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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연구세미나] 발제문(서문 + 1장)

기린 2011.01.18 17:28 조회 수 : 1450

 

서문


이 책의 기본적인 정의 및 지향점들.


  콜린 스파크스(1장)는 문화 연구를 규정하는 데 있어서의 어려움을 아주 정확하게 토로하고 있다. 그 어느 것으로도 문화 연구의 단일한 이론이나 방법론을 지적하고 단일한 이론이나 방법론으로써 문화 연구를 특징짓는 것은 불가능하다.

  존 피크스(6장)는 “문화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미학적이거나 인본주의적인 것에 그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라는 점에 강조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존슨(5장)은 문화 연구를 ‘의식이나 주관성의 역사적 형태들’에 대한 연구로서 규정한다. ‘텍스트’를 연구 대상의 중심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텍스트는 어떠한 형태들(예를 들어 서술체, 이데올로기적 문제틀, 발화의 양태들, 주관적 위치의 양식 등)이 추출될 수 있는 원재료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문화의 궁극적 대상은 텍스트가 아니라 텍스트 구현을 포함하여 그것의 표출 시점에서의 주체적 형태의 사회적 삶인 것이다. 라고 말한다.

  존 프로와 미간 모리스(22장)은 이와는 다소 다른 시각을 취하고 있다.

  정확한 의미에서 문화 연구는 텍스트의 개념을 그것의 기본적인 모델로 사용한다. 텍스트에 대한 ‘정확한’ 해독이란 있을 수 없다.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문화 연구는 분석하고자 하는 ‘텍스트화’의 구조들과 이것들에 대한 다양한 수용자 또는 이용자들에 주목하는 것이며, 텍스트 자체의 해독에 대한 권위와 귀착점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것이다.

  가장 정교한 문화의 개념은 스튜어트 홀의 개념일 것인데, 그는 대중문화를 ‘동의와 저항의 영역’으로 기술한다.

  문화 연구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은 마르크스주의이다. 이것은 문화 연구의 모든 실천가들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문화 연구 자체가 마르크스주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문화 연구에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제공한다. 첫째, 문화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사회 구조 및 역사 발생과 관련지어 문화를 분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 문화 연구는 자본주의 산업사회들을 민족, 젠더, 세대 및 계급 수준에 따라 불균등하게 구분된 사회들로 가정한다. 문화는 이러한 구분이 자리를 잡고 경쟁하는 주요한 영역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즉, 문화는 지배 집단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피지배 집단들의 의미 부여에 대한 저항의 시도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지속적인 투쟁을 확보하는 영역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만드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는 의심할 바 없이 문화 연구에서 핵심적인 개념이다. 문화의 장(場)은 문화 연구에서 주요한 이데올로기적 투쟁-‘불일치’와 ‘저항’의 영역이며, 헤게모니를 둘러싼 투쟁의 영역중의 하나-의 영역인 것이다.


문화 연구 : 일종의 정치적 프로젝트


존슨(5장)은 문화 연구가 정치적인 것이지 ‘즉각적이며 효용론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 바 있다. 홀은 ‘우리가 유기적 지식인을 배출 할 수도 있는 문화 연구의 제도적 실천을 발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고 말한다.

베넷(19장)은 유기적 지식인들을 자리잡게 하는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문화 연구에 관한 홀의 해독에 대해 다소 회의적이다. 베넷에 따르면, “그러한 기능을 학문에서 우선적으로 설정하게 되면, 실제적인 학문의 존재 조건과 그것의 관계들에 대하여 단순히 이데올로기로만 기술하는 잘못된 인식이 초래될 것이다”, 라고 우려한다.

벨 훅스는 궁극적으로 문화 연구의 정치성이 학교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윌리엄스(8장)도 미래의 문화 연구가 “1860년대 조잡했던 산업 훈련에 대한 규정(정의)에 도전하기 위해 16~18세의 교육에 대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헨리 지로스는 교육은 권력과 정치의 작요에서 분리되어 있는 중립적 영역을 대표할 수 없다고 한다.


