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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세미나] 집

생강 2021.09.06 12:59 조회 수 : 471

                                                                                                        집 -1

 

나는 이사를 많이 다닌 편이 아니다. 성장기에도 그랬고, 결혼 이후에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한두 번은 더 이사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이 생을 마칠 수도 있을 것이다. 혹시 그런 날이 온다면 나를 기억하고 싶은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을 묘비에 이런 말을 새겨주면 좋겠다.

 “가장 짧게 살 거라 생각했지만 결국은 가장 오래 서식했던 남가좌동 집에서 잠들다”

 아무 연고도 없던 남가좌동으로 이사 오게 된 건 1997년이다. 살 집을 내가 고르고 선택한 것도 아니다. 연립주택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건너편 집이 훤히 들여다 보이고 떠드는 소리까지 들리는 그런 곳에 내가 오고 싶어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열네 살 이후 서울에서 살았지만 이런 골목, 이런 연립주택이 있는 동네는 처음이었다. 다만 서울의 전형적인 강북 동네란 이런 거구나,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

 나는 청주의 마당 너른 기와집에서 (은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나 열세 살까지 살았다. 마당에는 늘 이런저런 개가 있어 어린 시절 심심했던 나의 동생이나 친구가 되어 주었고, 가끔 토끼장에 키우는 토끼가 있거나 잡아먹으려고 사놓은 닭이 화단 주변을 왔다 갔다 하기도 했다. 대문을 중심으로 골목과 면한 담장 안쪽에 커다란 암수 은행나무, 고욤나무, 오동나무들이 서 있었고 가운데 둥근 화단에는 사철나무, 장미꽃나무, 사르비아 등 키 작은 나무들과 한 잎씩 따서 삐이삐이 피리를 불던 기다란 풀도 있었다. 그 마당에서 하얗고 탐스런 복숭아를 따먹은 기억이 있다.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과일이 있다니! 어렸을 때는 복숭아 털이 알러지를 일으켜 두드러기가 났지만, 내가 임신했을 때 뜬금없이 복숭아 통조림이 먹고 싶었던 걸 보면 그때의 미각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집에서 먹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하긴 그 모든 것은 내가 다 처음 맛본 것들이지 않은가! 마당 한 켠 텃밭엔 호박이나 상추, 깻잎, 고추 같은 것들이 무성하게 자라서 여름날 저녁이면 대청 마루에 둘러앉아 갓 뜯은 상추쌈을 먹었다. 엄마가 밥상에 앉아 상추잎 여러 장을 손에 쥐고 쫙쫙 털면 그 물방울은 옆에 앉은 막내딸 얼굴에도 튀었고 그때마다 그 어린 아이는 까르르 웃었다. 엄마는 방문 쪽으로 손을 뻗어 물을 털어냈는데 분수처럼 시원하게 뿌려지는 물소리와 마른 종이가 점점이 물들어가는 퍼포먼스를 나는 좋아했다. 그러고 나면 상추는 더 아삭하고 맛있게 느껴졌다. 물을 뿌려주면 창호지가 좀 더 짱짱해진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지만, 아이들이 종종 손가락을 넣어 구멍을 내고 들여다보기 좋아하는 문풍지는 일 년에 한 번 누렇게 된 것을 떼고 새 것을 붙이곤 했는데 그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는지, 우리 집 문도 여닫이 문이었다가 미닫이문으로 교체되면서 종이에서 반투명 유리로 교체되었다. 이제는 문풍지도 없지만 나는 여전히 상추를 먹을 때 팔을 바깥으로 뻗어 물을 터는 버릇이 있다.

 마당도 대청마루도 없는 열다섯 평 빌라에 24년 째 살고 있는 나는 가끔 내가 이 세상에 별스럽게 존재한다는 걸 깨닫곤 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살다가는 이 집에서 30년을 채울 판이다. 살아온 생을 돌이켜 볼 때 나의 기억에 가장 집다운 집으로 남아있는 유년기의 집도 10년 남짓한 시간일 뿐이며, 이제부터 내 마음에 드는 집이 생긴다 해도 앞으로 얼마나 살게 될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내 생의 대부분 시간을 함께 하고 있는 남가좌동 집은 나의 영토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장소임에 틀림없다.

