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미나자료 :: 세미나의 발제ㆍ후기 게시판입니다. 첨부파일보다 텍스트로 올려주세요!


《정념에 관하여》 데이비드 흄, 이준호 옮김, 서광사, 1996

 

※원문대조와 번역 수정은 위 번역본의 대본으로 사용된 Selby-Bigge 판 A Treatise of Human Nature(Oxford University Press, 1978)를 사용함.

※인용문의 밑줄은 발제자의 표기임. 페이지 수는 [원문;번역문]의 형태.

 

발제자: 박준영

 

제3부 의지와 직접 정념[Direct Passion]에 관하여

1. 자유와 필연 관하여

 

[399;145]고통과 쾌락과 같은 모든 직접적 효과(effect)에 관하여,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의지이다. 그리고 엄밀히 말해서 그것이 정념 중 어느 하나와 상응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의지의 본성과 속성을 충분히 이해하는 것이 그것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기 때문에, 여기서 탐구의 주제로 삼을 것이다. 나는 의지라는 것이 다음과 같이 간주되기를 바란다. 즉 의지란 우리가 의식적으로(knowingly) 우리 신체(body)의 어떤 동작이나 새로운 정신의 지각(perception of our mind)을 야기할 때, 우리가 느끼고 의식하게 되는 내적인 인상(internal impression)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인상은 앞서 언급했던 긍지(pride)와 소심(humility), 사랑과 증오와 같이, 정의내리기 불가능하며, 더 이상 묘사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 흄이 ‘정신’을 ‘지각’으로 보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신은 ‘오성’의 체계라기 보다는 이렇게 인상으로부터 야기되는 ‘지각’이며, 그것의 근원은 여기서는 ‘신체’에 있다. 신체성과 의지의 상호성에 대한 리쾨르의 논지는 이와는 다소 다른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 한 축을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또한 ‘내적인 인상’이라는 것이 ‘의지’의 특성이라면, 이것은 외적인 인상, 다시 말해 타자가 우리의 의지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어떤 특성을 지닐 것인지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흄의 경우 ‘타자’의 문제는 ‘사회성’과 관련 있을 것이고, 이 논의는 뒤에 나올 것이다. 난 이 신체성에 대한 흄의 주목, 또는 신체의 근원적 성격에 대한 흄의 강조가 ‘물리주의’의 혐의를 벗을 수 있을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자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흄이 이 인상을 늘 ‘정의내리기 힘들고 그럴 필요도 없는’ 어떤 명증한 것으로 바라본다는 점이다. 그런데, 왜 이래야 하는가? ‘해석’의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는 흄의 방식은 내 생각에 이들 ‘인상’들의 본질보다는 그것의 ‘관계’ 즉 그것들의 물리적 충돌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어떤 것(혹 사회?)에 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흄이 ‘경험을 다루는 방식’은 ‘해석’이 아니라 ‘발생’인가? 부언하자면 (하지만 이는 중요하다) 흄에게서 저 ‘인상’이 정의 불가능한 것은 그가 기본적으로 ‘원자’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400;146]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물체들(objects)의 항상적 합일(constant union)일 뿐이다. 그리고 필연성(necessity)도 그러한 항상적 합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만약 대상들이 일치(uniform)하지 않아 서로 간에 규칙적인 연접(conjunction)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관념에 결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필연성이 인과 관념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데, 따라서 필연성이란 대상으로부터 그것의 일상적 수반물(usual attendant)로 넘어 가는 정신의 결정(determination of the mind)일 뿐이며, 그리고 어떤 것의 실존으로부터 다른 것의 실존(existence)을 추론하는 것일 뿐이다. 여기에 우리가 필연성에 대해 본질적으로 고려해야할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항상적 합일과 정신의 추론(inference)이다.

 

* 우선 흄이 신체(body)와 물체(또는 ‘대상’, object)를 무의식적으로 구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 보자. 큰 문제는 아니지만 흄의 ‘주체성’이 어떤 무차별적인 ‘신체’(인간신체와 사회체 전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인간주의’라는 것인데, 이 결론은 그리 특이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흄이 ‘일치’를 ‘연접’과 구분하지 않는다는 것에 약간 주목하는 것이 더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과연 연접하는 것은 일치하는 것인가? 흄의 이 용어에는 연접이 가지고 있는 일단의 시간적 특성이 하나의 ‘형상적 합쳐짐’(uni-form)이라는 무차별성과 등가적이라는 함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들뢰즈의 경우에 어떻게 받아들여질 것인가?

번역과 관련하여 한 마디 하자면, 번역본에서처럼(밑줄 참조) 정신을 주체로 놓고 보면, 흄의 진의를 결코 알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정신이 전적으로 수동적이라는 흄의(들뢰즈의 흄의) 해석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문을 그대로 옮기는 편이 더 좋을 뻔 했다. 다시 말해 ‘정신’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정신이 ‘결정’, 그 과정이 더 중요해 보인다는 것이다.

 

*번역검토: 그리고 무엇보다 원인과 결과의 관념에 들어오는 필연성은 정신의 결정일 뿐이며, 이 결정에 따라서 정신은 한 대상에서 그 대상의 일상적 수반물로 넘어가고, 한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추정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필연성에 본질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이 요소는 항상적 합일과 정신의 추정이다.

 

[401;147](...) 나는 우선 경험으로부터, 우리 행위가 우리의 동기, 기분(tempers) 그리고 상황(circumstance)과 항상적 합일을 가진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 우리가 인류를 성별, 나이, 정체(政體), 교육여건이나 방법에 따라 고려하든 하지 않든(whether), 동일한 통일성(uniformity; 제일성)과 자연적 원리의 규칙적 작동이 판별될 수 있다.

