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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읽기] ‘법의 힘’ 1부 후기

wonderland 2018.03.28 00:49 조회 수 : 513

지난 2주에 걸쳐 데리다 후기사상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법의 힘: 권위의 신비한 토대>, 그 첫 번째 글인 ‘법에서 정의로’ 혹은 ‘정의의 권리에 대하여’를 읽었습니다.

우선 제목들과 부제들에 들어가 있는 단어들이 저자가 제기하고자 하는 문제를, 촉발하고자 하는 사유를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즉 ‘법’이란 어떤 강제력, ‘힘’을 행사함으로써만 작동할 수 있는 것인데, 이 힘은 폭력과 어떻게 구분될 수 있는 것인가? 그 명확한 구분이란 가능한 것인가? 오히려 법이 최초로 설립되는 순간에는 (그 정당성 판단의 선행적 기준이 없으므로) 정당하지도 부당하지도 않은 어떤 기원적 폭력이 개입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몽테뉴가 지적한 것처럼) 그럼에도 사람들이 법에 대한 신용을 부여하고 따름으로써 하나의 법은 ‘권위’를 가지게 되는 것이므로, 그 법적 권위의 토대란 ‘신비한’ 것, 즉 근거를 알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기서 ‘정의’란 무엇이고,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항상 법 너머로, 법을 초과하는 정의로 이행해야만 하는가? 정의가 어떤 ‘권리’, 어떤 자격을 지니기에 그 이행과 초월은 가능한가?

이런 질문들이 불러들이는 사유 속에 필연적으로 들어있는 것, 그리고 데리다가 정의에 대한 숙고와 실천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보는 것은 ‘아포리아(aporia)의 경험’입니다. 아포리아란 논리적인 답이 없음, 통과할 수 있는 길이 없음을 뜻하지요. 즉 통상적, 관습적 사고로는 경험이 불가능한 사태입니다. 그러므로 “정의는 불가능한 것의 한 경험”이 될 수밖에 없는데, 데리다는 “그 구조가 아포리아의 경험이 아닌 정의에 대한 의지, 욕망, 요구는…...정의에 대한 정당한 호소가 될 수 있는 아무런 기회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들뢰즈 존재론의 주요개념인 ‘초험적 경험’, 즉 경험을 넘어서는 경험과도 매우 가깝게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그렇다면 정의는 왜, 어떤 의미에서 아포리아의 경험인 것인가?

데리다는 구체적으로 세 가지 아포리아를 제시하는데, 결국 이는 동일한 아포리아의 다른 형태들이기도 합니다. 첫째는 ‘규칙의 판단중지’로서, 어떤 판단이 정의롭기 위해서는 “규칙적이면서도 규칙이 없어야 하며”, “법을 보존하면서도 법에 대해 충분히 파괴적이거나 판단 중지적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정의는 법/규칙의 일반성과 개별적 상황의 특이성의 사이에서, 그 둘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모순을 견뎌내면서, ‘보존적이거나 재생산적’이 아닌 ‘재창설적이고 재발명적인’ 판단, 즉 매번 새로운 판단(fresh judgment)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데리다는 여기서 책임감 있는 판사의 예를 들고 있지만, 이것은 사실 어떤 상황에 직면해서 무엇이 옳고 정당한 것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인간 모두에게 적용되는 원칙일 것입니다. (데리다가 논의하고 있는 법은, 성문화된 법(loi=law) 뿐만 아니라 권리(droit=right)까지 아우르는 스펙트럼이 넓은 개념이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말하면, 옳은 것, 정의로운 것은 결코 자명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처음 같은 사유와 그에 따르는 고뇌를 요구합니다.

