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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 『고르기아스』 발제문: 481b~527e

발제자: 박준영

 

IV. 소크라테스와 칼리클레스의 대화(481b-522c)

(1) 칼리클레스의 반론(482c-492d)

① 자연의 정의와 법의 정의(482c-486d)

② 더 강한 자의 정체와 행복의 본질(491b-492d)

(2) 칼리클레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설득(492d-505c)

① 설화를 통한 설득(492d-494a): 무절제한 삶과 절제있는 삶의 비교

② 쾌락주의에 대한 논박(494b-500a)

③ 기술적 활동과 경험적 아첨활동의 구별에 따른 평가(500b-505b)

- 민중을 상대로 한 아첨 활동들(500b-503d)

- 참된 연설술과 연설가의 활동(503d-505b)

④ 절제 있는 사람이 행복하다(505b-508c)

- 절제(개인)-사회(정의)-우주(질서)의 관계

(3) 사적인 활동과 공적인 활동(정치활동)에 관한 결론

① 불의에 대한 대책은 어떠해야 하는가?(508c-513c)

② 참된 정치가의 자격과 현실 정치가들에 대한 비판(513c-521a)

③ 소크라테스의 자기변호(521a-522e)

(4) 사후 심판에 관한 설화(523a-526d)

(5) 삶의 선택을 위한 권고(526d-527e)

 

1. 소크라테스는 폴로스와의 대화를 마치면서 불의한 자를 응징하는 최고의 방법은 그를 응징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그를 “몹쓸 자로 영원히 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481b). 연설술은 이러한 일에 쓸모가 있다. 이에 대해 칼리클레스는 그것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조롱조로 묻는다. 만약 그것이 진담이라면 인간적인 모든 삶은 완전히 전도되어 있으며 인간이 마땅히 해야 할 일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라고 부언한다. 여기서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논하는 ‘응징의 역설’에 대해 매우 당황해 하고 있으며, 그것은 ‘권력’을 최고의 원리로 삼아 ‘행복과 정의’를 논하는 소피스트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질문은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이런 식의 전도된 형상으로 나타난 이유일 것이다.

칼리클레스는 먼저 폴로스가 부끄러움 때문에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당하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라고 인정”했다고 논의의 단초를 잡는다. 칼리클레스가 소크라테스를 논박하는 기본적인 전제는 “자연적으로 훌륭한 것”[자연적 선]과 “법적으로 훌륭한 것”[법적인 선]을 나누는 것이다(482e). 소크라테스는 이 두 가지를 멋대로 혼합하여 유리한 방향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칼리클레스에 따르면 이 두 가지는 “대부분 서로 대립하는 것”이다. 자연적인 측면에서 보면 불의를 당하는 경우가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법적인 측면에서는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그러하다. 그런데 여기서 법적인 것은 ‘노예적’이다. 왜냐하면 법은 처음부터 노예적인 인간들에 의해 제정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법은 강한 자가 아니라 약한 자의 이익을 위해 활용된다. 이렇게 해서 법은 강한 자들이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제동을 걸고, 그것에 대해 도덕적인 수치심을 부여함으로써 약한 자(열등한 자)의 이익을 대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 열등한 자들에게 중요한 이념은 바로 ‘평등’(몫의 평등)이다. 하지만 칼리클레스에 따르면 강한 자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것은 자연적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측면에서 “정의는 더 강한 자가 더 약한 자를 다스리며 더 많은 몫을 갖는 것”이 분명하다(483d).

칼리클레스는 이 논변의 여세를 몰아 철학자들의 작업이 어린애들의 그것과 흡사한 유치한 작업이라고 폄훼하면서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을 그만두고 정치적 기예를 익힐 것을 권한다. 사실상 칼리클레스의 논변은 이렇게 현실적인 ‘실천’의 면에 터를 잡고 소크라테스의 ‘이론’를 논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일종이 ‘세속적인 명예’이지 소위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여기/이곳에 터 잡고 현실적인 의미에서의 ‘정의’를 유용성에 기반하여 옹호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론적인 ‘원인탐구’가 주목적이 될 수 없으며, 오히려 실천적인 ‘설득과 계몽’에 주안점을 두는 사유라고 할 수 있겠다.