(...) 우리가 물질의 각 부분들을 설명하는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러한 물질의 부분들이 자연과 필연적 원리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분명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사회(human society)도 그러한 원리 위에 설립된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전자보다는 후자의 경우에 우리의 근거(our reason)가 더 타당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간이 언제나 사회를 탐구한다(men always seek society)는 것을 관찰할 뿐만 아니라, 이러한 보편적 성향(universal propensity)이 기반하고 있는 원리들을 설명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402;148]날품팔이꾼의 피부, 털구멍, 근육, 신경 등은 상류 인사의 것과 다르다: 그의 감정(sentiment; 소감), 행동 그리고 예절도 그러하다. 삶에 있어서 각각의 신분은 전체 [생활] 연관(fabric; 생활 구조)에 안팎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리고 이러한 각각 다른 신분들은, 한결같이 인간 본성의 필연성과 통일성으로부터 발생한다는 이유로(because uniformly) 필연적으로 발생한다.(;서로 다른 사회적 신분은 동형성 때문에 인간 본성의 필연적이고 한결같은 원리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인간은 사회 없이 살아갈 수 없고, 정부 없이는 연합할 수 없다. 정부는 재산을 구분하고, 인간의 각각 다른 계급을 수립한다. 이것이 산업, 교역, 공업, 소송, 전쟁, 동맹, 조약, 항해, 여행, 도시, 함대, 항구 그리고 그 밖의 모든 활동과 대상 등을 산출하는데, 이는 어떤 다양성(such a diversity; 사회적 차별)을 야기하며, 동시에 인간 삶에서 통일성(uniformity; 제일성)을 유지한다.

(...) [402~3;148] 태양과 기후의 운행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행동에서도 어떤 일반적 과정이 있다. 또한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 뿐 아니라 각각의 민족과 특정한 인격들에 속하는 특성들도 있다. 이러한 특성들에 대한 지식은 행동의 통일성에 대한 관찰 에 의해 성립되며, 행동들은 [또한] 그런 특성들로부터 흘러나온다.(that flow from them; [번역 없음]) 그리고 이러한 통일성(;제일성)이 바로 필연성의 본질을 형성한다.

 

* 이 구절은 저 콜론(:)이 매우 심난한 궁금증을 야기한다. 흄이 신체성을 말하는 이 지점에서 ‘:’은 도대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가? 그 뒤의 문장을 살피면 흄은 분명 신체성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그 신분 가운데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서 흄은 ‘인간 본성의 필연성과 통일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그 다음 구절들은 애초의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즉 ‘다양성’(사회적 활동과 계급의 다양성)은 직접적으로 ‘정부’로부터 오는 것이고, ‘통일성’도 마찬가지다. 이 구절들은 ‘정치체제’, ‘신체’ 그리고 ‘인간본성의 필연성과 통일성’이 어떤 연관성을 맺고 있는 것인지 매우 불명확하거나, 어둡다. 왜 이런 건가? 질문이 잘못된 것일까?

마지막 인용 밑줄은 지식과 행동 간에 ‘필연성’이 매개하는 것을 진술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보자면 ‘지식은 통일성을 알게 하여 그로부터 필연성을 구성하고 그것이 인간본성의 특성이 되어 행동을 불러 일으킨다’는 식이 될 것이다.

 

[403~4;149~50-인간 행동의 필연성에 대한 반론에 대한 재반론]

여기에 대해 답하자면, 나는 인간행동의 판단에 있어서 우리는, 외부대상에 관해 사유할 때와 같이 동일한 준칙(maxim; 공리)을 따라 진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현상이 언제나 변함없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면, 그것들은 상상력 안에서 어떤 의심과 망설임도 없이 일종의 연관성을 획득하는데, 이때 상상력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옮겨 다닌다. 그러나 이 아래에는 많은 열등한 등급의 증거와 가능성들이 존재하는데 (...) 상반되는 실험들이 전체적으로 동등할때조차, 우리는 원인과 필연성의 관념(notion)을 제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이러한 일상적인 상반성(usual contrariety)이 반대되는 것의 작동으로부터 진행되고, 원인을 은폐한다고 가정한다면, 외양(appearnace)이 공평하게 항상적이거나 확실하지 않아도, 우연(chance)이나 무차별성(indifference)은 모든 경우에 있어서 공평하게 필연적인 사물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불완전한 지식으로 인한 판단력에만 놓여 있어야 한다고 결론내린다. 어떤 통일(일치, union)도, 몇몇 동기들과 성격(character)이 행위와 맺는 일치보다 더 항상적이고 확실할 수 없다. 그리고 만약 다른 경우들에 있어서, 그 통일성이 불확실하다면, 그것은 단지 신체의 작동 안에서 발생하는 것이지, 우리가 공평하게 다른 것들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 아닌 하나의 불규칙성(irregularity)으로부터 사태가 도출된다고 할 수는 없다.

(...) 광인에게는 자유가 없다.

(...) 이제 우리가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것은 동기와 행동 사이의 합일(union)이 어떤 자연적 작용에서와 같은 항상성을 갖는다는 것과, 오성에 미치는 그 영향력 또한 우리가 하나의 실존(existence)으로부터 다른 실존을 추론하도록 결정하는 것과 동일하다는 것 등이다. (...) 결과적으로 우리가 물질의 운동에서는 필연성을 인정하고 정신의 작용에서는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은 명백하게 불합리하다.

 

* 동기와 행동은 상상력을 따라 연관성을 획득하고, 그러한 연관성은 통일성을 망설임없이 지향하므로, 우연이란 단지 신체와 판단력 안에 등장하여 통일성을 흐리는 것이다. 여기서 ‘신체’란 ‘판단력’과 마찬가지로 ‘통일성’을 거스르는 어떤 경향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러한 ‘결정’이란 오직 ‘정신’의 몫인가? 현재로서는 흄이 신체성에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판단력이나 오성의 작동과 관련해서도 그다지 발전적인 내용을 부여하지 않고 있다. 단지 ‘상상력’과 ‘정신’ 그리고 ‘인상’만이 중요해 보인다.

 

[405;150~1]신민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제후는 신민의 순종을 기대한다. (...) 이제 내가 주장하는 바는 이런 방식으로 추리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러한 사실로 인해(ipso facto; 실제로) 의지의 작용이 필연성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그 사람이 이런 사실을 부인한다면 그는 자신이 뜻하는 바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 해당 부분 들뢰즈 《경험주의와 주체성》 참조. p. 18.

* 중요한 것은 ‘믿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믿음’의 위상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 ‘습관’에서부터 생기는 것이고, 세 가지 원리(인과성, 인접성, 유사성)가 기반하는 것이기도 하다.

