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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모임에서는 

<존재와 시간> 299쪽 둘째 문단부터 303쪽 넷째 문단까지 읽었습니다.



이번 주에 다루었던 내용으로 들어가 보기에 앞서, 

지난 시간에 강독했던 곳 중에서 잘못 이해했던 부분을 하나 지적하고자 합니다.


“1) 현존재는 ‘무엇에 의거하여, 무엇을 향하여woraufhin’ 

자기 자신을 결단성 속에서 개시하는가? 

2) 현존재는 ‘무엇을 목적으로wozu’ 스스로 결단하는가? 

무엇에 의거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오로지 결단에 의거하여! 오로지 결단을 목적으로!” 

여기서 저는 ‘무엇을 향하여’와 ‘무엇을 목적으로’의 ‘무엇’이 

바로 결단 자체라고 해석하였는데, 틀렸습니다. 

하이데거는 위와 같은 물음을 던져놓고 단지 이렇게 대답하고 있습니다. 

“[그에 대한] 대답은 오직 결단 자체만이 줄 수 있다.” 

이는 대답이 곧 결단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향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기투하고 결단하는지를 인식하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렇게 기투하고 결단하는 순간 속에서 뿐이라는 얘기입니다. 

현존재는 그의 고유한 결단을 수행하고 있는 때에만, 

자신이 무엇을 향해,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결단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결단은 ‘미리 정해진vorgelegten’ 목표나 의도나 프로그램에 

맞추어 결정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그러한 일상적, 상식적 차원의 결정은 실존적 결단과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오히려 결단은 그것이 수행되고 있는 순간에야 비로소 

그 목적과 목표가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기에 결단과 목적은 동시적(同時的)이고 또한 동외연적(同外延的)입니다.

하이데거는 결단을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가능성을 

개시하면서 기투하고 규정하는 것”으로 정의 내립니다. 

저는 이 “그때그때의jeweiligen”이란 표현이 참으로 어렵게 여겨졌는데, 

위의 논의에서 도움을 받아 그 표현의 숨겨진 의미를 

어느 정도는 짐작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때그때의”는 여기 문단(<존재와 시간? 298쪽 넷째 문단)에서 

모두 세 번 등장합니다. 

첫 번째 문장에 있는 “그때그때의jeweiligen 현사실적 현존재의 결단성”이란 문구에서, 

그리고 위의 결단에 대한 정의에서, 

끝으로 마지막 문장에 있는 

“결단성의 실존적 무규정성그때마다jeweils 결단 속에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규정하게 되는 그런 무규정성”이란 문구에서 말이죠.


기투는 그 구조상 언제나 그 목적을 갖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어떤 것을 향한 기투입니다. 

앞의 정의에서 보듯이 결단이 본질적으로 기투함에 속하는 현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또한 자신의 고유한 목적을 가질 것입니다. 

이 목적이 바로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가능성”이지요. 

현존재는 이러한 가능성을 향하여, 이러한 가능성을 목적으로 

자신을 기투하고 스스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결단은 목적과 동시적이고 동외연적이라고 했습니다. 

목적은 결단이 일어나고 있는 때에만 존재합니다. 

즉, 결단이 목적으로 삼는 가능성은, 

오직 결단이 수행되고 있을 때마다 존재하는 가능성, 

즉 그때그때의 가능성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 결단하는 현존재 역시 

결단을 실천하고 있을 때마다의 현존재, 즉 그때그때의 현존재인 것입니다. 

(참고로, 

‘그때그때의’ 또는 ‘그때마다’로 옮긴 독일어 부사 ‘jeweiligen’과 ‘jeweils’에서 

뒤의 ‘weiligen’과 ‘weils’를 생략하고 ‘je’만 남겨보면, 

바로 이 ‘je’야말로 <존재와 시간>에서 매우 중요한 실존론적 개념 중 하나인 

각자성Jemeinigkeit의 ‘je’에 해당하는 본질적인 표현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현존재 및 그때그때의 현사실적 가능성과 

연관된 결단성 안에서 각자성 개념의 의미가 더 리얼하게 다가오지 않나요?)


철학적으로 이토록 의미심장한 의미를 내포하는 이 ‘그때마다je’라는 표현은 

상황Situation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소개하는 곳에서도 또 다시 등장합니다. 

