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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철학사] 합리론 에세이

바벨 2010.08.05 19:15 조회 수 : 1096 추천:1

 

생각의 조각들을 흩뿌려보자. 체계를 갖추는 것은 좀 더 나중의 일이어도 된다.


본유관념에 대해 생각해보자. 본유관념의 최초의 기원이라면, 우리는 플라톤을 생각해도 될 것이다. 그리 큰 비약은 아니라고 본다.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가 세계영혼을 만들 때, 그것의 형상이 되는 것을 이데아라고 말한다. 이데아는 객관적 실재이다. 그러나 의지나 인격을 가진 실재는 아니다. 오늘날의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논리적 실재에 가깝다. 플라톤에게 있어서, 본유관념은 이 이데아들에 대한 관념이다. 인간은 영혼을 가지고 있고, 이 영혼은 세계영혼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혼과 세계영혼 사이에는 공통된 것이 있다. 세계영혼이 이데아에 따라 만들어져서 이데아에 의해 움직인다면, 인간의 영혼 안에도 그와 같은 것이 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데아와 공통된 것을 갖는다. 그리스 사람들의 속담을 떠올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같은 것은 같은 것을 알아본다. 이를 통해서 인간은 이데아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 그러나 경험 자체를 통해서는 아니다. 이때에 경험은 아직 계기조차 아닌 듯이 보인다. 우리들은 이미 선천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망각하고 있을 뿐이다. 망각은 어떤 계기에 의해 사라질 수 있고, 그 때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확실히 알 수 있게 된다. 노예는 단 몇 가지의 요건들을 가지고 삼각형에 대해 추론해 낸다.

 

이것은 아직 그리스도교적 세계를 통과하지 않은 시대의 본유관념이다. 원래 컴컴했던 중세가 아니라, 우리들이 그것의 내적 과정을 잘 알지 못해서 어두워 보이는 중세기를 지나면서 본유관념은 이전과는 조금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현실을 설명하기위해 ‘영원한 질료’에 대해 플라톤은 말했다. 그러나 이 '영원한 질료‘로부터 실제하는 개별자로의 과정은 잘 밝혀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설명은 불충분하다고 생각했고, 다시 해명해보기위해 운동인과 두 가지 측면의 질료를 정의해낸다. 그 덕분에 질료는 좀 더 그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적 세계에서의 질료는 그 보다 더 단순명쾌하다. 믿는 자들은 세계가 창조주에 의해 생겨났다고 생각했다. 영혼, 즉 정신적인 것도, 질료, 즉 물질적인 것도 모두 창조주에 의해 생겨난다. 정신적인 것에 비해 항상 의심을 받아왔던 물질적인 것은 이 시기에 이르러서 좀 더 긍정적인 것이 된다.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까지 그 사상적 특징을 가르켜 합리론이라고 하는데, 혹자는 이들까지 중세철학으로 보기도 한다. 중세철학의 마지막 사상가를 라이프니츠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그들이 이렇게 묶이는 것이 의미가 없진 않다. 이들은 철학과 신학이 눈에 띄게 분리되는 시기에 그들의 사상을 증명하려고 애쓴 사람들이다. 동시에 이 분명한 분리가 그들의 사상에 부담을 준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신앙을 의심받든 받지 않든지 간에 신에 대해 증명해야 한다.

 

이런 시대의 본유관념은 이전과 어떤 차이가 있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의 경우는 초월적 신에 대해 긍정적이다. 이들의 본유관념은 그래서 더욱 확실하다. 무한하고 영원한 정신적 세계는 실재하는 것이고, 더 가치로운 것이다. 우리들은 조금만 분명히 생각하면 이러한 존재에 대해 명료하고 분명한 관념을 얻을 수 있다. 삼각형은 그 정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을 때 알 수 있는 것이지, 현실 속에서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플라톤의 태도처럼 이 실재 세계를 완전히 가상이라고 할 수 없다. 영원하고 무한한, 완전한 존재가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질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을 실재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강제한다. 이제 물질적인 것, 즉 경험에서 얻게 되는 앎에게도 어떤 지위가 부여된다. 그것은 인식의 계기를 형성하게 된다. 적극적인 앎이라고 할 수 없지만, 경험은 수동적인 방식으로 고유한 앎을 다시 상기하게 만든다.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가 본유관념이 잠재적이라고 하는 말의 의미다.

 

그런데 이런 본유관념은 이 시기의 지배적 특징이겠지만, 이런 것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본유관념을 다른 방식으로 정의한 스피노자를 떠올려보자. 그는 데카르트와 라이프니츠적인 방식으로 인식의 기초를 삼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시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소박한 방식으로 생각한다. 세계는 실재한다. 그것은 정신적인 방법으로만 실재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별적으로 실재하고, 개별적인 것은 여러 측면들이 동시에 통일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그러나 개별적인 것은 단지 개별적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 개체가 다양한 방식으로 조화되어 있듯이, 그런 것이 무한하게 불어나고, 이 무한하게 불어나는 것 자체가 조화롭게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 존재하는 모든 것이 일종의 하나의 실체가 된다. 그는 그 시기의 언어로 그것을 ‘신’이라고 불렀다. 이런 실체의 존재 아래에서 본유관념은 공통된 것에 대한 관념이다.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면, 이 연결에 대한 앎이 진짜 앎일 것이다. 그에게서도 경험은 이러한 공통적인 관념들을 얻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들과 스피노자가 다른 점은 이렇다. 그들이 갖는 본유관념은 초월적 신이 지배하는 세계의 유한한 존재가 갖는 것이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공통관념은 앎의 완성은 아니다. 스피노자는 개별적인 것으로부터 무한하게 연결된 세계까지 앎이 확장될 수 있다는 것, 그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들은 무한하게 연결된 고리들 중 하나이고,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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