 

2.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강한 것과 훌륭한 것 그리고 힘 센 것이 같은지 다른지에 대해 묻고서 그것이 같다는 대답을 칼리클레스에게 이끌어 낸다(488d). 하지만 여기서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전형적인 이분법(양도논법)에 의해 패착으로 이끌리는 것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사실상 두 가지-강한 것과 훌륭한 것)는 그렇게 분명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논의를 이어 소크라테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더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동등하게 갖는 것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며,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불의를 당하는 것보다 더 부끄럽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다(489a). 그리고 이런 것이 더 ‘자연적인 것’이라고 부언한다. 이 결론은 앞서 소크라테스가 대중들이 자연의 측면에서 더 강한 자라고 한 것(488d)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사실상 칼리클레스는 이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했어야 한다. 왜냐하면 칼리클레스의 논변에 따르면 대중은 분명 강한 자가 아니라 노예에 가까운 이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후의 칼리클레스의 대답으로부터도 알 수 있다. 나는 이러한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 가는 플라톤의 대화편이 어떤 ‘책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간파할 수 있다고 본다.

이어 소크라테스는 이 둘의 관점이 어떤 방면에서 차이를 불러 오는지에 대한 중요한 질문을 이어간다. 즉 “대체 ‘더 훌륭한 자들’이란 말을 무슨 뜻으로 사용하고 있나? ‘더 힘센 자들’이라는 뜻이 아니라고 하니까 묻는 걸세.”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전형적인 소크라테스식 질문, ‘~은 무엇인가’(본질에 대한 질문)에 해당한다. 이에 대해 칼리클레스는 “나는 더 훌륭하고 더 슬기로운 자가 더 열등한 자들을 다스릴 뿐 아니라 더 많이 갖는 것이 자연에서의 정의라고 믿으니까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서 칼리클레스는 소크라테스가 ‘본질’을 묻는 것에 대해 ‘실천’의 측면에서 대답을 이끌어 가고 있다. 즉 ‘무엇인가’라고 묻는 지점에서 ‘어떻게’라고 대답하는 형국이다. 이 대답에 소크라테스가 흠칫 놀라는 것은 플라톤도 이 점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점을 보다 세세히 뜯어보면 소크라테스는 어떤 ‘보편적 원인’을 실천보다 앞서 놓으면서 그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신념(도덕적 기반)을 가지고 있지만, 칼리클레스는 실천적 결과를 놓고 그것을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정치적 기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전자의 경우 ‘훌륭한 자들이 힘 센 자들’이 ‘되어야’ 하지만, 후자의 경우 ‘힘 센 자들이 훌륭한 자’가 된다. 전자는 ‘훌륭함’(선함)이라는 선험적인 가치기준이 존재하지만 후자의 경우 ‘힘 셈’(권력)이라는 ‘관점’(perspective)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늘 다이달로스의 조상을 기둥에 묶어둘려고 하는 것이고 칼리클레스는 그런 짓이 늘 우스꽝스러울 뿐이다.

 

3. 이렇게 어떤 고정된 것을 선호하는 소크라테스-플라톤의 이론적 성향과 칼리클레스의 활동적인 성향 간의 차이는 493e의 짧은 문답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들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겠지?”라고 물으며 칼리클레스는 “그렇습니다, 그렇게 되면 돌과 송장이 가장 행복할 테니까요”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늘 어떤 것을 필요로 하는 삶이 “끔찍하다”고 대답한다. 이 부분은 표면적으로 도덕적인 문답처럼 보이지만 이 둘의 세계관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는 욕구가 추동하는 움직임이 사실은 돌과 송장(죽음)보다 더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사변에서 세계는 동적이지 않고, 머물러 있으며, ‘하나의 정의’에 상응‘해야 한다.’