포스트마르크스주의 : 문화 연구에서의 위기인가


  맥로비에 의하면, 현재 위기의 의미는 아마도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이 서서히 약화되면서 야기된 ‘공황’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연구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할은 여전히 불확실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음과 같다.

  포스트모던 이전의 마르크스주의로 회귀하는 것은 지지 받을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들을 기계론적이고 반영론적인 입장에 위치지음으로써 경제적인 관계와 결정들이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관계들을 경정하고 동시에 그것들보다 우선시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 연구는 이전에도 이미 포스트마르크스주의였다는 주장도 있다.

  문화 연구를 말할 때, 정치적 프로젝트로서의 문화 연구와 마르크스주의가 연계되어 있다 할지라도, 문화 연구를 ‘단순히’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입장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 연구의 활용과 남용


  짐 맥기건은 문화 연구에서 실제적은 ‘위기’는 그것이 생산의 물질적 관계의 맥락에 대한 문제 제기 없이, 소비의 문제에 초점을 한정시킨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위기를 뒤집기 위해 그는 문화 연구와 문화의 정치 경제학 사이에 교류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문화 연구는 다양한 담론들을 취한다. 또한 수많은 다양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문화 연구는 형성체들의 전체 집합이다. 즉 문화 연구는 이전의 것들과 다양하게 결합하고 있고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문화 연구는 다양한 연구들을 포함하고 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주장하고 싶다. 문화 연구는 항상 불안정한 형성체의 집합이었다. 그것은 인용 부호에서만 ‘중심’이었다.

  라고.

  문화 연구는 항상 열려진 담론이었고, 변화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에 대해 응답하는 담론이었다. 그리고 항상 논쟁, 불일치 및 정치적인 조건에 대해 응답하는 담론이었다. 그러나 이것이 문화 연구가 완전히 열려 있는 분야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연구자들이 단순하게 발행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 또는 학문적 연구들이 감소하고 있는 영역을 구하기 위해서, 이미 행해지고 있는 분야를 ‘문화 연구’라는 이름으로 바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문화 연구는 이것 이외의 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수정된 헤게모니 이론


  신그람시주의적 헤게모니론은 생산 과정과 소비 행위 사이의 변증법에 주목한다. 소비자들은 항상 생산의 결정적 조건들의 결과로서 생성된 물질적 실체에서의 텍스트나 실천과 대면하게 된다. 그러나 같은 방식으로, 문화적 텍스트나 실천은 여러 가능한 의미를 제기하면서 효과적으로 생산해 내는 소비자와 대면하게 되는 데, 이것은 그 텍스트나 실천의 물질성에서, 또는 그 생산의 수단 및 관계들을 벗어나서는 해독될 수 없다.

  문화 연구의 최상의 상태는 그것의 주제를 결정할 때 문화의 생산, 분배, 소비의 세부 맥락까지 주의와 경계를 요하는 것이다. 그것은 (역사와 정치에서 우연히 발생한 사건들 외부에서) 엘리트의 일시적인 관심이나 겸손한 미소로 결정될 수 있는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그것들은 (의미, 즐거움, 이데올로기적 효과 등과 여러 형태의 의도, 생산의 의미, 또는 생산 그 자체를 위치짓는) 생산의 순간을 벗어나서는 읽힐 수 없다.


문화 연구는 어디에 있는가


호주에서의 문화 연구는 일본인들이 붐(boom)이라고 할 정도로 진행되어 왔다. 호주에서 영국 문화 연구의 영향은 강력하다. 문화 연구가 학문성을 지니게 되면서 보다 안전하게 자신을 유지할 때, 정치적인 프로젝트라기보다는 오히려 교육학으로 변모해 갈 위험성이 있다.

  홀은, 미국에서 문화 연구의 거대한 폭발, 그것의 급속한 전문화와 기구(제도)화를 보면, 문화 연구에 있어서 영국에서의 심각한 위험 요소가 바로 기구(제도)화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고 했다.