해당 원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습니다. 

“그때마다je 가능한 결단된 현존재의 실존론적 규정성은 

지금까지는 간과되어 왔던 현상의, 우리가 상황Situation이라고 부르는 

실존론적 현상의 구성적 계기들을 포함하고 있다.”


이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상황은 실존론적 현상이고 또한 실존론적 개념입니다. 

그것은 일상적, 존재적 수준에서 이야기되는 상황Lage과는 

존재론적으로 차원이 다릅니다. 

마치 심정성과 기분의 본질적 차이, 피발견성과 진리의 본질적 차이에 상응한다고 할까요? 

어쨌든 이 상황이라는 용어에는 (상황Lage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공간적 의미가 함께 울리고 있다고 합니다. 

명사 Situation은 동사 situieren과 관련된 낱말이지요. 

그리고 이 동사는 ‘어떤 위치에 놓다, 앉히다’ 등의 분명히 공간적인 뜻을 내포하고 있고요.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러한 공간적 의미를 그 실존론적 개념에서 

일부러 삭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공간적 의미가 (상황 개념과 본질적인 관련성을 갖는) 

현존재의 거기Da에도 똑같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하이데거는 ‘거기Da’ 개념이 지닌 공간적 함축에 착안하여 

<존재와 시간> 제22절~제24절에서 현존재에 고유한 공간성을 분석한 바 있습니다. 

거기서 세계-내-존재에 속한 공간성의 성격이 

거리-없앰Ent-fernung과 방향잡음Ausrichtung의 현상들에 의해 해명되었지요. 

덧붙여, 현존재는, 그가 현사실적으로 실존하는 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는 점도 밝혀졌고요. 

그러나 현존재가 이처럼 거리 없애고 방향 잡고 공간 마련할 수 있는 것은, 

그리하여 모든 일상적, 배려적 차원의 공간적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그의 근본 구성틀이 세계-내-존재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세계-내-존재이기 때문에, 

공간-내-존재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현존재적 공간성은 그의 세계-내-존재라는 구성틀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성틀을 일차적으로 구성하는 요소가 바로 개시성입니다.


지금까지의 조금은 복잡한 논의를 이해하기 쉽게 도식화 해보지요.

거기Da → 공간적 의미 → 현존재의 공간성 

→ 거리-없앰, 방향잡음 → 세계-내-존재 → 개시성 

(개시성과 거기Da는 서로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 개념들이지요. 

현존재의 거기에-있음 = 개시하고/개시되어 있음)


우리는 여기서 상황 개념을 정의 내릴 수 있는 바로 그 직전의 지점에 와 있습니다. 

앞에서 보듯이 거기의 공간성은 존재론적으로 개시성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꼭 마찬가지로 상황은 그 기초를 결단성에 두고 있습니다. 

결단성이 개시성과 관련하여 어떻게 규정되는지는 지난 시간에 이미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탁월한 양상의 개시성, 곧 본래적 개시성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를 통해 상황 개념을 정확히 규정해볼 수 있습니다. 

상황이란 “그때마다je 결단성 속에서 개시되고 있는 거기Da”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본래적 거기로서, 

실존하는 존재자(현존재는) 거기에 있는(현 존재하는) 것이죠. 

따라서 상황은 어떤 전재적인 테두리 내지 틀과 같은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현존재가 마음대로 그 속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상황은 현존재가 마주치게 되는 주위 환경들과 우연적 사건들을 

전재적으로 혼합해놓은 것과는 아주 거리가 멉니다. 

상황은 그런 전재적 혼합이기는커녕 

오히려 오직 결단성에 의해서만, 또한 오직 결단성 안에서만 존재합니다

상황의 정의에도 결단의 정의에도 ‘그때마다’와 ‘그때그때의’라는 표현이 

공통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만 확인해보아도, 

우리는 상황의 존재Sein가 결단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철학적으로 더 심오한 진리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일단을 텍스트를 마저 읽어보겠습니다. 

현존재가 자신의 거기를 위해 결단되어 있을 때, 

주위 환경들이 지닌 그때그때의 사용사태적 성격이 비로소 그에게 개시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오직 결단성에게만 우리가 우연적 사건들이라고 부르는 것이 

공동세계와 환경세계로부터 우연-할zu-fallen 수 있습니다.