 

[151~2;405~6]우리는 대상들을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경험하고 관찰함으로써 (한 대상의 존재에서 다른 대상의 존재를) 추론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와 같은 추론은 상상력에 습관이 작용(effects)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항상적으로(;항상) 합일된 대상들에서 원인과 결과의 관념이 발생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되며, 다음과 같은 사실을 반드시 긍정해야 한다. 즉 원인과 결과 등의 관념이 이 대상들의 관념과 동일하며, 또 필연적 연관(necessary connexion)은 오성의 결론을 통해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지각일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항상적 합일을 관찰하는 모든 경우에, 또 그 합일이 신념(belief)과 의견(opinion)에 동일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모든 경우에, 우리는 원인과 필연성 등의 관념을 가진다. (...) 정신은 이 항상적 합일로부터 원인과 결과 등의 관념을 형성하며, 이 합일의 영향력 때문에 정신은 필연성을 느낀다. 우리가 도덕적 명증성(moral evidence)이라고 일컫는 것에 바로 이런 동일한 (합일의) 항상성과 영향력이 있으므로, 나는 더 문제 삼을 것이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언어적 논란뿐일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가 도덕적 명증성과 자연적 명증성을 적절히 접합시켜서(cement) 두 명증성 사이에 단 하나의 연쇄적 논변을 형성하는 방법을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두 명증성이 동일한 본성이며 동일한 원리에서 도출된다는 점을 서슴없이 인정할 것이다.

 

*다시 ‘정신의 지각’이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도덕적 명증성’이라는 맥락에서다. 도덕적 명증성 자체가 물리적 환경들을 관찰하고 습관을 획득하면서, 필연성을 갖추는 과정과 동일하다. 정신은 곧 상상력이고 이것은 지각의 터다. 또는 다른 식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인상의 터다. 이 인상들을 연결하는 것은 물리적 신체들의 만남들과 이로부터 형성되는 습관들이다.

보다 심오한 문제는 ‘접합시킨다’는 언급일 것이다. 어떤 식으로 접합하는 것일까? 아래 ‘죄수의 예’가 그것을 충분히 설명하는 것일까?

 

[406~7; 152]그 죄수의 정신은 관념의 행렬을 따라간다. 그의 탈주를 허용할 수도 있는 병사들이 탈주를 거부하고, 집행인이 집행하면, 머리와 몸이 분리되어 피가 흐르고 발작적인 경련을 일으킨 다음에 죽음에 이른다. 여기에 자연적 원인과 의지적(voluntary) 행동의 연쇄적인 연관고리(connected chain)가 있다. 하지만 정신은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지나가는 동안에, 이들 사이의 차이를 전혀 느끼지 못한다. 우리가 물리적 필연성(physical necessity)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것을 통해 접합된 연쇄적 원인들(train of causes)에 의해 기억과 감관들의 현재 인상과 미래의 사건이 연관되면, 미래의 사건은 거의 확실하지 않을 수 없다. 경험을 통해 알려진 동일한 합일은 정신에 동일한 영향을 미치는데, 그 대상이 동기와 의욕(volition)이든 또는 형태와 운동이든 그 영향은 그 대상과 상관없다.

* 여기에서는 흄의 ‘물리주의’라고 부를 법한 내용이 등장한다. 그런데, 이 단락의 전반부와 후반부는 조금 다르게 해석할 여지를 남긴다. ‘연쇄적인 연관고리’라 함으로써 시간적인 선후성과 영역(물리영역과 정신영역)간의 연결이 드러나는 부분은 이후 ‘물리적 필연성’을 설명하는 ‘연쇄적 원인들’로 대체되며, 이 연쇄적인 물리적 원인들이 ‘기억과 감관들’에 영향을 준다고 묘사된다. 이 부분은 시간적 선후성이 아니라 이중적인 상호성(평행론?)이라할 만한 관계가 물리세계와 정신세계 사이에 형성되는 것으로 보인다. ‘죄수의 예’를 통해 봤을 때 후자가 전자보다 심층적이라고 보여진다. 일단 ‘경험을 통해 알려진 합일’이 있어야 하고, 이것은 과거의 경험들, 즉 과거의 인상들의 합일이 습관에 따라 축적된 것이다. 죄수의 상상 속에 일어나는 인과연쇄는 그러한 사전기억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한 사전 기억은 물리세계(또는 사회세계)에 대한 ‘경험’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상한 순환이 발생한다. 시간적 선후성이 이중성을 발생시키는 동시에, 그 이중성이 다시 선후성을 예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중성이 선후성보다 심층적이긴 하지만, 선후성은 또한 이중성보다 더 본질적이다. 그렇다면 이 흄의 물리주의는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단순한 물리주의는 아닐 것이다. 이에 대해 들뢰즈를 참조.

내가 여기서 흄의 물리주의를 단순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과연 스피노자를 참조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흄의 신체와 정신, 그리고 필연성에 대한 논변은 스피노자의 《에티카》의 그것을 (이렇게 표현해도 된다면) ‘거의 비스듬하게’ 따라 간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어떻게 이렇게 된 것일까? 이에 관한 충실한 연구는 있는가?

 

[407;152]나의 정의에 따르면, 필연성은 인과의 본질적 부분을 이루며, 결과적으로 자유는 필연성을 제거함으로써 원인 또한 제거하고, 자유는 곧 우연(chance)이다.

 

2. 이어지는 같은 주제

 

[408~409;153~154, 자유론에 대한 수용 이유]

첫째는 (...) 우리가 필연성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확신하기는 어렵고 (...) 필연성의 관념이 우리가 감지할 수 없는 힘과 방해(violence) 및 구속력 등을 포함하는 것으로 여긴다. (...) 자발성(spontaneity)의 자유 (...) 방해와 대립적인 자유 (...) 가장 일반적인 말뜻이기도 하다. (...) 우리의 사유는 주로 이런 종류의 자유에 몰두하며, 이런 종류의 자유를 두 번째 종류와 혼동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이다.

 

*‘자유롭다’고 느끼는 첫 번째 이유를 필연성의 관념에 대한 명백한 오해로부터 추론하는 이 장면에서 번역자는 ‘violence’를 ‘방해’로 옮겼다. ‘폭력’으로 옮겨도 될 것으로 보인다.

