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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를 마치며                                                                                                    

                                                                                                                                                                                      김정환

 

1.금광에 들어가 석탄을 캐 나오듯

                                                                                                                                                                                  

상반기 세미나가 벌써 끝난다니 아쉽습니다. 세미나 중간에야 참여한데다 중요한 부분마다 빠진 적이 많은 터라, 저는 어디 가서 진화론을 공부했다고 말도 꺼내지 못합니다. 기껏 금광에 들어가 입구 언저리만 돌다 나온 셈입니다.

 

하지만 ‘나름대로’ 소득은 있었습니다. 우리가 장기판에서 인생을 배우듯이 진화론 안에서 제 사유의 한계와 오류를 비추어 보고, 이를 삶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지어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그중 세 가지 주제를 꺼내어,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나마 여러분과 나누어 보겠습니다.

 

2.당연한 전제는 없다

 

수학의 출발점은 공리이듯, 모든 이론은 개념과 전제를 토대로 합니다. 예컨대 전통 경제학은 인간을 ‘이익 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 간주합니다. 수요곡선이 우하향하는 것도, 공급곡선이 우상향하는 것도 이러한 ‘합리적 인간’을 확장시킨 결과입니다.

 

반면 경제학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행태경제학은 ‘합리적 인간’의 전제에 문제를 제기합니다. 인간은 이익을 항상 극대화하지도 않으며, 이익 외에 다른 가치도 중요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전제를 뒤틂으로써 행태경제학은 전통 경제학이 다루지 못하던 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습니다.

 

경제학에 ‘합리적 인간’이 있다면, 진화론에는 ‘생존의 추구’가 있습니다. 제가 접한 진화론의 설명체계들은 어떤 형질이나 표현형을 ‘얼마나 생존에 유리한지’ 여부에 비추어 평가하고, 이에 기반하여 진화의 모든 과정을 풀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태 경제학이 ‘합리적 인간’의 가정에 도전했듯이 진화론에서도 ‘생존의 추구’라는 전제에 도전해 볼 수는 없을까요? 물론 생명체가 일차적으로는 생존을 추구하겠지만 때로는, 혹은 동시에, 다른 무언가를 추구한다고 시야를 넓힌다면 진화론에도 새로운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요?

 

세미나를 통해 저는 도킨스가 유전자 선택론을 들고 나온 목적이 (‘이기적 유전자’라는 말의 어감과 달리) 개체의 이타적 행위와 협력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배웠습니다. 이것은 마치 전통 경제학자들이 ‘합리적 인간’을 유지하면서 게임이론을 통해 협력을 설명하는 논리와 유사합니다.

 

하지만 ‘최후통첩 게임’, ‘독재자 게임’등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의 행위에는 이익 극대화와 배치되는 다양한 영향 요소가 있다는 것 또한 속속 밝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화론에서도 ‘생존의 추구’에 덧붙여(‘대체’까지는 아니겠지만), 다양한 전제를 모색해 볼 수도 있겠지요. 예컨대, 혹시 생명체들 사이에는 근본적으로 연대와 공감의 정서가 흐르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협력을, 생존 가능성 향상과 같은 ‘생존의 수단’으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목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체계가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생각은 제 자신에 대한 성찰로도 이어집니다. 제 안에도 무비판적이고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전제들이 수없이 많을 테니까요. 남 얘기를 하다 보면 자신을 돌아보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겠지요.

 

3.우리, 공존하면 안 될까요

 

사회과학 연구방법의 유형은 크게 실증론’과 ‘해석학’으로 구분됩니다. 실증론은 현실을 몇 개의 변수 간 관계로 단순화하여 이론체계를 세우고 계량적 데이터로 이론을 검증합니다. ‘경제학’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해석학은 연구 대상을 다양한 측면에서 살피고, 이들이 어떤 관계 안에서 변화를 이끌어내는지에 주목합니다. 해석학의 대표는 ‘인류학’입니다.