 이 집의 대부분 사물들은 시간의 변화를 모른 채 생존하고 있다. 세탁기와 냉장고는 처음부터 함께 했고 안방에 걸린 벽걸이형 에어컨은 20년쯤 된 것 같다. 에어컨 없이 버티고 살려고 했는데 열대야가 계속 되던 어느 해인가 설치한 것이다. 결혼할 때 샀던 14인치 브라운관 TV는 이 집에까지 함께 이사와 고장 나지 않은 채 계속 있었는데 TV수신 시스템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할 수 없이 버려야 했다. 가전제품 뿐만이 아니다. 안방에 있는 몇 개의 화분들은 여기저기서 받은 작은 것들인데 영양제는 물론 분갈이도 거의 못 해주었지만 다들 10년 넘게 공생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산세비리아는 2003년 선물 받은 것이니 20년이 다 되어간다. 누구는 이런 나를 보고 금손이라고 하지만, 날짜와 요일을 적어놓고 일주일 혹은 한 달에 한번 꼬박꼬박 물을 주는 게 내가 하는 최선의 일이다. 정말 윤기나게 화초를 가꾸는 사람에 비하면 나는 그저 영양실조를 면하게 할 뿐이다. 식물은 놀라운 자생력을 가지고 있어서 광합성을 할 수 있을 정도의 햇빛과 물, 그리고 바람이 통하는 환경이라면 죽지 않는다는 걸 경험을 통해 알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방문이 닫혀 있는 걸 싫어하고, 한겨울에도 언제나 창문을 조금 열어놓고 사는 나는 식물에게 최적의 반려동물인 것 같다. 가끔 누렇게 뜨기도 하고 비실비실 자라는 이 녀석들을 결코 폐기처분하지 않고, 생각나면 한 번씩 가위로 잘라주는 이 무심한 보살핌을 그 아이들은 느끼는 듯하다.

이 집에 서식하는 인간 동물들도 사정은 비슷해 보인다. 6, 35, 36세였던 가족은 이제 어느덧 30, 58, 59세가 되었는데 동일한 공간, 사물의 배치 속에서 연도나 나이를 숫자로 인식할 때 깜짝깜짝 놀라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집에 거의 손을 대고 살지 않은 최근 10년은 더더욱 그렇다. 냉장고에 10년 째 묵어 있는 유통기한이 훨씬 지난 잼을 발견했을 때...시간은 성큼성큼 점프하고 있는데 이 집과 사람과 사물은 그대로 여기에 있으며, 어느 날 여기서 이 저장식품처럼 발견될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상상을 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집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집과 나의 공생이 끝나는 날이 내년이 될지, 10년 뒤가 될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오래 전부터 집에 대한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살아왔기에 그건 그때 생각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일지 모를 그날에 앞서 촬영을 시작하려고 한다. 이미 10여년 전, 아들에 대한 다큐를 준비하면서 촬영해 놓았던 것들이 있다. 그렇다. 이 집이 어떤 변화를 보인다면 그건 이 집에서 성장해온 아들이 있어 가능한 것이다.

 아들은 유치원 무렵부터 이 집에서 자랐다. 벽 한쪽에는 아이의 키 높이를 써 놓은 숫자가 희미하게 남아있다. 그 숫자는 아이의 아버지가 써놓은 것이다. 그는 한번 씩 집에 올 때마다 훌쩍 자란 아이를 벽에 세워놓고 연필로 머리 위에 선을 그어 그 옆에 키 높이를 적어놓았던 것이다.

 나는 아이가 품 안의 아기였을 때부터 함께 거울 보는 걸 좋아했다. 거울 속에서 두 얼굴을 나란히 보는 건 재밌는 일이다. 우리 집에서 그나마 큰 전신거울 앞에서 내 턱 아래 겹쳐 서서 보곤 하던 유치원생 아들은 열살 무렵 내 키를 넘어서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내 얼굴이 그 아이의 가슴에 겨우 닿는듯하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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