 

둘째, 무차별의 자유(liberty of indifference)에도 거짓 감각 또는 거짓 경험(false sensation or experience)이 있다. 이 사실은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무차별의 자유가 실재한다는 데 대한 논거로 간주된다. 정신적 행동이건 신체적 행동이건 관계 없이, 그 행동의 필연성은 행위자의 고유 속성이 아니라, 그 행동을 고려할 수도 있는 사유하는 존재 또는 지성적 존재의 속성이고, 또 어떤 선행대상으로부터 그 행동을 추정하도록 그의 사유를 결정하는 데 있다. 반면에 자유 또는 우연은 바로 이런 결정의 부재 및 산만함일 뿐인데, 우리가 한 대상의 관념에서 다른 대상의 관념으로 옮겨 가거나 옮겨 가지 않을 때 이와 같은 결정의 부재 또는 산만함을 느낀다. (...) 우리는 그 무차별성이나 무관성 따위와 비슷한 어떤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리고 서로 관련되거나 유사한 대상들은 모두 쉽게 혼동되므로, 이런 사실은 인간의 자유에 대한 명시적 증거 또는 직관적 증거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행동이 대개의 경우에 우리의 의지를 따르는 것으로 느끼며, 또 우리가 의지 자체는 어떤 것에도 예속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으로 상상한다. (...) 우리는 (의지의) 이 심상 또는 희미한 운동이 의지 자체로 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이런 노력은 완전히 헛된 것이다. (...) 우리는 필연성의 굴레를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자기 내면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관찰자는 대체로 우리의 동기나 성격에서 우리의 행동을 추정할 수 있다. (...) 성향의 가장 은밀한 원천을 완전히 숙지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우리의 행동을 추정할 수 있으리라고 결론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 이것이 필연성의 실제 본질이다.

 

*흥미로운 점은 흄이 이 두 번째 ‘자유의 오류’을 설명하면서 ‘거짓’ 감각과 경험에 대해 논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자유는 우리 사유가 ‘정신의 결정’에 대해 산만해질 때, 마치 행동에 어떤 의지가 개입하는 것처럼, 희미한 심상을 떠 올리게 되고, 그 희미한 심상이나 운동이 자유라고 상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그러한 자유라는 것도 실은 필연성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며, 그런 식으로 상상하려는 노력은 완전히 헛되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흄이 감각과 경험에 대해 ‘거짓’(false)이라는 규정을 붙여, 마치 감각과 경험이 우리를 속일 수 있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자유의 오류가 기원하는 이 ‘거짓 감각과 경험’은 다른 경우, 이를테면 관념의 통합과정에서도 일어날 수 있는 것인가? 물론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면 과연 진리는? 흄은 이 질문이 지금의 논의와는 별무상관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지금의 논의는 소위 정신의 물리학이라고 부를만한 것이며, 진리냐 거짓이냐와는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재우쳐 우리는 그렇다하더라도 그 ‘거짓’을 판정할 만한 정신의 메커니즘이 있을 것 아니냐고 할 것이다. 이 문제는 이 장 전체에 걸쳐, 아니 이 책 전체에 걸쳐 전제되고 있는 그 ‘필연성’에 대해서도 그늘을 드리운다. 과연 필연성은 어디까지 논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관찰자’를 끌어 들이는 논변이다. 이 관찰자는 어떤 제3자인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완전히 숙지할 수’ 있는 이 인물(또는 신?)은 분명 앞서 제기한 ‘필연성’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가지고 있을 것이다. 흄의 논의 속에 이 제3자가 어떤 식으로 또 등장하는지 살펴 보는 것도 이 저작의 은폐된 지점을 보기 위한 하나의 (부수적인 그러나 매우 주요해질 수 있는) 작업일 수 있다.

‘필연성’에 대해서는 바로 이 페이지 마지막에 잠깐 기술된다.

 

[409~10;154~5]세 번째 이유는 종교에서 비롯되는데, 지금까지 종교는 전혀 쓸데없이 이런 물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 그러나 어떤 의견의 귀결이 위험하다고해서 그 의견이 거짓이라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따라서 그런 토론 태도(topics)는 진리를 발견하는 데 전혀 기여하지 않고 반대론자를 비방하는 데나 어울리므로, 우리는 그런 태도[종교적 태도]를 완전히 금지해야 한다. (...) 나는 솔직히 이런 종류의 검토과정(examination; 실험)을 따르며, 위험을 무릅쓰고 감히 단언하건대 필연성에 관해 내가 해명한 바에 따르면 필연성에 관한 학설은 종교나 도덕성 따위에 대해 해로울 것이 없을 뿐 아니라 유리하기도 하다.

 

[;155-필연성의 두 가지 정의 방식]

필연성은 원인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나는 필연성이 같은 대상들의 항상적 합일과 결부(the constant union and conjunction of like objects)에 있거나, 또는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으로 정신의 추론 과정에(in the inference of the mind from the one to the other; 정신이 한 대상에서 다른 대상을 추론할 때 이 추론에) 있다고 본다.

 

* 이 언급 뒤에 흄은 이러한 필연성에 대한 정의가 일상적으로는 “인간의 의지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하면서, “사람들과 나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유일한 차이점은 아마 사람들이 이런 사실을 필연성이라고 부르기를 거부한다는 점”이라고 덧붙인다. 이는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허구적 자유의 발생과정을 설명할 때 논하는 방향과 매우 흡사하다.

우선 흄의 이 저작 1권 《오성에 관하여》(Of the Understanding) pp. 240~244(원문 페이지)를 보면 스피노자에 대한 흄의 언급이 나와 있다.

 

*또한 코플스톤(F. Copleston)의 유익하지만 다소 카톨릭적인(?) 언급도 기억하자. 다음과 같다.

“흄은 ‘스피노자의 무신론이 지닌 기본 원리’는 바로 그의 일원론에 놓여 있는데 이 일원론은 ‘소름 끼치는 가정’이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와 더불어 ‘사고하는 실체가 비물질적이며 단순하고 분할될 수 없다는 주장은 진정한 무신론이며 스피노자를 그렇게 보편적으로 악명 높게 만든 모든 견해들을 정당화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도 함께 펴고 있는데, 흄이 스피노자의 ‘가정’을 보고 느꼈다는 ‘소름끼치는 공포’에 관해서는 다소간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흄이 비물질적인 사고하는 실체에 관한 데카르트의 주장과 알려질 수 없는 유일 실체에 관한 스피노자의 이론 모두를 여기서 고려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합리론》, 김성호 옮김, 서광사, 1998, p. 421)

 

*직접 스피노자의 원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여기서 스피노자는 ‘신학적 환상’과 더불어 ‘자유라는 환상’에 대해 논한다.