  이는 문화 연구가 “권력, 역사 및 비판적 정치 사안들을 언어와 텍스트화의 문제로 축소시킴으로써,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형식화(정형화)될 우려가 있다.

  오코너(10장)는 미국의 문화 연구는 “여러 형태의 포스트모던 이론화와 동의어”로 되어 가는 위험에 빠져 있다고 지적한다.

  넬슨(16장)은 “1970년대 이래로 미국에서 인본주의를 퍼드린 지식 운동 중 그 어떠한 것도 문화 연구처럼 가볍고, 기회주의적이며, 공허하고, 초역사적인 것으로 간주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한편으로는 “문화 연구에 대해 미국의 기구(제도)들이 긴장하도록 만드는” 반면, “한편으로는 문화 연구의 탈정치화에 대해 의심하지 않게 하여, 미국의 사회생활에 대해 어떠한 비판적 시각이나 견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하는 대가로 문화 연구를 제시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엘리자베스 롱(11장)은 문화 연구의 비판적 잠재력을 발전시키는 것이 페미니즘의 핵심이라, 라고 주장한다. 엘렌 루니(12장)도 유사한 주장을 피력한다.

  만시아 다이아와라(18장)은 흑인계 미국인에 대한 연구 방식이 문화 연구의 유입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홀(21장)은 문화 연구가 해야 하는 작업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과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들 및 차별성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의 능력에 대한 부적절한 인식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모든 것들을 동원해야 한다, 고 말한다.


제1장. 문화 연구의 진보


콜린 스파크스


  ‘문화 연구’를 한마디로 명확하게 규정하긴 어렵다. 문학 비평, 사회학, 역사학, 미디어 연구 등의 사상, 방법들 및 견해들의 잡동사니적인 통합이 ‘문화 연구’라는 편리한 이름으로 함께 묶이고 있다. 교육, 학회의 학술지, 출판사 정책에 이르기까지, 여러 제도적 단계들에 문학 비평, 사회학, 미디어 연구를 위치시키는 것은 가능한 반면 문화 연구는 불가능하다.

  이 논문에서는 버밍엄 연수소의 복잡한 실체에 대해 아주 제한된 부분만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 이유는 첫째, 필자는 2년 동안 이 연구소의 회원으로 있었다. 둘째, 연구소 내에서 행해지는 논의들은 (외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셋째, 단일한 제도적 위치의 결과로서 연구소는 내적 발전 속에서 일정한 강도로 문화 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딜레마에 직면해 왔다. 자체 내의 한계와 많은 사실들이 역설적으로 문화 연구의 진전을 가져왔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문화 연구의 기원은 1950년대에 출간된 두 책에서 비롯되었다. 리처드 호가트의 <문자의 이용>과 레이먼드 윌리엄스의 <문화와 사회>가 그것이다. 윌리엄스의 경우에 문화의 특별한 지배적인 입장에 대한 거부로 문화 연구의 기원을 위치짓는 것이 가능하다. 모든 유산의 회피와 거부로부터 문화 연구가 제기된 것이다.

  (문화 연구) 위기의 진정한 연원은 아주 정확하게 표현해서 정치적인 것이었다. 지배적인 전통은 노골적으로 반민주적이었다. 시초부터 문화 연구는 민주주의의 옹호자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용어(어휘)를 부정적으로 사용하면서 옹호하였다. 따라서 ‘엘리트’와 ‘대중’에 대한 플러스(호응)과 마이너스(적의) 부호들은 상반되어 사용된다. 즉 문화에 대한 근본 개념들이 다시 한번 변화한 것이다.