‘우연이 우연-하다(die Zufälle zu-fallen).’ 

우연이 가진 본연의 본질을 우리는 ‘우연성’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 우연성은 오직 ‘우연이 우연-하는’ 때만 본연의 모습을 잃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연이 우연-할 수 있는 것은, 

다시 말해 우연성이 본연의 본질을 보존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현존재의 결단성 속에서 뿐입니다. 

우연의 우연성을 존재론적으로 보증해주는 것은 오직 현존재의 결단뿐입니다. 

결단성에게만 우연이 우연 그 자체로서 본연의 모습 그대로 존재할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 식으로 말하면, 

결단성은 우연이 그 자신으로 존재하도록 허(許)해주는lassen 것입니다. 

우리는 이 글의 맨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존재는 그의 고유한 결단을 수행하고 있는 때에만, 

자신이 무엇을 향해, 무엇을 목적으로 

그런 결단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결단은 ‘미리 정해진vorgelegten’ 목표나 의도나 프로그램에 

맞추어 결정하는 행위와는 전혀 다릅니다.” 

우연은 미리 정해진 목표, 미리 결정된 의도, 

미리 계획된 프로그램 같은 것과는 하등 관계도 없습니다. 

만일 우연이 그러한 것들의 지배를 받는다면, 

그 순간 바로 우연은 우연이 아니게 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우연의 관념은 

자유의 관념과, 주체의 관념과, 결단의 관념과 통하게 되는 것입니다. 

결단은 그야말로 우연적으로 일어나야 본래의 결단입니다.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곧 일어날 수밖에 없는, 반드시 일어나야만 하는 

그런 결단은 참다운 결단이 아닙니다. 

자유는 그야말로 우연의 자유이어야 본래의 자유입니다. 

필연의 자유는, 곧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자유는 

스피노자 식 자유(“필연성의 인식”)에 불과할 뿐입니다. 

주체 또한 그야말로 자기 안에 우연을 간직한 주체이어야 본연의 주체이지, 

숨 막힐 정도로 철두철미하게 필연적 인과성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주체는 

진정한 주체라 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위대한 독일 철학자 칸트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현존재가 무엇을 향하여, 무엇을 목적으로 스스로 결단하게 될지는, 

결단이 일어나고 있는 그 순간에는 그 누구도 예상할 수 없으며 

심지어 현존재 자신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결단을 실천하고 난 이후에야 비로소, 현존재가 왜 그러한 결단을 내렸는지를 

다른 이도 현존재 자신도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현존재의 결단성은 철저하게 우연이기 때문입니다. 

결단과 목적이 동시적이고 동외연적인 만큼이나, 

결단성과 우연 또한 동시적이고 동외연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결단성 자체가 우연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은 우연적 사건들의 우연성을 존재론적으로 보증해줄 수 있기도 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우연으로 존재하는 자만이 다른 것들의 우연성도 허락해줄 수 있습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이 독일 관념론 철학을 계승하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바로 이 곳에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와 대조적으로 

(세상)사람들에게는 본질적으로 상황이 폐쇄되어 있습니다

이 점은 단순히 개념적으로만 생각해도 쉽게 납득이 됩니다. 

(세상)사람들은 ‘비본래적’ 존재자인데 반해 

상황은 ‘본래적’으로 개시되는 거기Da이기 때문이죠. 

즉, 본래적 거기는 오직 본래적 존재자에게만 개방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비본래적인 (세상)사람들은 단지 “일반적 상황Lage”만 알고 있을 것입니다. 

즉, 그들은 가장 가깝고 친숙한 “기회들”, 일상적인 그것들 속에서 자신을 상실합니다. 

(그런 기회들은 실은 우연의 변종이죠.) 

그들은 ‘우연’을 계산적 태도로 대하여, 

그것을 언제든지 처분 및 통제 가능한 일종의 용재자로 만들어버립니다. 

(가령 ‘확률’ 같은 개념이 그렇게 변형된, 즉 본연의 우연성을 잃어버린, 우연이죠.) 

그리하여 그들은 실존적인 현존재조차 

그런 계산에 따라 지불해야 할 경제적 대가로서 간주하고 맙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우연을 시간과 노력을 적극 투자해야 

획득할 수 있는 성과로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들은 ‘성공’이 1%의 운과 99%의 노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는 우연에 대한 완전한 오해입니다.