“이처럼 젖 먹이는 자유 의지로 젖을 욕구한다고 믿으며, 성난 소년은 자유의지에 따라 복수를 원한다고 믿고, 겁쟁이는 자유 의지로 도망친다고 믿는다. 다음으로 술주정뱅이는 나중에 술이 깨면 공연히 말했다고 후회할지라도 그 당시에는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지껄인다고 믿는다. (...) 많은 사람들은 사실은 그들이 갖고 있는 말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고 지껄이면서도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하여 말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경험 자체도 이성에 못지않게 분명하게, 인간은 자신의 행동을 의식하지만 자신을 그렇게 결정하는 원인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를 자유라고 믿는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경험은 또한 정신의 결단이란 충동에 지나지 않으며, 따라서 정신의 결단은 신체 상황의 변화에 따라서 변화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 우리가 상기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정신적 결단에 의해서 행할 수 없다는 것이다. (...) 우리가 자유로운 것으로 믿는 이 정신의 결단은 표상 자체나 상기 자체와 구별될 수 없으며, 그것은 관념이 관념인 한 필연적으로 포함하는 긍정(제2부 정리 49 참조)에 불과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정신의 이와 같은 결단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의 관념과 동일한 필연성을 가지고 정신 안에 생긴다. 따라서 정신의 자유로운 결단에 의해 이야기하거나 침묵하거나 어떤 행위를 한다고 믿는 사람은 눈을 뜨고 꿈꾸는 것이다.”(《에티카》 3부 정리 2 주석)

 

*그리고 이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도 참조하자.

“자유라는 심리학적 환상: 본질적으로 원인을 모르는 채 오직 그것의 결과만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의식은 스스로를 자유롭다고 생각할 수 있으며, 따라서 신체에 대한 가상적 지배력을 정신에 부여하게 된다. 그러나 의식은 실제적으로 신체를 작용하게끔 하는 원인들과 관련하여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조차도 알고 있지 못하다.”(《스피노자의 철학》, 질 들뢰즈, 박기순 옮김, 민음사, 2001, p. 93)

이들 인용문들을 흄의 것과 비교해 보면 ‘평행론’이라는 명시적인 스피노자의 목소리를 완화시킨다면, 흄의 논변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둘은 ‘물리주의’라는 암묵적인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일까? 혹은 저 ‘물리주의’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는 오해를 일소하기 위해 우리는 다른 개념을 창안해야 하는 것일까? 자연주의?

[410;155]그러나 확신하건대, 우리가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을 제외하면 아무것도 정신활동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I ascribe nothing to the actions of the mind, but what must readily be allow'd of). 단지 내가 인간 행동의 필연성을 주장하고 인간의 행동을 감각 없는 물질의 작용과 동일한 지반 위에 둔다고 말한 것 때문에 내 말을 오해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자. 나는 그러한 이해할 수 없는 필연성을 의지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이러한 필연성은 마땅히 물질에 속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이해가능한 특성을, 그것이 필연성이든 아니든 물질의 탓으로 돌린다.(I do not ascribe to the will that unintelligible necessity, which is suppos'd to lie in matter. But I ascribe to matter that intelligible quality, call it necessity or not ... ) 따라서 의지에 관한 한, 나는 전승된(reciev'd; 통상적) 체계에 아무것도 변경하지 않으며, 오직 물질적 대상에 관해서만 변경할 뿐이다.

 

* 이 부분의 번역은 다소 수정이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흄의 논의는 매우 미묘하다. 흄은 ‘기꺼이 인정해야 할 것’이라는 단서를 ‘고유한’ 정신활동의 영역으로 남겨 놓는듯한 뉘앙스를 이 구절에 담아 놓는다. 그리고는 ‘인간행동의 필연성’에 대한 예의 그 물리주의적(자연주의?)인 논변을 펼치며, 곧장 의지와 필연성 그리고 물질의 상관성에 대해 논한다. 여기서 ‘이해할 수 없는 필연성’이란 아마도 이 앞 단락에서 말한 바, 사람들이 필연성 이외의 것이라고 믿는 물리세계의 메커니즘일 것이다. 종합하자면, 흄은 이제 이해가능한 특성이든 이해할 수 없는 특성이든 모두 의지가 아니라 물질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흄이 이해가능한 것은 하나의 특성(quality)으로 언급하는 반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필연성’이라고 단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흄에게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마땅히 필연성에 속하는데, 그것이 이해할 수 있는 필연성이 되면 하나의 질적인 어떤 것으로 이행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해는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왜냐하면 ‘이행’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잠정적으로 이 이행이라는 가설을 (흄의 체계에 기반하여) ‘관념의 이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긴 이렇게 이해해야만 어느 정도 타당할 것이다.

 

[410~1;155~6]이 필연성이 없다면 (...) 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을 완전히 파괴한다 (...) 나의 주장은 신이 주재적인 역량으로 활동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의 가증스러움과 흉함 때문에 범죄를 응징하는 자로 간주되더라도, 인간의 행동에 필연적 연관이 없다면 정의와 도덕적 형평(justice and moral equity)에 맞게 징벌을 가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징벌을 가하는 것을 이성적 존재가 생각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 자유론 또는 우연론에 따르면 이 연관은 없어지며 (...) 그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 (...) 오직 필연성의 원리에 입각해서 사람은 자신의 행동에 따른 상벌을 받는다.

 

*이 부분에서는 앞서 410쪽에서 언급했듯이 필연성이 오히려 도덕과 종교에 유리한 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나 아주 평범하지만 충분히 타당한 반론이 가능하다. 즉 “흄 당신의 논지와는 반대로 자유의지만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소. 만약 모든 것이 필연성에 따라 움직이고, 인간의 의지도 그러하다면, 한 개인의 범죄는 징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오. 오직 자유의지만이 책임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오.” 물론 이 반론은 흄 이후의 칸트의 것이다. 이 반론에 대해 흄은 우선 의지가 ‘내적인 인상’(399)일 뿐이라고 답하면서 재반론을 시작할 것이다. 또한 ‘실험적 방법’(이 저작의 부제목)이란 그러한 자유의지를 불가능한 시도로 바라보며, 가능한 것은 오직 관념들의 통합과 그 효과로 간주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여기서 이러한 필연성을 완전히 일람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여기서 다시 ‘제3자’의 문제가 등장한다고 나는 본다. 아니면 도덕적 판단은 최소한 입증되기 전까지 유예될 것이다. 이 문제는 풀릴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그 ‘이해할 수 없는 필연성’은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

 

3. 의지의 유력한 동기에 관하여

 

[413~4;158~9]지금까지 이성의 영원불변성 및 불안정성과 기만성 따위는 지금까지 가장 강하게 강조되었다. 이런 철학 전체의 오류를 명시하기 위해 내가 증명하려고 노력할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오직 이성(reason)만으로는 어떤 의지 활동의 동기도 될 수 없다. 둘째, 이성은 의지의 방향을 결정할 때 결코 정념과 상반될 수 없다.

