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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시인은 첫 문장에서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하다고 말합니다. 실제로도 합리성의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재단해본다면, 삶은 간단해집니다. 노동하는 시간과 그렇지 않은 시간. 때로는 노동하지 않는 시간에도 우리는 휴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노동을 하거나, 더 나은 노동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곤 합니다.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이러한 흐름에선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중요해지고, 결국 미래의 나를 위해 오늘의 나를 투자(혹은 소비)하는 사람들(고등학생, 취업준비생, 혹은 그 누구나)이 떠올려집니다. 이 시의 화자가 '내일은 비가 올거라 말해주는 사람'을 새로 사귀는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지금(시간), 바로 여기(공간)보다 오늘 저녁이나 내일의 날씨를 예측하는 사람들, 그들은 오늘보다 내일을 바라보는 사람들이며 삶을 합리성의 관점에서 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나의 생계를 위해선, 합리성으로 삶을 재단하고 또 그러한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한다는 현실을 화자는 담담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여기서 합리적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이상한 뜻이 개입되는 순간, 우리의 삶은 반대로 다양해지는 것 같습니다. 낮잠을 잔다거나, 뒷산에 잠깐 산책을 한다거나, 때로는 수유너머에 와서 시 세미나를 하며 진지한 이야기들을 해보는, 이러한 시간들은 나의 생계가 아닌 나의 생활 전반을, 내일이 아닌 오늘을 들여다보게 함으로써 삶에 대한 우리의 시야를 다시 돌려 놓습니다. 이상한 뜻이 없이 살아가는 건 쉽지만,  우리가 자꾸 삶에 이상한 뜻을 덧붙이는 이유는 무엇때문일까요. 우리는 왜 금요일 오후 세시에 모여 몇 달 째 시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요. 오늘 저녁은 춥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것이라고 이야기 하지 않고서도 합리적인 혹은 생산적인 대화의 가능성은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러한 궁금증을 남긴 채 다음 문장을 읽어보면,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은데, 익숙한 문장들은 나를 자꾸 내 일기로 데려간다고 합니다. 실제로 시 세미나에 모인 저희들은 이형기, 기형도, 그리고 박준 시인의 얼굴을 한번도 보지 않은 채 그의 생애에 대해서, 시 혹은 문장에 대해서 쉽게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들의 종착점은 언제나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이야기였습니다. 끝나버린 연애 혹은 과거의 후회되는 일들과 같은 너무나 개인적인 경험들에 비추어서, 우리는 시를 해석하고 사람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 지 꾸준하게 떠들었던 것 같습니다. 시 세미나를 하지 않았더라면, 이해가 되지 않았을 두 번째 문장이었겠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습니다. 이 시를 통해서 박준 시인은 글을 쓰는 일을 포함한 삶의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 일종의 잠언같기도 한 이 문장 또한 삶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본다면, 찬비 즉 시련(화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슬픔에 더 가까운)은 흰 속옷으로 표현되는 내면의 나를 물들게 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물이끼의 색이 더 푸르게 되는 장면인데, 성장의 과정을 단 한 문장으로도 시각적으로 명확하고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어 저에게 큰 인상을 준 문장이었습니다. 소년이 사춘기라는 시련을 겪고 어른이 되는 것처럼 우리의 삶이 성숙해가는 과정은 비록 차가울지라도 아름답다는 이 깨달음은 우리 모두가 공유할 수 있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의 자서전에도 쉽게 들어갈 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글을 쓰며 생계를 유지하는 이 시 속의 화자는 이러한 말들로 타인의 자서전을 쉽게 채우는 일을 반성하는 지점까지 나아갑니다.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 문장에서 타자, 타인, 그리고 세계를 이야기하려는 화자는 타인의 이름만으로, 즉 겉으로 드러나는 누구나 공유할 수 있는 겉감정만으로 타인을 이해하려고 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며칠은'이 주는 의미는 타인의 이름 뿐인 감정을 소비하면서 며칠은 지낼 수 있겠으나, 궁극적으로는 '아픈' 내가 바뀌지 않는다는 진지한 자기반성에서 나왔을 것입니다. 우리도 쉽게 시를 이야기하면서, 타인을 이야기하면서, 세상을 이야기하면서 며칠 동안은 잘 지낼 수 있겠지만, 나 자신이 바뀌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밀도있는 이야기들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밀도 있는 이야기들은 화자가 일기를 쓰며 반성하는 것과 같이 자신의 솔직한 깨달음이 뒷받침되었을 때 가능할 것입니다. 시 세미나를 하는 저희들도 그동안의 2주 동안 박준의 시를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지만, 어느새 자기 이야기들을 꺼내놓으며 밤늦게까지 이어서 이야기를 했더랬습니다.  1월 26일 저녁, 날씨는 굉장히 추웠지만 연희동 한 카페에서 나눴던 이야기들의 밀도는 굉장히 따뜻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글의 만남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이 마지막 문장도, 글을 쓰는 행위, 혹은 하나의 예술론을 넘어서서 결국 우리의 삶 또한 아름다워야 한다는 당위의 측면이지 않을까 합니다. 삶이 비록 찬비와도 같은 시련일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아름다울 수 있다는 다짐을 주는 마지막 문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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