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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야마 이치로, 『전장의 기억』 제1부
2017/10/11(수)큰콩쥐
제1장 전장을 사고하는 것
<왕복운동>
지나간 전장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은 일상 속으로 전장의 기억을 가지고 들어가는 일이다. 일상과 동떨어진 위치에서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전장을 발견하는 왕복운동이 필요하다. 이 책에서는 오키나와 전투를 문제 삼으면서 전장을 분석적으로 이야기하는 작업과 전장의 기억을 말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작업이 얽혀 있다. 전장을 말함으로써 이야기하는 위치가 추궁당하고, 이야기하는 위치가 이동함으로써 새로운 이야기가 도출되는 관계로.
<‘일본인’ 되기>
류큐는 식민지였던 대만이나 조선과는 달리, 1898년에 일찌감치 징병제가 시행되었다는 점에서 국내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제도적인 동질화가 이루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일본인’이 탄생하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이 책 전반에 걸쳐서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일본인’이 되는 과정이란 도대체 어떤 것이었을까?’라는 물음을 놓치지 않는다.
이 대동아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우리 오키나와인도 일본으로 가서 화기애애하게 살 수 있을 거야.
(오키나와 출신 일본군 사병이 아들 생일날 남태평양의 섬 부겐빌 전선에서 보낸 편지 중에서)
이 짧은 글 속에 이 책의 핵심이 응축되어 있다.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일본군으로 전장에 동원되는 것과 ‘가족의 화기애애한‘ 생활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니며, 마음속 상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과 전장 동원이 하나로 연출되어 나가는 과정이다.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은 무의식적으로 신체화된 일상의 다양한 실천들 속에서 상상되고 검증되며 확인되어 간다. 그러나 일상을 구성하는 다양한 실천들 모두가 ‘일본인’이 된다는 것으로 이야기되지는 않는다. ‘일본인’이 이런 실천들 속에서 확인된다고 하는 것은, 곧 ‘일본인’으로 회수될 수 없는 임계영역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있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임계영역은 ‘상상의 공동체’ 내부에서는 이야기할 수 없는, 타자성을 띤 존재로서 양성된다. 중요한 것은 자기와 타자가 분할된 공간을 전제로 하는 게 아니라 ‘일본인’ 되기를 시작한 순간부터 타자성이 자기 내부로 슬며시 다가온다고 하는 양상이다.
‘일본인’이 되는 것은 바로 자기 내부로 침투해 오는 타자에 가위눌림을 당하면서 그 타자를 의식/의미세계의 임계영역으로 밀어내는 작업이다. 이렇게 타자성을 배제함으로써 일상을 구성하는 신체적 실천이 ‘일본이’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속에서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일본인’이 되는 일상적인 영위의 연장선상에 전장을 설정하려는 의도는 임계영역으로 밀려나간 타자의 행방을 전장에서 다시 한번 문제삼자는 데 있다. 그것은 균질적인 내셔널리즘으로 수렴되는 오키나와 전투 이야기 속으로는 회수되지 않을 새로운 이야기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전장을 말한다는 것>
전후에 일본 국민은 군인보다 회사원과 문관이 훨씬 더 많아졌다.
그렇다고 해서 일본이 군국주의에서 평화주의로 변했음을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쓰루미 슌스케)
전장 동원을 담당했던 해군 규율은 전후 일본에서 은행원의 규율로 고스란히 살아남았다. 전장의 기억을 말하는 전제조건은, 전전(戰前)과 연속성을 유지하면서 전후로 이행하고 있던 신체적 실천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연속성으로 회수되지 않을 전장의 기억을 발견해 내고 설명하려는 생각도 존재한다. 전장과 폭력에 의한 신체의 변용이 의미세계를 변화시켜 나간다는 것은, 신체를 변용시키는 전장 또한 의미세계를 뒤흔들 가능성을 낳는다는 말이 된다. 일상은 전장을 준비했다. 그러나 동시에 전장은 전장을 준비한 일상의 의미세계를 변화시켜 가는 모멘트로도 충만해 있는 것이다. 다시 전장에서 일상으로.
