빵빠라밤~! 그 두껍던 <광기의 역사>가 드디어, 혹은 어찌어찌 겨우겨우 끝이 났습니다.
푸코의 섬세한 사고의 결을 따라가기만도 이게 뭔말인가 싶은 구절들이 많은데,
그놈의 섬세한 결들을 벗어나서 좀 멀리에서 이게 뭔말인지 돌이켜보면 더 아득히 멀어지는 내용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코셈나 회원들은 불굴의지로(?) 혹은 불굴의 의지가 승화된 가벼움으로
푸코의 책들을 척척 읽어 냅니다. 말과사물도 광기의 역사도 go~! go~!
요즘 푸코 이외에 관심을 갖고 읽는 책이 자본입니다.
왜 이얘기를 하는고 하니, 맑스의 자본이라는 책이
푸코를 처음 공부할 때, 뭔가 나를 끌어댕기는 힘은 느끼면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당최 정리를 해낼수가 없었던 경험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자본 3권 쯤 가니, 맑스가 아주 큰~ 틀에서 무슨말을 하는지가 감이 잡히기는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착취와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문제.
그것이 자본주의가 뭔가 잘 못 운영되어 나타나는 문제점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개혁을 통해 바꿔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순진한 생각인지 조목 조목 보여주는 듯 합니다.
맑스는 잉여의 생산과 착취, 그로인한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 부작용이 아니라 자본주의 그 자체라고 말합니다.
<착취와 그로인한 불평등을, 착취와 불평등이 생산되는 구조자체를 그대로 둔채로
단지 결과로서의 착취와 불평등을 해소하려는 수 많은 장치와 노력들로 해결 할수 있을까?>라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해서
아무리 선한(?)의지를 가진 자본가도 심지어진 자본가에게 착취당하는 노동자마저도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착취와 불평등을 양산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밖에 없는 과정을
세밀하고 디테일하게 조목조목 (이해 못한다고 화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설명해 주는 듯 합니다.
자본셈나 후기에서 쓴 이런 내용들을 여기에 옮겨 적는 이유는
잘은 모르겠으나 푸코가 그런 맑스를 참 많이 닮아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인간중심주의'에서의 '정상성'의 척도는
인간중심주의의 부작용이 아니라 인간중심주의 그 자체라는 문제의식으로
<비정상을 양산하는 정상성의 척도(인간중심 주의)를 그대로 둔채로
과연 비정상과 그 소수성의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묻는 푸코의 접근 방식이 말입니다.
기존에 읽은 몇권의 푸코의 저서들과
푸코셈나에 참여하면서 읽은 말과 사물, 광기의 역사에 이르기까지.....
'푸코는 무슨말을 하고 싶은걸까?' 라는 질문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그질문이 '맑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걸까?' 라는 질문과 시기적으로 겹쳐서인지
정말로 그들의 접근 방식이 뭔가 연관성을 가져서인지
푸코가 정말로 저런 문제의식을 가지기는 했는지 혹은 푸코를 저런식으로 독해도 되는지는
푸코에 대한 변변한 해설서 한권 안 읽어본 저로서는 알수가 없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런 제 독해 속에서 푸코나 맑스가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그런 '구조'라는 거대한 문제의식 앞에서도 '나'를 무기력한 존재로 매몰 시키지 않는
섬세한 그 무엇이 그들의 설명 속에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피노자가 말한 실체와 양태의 묘한 관계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때문에 형용불가한 묘한 가능성과 설레임 느끼게도 됩니다.
<바닷가 모래사장에 그려진 그림처럼 인간도 사라질.....>
이라는 푸코의 표현이 맴돕니다.
타니가와 간이라면 그런 인간의 사라짐은 제로를 향한 소멸이 아니라
원점, 무의 운동으로부터의 새로운 창조라고 할것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창조 될 무엇을 니체는 '초인'이라고 표현했던 것일까요?
그래서 푸코는 니체를 그렇게 좋아라 할까요? ㅋㅋㅋ
아직은 모든것이 희미하고 뿌옇기만 합니다.
그래서 또 열심히 책을 읽어가야 하겠죠?
암튼..... 다음엔 푸코의 <임상의학의 탄생>을 들어가기 전에
<의학의 역사>라는 책을 1~4장까지 읽습니다.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이 언제나 보기 좋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후기가 왜 않올라오지? 은근히 기다렸지요.
푸코에 휘둘려 후들거리는 새에도 자본을 읽고 계셨군요. 열망하는 만큼 틀림없이 보답이 있을것입니다.
소소한 생활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