오성(undrestanding)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용한다. 즉 오성은 논증이나 개연성을 통해 판단하고, 또 오성은 우리 관념의 추상적 관계를 주목하거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대상의 관계를 주목한다. 첫 번째 종류의 추론만이 어떤 행동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이 추론의 고유 영역은 관념들의 세계(world of ideas)이지만, 의지의 문제에서 우리는 언제나 실재의 세계(that of realities)에 존재한다. (...) 추상적이거나 논증적인 추론은 오직 원인과 결과 따위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지배할 뿐, 우리의 어떤 행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이런 사실 때문에 우리는 오성의 두 번째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된다.

 

* 이 단락의 논변은 그간의 논지를 고려해 봤을 때 상당히 충격적이다. 왜냐하면 오성의 작용을 둘로 나누고(하나는 ‘논증과 개연성’, 다른 하나는 ‘관계’), 이에 따라 ‘세계’도 둘로 나누기 때문이다. 흄은 어째서 이런 설명 방식을 선택한 것일까? 이것이 그저 설명방식만이 아니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이에 대해서는 좀 더 신중하게 취급해야 하기 때문에 판단을 얼마간 유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414~5;159~60]어떤 대상으로부터 우리가 고통이나 쾌락을 예측할 때 우리는 이에 걸맞는 혐오나 집착(propensity) 따위의 정서(emotion)를 느끼며 (...) 그리고 그 대상의 원인과 결과를 우리가 이성과 경험을 통해 인지하면, 그 대상의 원인과 결과에까지 이런 정서가 확산된다(extend). (...) 대상 자체가 우리의 감정을 유발시키지 못하는 경우에 그 대상들의 연관도 영향력을 대상에 부여할 수 없다. 그리고 명백하듯이 추리는 이런 연관의 발견일 뿐이므로, 추리를 통해서 그 대상들이 우리에게 감정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 따라서 우리의 정념과 상반되는 원리는 이성과 같은 것일 수 없고, 부적절한 의미(improper sense)에서만 이성이라고 일컬어지는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가 이 정념과 이성의 싸움을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은 엄밀하지도 않고 철학적이지도 않다. 이성은 정념이 노예이고 또 노예일 뿐이어야 하며, 정념에게 봉사하고 복종하는 것 외에 결코 어떤 직무(office)도 탐낼 수 없다.

 

*흄은 이성의 추론에 대해서는 연쇄(chain, connect, connexion)라는 어휘를 많이 사용하는데, 이제 정념에 대해서는 ‘확산’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내가 (일견 쓸모없어 보이기까지 하지만) 여기 주목하는 이유는 흄에게서 이성이나 정신, 오성 그리고 상상력은 하나의 기능주의적인 관념들의 ‘터’(place)처럼 보이는데 반해, 정념은 보다 근본적인 ‘작용인’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구절의 논지는 명확하다. 정념이 보다 근원적이고 이성은 그 뒤를 따른다는 것.

 

[415~6;160~1]정념은 근원적 존재이며, 사람들이 원한다면 존재의 변용(modification of existence)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정념은 자신을 다른 어떤 존재나 변용 따위의 모사로 나타내는 표상적 성질(representative quality)을 전혀 포함하지 않는다. (...) 따라서 이 정념은 진리 및 이성과 맞설 수 없으며, 모순될 수도 없다.

(...) 따라서 반드시 정념은 어떤 판단이나 의견을 수반하는 한에 있어서만 이성과 상반될 수 있다. (...) 내 손가락의 생채기보다 전세계의 파멸을 선택했다는 것이 이성과 상충되지 않는다. (...) 어떤 정념이 불합리하려면 거짓 판단을 동반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엄밀히 말해서 불합리한 것은 정념이 아니라 판단이다.

 

* 흄의 이 논변에서도 스피노자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다소 다른 맥락이긴 하지만 ‘정념과 존재의 변용’이라는 테제는 정확하게 《에티카》 2부의 주제다. 스피노자는 정념의 변용을 통해 존재의 힘(conatus)의 증감을 증명하고 있다. 스피노자 철학에서 ‘변용’에 관해서는 앞서 인용한 들뢰즈의 저서를 참조.

*이 단락에 관한 들뢰즈의 설명 참조. 《경험주의와 주체성》, 한정헌, 정유경 옮김, 난장, 2012, p. 44-6.

 

[417~8;162~3]최초의 시각과 겉모습에 따라 사물을 판단하는 모든 사람은 조용하고 침착하게 작용하는 모든 정신 활동을 이성과 혼동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념임에도 불구하고 정신에 정서(emotion)를 거의 유발하지 않으면서, 직접적 느낌이나 감각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그 결과를 통해 더 잘 알려지는 차분한 욕구(desires)와 성향(tendencies)이 틀림없이 있다.

(...) 의지를 결정하는 일이 흔한 이 차분한 정념들(calm passions) 외에도 같은 종류의 격렬한 정서(violent emotions)가 있는데 이 정서 역시 이성이라는 직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 이 두 원리는 모두 의지에 작용하며, 이 두 원리가 상반되면 사람의 일반적 성격이나 현재의 성향에 따라서 두 원리 중 한 가지가 우세하다. 이른바 정신의 힘(strength of mind)은 차분한 정념이 격렬한 정념을 지배한다는 것을 함의한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 이 ‘차분한 욕구와 성향’을 이성과 혼동한다. 흄은 이제 정념을 두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차분한 정념’, ‘격렬한 정서(정념)’ 흄은 여기서 passion과 emotion을 일관성 있게 구분하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이후에 이를 구분하는 듯한 언급을 한다(419).

여기서 흄의 논변은 매우 명쾌하다. ‘정신의 힘’을 정념의 강도(intensity)로 설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념이란 어쨌든 단위로 양화되기보다, 어떤 문턱을 경계로 구분되기 때문이다. 만약 이런 방식으로 설명된다면 정신의 힘은 정념의 강도에 평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 격렬한 정념의 원인에 관하여

 

[419;163]어떤 정념이 행위의 원리로 확정되어 영혼의 지배적 의향으로 되면, 대체로 그 정념은 더 이상 감지할 수 있는 동요를 전혀 일으키지 않는다. 반복된(repeated; 거듭된) 습관(custom)과 습관 고유의 힘 ...

 

*습관은 흄의 철학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것은 상식이다. 이 습관의 힘은 매우 광범위하고 절대적이어서 이 원리가 부서진다면 다른 모든 원리도 아무런 의미가 없어질 정도다. 이것은 어떤 ‘초월적’ 원리도 거부하는 흄의 경험주의에서 어떤 ‘선험적’인 힘을 발휘하는 개념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선험적 힘을 떠받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이 필요하다.