신체의 변용 과정에서 발견하는 타자, 자기 내부에 숨어 있는 타자성은 다른 자기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임계영역으로 이끌고 간다. ‘자기 나라 속의 난민’. 전장은 이들을 창출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변용은 신체적 문제에서 차츰 의식, 의미의 문제로 이행한다. 익숙해져 버린 실천이 전장에서 신체의 변용에 다다를 때, 지금까지 말할 수 없었던 임계영역이 이번에는 말을 갖기 시작하는 것이다. 전장에서 힐끔 얼굴을 드러내는, 정의하기 힘든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이야말로 폭력이 행사되는 대상이며, 전장 동원은 그들의 말을 봉쇄하고 내부의 적으로 그들을 죽임으로써만 수행된다.
일상에서 전장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바로 일상의 밑바닥에, 내부의 적으로서 죽임을 당했던 ‘자기 나라 속의 난민’이 발화를 봉쇄당한 채 방치되어 있다고 하는 것을 ‘상기’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의미세계를 뒤흔들어 다른 공간과 시간을 발견해 나가는 작업이며,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영위 속에서 압살당해 온 타자가 의미를 갖고 말문을 여는 일이다. 이 작업으로 종래의 시공간을 지배해 온 의미의 질서와 신체성은 변동한다. 그 변동 속에서 전장의 기억은 현재 속에 침투해 올 것이며, 죽었을 터인 이들이 아직 압살당하고 있는 타자와 함께 현재에 소생할 것이다. 그래서 전장의 이야기는 일종의 정치적 장(場)으로서 발견되지 않으면 안 된다.
제2장 전장 동원
<’도덕’으로서의 생활개선운동>
전쟁동원을 실현해 나가는 규율 중에서 생활개선은 핵심적이며, 이때 오키나와로부터 남양군도로의 이민은 중요한 쟁점이 된다. 남양군도에서 식민지 경영에 필요한 노동력의 대부분은 오키나와에서 공급되었다. 이민자 수는 1930년대에 급격히 늘어났는데, 이 시기의 소철지옥은 오키나와의 노동력이 외부로 흩어지는 계기가 된다. 생활개선운동은 위로부터 강제되었을 뿐 아니라 생활도덕으로서 수용되었다. 강제도, 이데올로기도 아닌, 도덕을 설정한다는 것은 지배와 주체의 문제로 이어진다. 생활상식으로 정착된 도덕은 일상 속에서 익명화된 지배가 되어 폭력에 의한 지배와는 다른 차원인 ‘감시’라는 양상을 띠게 된다. 또한 도덕은 명확한 교의나 체계를 갖지 않기 때문에 개개인이 구체적인 실천 속에서 자기를 이끄는 방식을 만들어 내는데, 도덕이라는 문제 설정을 가치의 내면화라는 문제로 단순화 할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긍정과 기쁨 속에서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해 나가는 과정은 동시에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서 ‘감시’라는 지배를 창출한다. 사람들의 어떤 생각이 어떤 지배를 만들어 내는가? 이것이 바로 저자가 생활개선운동에 주목하는 이유이다.
<오키나와 방언 논쟁>
생활개선 중에서도 가장 중시되었던 것이 표준어 장려였다. 1940년 시작된 오키나와 방언 논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은 매우 흥미롭다. 이 논쟁에서 본토 출신 민예협회 연구자들은 가치판단적인 ‘문화’의 문제로 접근하여 오키나와어 폐지에 반대했고, 오키나와 출신자 대부분은 외부로의 노동력 유출로 인한 거역할 수 없는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표준어 장려를 추진했다. 오키나와인들에게 ‘일본인’이 된다는 것은 가치를 수용해서 내면화한 주체가 아니라 생활의 필요에 따라 대응하는 생활자로서의 전략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처럼 저자는 ‘일본인’이 된다는 것이 가치의 (수동적) 수용이라기보다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으로 분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프롤레타리아화와 노동 규율>
자본주의의 전개로 인한 노동력 유출은 근대 오키나와의 존재양식의 문제다. 외부 유출을 매개로 생활개선운동은 오키나와 뿐 아니라, 오사카, 남양군도로 확대되어갔다. 농민들 중에서도 빈곤한 80%이상은 남양으로, 조금 나은 사람들은 본토로 유출되었는데, 특히 오사카는 오키나와 출신자의 절반 이상을 흡수했다. 그 중 중졸이상의 학력을 갖춘 상층 출신자는 기계, 금속 등의 고임금 부문으로, 하층출신자는 일용노동직과 차별적 노무관리 하의 공장으로 편중되었다. 압도적 다수였던 하층 출신자는 오사카와 고베 각자에서 오키나와 출신자 밀집지역을 형성했고, 이들은 멸시의 대상이 되었다. 오사카 생활개선운동에서 ‘도덕적 주체로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이란 오키나와 출신자가 훌륭한 노동자로 규율화된 주체로서 스스로를 구성하는 ‘프롤레타리아화’와 밀접하게 관련된 실천이었다.