 

양측은 서로 으르렁댑니다. 실증론적 연구자들은 해석학적 연구를 ‘설명력과 예측력을 갖추지 못한 허황된 노력’이라 폄하합니다. 반면 해석학적 연구자들은 실증론자들이 ‘자기가 보고 싶은 것에만 주목해 세상을 편의적으로 설명한다’고 비판하지요. 눈치빠른 분들은 도킨스와 굴드 중 누가 어디에 가까울지, 금세 알아채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가지 연구 성향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닙니다. 연구의 목적, 다시말해 연구 대상을 ‘설명’하고자 하느냐, ‘이해’하고자 하느냐의 차이라고 할까요. 설명하려면 변수를 단순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도킨스의 유전자 결정론도 충분히 의미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의 변수만으로는 대상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굴드가 다원적 관점을 유지하는 데에는 이러한 그의 지향 또는 노력이 반영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현실에서는 두 가지 방법을 병행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완전한 융합이나 통일은 어렵지만 상대방의 장점을 부분적으로 취할 수는 있지요. 예컨대 해석학적 연구를 통해 실증론적 변수를 정의하거나, 실증론적 데이터를 취합하는 데에 해석학적 방법을 사용하는 식입니다.

 

상대적으로 진화학계에는 이러한 다원성의 공간이 크지 않은 것 같습니다. 아마 그것은 스스로 ‘진리’를 추구하는 ‘과학자’임에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로서는 그들의 치열함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상대방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나와 다른 지향점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관심의 부족 탓에 논쟁이 격화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료타르는 하나의 이론 체계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거대이론’이 현대사회에 이르러 파산선고를 맞았다고 선언한 바 있습니다. ‘종의 다양성’을 끔찍이도 중시하는 진화학계 안에서 ‘이론의 다양성’은 정녕 허용될 수 없는 것일까요?

 

4.어쩌면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닐지도 몰라

 

제가 어렸을 때 과학선생님께서는 인간의 눈이 두 개인 이유를 ‘입체감을 느낄 수 있어 생존에 더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궁금합니다. 우리가 세 개, 네 개의 눈을 가져보지도 않았는데 두 쪽의 눈이 생존에 ‘더’ 유리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요?

 

결국 선생님의 설명에는 ‘살아남은 자의 기쁨’이 반영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현재적 관점, 그리고 인간의 관점에서 진화의 역사를 설명했던 것이지요. 우리가 미니언처럼 눈이 하나였어도 두 개의 눈이 더 진보한 형태라고 주장했을까요?

 

같은 맥락에서 저는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에도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건 우리가 인간이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이지요. 누군가 ‘인간은 뇌의 용적이 크지 않으냐’고 한다면, 저는 왜 날개나 비늘이 아닌 뇌가 영장의 기준이 되어야 하는지, 나아가 그 잘난 뇌로 핵무기를 일으켜 멸종된다면 뇌가 혈우병의 치사유전자와 무엇이 다른지 물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부 진화론자들이 주장하는 ‘복잡성의 증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진화’와 같은 진화 방향성의 기준이 아직도 잘 납득되지 않습니다. ‘현재 살아남았다’는 것을 중심으로 진화의 메커니즘을 설명하는 결과론적 또는 편의적 설명 방식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지요.

 

물론 진화의 과정은 어떻게든 기술(記述)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현재를, 혹은 (인간으로서) 자기 자신을 기준삼아 끼워맞추기식으로 과거를 설명하는 진화론이라면 그 ‘기준’의 자리에 무엇이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진화론만이 아닌 사회과학적 측면에서 짚어두고 싶습니다. 홀로코스트는 히틀러가 자신이 속한 아리아족을 정점에 두었던 사고의 결과물이니까요.

 

5.‘진리’는 ‘사이’에

 

계몽주의의 전통에서 태어나 살고 있는 우리는 ‘이성’에 대해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1+1=2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불변의 진리가 아니라 십진법적 약속입니다. 삼각형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성이 다룰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언어의 한계에 주의해야 합니다. 인간의 사고작용을 100이라 한다면 이성으로 포착할 수 있는 영역은 30에 불과합니다. (정확한 수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100이 아니라는 게 중요하지요.) 또한 그 이성의 영역 중에서 우리가 말로 구현하고 소통할 수 있는 것도 결코 30까지는 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말’과 ‘글’로 세상의 진리를 독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세미나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겠지요. 덕분에 저는 진화론을 넘어 저를 돌아보고 생각을 넓혀갈 만한 값진 교훈들을 세미나를 통해 얻었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조금 ‘진보’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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