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와 틈새 그리고 실패... 그 새로움에 대하여 사유하자
‘우리가 이미지의 세계에 끌리는 것은 지식에 대한 알 수 없는 어떤 은밀한 반항심 때문이 아닐까?’ (223)
아이들은 건축, 정원일 혹은 가사일, 재단이나 목공일에서 생기는 폐기물에 끌린다. 바로 이 폐기물에서 아이들은 사물의 세계가 바로 자신들을 향해, 오로지 자신들에게만 보여주는 얼굴을 알아본다. 폐기물을 가지고 아이들은 어른의 작품을 모방하기 보다는 아주 이질적인 재료들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놀이를 통해 그 재료들을 어떤 새롭고 비약적인 관계 안에 집어넣는다. 우리는 이 작은 세계의 규범들을 가슴에 새겨두어야 한다.(<일방통행로>, 81)
우리는 벤야민의 글에서 ‘지식’에 대한 끊임없는 대항자로서의 ‘이미지’의 세계와 마주한다. 그것은 지식의 오물을 뒤집어 쓰지 않은 ‘아이들’의 세계, 혹은 ‘꿈’의 세계라 불릴 수도 있을 것이다. 혹은 이 세계에 ‘몸’과 ‘파괴’ 혹은 ‘약점, 숨기기’ 등의 단어들을 덧붙여도 좋다. 혹은 이미지라 하더라도, 이미 형상화되어 있는 것들에서 그것을 파멸시키는 어떤 ‘틈새’를 발견해야 한다. 이미 <일방통행로>에서 진정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얼굴의 주름살, 기미, 낡은 옷, 기울어진 걸음걸이’라고 이야기 했으며(80), ‘진정으로 아름다운 것, 명쾌한 것은 깨워지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202) 혹은 해시시를 먹고 난 후, ‘명쾌한 상태’가 되었을 때만이 ‘눈에 띄게 거칠거나 못생긴 얼굴들을 형식적으로 열심히 연구할 수 있다.’ (199)
결국 이건 진실에 관한 game이다. 무엇이 더 진실한 것인가? 벤야민은 이 game에서만큼은 단호함을 보여준다. 보이는 것을 믿지 말라. 진실은 그 이면에 존재한다. ‘생각된 그대로 표현되는 진실보다 더 가련한 것’(일방, 148)은 없다. 진실은 착하지 않다. ‘진실은 돌연 누군가에게 한 대 맞은 듯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는 상태에서 급작스럽게 내쫓기고, 시끄러운 소동, 음악소리, 혹은 도와달라는 소리 따위에 화들짝 놀라 깨어나기를 바란다’ (148)
때문에 우리는 강점이 아니라 ‘약점’에 주목해서, 이 실패들의 진흙창 속에서 ‘부활의 술책들을 배우고 용의 피로 목욕하듯이 수치심 속에 목욕’을 통해 매번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 모습이 바로 ‘자신이 이해되는 데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의 면면이다.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 어떤 지속적인 것도 보지 않기에, 어디에서나 길을 보는 자’ 니체의 짜라투스투라의 다른 버전인 ‘파괴적 성격’의 소유자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부수어진 조각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조각난 것들 사이를 뚫고 생겨날 길’이다. (179)
(이하 생략... 자세한 내용은 세미나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