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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중동태의 의미론

인도-유럽어에는 능동태와 중동태의 대립이 먼저 존재했고, 이후에 중동태가 무대에서 사라진 뒤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이 만들어졌다. 중동태는 중간적인 것이 아님에도, 능동-수동 퍼스펙티브에 의해 종종 잘못 이해된다.

연구자들도 중동태를 능동-수동의 대립항으로 수렴되지 않는 제3항으로 인식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방식에는 중동태를 특별한 것으로 취급하는, 신비화의 문제가 있다. 이분법의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중동태를 찬양할 때, 오히려 능동-수동의 대립은 더욱 강화된다.

 

이 책에서 주로 등장하는 언어학자 벤베니스트는 언어 변화의 역사를 늘 사회 변화의 역사로 사유했다. 그가 주목한 라틴어는 산스크리트어나 그리스어와는 달리 중동태를 이미 상실했다. 하지만 ‘형식소상 동사’라는 그룹이 존재했는데, 형(形)은 수동태이지만 의미는 능동인 동사들이다. 이 형식소상 동사는 중동태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관념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벤베니스트에 따르면, 능동태의 경우 동사는 주어에서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지시한다. 중동태의 동사는 주어가 그 장소가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즉 중동태에서 주어는 과정의 내부에 있다.

능동-수동의 대립에서는 하느냐-당하느냐가 문제 된다면, 능동-중동의 대립에서는 주어가 과정의 밖에 있느냐-안에 있느냐(외태-내태)가 문제 된다.

능동-중동의 구도에서 능동성은 단지 과정의 출발점일 뿐, 지금의 ‘주체성’과 같은 의미는 전혀 아니다. 당시 능동태로 분류되던 동사들인 ‘존재하다’, ‘살아가다’ 등은 주어로부터 출발하여 주어 바깥에서 완수되는 과정을 보여준다고 판단할 수 있다.

 

모든 행위를 능동-중동의 이분법으로 구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주어가 동사의 과정 안과 밖 어느 쪽에 있는가를 흑백논리처럼 뚜렷이 확정짓기는 어렵다. 하지만 능동-중동은 매우 효과적인 틀이다.

내태-외태라는 깔끔한 분류 용어를 사용할 때, 중동태를 둘러싼 역사가 사라져버린다. 오해의 역사를 몸에 두른 ‘중동태’라는 고명을 계속 사용해야 하며, 어떤 개념들을 아는 것에 안주해서도, 까다로운 역사를 회피해서도 안 된다.

 

주어가 과정의 밖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의 문제에서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한나 아렌트는 그리스인들이 의지에 대한 단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말한다.

 

 

4장 언어와 사고

그리스어에는 능동-중동의 퍼스펙티브가 남아 있다. 그리고 그리스어에는 의지의 개념이 없었다.

언어는 사고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의 가능성을 규정한다. 언어는 사고로 환원되지 않는다. 언어는 사고의 가능성의 조건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한 장은 언어가 말해지고 사고가 빚어져 나오는 현실 자체, 즉 사회이고 역사이다.

사고하는 주체는 늘 모종의 현실 속에 있다. 따라서 언어가 사고를 직접 규정하는 일 따위는 생각하기 힘들다.

 

데리다는, 중동태에 대한 억압이 지금의 철학의 기원일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리스 이래 철학은 존재를 물어왔는데, 그것은 ‘있다’라는 동사를 객체화 가능한 개념으로 삼을 수 있는 언어 때문이었다.

 

 

5장 의지와 선택

중동태의 존재와 의지 개념의 부재, 이는 그리스에서 찾아볼 수 있는 동시적 현상이다.

아렌트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의지 개념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성과 욕망, 이 두 가지만으로 사람의 행위를 설명하게 되면 결국 모순에 빠짐을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자제심이 없는 상태는 누구라도 좋지 않다고 여기므로, 그러한 상태에 빠져 있는 자는 자신이 바라고 있는 일을 행하면서 자신이 바라고 있는 일을 행하지 않는 셈이다. 그 사람은 욕망에 입각해 있다는 의미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만, 이성에 반한다는 의미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하지 않는 셈이다.