 

[;164]모든 것은 그 사람의 상황에 달려 있으며, 이런 상황의 변이는 차분한 정념과 격렬한 정념이 서로 바뀌어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정념은 모두 선을 추구하며 악을 기피한다. 그리고 이 정념은 모두 선, 악의 증감에 따라 증감된다.

 

*여기서 문제는 흄이 정념의 ‘증감’이라는 테제를 스피노자만큼 설득력있게 전개하고 있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구분이 정념의 증감보다 선행한다는 식의 이 논변은 도덕의 판별기준을 미리 전제하는 것이고 이 바람에 지금까지 구축된 정념의 위상이 상당히 위태로워지고 있다. 계속 드는 의문은 과연 흄은 스피노자를 어떻게 수용했는가 하는 점이다.

 

[;164]정념과 정서는 그 본성에서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심지어 서로 상반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정념을 수반하는 정서는 쉽게 정념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점이 인간 본성의 주목할 만한 속성이다. 사실 정념들 사이의 완전한 합일(union)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상과 관념의 이중 관계(double relation of impressions and ideas)가 항상 필요하지만, 단 한 가지 관계로는 이런 합일을 결코 충족시킬 수 없다. (...) 한 정념이 다른 정념을 낳도록 하는 데 필요할 뿐인 이중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각각의 원인을 통해 두 정념이 이미 산출되어 모두 정신에 나란히 현전할 때, 설령 그 정념 사이에 오직 한 가지 관계만 있거나 때로는 어떤 관계도 없을 수 있겠지만, 이 두 정념은 쉽게 뒤섞여 합일된다(mingle and unite). 지배적인 정념은 열세인 정념을 흡수하여(swallows) 자신의 것으로 전환시킨다(convert;동화시킨다).

 

*이 부분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동시에 흄의 설명이 미흡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정념과 정서의 구분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흄의 설명이 없다. 이 앞의 몇몇 구절에서 흄은 정념과 정서를 구분하지 않는 듯했다가 이제는 이 둘이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정서가 정념으로 전환되는 것이지 그 역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흥미로운 것은 지금까지의 물리적인 설명방식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런저런 말들을 살펴 보면, 여기서 흄은 분명 물리적인 설명방식에 한계를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정념들 간의 ‘이중관계’란 일종의 생물학적인 설명방식이 불가결한 것처럼 보인다. 사실 이것은 단지 스타일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보인다. 흄의 물리주의의 기본 원리가 ‘원자’라면 불가분적인 이 대상이 어떤 ‘강도’와 관련되는 정념에까지 ‘불가분’하기는 힘들 것이다. 오히려 문제틀을 입자에서 세포로 옮기는 것이 더 긴요하다. 난 이 지점이 흄이 데카르트주의를 벗어나 스피노자로 가는 문턱이라고 본다. 물론 난 여기서 스피노자의 (거의 생물적인) conatus의 형상을 발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흄은 이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하는가?

 

[421;166]따라서 우리는 자연히 금지된 것을 욕구하며 행동으로 수행하는 데에서 쾌락을 얻는데, 이것은 그런 행동이 불법적이라는 것 때문일 뿐이다. 의무 개념이 정념과 대립될 때, 그 개념이 정념을 압도하기는 거의 어렵다. 의무 개념이 이런 결과를 얻지 못하면 우리 동기와 성향(principles) 사이에 대립을 불러일으킴으로써 오히려 정념을 증대시키기 쉽다.

(...) 그런 장애를 극복하려는 정신의 노력은 기운을 북돋워서 정념에 생기를 불어넣는다.

(...) 정신이 자신의 열정을 유지하려면 새로운 정념의 흐름이 매순간마다 정신을 지탱해야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절망은 안심과 상반되지만 같은 영향력을 갖는다.

 

*주의해야 할 점은 ‘도덕감정’에 관한 교설들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점이다. 의무는 정념을 압도하기는 힘들지만, 그로 인해 오히려 결국에는 그 정념을 압도하는 다른 정념(열정)을 산출한다는 점이다. 이를 흄은 여기서 ‘정신의 노력’이라고 하고 있다. 매우 고무적인 결론이지만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과연 ‘정신’이 ‘노력’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애초에 우리는 정신이 하나의 ‘활동’이고 상상력이라는 배경을 가진 관념들의 무대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때 ‘노력’이란 정신이라기보다 신체의 문제가 아닌가? 아니면 그것은 다시 감정의 노력인가? 아니면 다시 코나투스의 문제인가?

이 지점에서 흄 철학의 어떤 총체적인 아포리아가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정념이 환원될 수 없는 ‘원자론’의 문제라든지, 정념이 비로소 출현하는 근원에 대한 것이라든지 ... 말이다.

5. 습관의 영향력에 관하여

 

[422~3;167~8]우리의 정념을 증감시키고 쾌락을 고통으로 바꾸는 등 이런 것에 가장 중대한 영향력(effect)을 갖는 것은 습관(custom)과 반복(repetition)이다. 습관이 정신에게 미치는 근원적 영향 중 한 가지는 어떤 행동을 수행하거나 어떤 대상을 표상할 때 장소(facility; 수월성)를 제공하는 것이며, 다른 것은 그 행동이나 대상을 향한 경향(tendency)이나 의향(inclination)을 정신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 반복은 점차적으로 수월성을 낳는데 (...) 수월성이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지 않는 경우에는 틀림없이 쾌락의 원천이다.

(...) 그런데 또 수월성은 고통을 쾌락으로 전환하듯이 때로는 쾌락을 고통으로 전환하는데, 지나치게 수월해서 정신 활동이 더 이상 정신의 흥미를 유발시키고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 활동을 어렴풋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경우이다. (...) 이 정서나 감정은 지나친 반복 때문에 소멸된다.

 

*습관의 형성과 반복을 통한 쾌락에서 고통으로의 정념의 전환에 대한 이 논변은 충분히 명쾌하다. 하지만 여전히 흄에게서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타자’의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타자는 여기서 주체의 정념에 간접적인 역할만을 할 뿐이다. 도덕(morality)이 윤리(ethic)와 다른 지점을 흄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변은 그가 사회를 다루는 부분까지 우리가 살펴 보아야 대답할 수 있다.

 

6. 상상력이 정념에 미치는 영향력에 관하여

 

[424;169]상상력과 감정이 함께 밀접하게 합일되며 (...) 정념은 생동성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상상력과 보조를 맞춘다.

