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미쌤이 쓰신 후기에 댓글 달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져버려서 또 하나의 후기로서 여기에 올릴게요.)
언급 고맙습니다. 그때는 다들 이야기하는 시간을 빼앗아버린 것 같아 미안했고 아쉬었는데..
노들에서 하는 세미나에서도 가까운 이야기가 나오면서, 좀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서요.
말로 하는 것보다 글로 하는 게 편하니 허락해주세요..
우선, 저도 기본적으로 '아이러니'라는지 '이중의 시선'이라고 표현하신 해러웨이의 전략에 공감이 가구요.
특히,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이나 동물, 그리고 사물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그것은 거의 대부분 제편/적, 옳다/그르다의 틀로 생각하기 어려운 면에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게 바로 어쩔 수 없이 모순으로 얽매인 우리 '세속적 삶'의 모습인 것 같고요.
다만, 그런 관계에서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이 절실히 필요할 때가 있겠죠(강간 같은 성폭력이 그 예인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국가와 자본이 개입될 때, 즉 싸워야 될 때에는 더욱더 불가피한 것 같아요.
바로 공장식축산이나 동물실험, 그리고 핵발전소가 그런 것들의 대표적인 예라고 생각해요.
거기서는 우리가 일대일로 마주할 관계에서는 분명히 폭력이고 학대라고 규정될 만한 것들이,
산업적 규모로 당연하게 행해질 수 있게 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다만 그 장면이 우리에게는 안 보이게 구도적으로 만들어져 있을뿐이죠.
(그리고 우리 또한 대부분 불편한 것을 안 보고 싶어 하기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여기서 우리 소비 행위에서도 책임은 결코 부인할 수 없다고 느끼고요.
물론 자본이나 국가의 책임과는 질도 양도 다를 거고,
여러 사회적 조건 때문에 모두가 똑같은 방식으로 나은 소비를 찾아볼 수 있지는 아니지만요.)
만약 해러웨이가 동물실험에서의 쥐와의 관계를 '아니러니한' 관계라고 생각한다면,
저는 그런 관계는 관계라고 하기도 힘든 아주 끔찍한 관계이고, 관계의 틀자체가 잘못되어 있다고 여겨져요.
즉, 국가와 자본 그리고 그 밑바닥의 가부장제에 의해서 가능해진 지배와 피지배,
죽이는 자와 죽음 당하는 자의 틀이 딱 정해진, 그런 관계 말인데,
그것은 하나의 관계라고 하기보다는 관계의 통절한 실패가 아닐까 싶어요.
과연 우리는 노예제하에서의 백인주인과 흑인여성의 관계를 공평한 것으로 상상할 수는 이제 없잖아요?
위안부로 만들어진 여성과 일본인 병사의 관계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실험이든, 음식물이든, 성이든, 노동이든 - 이용, 그리고 이익에 묶인 관계는 매우 파괴적일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생물체의 접촉이다 보니 예외적으로 보이는 장면도 생기겠으나,
이 예외를 일반화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그러니 우리가 다른 존재와 만나고, 더욱 변화하기 위해서는, 지금 있는 틀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그 무대설정자체를 바꿔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적어도, 그런 노력 속에서만 우리는 '실험쥐'가 아닌 어떤 독특한 존재와,
또한 '위안부'가 아닌 이름을 가진 어떤 유일한 존재와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요컨대 저는 우선 옳음 그름을 이야기해야 될 경우도 있다고 생각하고요,
그것은 주로 국가와 자본, 그리고 가부장제에 얽힌 관계이고요,
그리고 그런 관계의 틀자체를 버리고 변화시키려는 과정에서만,
현 구도 속에서 사물취급을 당하고 있는 존재자들과 다르게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덧붙이자면, 싸울 때 '이중의 시선을 유지'한다는 것은, 국가나 자본 같은 적의 존재를 흐리게 하는 것아 아니라,
어떤 투쟁이 또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서 중요한 것이 않을까 싶어요.
