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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

1983년 서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문학을 잘 배우면 다른 이에게 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대학과 대학원에서 알았다.

2008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인의 말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내가 살아 있어서 만날 수도 없는 당신이 저 세상에 살고 있다. 물론 이 세상에도 두엇쯤 당신이 있다. 만나면 몇번이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것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꾀병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은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이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광장

 

 빛 하나 들여보내는 창(窓)이면 좋았다 우리는, 같이 살아야 같이 죽을 수도 있다는 간단한 사실을 잘 알고 있던 시절에 만났다 네가 피우다 만 담배는 달고 방에 불 들어오기 시작하면 긴 다리를 베고 누워 국 멸치처럼 끓다가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장에 새를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 정도의 글귀를 생각해 너의 무릎에 밀어넣어두고 잠드는 날도 많았다 이불은 개지도 않고 미안한 표정으로 마주않아 지난 꿈 얘기를 하던 어느 아침에는 옥상에 널어놓은 흰 빨래들이 밤새 별빛을 먹어 노랗게 말랐다

 

 

 

천마총 놀이터 

 

심야택시 미터기에서 뛰는 말아, 불안감 조성은 경범죄처벌법 제24조에 의해 처벌될 수 있다 덕분에 나는 동네 입구서부터 내려 걷는 날이 많다 시유지 놀이터엔 비가 내린다 가로등 그늘은 빈 그네를 쉽게 밀 줄을 알고 나는 오래된 말들을 곧잘 불러 탄다

 

   그때, 수학여행에 못가고 벤치에서 몸을 김밥처럼 말아 넣는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친구들은 첨성대를 돌아 천마총으로 향하고 있었을 겁니다 뒷산에서부터 저녁이 미끄러져 내려왔습니다 철봉에 거꾸로 매달리는 놀이, 혀가 마른 입술을 아리게 만드는 놀이, 시소가 떠난 무게를 기억하는 간단한 놀이, 누가 부르는 것 같아 자꾸 뒤돌아보는 놀이 들을 모래에 섞어 신발에 넣었습니다 네가 돌아오면 '경주는 많이 갔다 와바서, 바다로 가족여행을 다녀왔어'라고 신발을 털며 말하고 싶었지만

 

놀이를 놀이이게 하고 겨울을 겨울이게 하는 놀이터에 봄이 와도 너는 오지 않았으니 나는 풀어놓은 아픈 말들을 한데 모아 노트에 적는 놀이를 시작했다 흙이 흙을 낳고 말이 새 말을 하는 놀이, 그 말을 자작나무 껍질에 옮겨 적지 않아도 되는 놀이, 흙에 종이를 묻는 놀이

 

고분처럼 뚱뚱한 동네 엄마들이 깨어날 시간입니다 저는 아직 제 방으로도 못 가고 천마총에도 못 가보았지만 이게 꼭 거리의 문제만은 아니어서요 결국 무엇을 묻어둔다는 것은 시차(時差)를 만드는 일이었고 시차는 그곳에 먼저 가 있는 혼자가 스스로의 눈빛을 아프게 기다리는 일이었으니까요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獨裁)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한다

 

잠,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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