두번째 아포리아는, 모든 결정에는 ‘결정 불가능한 것의 유령’이 깃들어 있으며 그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법이란 언제나 계산 가능한 것과 함께 시작하고 끝나지만, 정의란 계산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내가 정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도대체 가능한가?”) 그런데 계산 불가능한 것의 시험(=판단중지의 순간)을 거치지 않은 결정이란 자유로운 결정이 될 수 없고 프로그램화되고 기계화된 결정에 불과합니다. 반대로 계산 불가능성에 떠밀려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것 역시 정당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오로지 결정함으로써만 정당함은 드러나고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정확히 또 하나의 모순적 상황이, “계산 불가능한 것과 함께 계산을 요구하는” 아포리아가 정의의 문제 속에 내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정 불가능한 것은 왜 ‘유령’일까요? 그것은 이 결정 불가능성이 결코 통과되거나 극복되거나 지양되는 하나의 계기가 아니고, 늘 잠재성의 형태로 머물면서, 오히려 모든 결정의 확실성과 안전성을, “모든 공언된 척도 체계를 내부로부터 해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해체는, 많은 이가 오해하듯이, 중요한 투쟁과 책임의 구도를 삭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의의 이념’에서 오는 무한한 책임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결정도, 그 어떤 이론적 담론이나 실천적 행위도 언제나 언어의 수행적/선언적/기원적 폭력을 내장하고 있고, 필연적으로 배제되는 것이 있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지속적인 정당함을 확보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의가 법을 통해 실현되어야 하면서도 항상 그것을 초과하고 넘어서야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입법/권리/주장이 정의에 조금이라도 더 다가서기 위해서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해체하면서 ‘이미 도착해 있는 타자’를 받아들여 확장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데리다 자신의 담론 변화의 궤적을 보여주는 ‘육식성-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라는 개념이 이 점을 잘 보여주고 있지요. 서양철학사가 보여주는 부당한 구조를 분석하면서 데리다는 처음에는 로고스/이성 중심에 의한 억압을 말했으나, 팔루스/남근 중심에 의한 여성의 배제라는 주제를 포함해 논의를 확장시키게 되고, 마침내는 인간의 주체성 구성에 본질적인 동물의 희생까지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정의는 이렇게 지속적으로 기존의 결정을 허물고 더 확장되고 개방된 결정을 요구하는 무한한 책임과 긍정의 운동입니다.

마지막 아포리아는, ‘지식의 지평을 차단하는 긴급성’이라는 정의의 특성인데, 이것은 저에게 하나의 반전으로 다가왔습니다. 데리다의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정의란 쉽게 결정할 수 없는 것, 그래서 끊임없이 유보되고 유예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것은 정의의 방정식의 한 쪽면에 불과했습니다. 데리다는 말합니다. “정의는 현전 불가능한 것이긴 하지만 기다리지 않는다”고. 오히려 “하나의 정당한 결정은 직접적으로, 당장, 가능한 한 빠르게 요구된다”고. 그래서 데리다는 지식, 반성, 의식의 지평을 경계합니다. 지평이란 진보를 가능하게 하는 개방이면서 동시에 개방의 한정이기 때문입니다. 잘 생각해보면 이 세계 속의 많은 부정의와 억압들이 쉽게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우리가 그것들을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알량한 지식이 그 해결에 대한 한계를 설정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데리다에게 정의를 지향하는 결정이란 ‘비지식과 비규칙의 밤’에, ‘무반성과 무의식의 환원불가능성’ 속에서 이루어지는 긴급하고 촉박한 것이고,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빌자면) 그러한 ‘결정의 순간은 하나의 광기’입니다. 정의, 결정, 광기, 아포리아의 관계를 잘 보여주는 문장을 직접 인용하면서 후기를 마치겠습니다.

“하나의 광기인 이유는 이러한 결정이 과잉 능동적이면서 또한 수동적이기 때문이다. 마치 결정자는 자신의 결정에 의해 자기 자신이 변형되도록 내맡김으로써만 자유로울 수 있는 것처럼, 마치 그 자신의 결정이 타자로부터 그에게 도래하는 것처럼, 이러한 결정은 수동적인 – 심지어 무의식적인 – 어떤 것을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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