세계관의 차이는 삶과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이기도 하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칼리클레스의 입장에서는 소크라테스의 관점은 완전히 전도된 것이며,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칼리클레스의 관점(소피스트들의 관점)은 골치덩어리 조상(彫像)과 같은 것이다. 소피스트들은 늘 ‘실천’과 ‘효과’를 강조함으로써 ‘보편적 정의’에 벗어나는 괴물들을 창조해 낸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떤 ‘절제’나 ‘정의’도 먹혀들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여기에 ‘욕구’의 우월성까지 부가되면 절제와 정의는 자신의 현실기반 자체를 상실할 수도 있다. 칼리클레스는 반복해서 이런 ‘현실기반’을 불러 세운다. 하지만 플라톤의 이 대화편에서는 칼리클레스가 이런 중대한 사실을 알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플라톤 대화편의 반소피스트적인 면을 감안한다면 역사적 사실은 달랐으리라고 추론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아무리 욕구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강자의 원칙이라고 주장하더라도 소크라테스가 과장되게 논박하는 바와 같이 “비역질 하는 자들의 삶”을 정의롭다고 보지는 않았으리라 충분히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495e). 오히려 이러한 삶은 욕구의 충족을 단기간에 소진시키고 평판을 훼손시키는 것으로 정치적으로 기각되어야 함이 마땅한 삶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리클레스는 “논의를 그런 것들로 끌고 가시는 게 부끄럽지 않으십니까?”라고 소크라테스의 각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다시 자신의 관점만을 고집한다. “고귀한 친구여, 정말 내가 그쪽으로 끌고 가는 건가? 아니면, 어떻게 해서든 기쁨을 누리는 자들이 행복하다고 무조건 주장하며 즐거움들 가운데 어떤 것들이 좋고 어떤 것들이 나쁜지 구별하지 않는 사람이 그쪽으로 끌고 가는 건가?” 하지만 소크라테스의 이 질문은 칼리클레스의 입장에서 보면 다시 전도된 관점을 전제한 질문이 된다. 즉 ‘좋음/나쁨’을 기준으로 삼기 이전에 ‘즐거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좋음/나쁨’은 차후의 판단과제다. 다른 말로 하자면 경험을 통해 보편적인 정의가 이끌어 내어지는 것이지 어떤 선재하는 가치기준은 늘 부족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버릇처럼 되뇌이는 ‘~자체’라는 것은 따라서 앎의 영역 언제나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마치 이것을 스스로 획득한 자처럼 행세한다.

 

4.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이러한 전도된 관점 하에 논의를 이끌어 가기 때문에, 칼리클레스의 논변은 때로 무시당하기도 하고, 소크라테스 자신도 논리적인 비약을 감행하기도 한다. 논변진행상의 이러한 부당한 지점들은 특히 칼리클레스가 자신의 주장을 거의 철회하다시피하는 497b(고르기아스가 논의 진행을 재촉하는 지점) 근방에서부터 두드러진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좋은 것/나쁜 것’이 ‘즐거운 것/괴로운 것’과 다르다는 주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갈증의 예를 들고 있다. 하지만 이 논변 진행에서 소크라테스는 ‘~한에서’라는 한정어구를 ‘~와 동시에’라는 어구와 동일하게 취급하는 오류를 범한다. 즉 “마시는 한에서” 갈증이 해소되어 기쁜 것이라는 것은 고통 ‘이후에’ 즐거움이 온다는 의미로 칼리클레스는 받아들이지만 소크라테스는 고통과 ‘동시에’ 즐거움이 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식의 논변의 아전인수는 칼리클레스로 하여금 “어떤 즐거움들은 더 좋지만 어떤 즐거움들은 더 나쁘다고 믿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시는 모양입니다”라는 대답을 하게 한다(499a). 하지만 이런 칼리클레스의 반론은 애초에 그가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한 것이기 때문에 그다지 큰 설득력을 지니지 못하게 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소크라테스-플라톤이 이 두 항목들의 관계가 양도논법적으로 갈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과연 알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은 가져봄 직하다.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는 칼리클레스가 제기하는 정당한 의문을 해소(배제)하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즐거운 것들을 위해서 좋은 것들을 행해서는 안 되고 좋은 것들을 위해서 즐거운 것들과 그 밖의 것들을 행해야 하네.” 다시 전도.

