 있지만 있어서는 안 될 것. 여성은 왜 괴물인가? 남성은 남근을 소유하거나 그렇지 않지만, 여성은 바로 남근 자체이기 때문이다.

 

 

기표의 논리로부터...

라캉은 포스트주의자가 아니다. 그의 기표논리는 헤겔 변증법의 다른 판본이라는 점이 이를 보여준다. 캐더린 헤일즈의 주장처럼 라캉의 기표가 현존/부재, 패턴/무작위의 이항논리의 어느 쪽에 있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그런 대립 이전의 대립, 대립이라는 상상적 질서가 있다는 점이다. 마나, 그것은 규정된 의미 없이, 부재 자체의 대립만을 의마하는 기표로서, 기표 이전의 기표이다. 들뢰즈식으로 말해 차이 자체를 표상하는 순수한 기표, 기표 이전의 기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차이는 두 기표 사이가 아니라, 현존을 의미하는 기표와 의미함 자체를 의미하는 비어있는 기표 사이에서 발생한다. 이토록 어려운 말이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폐쇄적 상징체계와 그 외부 사이의 차이가 그 체계가 배제한 것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체계의 내적 완결성, 폐쇄적 체계성은 역설적으로 그 외부와의 차이를 표상하는 제로-기표를 요청한다는 것. 이에 따르면 차이가 동일성에 앞서고, 부재가 현존을 앞선다. 지젝의 라캉 해석에서 공백Void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있다. 또한, 동일한 의미에서 주체가 주체가 귀속된 상징계와 실재 사이의 뒤얽힘, 간극의 효과라면, 정확히 주체야말로 여성적이지 않을까나? 여성=$

 

 

... 헤겔의 변증법을 향해

변증법은 일자를 위한 것도, 복수성을 위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일자의 분열이다. 하지만 분열은 이것/저것, 남자/여자, 일/다, 선/악, 양념반/후라이드반의 짬짜면식 이항대립이 아니라, 일자와 그 자리 사이의 분열이다. 이는 종과 유가 등가의 위치를 차지한다는 점에서 왜상적인 관점이동으로서의 분열에 다름 아니다(무=존재). 실재는 바로 여기서 출현한다. 실재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사물을 그 자체가 아니게끔 하는 간극이 유지되도록 만드는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현실이 없다면 실재도 없고, 현실이 실재에 의존하는 것만큼이나 실재는 현실에 의존한다. “즉 실재는 그 자체로 현실의 찡그림이다”(33). 그 찡그림/왜곡이 없다면 실재는 현시될 수조차 없다. 그러나 실재는 현실 너머에 있지 않다. 그것은 현실이라는 외관, 그 외관의 외관이다. 실재는 외관 속에 있지만, 동시에 외관 자체이다. 현상 너머가 아닌, 현상의 배가(doubling), 쫙 벌어져서 일치하지 않는 두 현상의 간극만이 실재인 것이다(시차적 관점). 현실의 틈새를 흘러다니는 유령, 혹은 현실이 나타날 수 있는 공백, 그 빈칸을 직접 보여주는, 껍데기 없이 그로테스크한 맨살 자체를 체현하는 것이 바로 실재다.

 

 

자연 자체는 비어있지 않다. 거기엔 믿음이 있다. 우리의 자연 상태는 믿음(이데올로기)에 다름아니다. 오히려 알 수 없이 남겨진 공백, 그것은 진정한 유물론이다. 무신론은 흔히 신없는 종교라 하지만, 무신론이 진실로 진정하다면 그것은 종교없는 종교, 즉 종교의 형식이 사라진 그로테스크한 내용물 덩어리 자체일 것이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내용이 있을 자리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내용이 제거된 종교의 장소다. “장소 외에는 아무 것도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35). 종교의 텅빈 내용을 가리키는 형식.

 

 

칸트는 현실의 일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개념의 비일관성을 현실 밖에 설정했다(물자체). 그러나 헤겔은 현실의 한계를 외부가 아닌 내부로 끌어들인다. 비일관적 개념은 현실 밖에 있는 게 아니라, 현실이 비일관적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비일관적 개념은 이미 비일관적인 현실 안에 있다. 이것이야말로 일관적이지 않을까? 홀바인의 <대사들>이 보여주는 라캉의 왜상적 사물은 현실에 침투한 채, 현실 속에서 이미 현실의 외관 자체인 비일관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부정적인 것과 함께 머물기’란 바로 이런 뜻. 공백없이는 현실의 실정성도 없다. 어떤 상징적 창조[내용]가 일어나려면, 먼저 그 바닥[빈 공간으로서의 형식]이 마련되어야 한다. 죽음 충동이 하는 일은, 부정성이 실정적 존재성을 갖게 하는 것이며, 칸트를 넘어선 헤겔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단다. 다른 예로서 그리스도(37~). 응시와 주체의 시선(39~). ‘환영 자체의 환영적 위상’(42).

 

 

행위

대립물의 동일성이란 무엇인가? 자기 지시적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악덕과 미덕은 어떻게 일치하는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는 어떻게 이어지는가? 오직 공백(부정성)만이 실정성을 담보할 수 있다면, 이 역설을, 악순환을 어떻게 끊을 것인가? 이러한 순환연쇄의 원인은 대상a다. 그것과 만나기 위해서는 실정적인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것, 아무 것도 아닌 것에 걸 수 있어야 한다. 교환이 배제된 순수한 지출. 부정성에 투자하라! 라캉은 이를 ‘행위’라 불렀다. 현실이라는 환상을 벗어나는 것은 어떤 초월적 체험(신비주의 일반)을 통해서가 아니다. 역설적으로 우리는 초월적인 것으로부터 한 발짝 물러섬으로써, 일상을 통해서 환상을 벗어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행동하라는 것. 루이스가 “내 행동이 곧 나다”라고 부른 수행성이 관건이다. 우리는 결코 병리적인 현실을 탈출해 순진무구한 저 세계(실재)로 갈 수 없다. 차라리 우리는 병리적인 것을 껴안고, 그런 현실 속에 특정한 대상을 무조건 선택하는(편드는) 것으로써 현실의 환상을 가로지르게 된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것은 오직 행위 자체다! “무를 넘어” “부정성과 머물기” “‘무너머’에 있는 현상계적 현실로 되돌아가기, 무를 체현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 회귀하기”(53).