  문화 연구의 또 다른 특징은 문화에 대한 지배 모델의 구조가 어떻게 직접적으로 승계되었는가를 밝혀준 것이다. 지배 모델은 ‘작업’과 ‘문화’ 사이의 엄격한 구분을 중심으로 시작했으며, 그러한 물질적 결정성 대신에 ‘공동체’ 또는 ‘삶의 제 방식’에 대해 특정한 시각에 구애받지 않으며 모순되지 않는 개념을 도입했다. 문화 개념은 사회적 적대(감)와의 관련성을 배제하는 것으로 다시 한번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문화 연구의 표면적인 기이함은 역사적인 향수와 급진적인 역사의 무관심과의 조합, 민주적인 여망과 근본적인 보수주의와의 조합, 그리고 정치적인 의도들과 정치에 대한 무관심의 조합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초창기 창시자들과 그들의 학문적 연구가 시도된 이래로 더 많은 단절-마르크스주의와 연수소와의 조우에 의해 야기된-이 있어왔다. 마르크스주의와의 조우는 버밍엄 연구소 하나만 언급해서는 명료하게 논의될 수 없다. 그 진전은 지난 10년간 영국의 지적 생활에서 발생했던 변형의 일부인 것이다. 오늘날의 일반 사회 과학 학부 학생들은 10년 전의 사회학 교수들보다 마르크스의 업적들에 훨씬 더 친밀하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관심의 증대는 1968년 이후에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적절한 설명은 영국 사회의 구조와 연계해야 한다. 우리는 1968년의 새로운 분위기를 근간으로 하는 결합요소들과 지난 10년 동안 영국 지식인들의 방향을 결정했던 역사적인 힘들을 구분해야 한다.

  영국의 지적인 생활은 내부에서 그 자체를 재생산할 수는 없었지만, 어떠한 특정의 선택을 가로막고 그 대신 다른 선택을 열어놓게 하였다. 인본주의적 전통은 특수주의와 냉철하며 비인간적인 현대주의자들의 사회 공약에 대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오랜 전통에 대한 기술관료적인 비판은 정형적인 것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위해 사용될 수 있었다. 인본주의적인 전통과 기술 관료적인 전통은 영국 사회 내에 잘못된 무엇인가가 있다는 암묵적인 주장으로 통합되었다. 따라서 비판적인 시각은 영국의 지적인 생활 외부로부터 나와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여타의 것들과는 달리, 마르크스주의는 개인주의 경향과 대항하여 성공을 거둘 수 있는 효율적인 시각을 제공해 줄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라는 용어를 느슨하게 사용해왔다. 만일 우리가 마르크스주의 초기에 조우했던 몇몇의 텍스트들을 검토해 본다면, 이러한 문제점들과 아주 극단의 대립점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나는, 노동자 운동은 급진적 저항의 역할을 중단하게 되었다는 관점이고, 또 하나는 마르쿠제가 제시하는 사례처럼, 그들(노동자 외 약자계층 포함)의 저항은, 비록 그들의 의식 수준에서의 저항이 아닐 지라도 가히 혁명적인 것이다, 라는 관점이다.

  마르쿠제의 관점에서 19세기 초반에는 서로 대립하는 두 거대 계급인 부르주와와 프롤레타리아의 의식 속에서, 그리고 정치적인 행위 속에서 발생했다고 보았지만, 그러나 자본주의의 발전은 이들이 더 이상 역사적인 변형의 동인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 두 계급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켰다. 증명할 수 있는 동인과 사회 변화의 기제들의 부재 속에서, 비판은 추상의 높은 단계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론과 실체, 사상과 행위가 만나는 그 어떠한 토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견해에 두 가지 대안이 있었는데, 지식인들에게 마르쿠제의 관점을 일부 수용(추상의 높은 수준에서 독립적인 비판 행위를 지속)하면서, 실제 행위, 정통 노동계급의 정치 행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이후로, 여러 사람들의 시도들이 나오는데, 너무 어려워서 못했습니다. 뭔가, 계속 나열만 하는 느낌이라, 맥락이 잘 안 잡혔습니다.


  필자는 이런 시도들이 아직 제대로 틀이 안 잡혔다고 주장하는 것 같고, 보다 실천적이고 이론적인 진전들은 몇몇 기본 가정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며 말을 맺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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