 

5. 소크라테스의 논법과 칼리클레스의 반론이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고 궁극적으로 소크라테스의 논변이 힘을 얻는 이유는 플라톤의 반소피스트적인 경향이 이 저작에 반영되었다는 아주 단순한 사실에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이런 식의 논변을 통해 드러내고자 한 목적이 있을 것이고, 그것이 이런 일방적인 논변이 성립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나아 보인다. 실제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철학과 연설술의 차이를 사유 방식의 차이로까지 확장한다. “그러니까 한 쪽은 (...) 자신이 보살피는 것의 본성과 자신이 하는 행위들의 원인을 살피고 그것들 각각에 대해 설명을 제시할 수 있지만, 다른 쪽은 즐거움에 관계하는 바, 그것의 보살피는 활동 전체가 즐거움을 지향하며 기술이 전혀 없는 상태로 즐거움을 향해 가면서 즐거움의 본성도 원인도 살피지 않고 완전히 불합리하게 - 하나하나 따져서 구별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기억을 숙달과 경험을 통해 보존하는 방식으로 - 접근하며, 바로 이런 식으로 즐거움을 제공한다”(501a). 따라서 플라톤-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원인 탐구’며, ‘기억과 경험, 습관’은 하찮은 것에 불괗하다. 이러한 사유구도는 사실상 고대 자연철학자들이 데모크리토스로부터 물려받은 아주 전통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이들의 사유구도에 가치론적인 함축을 대담하게 적용한다. 이 함축을 적용하기 위해 그는 몸과 영혼을 이분법적으로 가르고(이는 새로운 생각이다), 사유를 영혼의 기능으로 배분하며, 몸(soma)은 감옥(sema)으로 형상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욕구는 몸의 기능을 축소되고, 몸과 영혼은 심대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대립하고 투쟁하게 된다. 플라톤-소크라테스가 시민들의 영혼을 돌보는 행위를 ‘싸움’에 비유한 것은 이것을 시사한다(503b). 이 싸움에서 철학은 당연히 혼의 편에 서게 된다.

6. 혼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짜임새와 질서”다(504a). 그래서 혼을 돌보는 자들은 “준법적이고 절도 있는 자들”이며, “그리고 이것들이 정의와 절제”다(504d). 결국 이러한 논의 전개 과정은 우주론적으로도 확장된다. 카오스는 ‘나쁜 것’이며, 코스모스는 ‘좋은 것’이다. 카오스가 코스모스에 붙어 있는 상태 그것이 욕구가 영혼에 붙어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혼이 욕구하는 것들로부터 떼어 놓는 것은 응징하는 것”이 된다(505b). “따라서 응징받는 것이 혼을 위해서 더 좋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끝없는 악”이기 때문이다(507e).

소크라테스 논변의 대미를 장식하는 이 ‘응징의 논리’는 니체가 플라톤 철학을 ‘원한의 철학’이라고 단죄한 이유를 알 수 있게 한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처음에 칼리클레스가 충고한 것을 그대로 되돌려 주고 있다. 이 부분에 와서 소크라테스-플라톤은 명백하게 자신의 반소피스트적인 경향을 드러내는데, 공교롭게도 여러 부분에서 자가당착적인 결론을 향한다. 그는 소피스트들의 모순된 행태들(정의롭게 만들었다고 여겨지는 제자들로부터 고소당하는 행태)을 지적하면서도 스스로가 이후 그가 교육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죽임을 당한 것에 대한 반성은 하지 않는다(이 저작이 플라톤의 저작이라는 점을 감안하자).