<감시받는 주체(노동자)와 폭력을 행사하는 주체(통치자)의 일체화 >
남양군도로 진출한 주요자본 중 하나인 남양흥발은 소철지옥이었던 오키나와에서 노동력을 조달하여 사탕수수의 생산성을 지탱했다. 특히 사이판의 경우 노동력의 대부분이 오키나와 출신자였는데, 1927년과 1933년 두 차례에 걸쳐서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 남양흥발은 쟁의를 주도한 오키나와 사람들이 아닌, 쟁의를 일으키지 않는 본토의 노동자들을 채용하여 양자 사이에 차별적 노무관리를 실시한다. 두번째 계층이었던 조선인과 오키나와인, 그리고 가장 아래의 도민(선주민 미크로네시아인) 사이의 관계는 더 복잡하다. 제도적으로는 구분되어 있는 그들의 위계가, 사회의식의 측면에서는 역전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민이 오키나와인과 조선인을 멸시하면서 ‘일본인이라면 일본어를 해봐’라는 사회적 수준에서의 증거를 요구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만들어내는 ‘일본인’ 담론은, 도민을 지도하는 ‘일본인’과 지도 받는 객체로서의 ‘도민’을 연출하는 힘이 존재하고, 저자는 이러한 ‘일본인’ 담론이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성공을 추구하는 오키나와 사람들과 그들을 남양의 지도자로 만들려는 남양청 사이에 존재했던 사고의 틈새에 주목하자고 말한다. 입신출세의 꿈과 제국주의적 침략은 틈새가 벌어진 채로 유착되어 있다. 이 유착이 시사하는 바는 생활의 향상을 바라는 마음 속으로 슬그머니 침투하는 제국의식이며, 일상에서 설정되는 지도 받아야할 타자의 존재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자기 내부에서 불식해야 할 타자를 구성했던 것.
‘일본인’이 되는 과정 속에서 노동자가 된다는 것과 통치자가 된다는 것의 일체화는, 감시를 받는 주체가 동시에 폭력을 행사하는 쪽에 선다는 의미를 갖는다.
<’원한’, 과거를 돌이켜보는 마음에 근거에서 일어나는 분노>
전장에서 사람들의 심성이 동원과 어떻게 공명하고 또 그로부터 어떻게 이탈했을까? 생사의 경계 앞에서 오키나와어의 세계가 떠오른다. 받아들이기 힘든 명령이 내려지자 오키나와어를 구사하여 그 상황을 모면한 방위대원, 자결명령이 떨어지자 갑자기 튀어나온 오키나와어 ‘리카시만카이’(자, 마을로 돌아가자), 투항을 설득하기 위한 혹은 일본군을 비방하기 위한 오키나와어… 생활개선운동에서는 ‘도덕적 범죄’로 금지당하고 스파이의 표지가 되었던 오키나와어가, 전장에서는 군율과 규율로부터 이탈하는 행위를 보증하는 저항의 담론/언어로 등장한다.
이탈에 있어서 ‘원한’의 문제를 빼 놓을 수 없다. 일본군으로부터 투항을 권유받거나 투항하는 일본군을 바라보는 오키나와 주민의 감정에는 공감 일변도가 아닌, 반감과 증오가 존재했다. ‘속았다’는 감정은 전쟁동원에 자신이 깊숙이 관여했음의 반증이기도 하기에 질문은 자신의 과거를 향하게 된다. 타자에 대한 분노와 함께 과거의 자신에 대한 격렬한 내적 성찰에 근거해서 일어나는 분노를 저자는 ‘원한’이라고 부른다. ‘원한’에는 항상 타자와 동시에 자기에 대한 질문이 있다. 내적 성찰이 마주하는 과거란 현존했던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 발견되고 구성된 과거다. 따라서 과거를 어떻게 떠올리는가 하는 것은 현재와 어떻게 대면할 것인가의 문제와 직결된다. 호미 바바는 이렇게 국민의 시간으로 회수되지 않을 반복적이고 비공시적인 시간이야말로 국민적 정체성으로 확정되지 않는 임계적인 타자성이 숨어드는 영역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공동성, 개별적인 ‘체험’을 ‘경험’으로 발견한다는 것>
일본 혹은 일본군에 대한 ‘원한’과 함께 나타나는 ‘오키나와 민족’이라는 정체성. 저자는 전장에서 발견되어야 할 새로운 주체의 기점(起点)을 여기에 설정한다. 전장이라는 장에서 ‘원한’과 함께 과거에 대한 질문을 던질 때 획득되는 오키나와어, 그리고 ‘오키나와 민족’.