결단성은 ‘거기Da의 존재’를 ‘상황의 실존’으로 가지고 옵니다. 

결단성 안에서 거기의 존재는 상황의 실존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결단성이 갖는 기능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것은 또한 양심 속에서 증언되는 본래적인 존재 가능, 

곧 양심의 불러냄을 적합하게 이해하도록 해주는 존재 가능, 

곧 양심을-갖기를-원함이라는 실존적 존재 가능의 ‘실존론적 구조’를 

한정짓고 있는 현상입니다. 

간단히, 결단성은 양심을-갖기를-원함의 실존론적 구조입니다.


이 두 사항들로부터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명확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양심의 부름은, 

그것이 이러한 본래적인 존재 가능을 향해 현존재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한에서, 

결코 공허한 실존 이상을 자기 앞에 간직하고vorhält 있지 않다는 사실

─왜냐하면,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공허한 이상이 아니라 현사실적 상황의 실존이니까─

오히려 그 부름은 현존재를 상황 속으로 앞서-부르고 있다vorruft는 사실 말이죠. 

양심의 부름 속에서 현존재는 결단성 속에서 본래적으로 개시되는 

그의 거기Da 속으로, 즉 그의 상황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와 같이, 양심의 부름은 현존재를 상황 속으로 앞서-부르도록 해주는 

‘실존론적 적극성’을 가집니다. 

이런 적극성을 올바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다음의 사항도 분명하게 통찰할 수 있습니다. 

즉, 부름의 경향을 전재적인 책임/빚을 짐Verschuldungen으로만 국한하는 일이 

얼마나 양심이 가진 ‘개시함의 성격’을 오인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양심의 소리에 대한 구체적 이해를 얼마나 피상적으로만 전달하고 있는가, 

하는 점 말이죠.


우리는 불러냄의 이해를 실존론적으로 ‘결단성’으로서 해석합니다. 

(물론 그것을 실존적으로는 ‘양심을-갖기를-원함’으로 제시하였고요.) 

이런 실존론적 해석은, 양심을 현존재의 

(표면이 아니라) ‘근본 바탕’에 포함되어 있는 존재 양식으로 드러내줍니다. 

즉, 현존재가 —그의 가장 고유한 존재 가능(책임 있음)을 증언하는 가운데— 

(세상)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sich selbst) 

자신의 현사실적 실존을 가능하게 하는 그런 존재 양식으로 드러내줍니다.


결단성은 실존론적-존재론적 현상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공허한 “습관”이나 아직 규정되지 않은 “머뭇거림”과 같은 

존재적 현상들과 동일한 차원에서 비교될 수 없습니다. 

비록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결정, 결심’과 ‘습관’과 ‘머뭇거림, 우유부단’을 

상호 연관 속에서 말하고 있지만요. 

결단성은 근본적인 실존론적 현상입니다. 

그렇기에 그것은 지각-인지하는 방식으로 상황을 표상하지vorstellt 않습니다. 

결단성은 상황과 재현(再現), 대리(代理)의 간접적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단성은 언제나 이미 상황 속으로 직접 자신을 위치지우고stellt 있습니다. 

달리 말해서, 현존재는, 결단된 존재자로서, 언제나 이미 행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행동하다Handeln”는 용어를 되도록이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첫째, 이 용어는 일상적으로 아주 넓은 용법을 가지고 있어서, 

능동성의 의미뿐 아니라 수동성의 의미까지 담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결단성 또는 결단에는 그런 수동성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둘째, 이 용어는 마치 결단성이 이론적 능력에 대비되는 실천적 능력의 행위에만 

속하는 것인 양 불필요한 현존재-존재론적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염려는 배려와 심려의 통일로서, 

현존재의 존재를 매우 근원적, 전제적으로 포괄하고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우리가 이론적 행위와 실천적 행위를 구별하고자 한다면, 

그런 구별을 가능케 해주는 하나의 전체적 현상으로서 

그때마다 이미 전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탐구 주제인 결단성은 오로지 

이 같은 염려의, 염려 자체의 본래성으로만 존재합니다

그것은 염려 속에서 염려되고 있는 그런 본래성으로만, 

또한 염려로서 가능한 그런 본래성으로만 존재합니다. 