 

 

전쟁 중인 젠禪

선불교는 서구인들의 이상이다. 불교적 명상과 깨달음은 현대의 병리적이고 비일관적인 현실을 탈출하는 저 세계다. 아니다 임마. 스즈키가 보여주듯, 전쟁의 칼을 버리고 자비의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해탈이 아니라, 동일한 평면에서의 전치다. 속류 헤겔주의의 절대 명제인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 따위는 진짜 헤겔과 무관하다. 헤겔에게 절대적인 것은 자기 파괴적 테러, 동일성과 비동일성의 동일성 따위를 완전한 무의 ‘자리’로 돌려버리는 혁명적 테러에 다름 아니다(죽음 충동). 스즈키식의 선, 무신론화된 선은 내용을 비운 자리에 남은 그 자리 자체, 의장에 복종한다. 형식을 내용으로 전치시키고, 신의 의장을 신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하지만 역시 문제는 빈 자리는 빈 자리라는 무의미를 가리키는 의미의 기표일 뿐이라는 것! 순전한 무신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든 빈 자리임을 보여주기 위한 테러가, 죽음 충동의 만개가 있어야지 않을까? “진정한 혁명적 해방은 훨씬 더 직접적으로 폭력과 일치한다. 해방은 폭력 그 자체이다. 자유는 조화와 균형의 은혜로운 중립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이런 균형상태를 파괴하는 폭력적 행위, 바로 그것이다”(58-9).

 

 

행복이나 평화, 선의 궁극적 이상은 이러한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 초월적이지 않다. 메타언어가 자연언어에 항상-이미 개입해 있듯, 실재가 현상에 항상-이미 끼어들어 있듯, 연루가 비-연루에 앞서 항상-이미 존재한다. 폭력은 사랑 속에, 사랑은 폭력 속에.

 

 

종교

아 씨, 그럼 다 때려부숴?? 가슴 벅차게 폭력을 찬양하고 즐거워해? 그러기는 쉽다. 대단히. 아주. 그러나 이런 태도의 이면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폭력 이후의 초월적인 평화, 행복, 낙원의 상태를 환상하고 있음을 찾아내야 한다. 문제는 폭력의 무의미함, 그것에 대한 불가피성과 더불어 그것이 무의미하고 아무런 긍정적인 실정성을 담보하지 않으며, 오로지 빈 칸만을 남기게 될 것임을 처절히 인식하는 데 있다(잘 모르겠으면, 반장님의 바흐찐 강의를 들으라).

 

 

욥의 위대함이란 어디에 있을까? 신은 그에게 시련을 주신다. 엄청 쎄게~ 진실한 크리스천이라면 이 고통의 말미에 천국의 행복이, 혹은 종말 이후의 낙원에 대한 신념을 버려서는 안 될 것. 원망 대신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것. 하지만 욥은 무엄하게도 매 순간 불평불만에 가득차서 질문을 던진다. “아 내가 왜?” 그의 고난은 무의미하다. 그럴 이유가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이데올로기 비판가’ 욥! 그의 위대함은 고통에 어떤 의미와 전제를 설정하지 않고, 고통의 외관 자체의 비일관성을 고발했다는 데 있다. 의미를 제거하고 구원에 대한 전제를 내려놓을 때 우리는 진정한 유물론자를 만나게 된다. 현실은 다만 우연일 뿐이다.

 

 

신의 아들 그리스도 역시 그러하지 않았을까? “아버지,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만약 그의 대속 행위가 필연적임을 알았다면, 그래서 천국의 삶이 그를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리스도의 행위는 단지 퍼포먼스이며 위선적이다. 그가 진정 장사한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을 몰랐을 때, 신의 무력함을 불안스레 묻고 있을 때 진정 그리스도는 기독교의 유물론적 본질을 보여준다. 여기 고통이 있고 죽음이 있는데, 그 이후는 “아무도 모른다”라는 외설적인 간극 위에 세워진 종교가 바로 기독교인 것. 최초의 종교는 바로 이 무의미의 무의미를 지우고 덧칠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었을까? 종교란, 이런 무의미의 불안 위에 세워진 구원의 전제를 하나의 전통으로서, 묻지 않은 채 받아들일 때 세워진 제도가 아닌가? 아무런 실정적 전제도 없이 무조건적으로 던져진 신앙의 전통은 유령에 다름 아니지 않은가?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할 때 비로소 ‘신자’가 된다. 아이를 잃고 기독교에 귀의한 전도연이 해맑게 웃는 장면을 떠올려 보라(<밀양>, 2007).

 

 

유대교와 기독교. 유대인들은 신의 이름을 묻지 않음으로서, 신의 무기력이라는 비밀을 함구했던 데 비해(“심연 같은 타자의 욕망과 대면케 함으로써 [...]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간적 자유의 역설에 직면케 했다,” 71), 기독교는 그 비밀을 발설하고(“왜 버리시나이까?”), 그것을 하나의 계시로서 전승해 왔다. “불합리하기에 믿는다”(테르툴리아누스)는 이미 무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무의미를 하나의 의미로 전치시켜, ‘자유’대신 윤리로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다. 즉 이데올로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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