살아남는 거다! 우리 오키나와 민족 모두가 의미없고 가치 없는 희생을 치러서야 될 말인가! 자존하자!
(주민 편에서 전쟁을 고찰하는 자료 「요시하마 일기」중에서)
요시하마는 투항하지 않는 일본군에 대항해서 주민들에게 토벌전을 벌이자고 결의하고 있다. 전투 말기에 무장한 주민이 일본군과 대치하는 경우는 도처에서 발견된다. 새로운 주체는 일본군 반대투쟁의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하마는 생활개선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였고, 전후 미군정기 질서에 있어서도 그랬다. 그에 대한 주민들의 감정은 엘리트 지도자가 수용소에서 같은 엘리트를 발견했을 때 품는 ‘공감’이 아니라, ‘원한’이다.
전쟁 지도자로서 우리에게 고난을 강요했던 주제에, 전쟁에서 지니까
손바닥 뒤집듯 돌아서서 다시 위세를 부리고 있군…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1972년의 조국(일본)으로의 복귀는 일종의 제도화였다. 복귀를 앞둔 시점에 오키나와 전기(傳記)가 대량으로 쏟아져 나온 현상을 두고 저자는, 복귀라고 하는 제도화/정치과정에 대한 거부와 함께 내성적인 질문들이 비로소 존재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왜 자신은 전장으로부터 뛰쳐나오지 못했는지, 어떻게 뛰쳐나오면 좋을지를 묻게 된 것. 전기에서 발견되는 개별적인 실감으로서의 전쟁’체험’(‘원한’, 오키나와어)을 어떻게 ‘경험’으로 발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설정이 중요하다. ‘일본인’이 된다고 하는 ‘공동성’으로부터 이탈한 ‘원한’과 오키나와어라는 개별적인 실감을 ‘새로운 공동성’으로 확보하는 새로운 주체!
제3장 전장의 기억
<국민의 이야기 아래에 감추어진 ‘증언의 영역’>
국민의 이야기를 실천적으로 다시 상정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프란츠 파농은 죽은 자를 대신해서 국민의 역사를 말하는 행위를 끝까지 거부했다. ‘대신해서 말하는’ 행위를 멈추기만 한다면, 죽은 자들이 말문을 열지도 모른다. 수다스러운 국민의 이야기 속에서 침묵해가는 산 자와 죽은 자들이 이야기를 내뱉는 장을 가리켜 저자는 ‘증언의 영역’이라고 말한다. 문제는 역사의 망각이 아니라 망각의 전제가 되는 기억이 이미 설정되어 있다는 것이며, 기억과 망각의 내용을 지시하는 혹은 ‘대신해서 말하는’ 발화주체의 위치설정이다. 증언의 영역이란 망각에 대항해서 잊지 말자는 것이 아니라, 국민의 이야기와는 다른 이야기의 위치를 설정하는 것을 말한다.
전사자에 대한 국민의 이야기는 말하는 주체와 죽은 자 사이의 그 어떤 실천적 관계를 부인한 채, 죽은 자를 인식의 대상으로 회수해 버린다. 죽음마저도 횡령 당한 결과, 죽은 자는 이야기의 대상이 됨으로써 말 못하는 유골/관찰대상이 되고 만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와 ‘함께’ 어떤 시간성 속에서 대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로서 증언이라는 것을 설정한다면 어떨까?
<말하는 실천 속에서 드러나는 ’공백’>
전장 체험은 죽음이라는 문제와 연관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영역을 구성한다. 저자는 특히 전장의 기억을 체험의 ‘특권화’로 연결시키지 말고 ‘분절화’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를 통해 증언의 영역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증언의 영역에서 전장의 기억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체험’으로서는 존립하지 않는다. ‘체험’으로 말할 수 없는 '공백'이 드러나기 때문. '공백'은 말할 수 없는 영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말한다고 하는 실천 속에서 설정된다. 체험을 말할수록 그 구체적 체험이 구성되는 의미의 연관을 모두 소멸시켜 버리는 영역이 그 배후에 다가오는데 이 영역이 '공백'이다. 결국 전장의 구체적 체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말할수록 개별적 영역이 해체되고 마는 불안정한 발화를 통해 혼란스러운 시간의식을 창출하는 공백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러한 ‘공백’은 전사자 '대신에' 의미를 확정하려고 하는 국민의 이야기로는 독해할 수 없다.