한 마디로, 결단성은 ‘본래적 염려’의 현상입니다.


본 절에서 우리는 결단성의 현상을 실존론적-존재론적으로 

‘침묵되어 있고(말), 불안을 준비하는(심정성), 

가장 고유한 책임 있음을 향한 자기 기투(이해)’로서 규명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로써 우리는 앞 장에서 탐색한 바 있던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곧, 죽음을 향한 존재—의 

‘존재론적 의미’를 한정지을 수 있는 위치에 서 있게 됩니다. 

(다음 절의 내용을 조금 선취하여 말하자면, 

결단성과 죽음을 향한 존재는 본질적인 상호 연관을 가지기에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이번 장의 분석을 통해, 적어도 현존재의 본래성이란 것이 

공허한 이름을 뜻하지도 않고 임의적으로 고안된 이념을 말하지도 않는다는 점은 

충분히 밝혀졌으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사실이 분명히 해명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앞의 장에서 실존적으로 증언되지는 않고 실존론적으로 연역되기만 한)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는 여전히 어떤 순수한 실존론적 기투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현존재의 ‘현상적, 실존적 증언’을 결여하고 있는, 

그런 순수한 ‘실존론적’ 기투로 말이지요. 

즉, 양심 현상의 경우에는 실존적 증언과 실존론적 규정이 다 같이 이루어진 데 반해, 

죽음 현상의 경우에는 단순히 실존론적 규정만 작업되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일차적인 당면 과제는 

본래적인 죽음을 향한 존재의 실존적 증언을 찾아보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러나 실제로 이런 증언을 발견되는 때조차, 

우리의 탐구는 실존론적으로 확증되고 해명되는,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을 단순히 제시Aufweisung만 하여도 

충분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현존재가 그의 본래성과 전체성에서 ‘현상적으로’ 접근될 수 있는 때에만, 

오직 그러한 때에만, 

그의 실존에 존재 이해 일반이 속해 있는 바로 이 존재자의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이 탄탄하고 안정된 기반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3장.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과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로서의 시간성


제61절. 본래적인 현존재적 전체 존재의 한정에서 출발하여 

시간성의 현상적 개현에 이르는 방법적 단계에 대한 밑그림 그리기


본 절은,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 그

것이 속한 제3장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제3장은 제61절을 시작으로 제65절까지 총 다섯 개의 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본 절에서 각각의 절에 대한 짧은 소개를 보여주고 있지요.


1) 미리 달려가는 결단성으로 규정되는 현존재의 실존적 본래적 전체 존재 가능 (제62절)

제2편 제1장에서, 현존재의 본래적인 전체 존재 가능은 

단지 실존론적 관점에서만 기투되었습니다. 

거기서 그 현상은 결국 미리 달려감Vorlaufen으로 밝혀졌지요. 

제2편 제2장에서, 현존재의 본래적 존재 가능은 

실존적 증언 속에서는 결단성Entschlossenheit로서 제시되었고 

실존론적으로는 동일한 현상으로 해석되었습니다. 

미리 달려감과 결단성, 이 두 현상이 앞의 장들에서 획득한 최종적인 분석 성과들이죠. 

여기 제2편 제3장에서 우선 시도해야 할 과제는 

미리 달려감과 결단성 사이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연관성은 그저 외적으로만 결합되는 피상적인 연관성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미리 달려감과 결단성 사이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연관성을 발굴해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하이데거가 제안하는 방법은 이것입니다. 

곧, 현존재의 실존적 가능성(양심을-갖기를-원함)에서 

증언되는 결단성의 현상에서 출발하되, 

이로부터 이 결단성이 과연 그것의 가장 고유한 실존적 존재 경향 자체 속에서 

‘미리 달려가는 결단성’—그것의 가장 고유한 본래적 가능성으로서—을 향해 

미리 지시하고 있는지를 질문해보는 것. 

결단성은, 그것이 자신을 가장 극단적인 죽음의 가능성을 향해 기투하자마자, 

과연 자신을 본래성 속으로 가져오게 되는지를. 