(...) 우리는 우리와 친숙한 쾌락에 대해서는 자세하고 확정적인 관념을 형성할 수 있지만, 우리가 그 본성을 전혀 모르는 쾌락에 대해서는 쾌락의 일반 관념으로 표상한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의 관념이 일반적이고 보편적일수록 그 관념이 상상력에 미치는 영향력도 줄어든다. 일반 관념은 일정한 관점에서 고려된 개별 관념일 뿐이라고 하더라도 대체로 훨씬 모호하다.

 

*정념에 있어서도 상상력은 그것이 작동하는 하나의 ‘터’처럼 놓여 있다. 상상력이라는 것을 여기서 어떤 ‘능력’으로 이해하기는 힘들다는 주장이 가능하다. 만약 상상력을 하나의 주체적 능력으로 인정한다면 정념은 이성으로 ‘확산되는’ 이 역능을 상상력에게 건네주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흄에게서 중요한 것은 상상력이나 오성, 그리고 이성과 같은 표면적인 능력이라기 보다 그 아래에 들끓고 있는 이미지들, 감정들, 그리고 원자들 또는 관념들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은 주체로 환원되지 않는 ‘내재적’ 존재론의 영역이다. 여기에는 어떤 초월적 신도 들어서지 못한다. 흄 철학의 매력은 이러한 무신론이며, 유물론일 것이다.

 

[427;171]다른 사람의 적나라한 의견은 특히 [웅변 등으로] 정념을 통해 강화될 때 우리에게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선이나 악 따위의 관념을 유발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완전히 무시당했을 것이다. 이런 사실은 공감(sympathy) 또는 교류(communication)의 원리에서 비롯되는데, (...) 공감은 상상력의 힘을 통해 관념을 인상으로 전환하는 것일 뿐이다.

 

*이 부분은 p. 419의 논변과 비교될 필요가 있다. 거기서 흄은 ‘상황’을 얘기하면서 ‘정념이 선을 추구하고’ 또한 ‘선악의 증감에 따라’ 정념도 증감된다고 함으로써, 선악기준을 앞세우고 정념을 후행하는 것인 양 취급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흄은 ‘타자’를 끌어들이면서 정념이 우리에게 ‘주입’(바로 앞 문단)_될 때 그것이 선악의 관념을 유발한다고 한다. 만약 이 두 논변을 모순으로 보지 않고 일관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자에서 취급되는 선악이 이미 유발된 것이고, 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보는 편이 좋을 것이다. 즉 앞서의 ‘상황’이란 주체 자신만의 상황인 것이고(이때 유발된 선악은 이미 주체의 기억 속에 있다), 다음의 ‘타자’는 지금 당장 내 앞에서 웅변을 펼치는 ‘그’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문제는 보다 복잡해진다. 일단 정념의 측면에서 도덕이란 유발시키는 것인데, 그것은 유아론적 상황이 아니라 타자와의 만남(조우)를 통해 가능해 진다. 그래서 이 경우에 주체는 완전히 수동적인 입장에 처하게 되는데, 이런 것이 사실상 ‘정념’(passion)의 말뜻에도 맞아들어 간다. 유아론적 상황은 이러한 ‘상호적 만남’ 이후에 가능하다. 따라서 우선 세계가 있고, 주체의 도덕이 있으며, 결론적으로 삶이 가능해진다. 내 생각에 만약 이런 취지가 그의 철학 전반에 걸쳐 있다면, (일단의 과도한 일반화를 경계하면서) ‘공감’이라는 도덕감정은 그 외연이 무한히 확대될 수 있다. 하지만 아직 흄의 철학을 ‘관계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427;172]신념(belief)은 현전하는 인상과 관련된 생생한 관념일 뿐이다. 이 생동성은 격렬한 정념은 물론 차분한 정념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데 필요한 여건이다. 단지 상상력의 허구만으로는 어떤 정념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칠 수 없다. 정신을 붙잡아 두거나 정서를 수반하기에 상상력의 단순한 허구는 너무 약하다.

 

*상상력과 더불어 신념은 정념을 더욱 생생하게 정신에 붙잡아 두기 위한 요건이라는 점.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는 이 절 마지막 구절로 보인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3378 [클래식을 듣자] 9/8일 세미나 후기 [5] file choonghan 2012.09.11 13092
3377 [하이데거강독] 6월 30일 세미나 후기 김민우 2012.07.02 12948
3376 [심리학 세미나] 심리학 개론 1장 심리학: 과학의 진화 file 아샤 2013.08.14 12917
3375 젬베드럼을 배우고 있는데요.. [8] 놀이 2011.07.07 12225
3374 [라캉세미나] Seminar II의 16. The Purloined Letter 번역본 file RedSheep_S 2011.10.20 12028
3373 [흄 세미나]3월 15일 영문원고 타락천사 2012.03.08 11509
3372 [흄 세미나] 정념이란 무엇인가 -원문- 유심 2012.05.20 11424
3371 세네카 영어로 읽기 세미나 후기 및 다음주 공지(1월 31일 목요일 2시 반) [3] Julie 2013.01.27 11334
3370 [철학사세미나]『고르기아스』 발제문: 481b~527e [3] file nomadia 2013.03.25 11316
3369 [생물학 세미나] 생명:생물의 과학 5.세포: 생명의 기본 단위 발제문 file choonghan 2012.11.30 10974
3368 [흄 세미나]4월 12~19일 영문원고 타락천사 2012.04.10 10491
3367 [횡단정신분석] 지젝 <당신의 징후를 즐겨라> 1-2장 file vizario 2013.03.02 9519
3366 [노마디즘 2권 읽기] 13장4~5절(8/16) 후기 [1] 68 2013.08.22 8788
» [흄세미나]6월7일 발제문, [정념에 관하여] 3부 1-6장 file nomadia 2012.06.07 8659
3364 [세네카 영어로 읽기] 1/3 후기와 1/10 공지 현실 2013.01.04 8493
3363 [Rock] PJ Harvey [2] file 유진 2010.10.23 8353
3362 [물리학세미나 시즌2] 파인만 물리학 강의 1~4장 발제 [3] file 반장 2013.03.17 8180
3361 [라캉세미나] Leader, Darian. Introducing Lacan. - 빠진 페이지 file RedSheep_S 2011.10.21 8025
3360 [독일어강습] 2/25 후기 [1] 진쫑 2013.03.02 7929
3359 푸코 [광기의역사] 제 2부 2장 발제문 먹다 2010.08.17 7842
CLO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