응징의 논리가 절정을 이루는 부분은 바로 523a 이하 ‘설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설화적인 변론 방식은 플라톤이 자주 쓰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기서 이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혼이 더러운 자들은 죽기 전까지 응징을 받지 않더라도 죽은 후에 하데스에 이르러 응징을 반드시 받는다는 사실을 일깨우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정치인들은 응징받아야 할 대상이 되며, 그것도 본보기로 내세워지지 위해 끔찍한 형벌을 받아야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을 이것을 고마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응징받음으로써 영혼을 정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7. 따라서 플라톤-소크라테스에게 중요한 것은 저승에까지 이어지는 ‘영혼의 정화’지 세속적인 권력이 아닌 것이다. 만약 스스로 영혼이 덕으로 채워지지 않는다면 정치는 유예되는 것이 마땅하다. “우리가 이렇게 덕을 단련한 후에, 그때 비로소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나랏일에 나서거나, 아니면 우리가 의미 있게 여기는 일을 하기로 결정해야 할 것이데, 그때는 우리가 지금보다 결정을 더 잘 내릴 수 있는 상태에 있을 테니까”(527d). 하지만 영혼의 정화와 덕의 단련이 ‘정의’라고 하는 아득한 전망 안에서만 가능한 그 만큼, 그것이 현실 안에서 이루어지는 기간은 끝없이 유예되리라는 것을 칼리클레스는 분명 지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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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자연적인 것은 ‘욕구에 충실한 것’이다. 반면 ‘법적인 것’은 ‘협약’에 불과하다. 욕구의 우월성에 대해 칼리클레스는 492a-c에서 논변을 전개한다. 그에 따르면 “사치와 무절제와 자유, 이것들이 지원을 받으면 그것들이 덕이고 행복”이며 “그 밖의 이 모든 것들은 말만 번듯한 장식들이며, 자연에 반하는, 사람들 간의 협약들로서 실없는 소리이자 전혀 무가치한 것들”이다. 이런 식의 논변은 분명 니체의 권력의지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짐에 틀림없다.

2) “제가 더 강한 자들을 더 훌륭한 자들이라는 뜻 말고 다른 뜻으로 말한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더 훌륭한 것과 더 강한 것을 같은 것으로 여긴다고 당신에게 이미 말하지 않았나요? 아니면, 노예들이나 아마도 몸이 강건한 것 말고는 아무 쓸모없는 각양각색의 잡다한 사람들의 무리가 모여서 무슨 주장을 하면 그 주장이 법규가 된다는 말을 제가 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이 말을 하기 전에 이미 칼리클레스는 패착에 이르렀다. 칼리클레스의 패착은 이 대화 상황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지금 대화는 많은 사람들(대중)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3) 칼리클레스의 논변은 사실상 앞서의 장광설에서 그 밑천이 드러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이후의 대화에서도 자신의 논변을 반복하거나 부당한 오해에 대해 반발하는 것으로 그친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논박술을 활용하여 서서히 그의 전제들과 의도를 드러내는 방향을 취한다. 칼리클레스가 분명히 밝히고 있다시피 그는 소크라테스의 ‘사소한 것들’에는 관심이 없으며, ‘나랏일’ 즉 더 ‘큰 것들’에 관심이 많으며, 이에 대해서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매번 무시하면서 자신의 논변을 전개하고 있다.

4) 이 뒤에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의 논변은 이를 확증한다. 여기서도 소크라테스는 무언가를 ‘붙잡아 두기’를 바란다(493c).

5) 과연 플라톤의 소크라테스가 아니라 실제 소크라테스가 이러했을까라는 의문이 생길만 하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무지하다고 여겼으며, 그것을 자랑삼았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체’에 대한 앎에 있어서도 무지하다고 고백해야 합당하지 않겠는가?

6) 498b. “그건 다를 게 없다네.”

7) “시민들의 혼이 가능한 한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해 주는 활동으로, 듣는 사람들에게 더 즐겁든 더 불쾌하든 상관없이 최선의 것들을 말하기 위해 애써 싸우는 일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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