이런 모순된 상태에 빠지는 것은 행위에 앞서 ‘선택(프로아이레시스)’이 상정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지는 선택과 다르다. 의지는 미래와 관련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미래는 도토리 안에 참나무가 될 가능태로서의 미래이다. 이는 과거에 존재하고 있는 귀결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의지로서의 미래는 과거로부터의 귀결이어서는 안 된다. 과거로부터의 단절된 절대적 시작이어야만 그곳에 의지의 장소가 마련된다. 시작을 담당할 능력, 무슨 일인가를 시작할 능력의 존재가 인정받는 것이다.

이는 앞서 보았듯이 책임 개념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어떤 행위가 과거로부터의 귀결이라고 한다면, 의지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사람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늘 행위한다. 그리고 이 행위는 늘 선택이다. 그렇다면 의지는 무엇인가? 과거로부터의 귀결로 존재하는 ‘선택’곁에 돌연 출연하여 억지로 그것을 과거로부터 분리해버리는 개념이다. 게다가 이 개념은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호출된다.

책임을 묻기 위해 선택의 개시 지점을 확정해야 하고, 이 확정을 위해 의지는 호출된다. 과거와의 연결을 끊어내고 선택의 개시 지점을 내 안에 위치 짓고자 한다.

논의가 추상적으로 흐르면 (모든 걸 능동-수동으로 구분하듯이, 모든 걸 선택으로 환원해 버리듯이) 선택은 의지로 바꿔치기 된다.

과거로부터 연속적으로 이어지며 늘 불순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란 것이 순수한 의지에 덮어씌워져버린다. ‘의지는 환상이다’라고 할 때에도 원래는 의지가 아니라 선택이 문제인 상황이었는데도 (여기서 선택 또한 순수 수동성이 아니다) 결론에 이르러서 뚜렷한 이유 없이 의지가 부정된다.

 

의지라는 절대적 시작을 상정하지 않고도 선택이라는 개념(과거로부터의 귀결이고 또한 무수한 요소들의 상호작용하에 있는)을 통해 우리는 의식을 위한 장소를 확보할 수 있다. 오히려 의지 개념을 배척함으로써 의식의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푸코는 권력을 행위의 산출에 의해 정의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권력론에서는 권력이란 국가의 폭력장치와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이란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행위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권력은 상대의 행위에 작용하고 폭력은 상대의 신체에 작용한다. 권력은 상대를 행위하게 하고 폭력은 상대를 특정 상태(수동성)에 둔다. 폭력은 능동-수동의 대립속에 있지만, 권력은 행사당하는 자의 능동성을 남겨 둔다.

권력의 이러한 능동성이 특수한 사례로 보이는 이유는 능동-수동의 구분으로 권력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권력 관계는 능동-중동의 대립에 의해 정의하는 것이 옳다. 즉 행위자가 행위의 자리에 있는지 아닌지로 정의하는 것이다.

 

권력을 행사하는 자는 행위 절차의 바깥에 있다. 이는 중동성에 대립하는 의미에서의 능동성이다. 권력에 의해 행위 당하는 자는 행위 절차 안에 있으므로 중동적이다.

폭력과 권력을 애매하게 일치시켜버리면, 능동-중동 대립으로 이해해야 할 일을 무리하게 능동-수동의 대립속으로 밀어 넣게 된다.

강제는 없지만 자발적이지도 않고, 자발적이지 않지만 동의는 하고 있는 사태도 일상에 차고 넘칠 정도로 흔하다. 여기서도 강제-자발이라는 능동-수동의 대립으로 사태를 바라보기 때문에, 우리는 모순에 빠진다.

 

‘선택’이 늘 불순하듯이 ‘동의’ 역시 늘 불순하다. 아렌트에게는 절실했던 자발성, 이 자발성이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반드시 정치에 대한 절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중동태의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발적인 방식은 아니더라도 일치를 만들어내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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