<전후 일본의 희생자 담론>
좌익의 오키나와 '귀환'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오키나와는 전후 일본에서 있어야 할 본래의 영토를 끊임없이 일깨운다. 그래서 '오키나와를 반환하라'는 주장은 전후 일본 내셔널리즘의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오키나와의 비극을 자기 일처럼 애통해 하면서 자신을 희생자로 구성해 낸 전후 일본 내셔널리즘의 재구축 논리는 아시아라는 타자뿐 아니라 '일본'의 내부에서 '일본'으로 확정될 수 없는 이질적 존재까지도 망각하는 행위, 즉 증언의 영역을 망각하는 행위다. 증언의 영역은 전쟁 가해자라는 자각을 넘어서서, 그 과정에서 생겨난 불협화음을 상기하고 국민의 이야기로 포섭되지 않는 이질적인 존재를 불러들이는 것이며 그때서야 비로소 아시아를 상기할 수 있다. 다른 발화, 새로운 분절화의 가능성은 바로 여기에서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생활개선을 추진하고 일본군에 적극 협력했던 '지도자' 데루야 다다히데는 오키나와 전투 중에 일본군의 '스파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다. 일관되게 '일본인'이고자 했던 한 인간이 타자(=적)로서 살해된 죽음이 어떻게 상기될 수 있을까? 저자는 여기서 ‘일본인'으로서의 죽음으로의 동원과 '스파이'(=적)으로서의 학살이라는 두 가지 죽음으로 찢겨진 주체의 ‘잔여’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잔여’야말로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을 상기할 때 내셔널리즘에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잡음의 근원이며, 역으로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이 잔여가 망각되거나 회수되기도 한다.
주목할 것은 학살사건이 '동포 살해'로서 상기된다는 점이다. '동포 살해' 속에 갇힐수록 조국을 위해 죽었다고 하는 기억이 각인된다. 반전(反戰)과 내셔널리즘의 일체화, 즉 반전 복귀의 깃발 아래서 학살이 이야기되고 만다. 그러나 '일본인임을 잊었던' 기억(오키나와인을 재정의했던 기억)은 발설되지 않은 채 방치되었다 '복귀'를 기점으로 오키나와 전투의 기억은 축소되었고, 일상과 전장은 단절되었다. 여기서 망각과 침묵이 시작된다. 이 침묵이 깨질 때, 죽은 자들의 목소리는 새로운 이야기와 함께 부활할 것이다.
제4장 기억의 정치학
상기(remembering)란 평온한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현재라는 시대에 아로새겨진 정신적 외상(外傷)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서 조각난 과거를 다시 일깨워(re-membering) 구축한다고 하는 고통을 수반하는 작업이리라. (호미바바)
<상기, remembering에서 re-membering으로>
전장과 분리된 일상은 전장과 연결하는 매개를 이미-항상 지니고 있다. 하얼빈의 관광지에서 만난 노인은 파편화된 일본어를 매일 저자에게 건넨다. 어설픈 일상의 단어들 앞에 두고 두 사람은 결국 침묵하게 되고, 그들 앞에는 관광이라는 문맥으로는 분절화될 수 없는 공간이 펼쳐진다. 노인은 저자에게 말을 걸어(=정치적으로 개입해)왔다. 진부한 일상으로 갑작스레 침입하여 전장을 가져온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하얼빈의 노인을 통해 전후 일본 사회 속에서 당연한 듯 일상으로 구성되어 있던 실천이 되풀이되면서, 저자는 그것이 전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았고, 자신의 일상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일상 속에서 계속 전장을 상기하는 것은 이런 나날의 실천(신체 변용의 실천)이 전장의 몸짓임을 확인하는 일이며, 신체화된 실천을 전장이라는 장에서 재구성해 나가는 일이다. 구축된 실천으로부터 다른 구축의 가능성을 부상하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전장을 상기한다는 작업이다. 그렇기에 상기는 신체적 변용으로서 시작되는 것이다. 기억은 담론이 아니라 신체와 실천을 구성하는 정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