현존재의 본래적 진리로서 규정되는 결단성이 과연 죽음으로 미리 달려감 속에서 

비로소 그 진리에 속하는 본래적 확실성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실존론적 해석은 

그것의 주제가 되는 존재자가 다름 아닌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갖는다는 사실, 

따라서 이 존재자는 전재적인 부분들이 함께 모여 구성되는 

하나의 전재자로 사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한시도 망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다면, 

우리는 이 해석이 밝아갈 단계들이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실존의 이념에 의해서만 인도되어야 한다는 점을 잘 이해할 수 있지요. 

하이데거에 의하면, 

이 점이 미리 달려감과 결단성 사이의 연관에 대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요구입니다. 

즉, 이 실존론적 현상들을 그것들 안에서 

윤곽이 그려지는 어떤 실존적인 가능성들을 향해 기투해보고, 

그런 후에 이 가능성들을 실존론적으로 끝까지 사유해보라는 요구. 

실존론적 현상 → 실존적 가능성 → 실존론적 사유의 순서로 진행되는 요구입니다.


2) 염려의 존재 의미에 대한 해석을 위해 획득된 해석학적 상황과 

실존론적 분석론 일반이 갖는 방법론적 성격 (제63절)

그런데 실존론적 해석은 이러한 단계들을 밝아감에 따라 

그것에 고유한 방법론적 성격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우리는 방법에 관한 분명한 논의를, 

비록 필요할 때마다 간단하게 언급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시도해본 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단은 탐구해야 할 현상들에 먼저 가보는 일이 급선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분석해야 할 것들을 대부분 다루어본 상태입니다. 

나올 만한 개념과 현상들은 대략 다 나온 셈이죠. 

따라서 현존재의 존재 의미를 개현하기에 앞서

우리는 잠시 탐구를 중단하고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겨도 될 타이밍에 서 있습니다. 

이 시간 동안 가벼운 마음으로 진정한 방법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지요.


진정한 방법은 그것의 대상과 단지 외적인 관계만 갖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은, 개시되어야 할 대상의 근본 구성틀을 

그 대상에 적합한 방식으로 예견Vorblick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방법만 잘 숙고해도, 그것이 주제로 삼는 대상이 

어떠한 존재 방식을 갖는지를 어느 정도 밝혀줄 수 있어야 합니다. 

현존재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우리의 실존론적 분석론 또한 

나름의 고유한 방법을 지닙니다. 

나름의 고유한 방법론적 가능성들, 논구들, 한계들을 말이죠. 

따라서 이런 방법론적 특징들을 잘 해명한다면, 

우리는 염려의 존재 의미를 드러내기 위하여 분석론이 취하는 

기본적인 단계들에 필연적 투명성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투명성을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보다 근본적인 작업이 방법과 관련하여 요청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규명된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을 

현상학적으로 현전화하는 또는 반복하는 일을 기반으로 하여 

염려의 존재론적 의미—곧, 시간성—를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이 작업이 제2편의 제4장에서 본격적으로 수행되고 있지요.


3) 염려와 자기성 (제64절)

존재론적으로 볼 때, 

현존재는 모든 전재자 및 실재와 원리적으로 구별됩니다. 

그의 ‘존립Bestand’은 실체의 실체성Substanzialität에 근거하지 않고, 

실존하는 자기Selbst의 ‘자기-존립성Selbständigket’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런 자기의 존재는 존재론적으로 염려로서 파악되고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염려 안에 포함된 자기라는 현상은 

근원적이고 본래적인 어떤 실존론적 규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실존론적 규정은, 실체도 아니고 주체도 아닌 이 ‘자기’에 관해 

어떠한 존재론적 물음들이 가능한지를 확정짓는 일과 나란히 동행(同行)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는 <존재와 시간> 303쪽 마지막 문단부터 308쪽 끝까지 읽어볼 계획입니다.


어쩌다보니, 올해도 벌써 20일 정도만 남겨두고 있네요.

저희 세미나도 앞으로 두 번만 더 진행하면

나름 길고 길었던 2013년의 공부는 마무리될 것 같습니다.

(마지막 주 토요일에는 연구실 송년회를 한다지요.^^)

그 동안 즐거움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얼마 남지 않은 2013년의 시간을 다들 잘 마무리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다음 세미나 시간에,

2013년 12월 14일 토요일 저녁 6시에 뵙겠습니다.


문의는 O1O-7799-O181 또는 plateaux1000@hanmail.net 로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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