과연, 어떤 여성운동이나 장애인운동은 자기의 해방을 모색하는 바로 그 길에서,
동물과 이 사회에서의 억압을 공유한다는 것을, 자기가 피해자일 뿐 아니라 가해적 위치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을,
그러니까 그들의 해방이 우리 해방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싸우는 길을 모색하기 시작할 수 있었듯이 말이에요.
이렇게 생각하다보면, 결국, 우리 자신을 바꾸기 위한 싸움이 우리 사회를 바꾸는 그것과 따로 있지는 않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너무 길어져서 죄송해요.
말씀하신 것도 제대로 이해했는지 약간 아슬아슬하지만, 또 나중에 이야기 나눠볼 수 있기를 바라며, 일단 이 (좀 이상한) 후기를 올려요.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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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mi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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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ri
답장 고맙습니다.
확실히, '옳기 때문에 싸우'는 것보다도 동물이라는 타자와 어떻게 함께(특히 이런 도시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을지 모색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다만 공장삭 축산의 경우, 국가와 자본이 우리가 농장의 동물들과 만나는 것자체를 물리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은 강조하고 싶네요.
'응답'하고 싶어도, 관계를 맺고 싶어도, 그게 가로막혀 있는 상태.. 라고 해야 될까요.
(여기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로서의 동물'라고 말씀하신 것은, 개나 고양이 같은 소위 말하는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더 넓게 이 사회에서 (공장식) 농장에서 살게 만들어져 있는 동물을 뜻하시는 것으로 이해했어요)
싸움이, 인간뿐만 아닌 동물들이랑 함께 이어나갈 수 있는 것보다 좋은 것은 없겠죠!
실제로 해외에서는 팜 생크추어리(farm sanctuary)라고 해서, 공장식 농장에서 구출된 동물들이 이후의 삶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농장이 있는데요,
그런 장소조차 없는 이 사회에서는 아직 어려운 과제일 수 밖에 없지만, '동물에 목소리에 응답하기,' 나가가 동물의 행위주체성 같은 것을 생각하는 것은, '동물의 목소리가 되자' 같은 호소가 지배적인 동물운동권 안에서도 꼭 어떻게든 모색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점으로써 - 공장식축산을 유지하면서 동물의 복지를 위해 싸우는 것은 저는 이상하다고 느끼고요.
쪼끔 사는 공간이 넓혔다고 해서 뭐가 복지예요.. 그것은 인간의 죄책심을 달래기 위한 장치일뿐이죠.
동물들의 삶이 도살장에 매이고 있는 것자체를 문제로 삼아야 되는 거고, 그런 의미에서 공장식축산과 도살장의 폐지라는 것은 못 흔들이는 부분인 것 같아요.
이렇게 쓰면 다시 처음에 지적하신 지점으로 돌아가버린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동물들이 살고 싶다고, 죽음 당하고 싶지 않다고 소리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니까, 그렇게 느낄 수 밖에 없네요.
참고로, 케이지 프리 계란의 실제는 이런 거고(아래 링크 사진),
https://www.facebook.com/surgeactivism/?hc_ref=ARTwVkmZo4jMU8yjhgLpDvpgXP1w7Hzg3O13vmss9oiWkpawFivONPtfr8t4BY5WF9M
동물은 이렇게 목소리를 내고 있단답니다.. (정서적으로 괜찮을 때에 보시길 바라요)
https://www.youtube.com/watch?v=sS1XHQ7hoXE
네 저도 유리씨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관계랄 것도 없는 끔찍한 관계들이 많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런 관계들을 바꾸기 위해 당연히 싸워야 하고요.
다만 우리가 뭔가를 위해 싸울때도 옳기 때문에 싸우면 좀 곤란한 일이 발생한다고 생각해요.
일단 내가 주장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면, 그 문제에 대해서는 옳은 것이기 때문에 다시 돌아보지는 않게 되잖아요.
그래서 공장식 축산의 동물편에 서서 그들의 복지를 위해 싸울때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반려로서의 동물에 대한 응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실험동물에 대한 이야기는 해러웨이의 책 when species meet에 나오는데, 그 책도 언제 함게 읽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